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45
제 45 화
때는 바야흐로 7년 전, 유림이 열두 살일 때의 이야기이다.
그 당시의 유림은 사혈에 거주하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아버지’에게 령과 사혈의 문화, 풍습, 생활 방식 등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었다. 물론, 특유의 무신경함으로 별 탈 없이 잘 지내긴 했으나, 아버지의 염려 때문에 이것저것을 배워가고 있을 때였다.
그날 또한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유림의 아버지는 그녀를 불러 인생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다. 뭐, 썩 좋은 인생 교육은 아니었으나 받아치는 것도 귀찮았던 유림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런 그녀의 귀로 아버지의 말이 계속 들어왔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잘산다고 생각하냐?”
“음…… 돈 많은 사람?”
“그렇지. 그런데 그보다 더 잘사는 사람들이 있어.”
“누군데요?”
“사기를 잘 치는 사람. 그런 고로 오늘 내가 가르칠 것은 바로 사기의 기술이다.”
유림은 헐 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이 양반이 술이 덜 깼는지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돼지 똥 싸는 소리네요.”
“그렇지. 근데 그렇게 하는 애들이 잘사는 건 사실이야.”
“그래서 뭘 가르쳐 주실 건데요? 어떻게 남을 잘 속이는가? 아니면 믿음을 주는 기술? 음…… 그것도 아니면 공갈?”
“아니, 거짓말.”
거짓말? 유림은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더니 이내 미간을 팍 구겼다. 아니, 거짓말이라면 그 누구보다 능청스럽게 하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가르치겠다니. 이거야말로 헛소리가 아닌가.
“그거라면 충분하지 않아요?”
“그렇지.”
아, 젠장. 부정 안 하니까 슬프잖아.
“하지만 그건 은하처럼 순한 애들이나 속는 거고 정말 능한 사람들은 속지 않지. 오히려 네 그런 태도를 역으로 이용하려고 할 거야. 자, 그래서 오늘 내가 가르칠 건 뭐냐. 바로 완벽하게 상대방을 속이는 방법이다.”
“그니까 어떻게요.”
“간단해. 정말로 모르면 돼.”
데앵- 종소리가 들렸다. 까악까악 새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고, 뿌직뿌직 돼지 똥 싸는 소리도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음…… 뭐라고? 내가 뭔 개소리를 들은 거지?
“미치셨어요?”
“우리 딸내미야말로 미쳤군, 아버지에게 미쳤냐고 묻는 것을 보니까. 정말 미친 아버지를 보여줄까?”
싱긋 웃으며 하는 그 살벌한 말에 유림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하하……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정말로 모르면 된다니까.”
아니, 이 짜증 나는 인간아…… 내가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아니, 그니까 어떻게 모르면 되는 건데요?”
“무지(無知)하는 거지. 쉽게 말하면 깊이 공부하지 않는 거야. 어느 정도 아는 선에서 멈추는 거지. 그것만큼 상대방을 잘 속일 수 있는 것은 없어.”
“……잠깐만요, 아버지. 애초에 그건 속이는 게 아닐뿐더러 이길 수가 없잖아요. 그니까 아예 사기를 칠 수가 없잖아요.”
“그래. 분명 네 말대로라면 사기 치기 위해선 게임에 대한 완벽한 파악, 그리고 심리전에 대한 적잖은 지식과 경험이 필요해. 하지만 넌 그게 필요 없잖아.”
“무슨 소리예요?”
“네 능력.”
그는 유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시험이면 나중에 다른 애들 답을 보고 답안지를 바꾸면 되고, 도박이면 그 패를 원하는 패로 바꿔 버리면 돼. 그런 능력을 가진 네가 과연 룰을 공부하고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머리를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
유림이 멍한 표정으로 아버지를 올려다봤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굳이 무식한 척, 아무것도 모른 척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가뜩이나 공부하는 걸 싫어하는 자신이 아니던가. 요행만 있으면 그 상황 자체를 고민하면서 풀어나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헐, 아버지 천재. 대박.”
“훗, 내가 좀 하지.”
그리고 그 가르침을 받아 심리적으로 상대를 파고들어 허점을 찾기보단 남을 흔들어놓은 사이 상대방 몰래 늄을 사용하는 방법을 수련한 유림. 그러한 수련은 그녀의 나이 19세, 클레이즈의 도박장에서 빛을 발휘하게 된다.
유림은 키득거리며 앞에 놓인 칩을 다 쓸어왔다. 사실 그녀는 이 게임에 대해 전혀 자신이 없었다. 룰이 뭔지도 잘 모르겠고, 베팅의 칩 수로 심리를 파악하는 귀찮은 것 따위 궁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대충 상대방 수보다 작으면 폴, 크면 페아라는 것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유림이 이 게임에서 유일하게 신경 쓰고 있던 것은 올인의 기회, 엄밀하게 말하면 카드를 조작할 기회였다. 더욱이 세룬이 내주었던 키르 사용 과제도 겸사겸사 같이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혹시 모를 만일의 상황이 있었기에 이를 막기 위해 유림은 코니룸을 조사하고 도발했다. 미야의 이야기를 꺼낸 건 이 때문이었다. 관심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학생회장인 미야와 사귀는 것을 숨기는 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러니 그 부분을 까발리자고.
그렇게 시작된 흔들기.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코니룸은 유림이 하는 말에 흔들려 그녀가 늄을 조작해 카드의 흐름을 바꿔놓은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애당초 키르를 써서 평소보다 더 매끄러웠기에 알아챌 확률은 0에 가까웠다.
아버지, 설마 이 기술을 여기서 이렇게 멋지게 쓸 줄은 몰랐네요.
입꼬리가 승천할 정도로 올라갔다. 유림은 실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모든 칩을 쓸어 모았다. 그리고 코니룸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선배. 제 친구들 돈 돌려주세요.”
“싫다면?”
단박에 들려오는 거절에 유림이 엥 하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싫다고?
“뭐예요. 약속했잖아요.”
“그거야, 어디까지나 ‘게임’에서 네가 승리할 때지.”
차갑게 내려앉은 그 말에 미간이 팍 구겨졌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코니룸이 이 게임을 부정하고 있단 것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듣는 그대로야.”
“헛소리! 지금 무슨 짓을 하고 계시는지 아세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승패를 부인하는 거라고요.”
“너야말로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무슨 짓을 한 거냐? 어떻게 카드를 바꾼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카드 조작했잖아. 분명 너한테 갈 카드는 그게 아니었어.”
코니룸의 말에 유림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설마 했는데, 역시 처음부터 조작한 거였다.
“선배, 무슨 소리예요. 애초에 그 카드가 뭔진 아무도 모른다고요. 아시잖아요, 저 뒤집지 않고 그냥 운에 맡긴 거.”
“그래, 하지만 1은 아니야. 9가 정답이지.”
코니룸은 자리에서 일어나 뭉쳐져 있는 카드를 다 펼쳐 테이블에 깔았다. 그의 말에 확답하듯 마흔 장의 카드 중 9가 적혀 있는 카드는 단 석 장뿐이었으며, 반대로 1이 적혀 있는 카드는 유림이 가진 것을 포함해 총 다섯 장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녀가 능력을 써 카드의 숫자를 바꿨음을 파악한 은하 일행이었다.
유림이 귀찮다는 듯 쳇 하고 혀를 찼다. 그러더니 뚱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 카드가 9였던 걸 정확하게 아시네요. 그걸 어떻게 아셨을까?”
“내가 내 능력으로 만든 카드니까.”
코니룸의 말에 주위가 다시 한 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유림은 정말로 가벼운 여론이라 생각하며 혀를 찼다.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선배는 후배들을 상대로 사기를 쳤단 거네요? 애초부터 질 수밖에 없게.”
“후배‘들’은 아니지.”
씨익 웃으며 은하들의 상황을 부정하는 코니룸의 말에 유림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웃기시네. 그런 식으로 발 빼면 누가 돈 못 받아낼 줄 알고? 나의 집념을 무시하지 말라고.
“그걸 어떻게 믿어요?”
“믿어야 할 거야.”
“왜요?”
“내가 클래스가 더 높으니까.”
뻔뻔하리만큼 당당한 말에 유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놈의 학교는 어떻게 돼먹은 곳인지 계급이 높은 쪽이 우선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절대적인 건 없다. 즉, 그게 전부는 아니란 소리다.
유림은 덴 케이가 지을 법한 느긋하면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가볍게 턱을 괸 뒤 코니룸에게 말했다.
“글쎄요. 그게 그렇게나 중요할까요?”
“클레이즈는 철저한 계급사회야. 계급이 높은 쪽이 이기는 거 모르나? 이 판은 너나 나나 서로를 속였으니 무효인 게임이야. 그런 고로 너와 나의 거래 또한 무효다. 그리고 후배들은 정당한 방식으로 돈을 잃은 거야. 그 사실을 번복하지 마.”
“명령이에요?”
“그래, 계급으로서 내리는 명령이야.”
클레이즈는 절대적인 교칙에 따라 무너지지 않는 계급을 가진 학교였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계급을 들먹이며 물러나라 명하는 코니룸. 신입생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클레이즈의 생활로 인해 상위 클래스가 왕이란 인식이 강한 재학생들은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듯 유림을 바라봤다. 그러나 유림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누구 맘대로?”
라는 건방진 말을 내뱉으며 명령을 거절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킨 코니룸이었다. 그는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유림을 바라봤다.
재수 없을 정도로 여유롭게 웃고 있는 자신의 후배. 좀 전까지만 해도 뭐 이런 녀석이 있나 싶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섬뜩하고 무서웠다.
여태껏 클레이즈의 교칙을 무시하는 이는 없었다. 더욱이 계급을 무시하는 이도 없었다. 아니꼬워도 윗사람의 말이라면 들어야 하는 것이 바로 절대 계급사회인 클레이즈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걸 깡그리 무시하다니. 아무리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해도 말이 안 되는, 참으로 건방진 행동이었다.
코니룸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목소리로 유림에게 말했다.
“그것이 이 학교의 교칙이니까.”
교칙, 그놈의 교칙. 정말 준법정신 한번 투철하네.
“있잖아요, 코니룸 선배, 우리 교칙 다 기억해요?”
유림은 씨익 웃으며 뒷머리를 가볍게 긁적였다. 저 행동이 당황할 때나 나타나는 버릇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코니룸은 왠지 모르게 여유로운 유림의 태도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 다 기억해.”
“교칙 중에 계급이 높은 사람이 우위에 선단 내용이 있잖아요? 클레이즈는 계급사회고요.”
“그래, 그게 뭐 어땠다는 것이지?”
“어땠다는 게 아니라요. 딱히 클래스가 계급이라고 언급한 내용은 없었던 것 같아서 말이죠.”
“……!”
“단순히 그 어감과 인식 때문에 클래스를 계급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뿐이죠.”
유림은 연신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왜 덴 케이가 자신의 속을 들들 볶을 때마다 그 표정을 짓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짓는 미소는 상대방의 판단을 흩트리기에 가장 적합했다. 그리고 자신이 상대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을 각인시킬 수 있었다.
“확실히 계급이 클래스라는 내용은 없었어요. 뭐 동아리장이 가장 높다는 이야긴 있었지만 그건 동아리 내에서니 전 해당 사항 없고요. 그럼 여기서 저랑 선배의 계급을 뭐로 나눌 수 있을까요?”
질문과 함께 자신의 앞에 쌓여 있는 칩을 가볍게 툭툭 두드리는 행동에, 코니룸은 유림이 하고자 하는 뒷말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을 확신시켜 주듯 유림이 입을 열어 그 사실을 언어로 만들었다.
유림의 목소리가 도박장에 퍼졌다.
“칩. 그죠? 여긴 도박장이잖아요. 이곳의 가장 큰 기준은 칩이죠. 자, 그럼 여기서 문제. 지금 이 테이블에서 칩을 마흔 개나 가지고 있는 제가 계급이 높을까요? 아니면 하나도 없는 선배가 높을까요? 그리고…….”
유림은 다릴 꼬았다. 그런 뒤 의자의 등받이에 그 작은 몸을 파묻으며 거만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아주 여유롭게 말이다.
“과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누가 더 계급이 높다 생각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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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