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28
제 28 화
면접을 기다리는 루아의 얼굴이 공포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무리 참아보려 해도 어깨가 덜덜 떨렸고 눈가가 뜨거웠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이런 시험이 있는 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그것이 환상이고 이미 지난 일임을 자각했기에 망정이지, 만일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루아는 이가 아플 정도로 꽉 다물고 필사적으로 공포를 쫓고 있었다. 추운 것이 아님에도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온몸이 떨려왔고, 손은 뼈마디와 힘줄이 드러날 정도로 꽉 쥐어졌다.
아직도 질척이는 땅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온 주위가 캄캄하게 느껴지고 비릿한 향이 코끝에 풍겨왔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저 잊은 척한 것이었다.
이가 딱딱거리며 맞물렸다. 어떻게든 진정하려고 있는 힘을 다해 이를 깨물어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반쪽이 보고 싶었다. 자신의 친우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유림이 보고 싶었다. 그래, 유림이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 8년간 기다린 친구를 보고 싶었다.
“루아?”
루아의 이상한 태도에 옆에 앉아 있던 륜이 그녀를 바라봤다. 고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 무릎 위에 얹어진 두 손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 가장 심각한 건 아무리 불러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덜덜 떨기만 할 뿐, 별다른 움직임이 없단 것이었다.
륜은 4차 시험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보여주던 방. 하지만 륜에게 있어 시험의 난이도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퉁명스럽게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 정도의 두려움이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오기가 생길 정도로 싫어하는 사람이 등장한 것이지 저렇게 벌벌 떨 정도로 싫거나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을 겪은 거지?
륜은 조심스럽게 루아의 어깰 두드렸다. 그 움직임에 루아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봤다. 눈동자가 불안감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괜찮아요?”
“……네.”
그제야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루아였다.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며 륜을 바라봤다. 걱정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륜. 어찌나 진지한지, 도리어 미안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 루아를 감싸고 있던 긴장이 서서히 풀려갔다.
“하아…….”
“어디 아픈 거예요?”
루아는 륜을 빤히 쳐다봤다. 처음이었다, 레이먼들을 제외하고 이 긴장을 풀어준 이는.
“……괜찮아요. 조금 놀라서 그래요.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정말 아픈 거 아니죠?”
“음……. 사실 아직 안 괜찮아요.”
루아는 쓰게 웃었다. 몸의 긴장은 풀렸지만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꽉 쥐고 있던 손을 펴보았다. 손바닥은 날카로운 손톱에 베여 살이 뜯기고 피가 배어나온 상태였다. 어째 쓰라리다 했더니 찢어진 모양이었다.
핏방울이 맺혀 있는 손을 보며, 루아는 크게 아프지도 않고 큰 상처도 아닌 것 같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륜은 그게 아니었다.
“피? 피가 나잖아요?! 잠깐만요. 내가 분명 손수건을 가져왔는데…….”
륜은 크게 당황했는지 주머니를 성급하게 뒤졌다. 그러더니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의 성격을 보여주듯 청아한 녹색이었다.
륜은 루아의 손에 손수건을 감았다. 그의 배려만큼이나 따뜻한 온기가 마치 상처를 어루만지고 감싸주듯 닿았다.
“으…… 면접 보고 나면 약 발라요. 잘못하면 덧나니까요.”
“네…….”
“까먹지 말고요. 아니면 지금 구해줄까요? 아마 비상약은 금방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음……. 약은 괜찮은데,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네? 네! 뭐든지!”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다는 듯 격한 끄덕임에 루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륜의 손을 잡았다.
“아……!”
그와 동시에 륜의 얼굴이 물감 번지듯 붉게 변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눈만 껌뻑였다.
루아는 그런 그를 향해 옅게 웃어 보였다.
“미안해요. 사실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누가 옆에 있어야지 안심을 해서요. 미안하지만… 조금만 잡고 있을게요.”
“네에…….”
“고마워요, 진짜.”
면접실의 앞. 그 앞에 나열된 의자에 앉은 루아와 륜.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이어주듯 꼭 잡혀 있는 두 손이었다.
* * *
루아가 륜의 도움으로 진정을 되찾고 있을 때, 레이먼은 눈물을 꾹 참으며 문을 열고 4차 시험을 통과했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고, 갑작스럽게 나타난 빛이 가슴 아플 정도로 눈부셨다.
“아…….”
레이먼은 문을 통과하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하얀 피부는 더욱 창백하게 질렸고 극심한 추위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눈에 띌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다.
허상이고 환상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왜 이리 두렵고 또 두려운 것일까. 이미 지나간 일인데…… 이미 끝난 일인데 어째서 그렇게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머리론 모든 것을 알고 있으나 몸과 마음은 아니었다. 아직도 그 음습한 곳에 있는 것처럼 지독한 향이 사라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거대한 홀과 그곳에 서 있는 몇몇 사람. 이곳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곳에 있었다.
정말로 그곳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레이먼은 그대로 손을 들어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호흡이 일정치 않아 머리로 숨 쉬는 법을 되뇌었다. 까딱하단 숨 쉬는 것도 잊어버려 그대로 질식해 버릴 것만 같았다.
레이먼은 입술을 짓씹었다. 자신이 이것을 겪었으면 나머지 세 사람도 같은 것을 겪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해야만 했다. 이렇게 벌벌 떨고 있으면 모두가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어떤 태도를 보일진 확실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적어도 한 명쯤은 멀쩡해야 했다.
레이먼은 두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풀려 살짝 휘청거렸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괜찮아. 아무 일 없었어. 그저 나쁜 꿈을 꿨을 뿐이야. 그는 팔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이미 벌게질 대로 벌게진 눈이었지만 적어도 우는 상태로 가선 안 됐다.
“아, 진짜…… 한심하게 이게 뭐냐.”
레이먼은 눈물을 참으며 가볍게 키득거렸다. 유림을 만나서 그런지 굳어 있던 감정이 너무나 쉽게 풀려 버렸다. 전엔 이것보단 훨씬 다부졌는데…….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만났다는 사실이 기뻤나 보다.
그는 다시금 무릎에 힘을 줘 걸음을 옮겼다. 이젠 정말로 괜찮아야 할 때였다. 깊은 심호흡과 함께 그가 뒤를 돌아봤다. 아직도 입을 벌린 채 자신이 있던 곳을 보여주는 방. 이 또한 꿈이 아니라는 듯 진득한 향이 발끝을 따라 움직였다.
레이먼은 손을 뻗어 문을 밀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끼익.
그의 등 뒤로 서서히 닫히고 있는 망각의 방. 그 틈새로 보이는 건 지독한 어둠과 공포, 그리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수많은 사람의 시체와 그 틈새로 번져 나오는 비릿한 피 냄새였다.
쿠웅.
이윽고 육중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 * *
유림은 대기실의 의자에 앉아 자신의 순번을 기다렸다. 그녀의 옆엔 면접을 기다리는 학생이 둘이나 더 앉아 있었다. 그들이 먼저 왔으니 아마 자신의 순번은 3번쯤 되리라.
‘은하는 잘하고 있으려나?’
막 면접을 보러 들어간 은하가 잘 보고 있을지 걱정이 돼 면접실의 입구를 흘끔흘끔 쳐다봤지만, 딱히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얼마나 두꺼운지 작은 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뭘 물어 봤냐고 묻고 싶었지만 데몽을 비롯한 나머지들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면접을 보고 나가는 곳은 아무래도 홀이 아닌 다른 곳인 듯싶었다.
데몽들의 합격 여부도 알 수 없었다. 더욱이 마지막 시험이란 점에서 합격한 뒤에 어떻게 되는지도 감이 서질 않았다.
앞에처럼 합격자와 탈락자가 나오는 곳이 달라지려나? 아니면 자동 이동?
유림이 면접실을 쳐다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대기하던 응시생에게 다가와 들어오란 말을 전했다. 은하의 면접이 끝난 것이다.
바보 박은하수. 잘 봤을까? 워낙 운이 좋은 녀석이니 어디에 내놔도 어지간해선 걱정이 되지 않았지만, 이번은 좀 불안했다. 은하 녀석은 다 좋은데 애가 살짝 단순해서 말귀를 잘 못 알아들으니 말이다.
대답은 잘했으려나? 막 더듬고 그러진 않겠지? 바보같이 뜬금없는 소리는 안 했을지 걱정이다. ……아니다, 지금 내가 은하 걱정할 때가 아니지.
유림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안젤리카 7호와 했던 대화를 생각했다. 적당히 알아서 뻔뻔하게 행동하라 했던 그. 그리고 그건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림은 꽤나 뻔뻔했고 넉살도 좋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뭘까, 이 찜찜한 느낌은.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처럼 뭔가가 계속 걸렸다.
뭐지? 뭐가 이렇게 걸리는 걸까.
여태껏 계속 들들 볶다가 갑자기 진지한 시험이 나와서 그러나? 아니면 마지막이라 신경이 예민해진 건가?
유림은 연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순서를 기다렸다. 그때 문이 열리더니 남자 하나가 나와 유림의 옆에 앉아 있던 응시생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다음이면 유림의 차례였다.
“…….”
긴장은 안 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막상 다음이 자신의 순서라 생각하니 심장이 쿵쿵거리고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이 멍청아, 이게 뭐라고 이렇게 쪼냐.
유림은 다시금 손을 꽉 쥐었다 펴며 긴장을 풀었다. 이제 이것만 통과하면 연금에 가까워진다.
일단 입학을 하는 것이다. 그 뒤에 들 생활비며 뭐며 많은 돈이 걱정되긴 했지만, 무일푼으로 덴 이레프까지 오지 않았던가. 그 정신력이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니까 우선 이 면접을 잘 봐서 합격하자. 그 뒤에 죽어라 살지 뭐.
유림이 앞일을 생각하며 긴장을 풀고 있을 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드니 예의 남자가 앞에 서 있었다.
“한유림 양.”
“아, 네.”
긴장이 여실히 드러나는 목소리에, 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지막 5차 시험인 면접을 볼 겁니다. 절 따라와 주세요.”
그리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유림이었다.
방은 음침했다. 창문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등불만이 유일하게 방을 밝히고 있었다. 유림은 보조 감독관의 지시에 따라 방 안에 존재하는 큰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촉감이 좋은 것이 꽤나 값비싼 의자 같았다.
유림은 최대한 단정한 자세를 취해 보이며 앞을 바라봤다. 고풍스러운 엔틱 모양의 테이블과 그곳에 올려진 서류를 바라보는 한 인영. 자신의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그가 바로 면접을 보는 이사장일 것이다.
그는 부스스한 머리에 꽤나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뭐가 그리 진지한지 안경을 고쳐 쓰며 서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램프의 빛이 미약해 그의 얼굴이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꽤 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앞서 만난 감독관인 해우와도 별 차이가 안 나 보였다. 그렇다는 건 이십 대 후반 혹은 삼십 대 초반이란 건데…… 정말로 저렇게 젊은 사람이 이사장이라고?
혹시 다른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별다른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유림의 건너편에 앉은 남자와 그의 뒤에 서 있는 감독관 이즈네, 그리고 그 옆에 비슷한 또래로 추정되는 붉은 머리의 듬직한 사내 하나가 전부였다.
유림이 주위를 살피고 있을 때, 낮게 쉰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한유림, 맞지?”
어느새 그가 보고 있던 서류를 덮어둔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행동과 말투였지만 왠지 모르게 긴장이 바짝 들어간 유림이었다.
“네.”
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반가워. 클레이즈의 이사장 덴 케이라고 한다.”
낮게 떨어지는 진중한 중저음. 제법 거친 목소리였지만 느긋한 느낌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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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