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46
제 46 화
유림이 우월한 표정으로 코니룸을 농락하고 있을 때, 도박장 구석에서는 두 청년이 소파에 앉아 그 상황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부신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한 소년은 지독한 무표정이라 엄밀하게 말하면 겉모습만으론 판단이 어려웠으나, 손끝을 가볍게 까딱이는 것이 그가 상당히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금발의 소년은 가볍게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앉은 이를 바라봤다.
교복 셔츠 위로 입은 흑색의 긴 외투. 밝은 실내였음에도 후드를 깊게 눌러 써 그 얼굴이 다 드러나진 않았으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 있단 건 보였다.
그것이 미소라는 걸 깨달은 금발의 청년은 특유의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좋아?”
“응, 좋아.”
한 치의 틈도 없이 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주어가 빠진 질문이었지만 기차게 알아들은 청년은 더욱 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선은 계속 유림을 향한 채 말이다.
“이렇게 같이 있다는 사실이 미칠 듯이 좋아.”
“변태.”
“하하하, 부정 못 하겠네.”
정말로 즐겁다는 듯 웃는 그 모습에 금발 소년 또한 옅은 미소를 그렸다. 제 친구가 저렇게 웃는 것은 실로 오래간만인 데다, 그 또한 이 상황이 싫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도 기쁜 것 같은데?”
후드의 질문에 금빛 청년이 느릿하게 답했다.
“아…… 그렇지. 여섯 명이 다 모인 건 몇 년 만이니까.”
그는 찬찬히 유림과 그녀의 주위를 바라봤다. 유림을 비롯한 레이먼, 디하르, 루아까지 모두가 이 자리에 있었다. 마치 과거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모습에 그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앞을 응시했다.
코니룸. 상당히 자존심이 강한, 그리고 한번 흥분하면 거칠어지는 사내였다.
금발의 소년은 턱을 괴며 앞을 바라봤다. 현재 코니룸은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무슨 짓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괜찮을까?”
“괜찮아.”
다시금 떨어지는 확실한 대답. 소년은 눈만 살짝 움직여 옆의 친구를 바라봤다.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음에도 그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이쪽을 향하지 않았다. 오직 한 명, 마치 그것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한곳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유림이잖아.”
그의 목에 걸려 있던 태양 모양의 펜던트가 가볍게 흔들렸다.
코니룸은 입술을 짓씹으며 뼈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두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자신을 게임으로 누른 것도 모자라 이렇게 몰아붙이다니.
주위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 비웃음, 그리고 손짓.
자존심이 뭉개질 대로 뭉개진 상황이었지만 그 정돈 나름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가장 참지 못하게 만드는 건 얼굴에 잔뜩 걱정을 묻힌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미야였다.
설마 저런 표정을 짓게 할 줄이야.
코니룸은 미야의 시선을 느낀 채 유림을 바라봤다. 자신도 모르게 이가 갈리고 쓴 미소가 그려졌다.
“……하하 ……미치겠군. 뭐 어쩌다 이딴 녀석이 입학한 거야?”
“그러게 말이에요.”
차라리 입이라도 다물고 있으면 괜찮을 텐데, 한마디도 지지 않는 저 입을 진심으로 뭉개주고 싶었다.
유림은 교활했다. 엄밀하게 보자면 얄밉다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코니룸의 눈에는 참으로 교활해 보였다.
“한유림, 네 말에 따르면 애초에 네 계급도 말이 안 되는 거야.”
“왜요?”
“도박장은 클레이즈의 일부니까. 아니, 그렇게 따지면 클레이즈 자체에서 매기는 방법으로 계급을 매겨야지. 설령 그게 클래스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마법 대학이잖아? 즉, 마법 자체가 그 계급이지.”
“……선배, 그냥 깔끔하게 진 거 인정하고 돈 주면 안 돼요?”
유림이 귀찮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코니룸은 그런 유림의 상태를 보며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숨긴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으며 그럴 만큼 제정신이지도 못했다.
“웃기지 마. 절대 그렇게 못 해. 내가 여기서 지고 들어간다는 건, 너희 신입생들이 나머지 선배들을 다 개같이 대해도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
“그러니까…….”
“코니룸.”
코니룸이 이를 세우며 유림에게 달려들 때, 차분한 음성이 둘 사이를 갈라 세웠다. 미야였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미야에게로 향했다.
미야는 이런 소란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단정한 자태로 코니룸과 유림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코니룸, 그쯤 해둬. 자꾸 무리수 던지지 마. 이번 게임은 네가 졌어. 깔끔하게 승복해.”
“젠장! 알아, 안다고! 그렇지만……!”
“코니룸.”
“……빌어먹을! 널 걸고 넘어갔잖아!”
발악에 가까운 말에 미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시선을 돌려 유림을 바라봤다.
“한유림, 네 이야긴 잘 들었어. 네 말대로 교칙에 클래스가 계급이라는 건 없어. 하지만 선배라는 건 맞아. 그건 틀림없어.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예의와 선이 지켜졌을 때 후배도 선배도 존재하는 거야. 지금 네 행동이 썩 좋은 모습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 선배들이 보기에도, 그리고 너희 신입생들이 보기에도 말이야.”
유림은 난처함에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 과한 건 알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네?”
“나랑 코니룸은 연인이 아니야, 사촌이지.”
“미야!”
“에……?”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유림 또한 고개를 휙휙, 돌려 코니룸과 미야를 번갈아 봤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아헬에서도 알아주는 귀족의 영애인 미야가, 가난한 어부의 아들인 코니룸과 사촌이라고? 에에에??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의 관계에 유림이 한창 머리 위로 물음표를 그리고 있을 때, 다시금 미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쓸데없는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어디까지나 우린 사촌으로 포옹한 거니까. 그리고 신입생들한테 말할게. 과한 환영회는 미안해. 도가 지나친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너희도 알아야 해. 학교란 곳은 만만한 곳이 아니고, 이곳은 더더욱 그래. 그러니 이번 일을 교훈 삼아 항상 신중하게 행동하길 바라.”
그런 뒤 신입생들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난 선배라고 각 잡을 생각 없어, 그만큼 대단하지도 않고. 하지만 적어도 좋은 선배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좀 늦었지만, 다시 소개할게. 클레이즈의 학생회장 미야 애시틴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학생회로 찾아와. 두 팔 벌려 환영할 테니까.”
미야의 환한 웃음과 함께 주위에 있던 재학생들이 신입생을 바라봤다. 비록 이런 어이없는 사건이 터지긴 했지만, 그들은 엄연한 자신들의 후배였고, 앞으로 보살펴야 할 아이들이었다.
조용한 적막 속에서 누군가가 손뼉을 치며 환영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반응은 어느새 잉크가 번지듯 퍼져 휘파람 소리와 늦었지만 입학을 축하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도박장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신입생들은 얼떨떨한 상황에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대부분의 선배가 모여서 해주는 신입생 축하.
유림이 뻘짓을 해가면서까지 크게 만든 도박장 사건은 이렇게 훈훈한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신입생들은 코니룸을 비롯해 공갈을 친 선배들에게서 돈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고 유림은 한없이 찜찜한 마음으로 기숙사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뭔가 진 느낌이야.”
유림이 팔짱을 끼며 투덜거렸다. 결과적으로 은하네들은 돈을 되찾았고, 선후배끼리도 훈훈하게 끝났으나 왠지 모르게 뒤가 구렸다. 그뿐만 아니라 본의 아니게 모든 신입생의 영웅이 되어 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가능한 한 조용히 지내고 싶었는데 졸지에 엄청난 유명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코니룸을 전교생 앞에서 개망신시키려면 역으로 나 또한 모두의 앞에 드러난단 것인데 그걸 왜 생각 못 했을까…….
제길, 나의 단순함이 여기서 드러나는군.
“림, 오늘 짱 멋있었어!”
은하가 묵직한 돈주머니를 들며 평소보다 한층 더 높아진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 옆에 있던 테오 또한 유림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맞아. 대박 멋졌어.”
양쪽에서 떠드는 칭찬에 유림이 멋쩍은지 시선을 살짝 피했다.
“멋지긴, 난 무게 잡느라 엄청 힘들었다고. 얼굴에 경련 나는 줄 알았다. 거기다 코니룸 선배 은근 무서웠어.”
“그런 것치곤 당당하던데?”
“그럼 어째. 거기서 주눅이 들 순 없잖아. 나름 화가 난 것도 사실이었고.”
“근데 네가 그 칩이 계급이란 말 했을 때 주위에서 반응 안 해주면 어떻게 하려 그랬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 만약 선배들이 ‘클래스가 계급이다’라면 어떻게 하려 그랬어?”
돈주머니를 챙기며 묻는 륜과 루아의 질문에 유림이 그들을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사실, 두 사람의 말대로 절대적인 교칙을 가진 클레이즈였기에 이에 따른 계급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만일 그때 루아와 륜의 생각처럼 선배들이 그리 나왔다면 유림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 교칙을 어기는 것만큼 고단한 학교생활의 지름길도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유림이 그렇게 당당했던 건 그만큼 믿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계급은 상관없었어.”
“응?”
“그니까 누가 계급이 높든 상관없었어. 뭐라 해도 난 거기서 개길 생각이었고, 뒤집어엎을 예정이었거든. 단지 선배가 너무 계급, 계급거려서 그거 받아치려고 한 소리지.”
“무슨 소리야?”
뜻을 묻는 루아의 목소리에 유림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아까 코니룸을 엿 먹였을 때와 비슷한 미소였다.
“클레이즈 교칙 열다섯 번째 기억해?”
“열다섯 번째?”
“그래, 클레이즈는 준법정신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 말에 일행이 그게 뭐? 라는 표정으로 유림을 바라봤다. 그때 뒤쪽에서 걷던 데몽이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아! 소리를 내며 유림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이내 미친 듯이 웃어 재끼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바보 같은 해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한 해석은 존재하지 않았다.
계속 킬킬거리는 데몽과 여유롭게 앞서 걸어가는 유림. 그 사이에 낀 모두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갸웃거렸다.
“츳, 아직도 모르겠냐?”
결국, 참다못한 유림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유림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모두를 바라본 채 뒷걸음질로 걸음을 옮겼다. 은은하게 퍼지는, 유난히도 편해 보이는 미소가 번졌다.
잠시 후 유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교칙도 법이잖아, 안 그래?”
그렇다. 교칙도 법이었다. 쉽게 말해 클레이즈의 교칙 15번이 교칙 자체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칙이 교칙을 지키지 말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교칙이 아니던가.
유림은 오늘 새벽 자신의 질문에 그렇다며 응해주던 덴 케이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거기다 교수님들도 다 그 사실을 아는 것 같았고. 진짜 기막힌 교칙이라니까,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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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