Clay A.C RAW novel - Chapter 266
제 266 화
저가 온 걸 알고 있음에도 고개조차 들지 않는 모습에 어쩐지 조금 서운하단 생각이 들었다.
“샨.”
유림은 그대로 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처음 샨을 만났을 때와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땐 제 얼굴을 마주 봤지만.
“나 안 볼 거야?”
“……어쩐지 못 보겠어.”
“왜?”
샨은 답이 없었다. 유림은 그를 채근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계속 기다렸다.
그렇게 몇 분, 샨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날 살린 걸 후회하지 않는단 말을 했을 때 기뻤어…… 그래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후회하고 말았어. 그냥 늄을 줄 걸 그랬다고. 그랬다면 무사히 돌아왔을 수도 있다고…….”
“나 무사히 돌아왔어. 조금 많이 늦었지만.”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야…….”
샨이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
“나는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늄을 주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지 몰라.”
유림이 이것을 가장 원치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런 생각을 계속하는 자신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괴로웠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저를 유림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샨이 유림과 멀리 떨어져 살긴 했지만, 신앙과도 같은 애착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잘 못 되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겠지.
어쩌면 이 부분은 샨이 아니라 유림이 평생 끌어안고 살아야 할 부분일지도 모른다.
“샨. 그거 알아? 난 네가 준 늄 때문에 살았어.”
모든 정신을 잃고 쓰러진 유림을 살린 건 다름 아닌 샨의 펜던트였다.
다른 친구들과 달리 샨은 스스로 늄을 회복할 수 없었기에, 다시 그에게 돌려줄 요량으로 펜던트를 따로 빼놨었다. 근데 살기 위해 제 무의식이 그 늄을 빼가 사용했다. 하물며 샨의 늄은 다른 친구들과 달리 제 늄을 기반으로 했기에 훨씬 더 큰 도움이 됐다.
“눈을 다시 뜬 것도, 그 긴 시간을 계속 버티고 걸었던 것도, 지금 이렇게 네 앞에 있는 것도 다 네 늄 덕분이야. 고마워.”
“…….”
“앞으로도 이렇게 큰일 있을 때마다 조금씩 늄을 빌려줘. 그리고 내가 무사히 돌아오면 어서 오라고 말 해줘. 그거면 돼.”
주먹을 꽉 쥔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유림은 샨의 팔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어이- 샨. 어서 빨리 얼굴 들어. 나 네 얼굴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이야.”
장난기가 가득 묻은 목소리에 샨이 천천히 고갤 들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따스한 녹빛 눈동자가 저를 향했다. 유림은 정말로 첫 만남 때와 지금이 이어진 것 같단 착각이 들었다.
유림이 옅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그리고 샨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
모두에게 할 말이 있다는 통에 어디도 가지 못한 채 온실에 자릴 깔게 된 일행과 교수진들은 유림이 히야스와 샨, 요한 그리고 아슈팔과 함께 돌아오는 것을 보고 고갤 들었다.
“늦었어.”
데몽의 핀잔에 유림이 히야스하고 샨이 꾸물거려서 그런 거라며 두 사람에게 탓을 돌렸다.
자리가 넉넉한 게 아니었기에 전임 교수들과 은하 하민을 제한 나머지는 바닥에 앉거나 서서 기다렸다.
유림은 샨을 한 번 슬쩍 보고, 히야스를 보다 은하를 쳐다봤다. 그리고 모두를 바라봤다.
“음…… 사실 말이죠……그니까……으음…….”
유림이 좀처럼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기에 저렇게 우물쭈물하는 걸까.
케이는 은하와 디하르를 향해 뭐 아는 거 없냔 얼굴로 쳐다봤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뭐 따로 들은 내용이 없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도 아는 게 없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곧이어 유림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자퇴를 하려 합니다.”
“…….”
상상도 못 할 충격적인 말이 나와서일까.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다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교수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유림을 보며 뒤늦게 케이가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그런 그보다 히야스가 먼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자, 자퇴를 한다고?”
뒤이어 은하와 루아가 소리쳤다.
“어째서?!”
“왜?!!”
클레이즈 역사상 사망을 제하곤 중도에 학교를 그만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입학을 포기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자퇴라니! 하물며 내부의 적의 일이 일단락되어 이제는 편하게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는데……!
“너무 갑작스럽잖아.”
평소엔 큰소리조차 잘 내지 않는 륜이 믿을 수 없단 표정을 했다.
“음…… 그렇게 갑자기는 아닌데…….”
물론 이들 입장에선 오랜만에 나타난 저가 이런 말을 하는 게 갑작스럽게 느껴지겠지만, 유림에게 자퇴는 꽤 오랫동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석 달. 절대 짧지 않은 그 시간 동안 유림은 침대 밖을 떠날 수 없었다.
어릴 때 순간이동의 후유증으로 죽다 살 때를 제외하곤 이렇게 오랫동안 아픈 것도 처음이었다.
그동안 유림이 할 수 있었던 건 몇 개 없었다. 자거나 먹거나 창밖의 풍경을 보거나.
무료한 시간이 길어진 만큼 생각도 많아졌다.
처음엔 친구들에 대한 걱정과 반송되는 편지에 대한 의문으로 가득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주로 생각하게 됐다.
내부의 적 사건은 정리되었다. 다단은 잡았고, 진유나 이즈네가 정보를 불었으니 잔당을 잡는 것도 금방일 것이다. 앞으로는 제 기록이 넘어갈 일도 없고, 또 마음속에 쌓여 있던 일도 어느 정도 정리했다.
그럼 앞으론 뭘 해야 할까.
학구열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배움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왕실이나 군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졸업장을 팔아 크게 사업을 할 성격도 아니었다.
가장 큰 고민은 유림이 클레이즈에 온 목적이 사라진 데 있었다.
결국, 유림은 계속 고민했고, 끝끝내 학교에 더는 있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부의 적 잔당 때문에 그래?”
데몽의 질문에 유림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건 이미 내 손을 떠났잖아. 백작님은 한 번 찾아뵐 생각이지만, 어딘가에 시설이 또 있는 거면 모를까 따로 녀석들을 잡으러 돌아다닐 생각은 없어. 굳이 내가 안 해도 금방 처리될 테고.”
“그럼 왜?”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을 보며 유림은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계속 고민했다.
그러다 어서 말하라며 재촉했을 때야,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슬쩍 내뱉었다.
“연금을 못 타잖아…….”
“…….”
“…….”
상상도 못 할 만큼 냉랭한 침묵이 온실을 휘감았다.
하지만 유림만큼은 그 누구보다 진지했다.
유림이 클레이즈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제일 중요한 이유. 바로 연금이었다.
지금 유림은 한 학기를 통째로 날려 먹은 것은 물론 진급시험조차 치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2년 안에 졸업해야만 받을 수 있는 연금을 탈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연금도 못 타게 됐는데 굳이 여길 다닐 이유가 있나 해서……. 또 클레이즈에 안 다닌다고 모두를 못 만나는 것도 아니잖아. 그니까…… 그니까…….”
어쩐지 화가 잔뜩 나 보이는 친구들의 모습에 유림이 점점 말끝을 흐렸다.
실로 친구들은 화가 반쯤 난 상태였다.
“……나 지금 엄청 심한 욕할 뻔했어.”
하민이 욕이나 다름없는 말을 했고,
“이거야말로 돼지 똥 싸는 소리네…….”
테오가 입을 턱 하니 벌렸으며,
“여태까지의 고생이 허무하게 느껴져…….”
루아가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레이먼에게 기댔다.
“목적의식 하나만은 확실하네…….”
곧이어 륜이 감탄했다는 어투로 말했고,
“맞아…… 림은 연금 타려고 클레이즈에 온 거였지…….”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한 얼굴로 은하가 체념했다.
이 사태의 결정권을 가진 케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말문이 막히는 신박한 경험을 겪었다.
문뜩 클레이즈에 연금이란 제도가 없었으면 유림이 과연 여길 오기나 했을까, 하는 불길한 가정도 들었다.
좀 더 여러 가지를 가르치고 싶었기에 뜯어말리고 싶은 마음도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한다 한들 유림은 제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애였으니까. 여태 그래 왔으니까.
거기다 이건 과거처럼 도망치거나 숨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미 앞으로의 일을 결정한 아이를 제 이기심으로 막을 순 없었다.
비록 그 이유가 참으로 눈물이 난다 해도.
“학교로 다시 온 이유는 이걸 말하기 위해서였군…….”
“아뇨, 이것 때문만은 아니고요, 겸사겸사……?”
말이라도 못 하면 참 좋을 텐데.
케이가 쓰게 웃다 골이 아픈지 이마를 짚었다.
그것이 무엇의 응낙임을 안 히야스가 기가 차단 얼굴을 했다.
자퇴한다는 놈이나 허락하는 놈이나…….
미친개라 불리는 저조차도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갔다.
역시 8형은 또라이만 있는 게 분명해.
히야스는 팔짱을 끼며 유림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만두면 뭐할 건데?”
그리고 이 말에 유림은 이곳에 온 이래 처음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답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글쎄요. 세계여행이라도 해 볼까요?”
마지막 교시 [돼지 똥 싸는 소리]
클레이즈 아카데미.
비슈아드 대륙에 숨겨져 있는 제 1의 마법 대학이자, 최고의 군사력과 교육을 자랑하는 꿈의 학원.
클레이즈의 졸업장을 딴 이는 절대적인 명예와 함께 어느 국가에서도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으며, 그 직위는 장교와 맞먹었다.
‘절대적인 지식을 배운 자’, ‘무너지지 않는 교욱을 습득한 자’ 그것이 클레이즈의 졸업생들에게 주어지는 칭호였다.
그러나 이런 곳을 당당히 걷어차고 나온 이가 있었으니…….
현재 카렌타의 한 여관에서 꽁꽁 언 몸을 녹이고 있는 방년 스물셋의 한유림이었다.
비슈아드력 1775년 1월 5일. ‘펜시리움’, ‘렌티아’ 수도의 여관 ‘봄이 오는 곳’.
“으- 춥다 추워. 진짜 춥네. 누가 빙설의 땅 아니랄까 봐 뭐 이렇게 춥냐. 여관 이름도 바꿔야 해. 무슨 봄이야. 얼어 죽겠구먼.”
유림은 몸에 한기가 이는지 벽난로 앞에 앉아 호들갑스럽게 손을 비볐다.
클레이즈를 자퇴하고 두 달 후, 유림은 정말로 훌쩍 떠나버렸다.
특유의 느긋한 성격답게 여행은 아주 천천히, 여유롭게 진행되었다.
경비가 넉넉한 편은 아니라 중간중간 목공예품을 만들어 팔거나 가게에서 며칠간 일하기도 했고, 이따금 잡다한 심부름도 했다. 그리고 돈이 모이면 또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돈을 벌고, 여행을 하고. 그렇게 반복된 여행은 어느새 유림을 빙설의 땅인 펜시리움까지 인도했다.
그새 해도 몇 번이나 바뀌었고, 나이도 셋이나 더 먹었다. 마음도 훨씬 여유로워졌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더 능수능란해졌다. 바뀌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많은 것이 바뀐 시간이었다.
“텐러워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니, 가보고 싶었던 나라들은 다 돈 건데 이제 슬슬 사혈로 돌아갈까?”
하지만 좀 아까운데…… 그냥 안 들렸던 나라들 위주로 돌아볼까? 거기다 슈리넬도 한 번 들려야 하니까. 아니면 정말로 집에 가서 좀 쉬다 다시 나오고.
유림은 담요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목 부분을 묶으며 어떻게 할지를 고민했다.
그때 눈앞에 늄의 기운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드니 금빛의 알갱이 속에서 새하얗고 빳빳한 종이가 나타났다.
반사적으로 종이를 잡은 유림이 그곳에 적힌 글을 읽었다.
[클레이즈]반갑습니다, 한유림 양.
당신은 당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클레이즈의 전임 교수 후계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2월 22일까지 ‘덴 이레프’의 작은 마을 ‘콜람’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잉크로 쓴 것이 아님에도 두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이질적인 글씨에 유림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야, 이런 것도 보내는 거였어?”
타이밍도 웃겼다. 알고 보낸 건가? 어떻게 이렇게 절묘한 순간에 딱 떨어지지?
거기다 아슈팔 선배도 있는데 저는 또 왜 부른단 말인가.
장난인 건지, 아니면 진짜인지.
어쨌든 이게 뭐든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자퇴까지 했는데 교수는 무슨 교수.”
유림은 그리 중얼거리며 종이를 꾸깃꾸깃 접었다. 그리고 장작을 향해 집어 던졌다.
불길이 닿자 새하얀 종이가 순식간에 타올라 재가 되었다.
활활 타오르는 난로를 보며 유림이 피식 웃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돼지 똥 싸는 소리 하고 앉았네.”
-클레이즈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