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52
제 52 화
“이사장님-!”
온실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는 유림의 목소리에 한적하게 담소를 나누던 케이와 하민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화창한 목요일. 공통 수업이 끝나면 시작되는 담당 교수와의 면담. 물론 그 담당 교수가 덴 케이고 학생이 하민과 유림 한정이라는 흠이 있었지만. 하여튼 목요일은 세 사람의 티타임 날이었다. 그런데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근래 동아리 건으로 너무 정신이 없어 오늘이 목요일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때마침 기억이 났기에-덤으로 그 세 사람이 이사장님이란 말에 바로 놔줬으니-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다른 의미로 끔찍한 일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유림은 이사장의 유별난 성격을 생각하며 속도를 높였다.
정말이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종아리는 멍이 든 것처럼 뻐근했으며, 반쯤 빠진 비녀 탓에 광년 뺨칠 정도로 머리가 엉망이 되었음에도 멈출 수 없었다.
그저 온실 중앙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릴 뿐이었다.
망할 학교, 대체 왜 이렇게 넓은 거야?
이렇게 낭비할 땅이 많으면 차라리 나 같은 빈곤민한테 기부나 하지! 그럼 내가 투기로 떼돈을 벌었을 텐데!
유림은 하나마나한 생각을 하며, 치렁치렁할 정도로 늘어진 풀들을 헤치고 중앙으로 달려갔다.
헉헉거리는 숨소리와 땅을 박차는 거친 소리가 온실을 울렸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대나무 소파에 옆으로 누워 머리를 괴고 있던 케이는 제 위치를 처절하게 밝히는 요란한 소리에 담뱃재를 털며 여유롭게 웃었다.
“이제 왔군.”
하민 또한 유림이 오는 것을 알곤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유림이 모습이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왔다.
“헥헥. 젠장, 이게 뭐야!”
막판 전력하듯 한달음에 테이블 앞까지 달려온 유림이 괴성을 지르며 하민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이 아팠고, 심장이 제 속도를 잃어버린 놈처럼 쿵쾅거렸다. 다리는 후들거려 감각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유림은 고개를 숙이며 헉헉거리더니 크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자신과 달리 너무나도 태평해 보이는 덴 케이를 향해 고개를 꾸뻑 숙여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흐학-”
말과 함께 큰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덧붙여 유림의 몸도 뒤로 기울어져 소파의 등받이에 파묻혔다. 푹신한 쿠션이 수고했다며 등을 다독여 주는 것 같았다.
케이는 아직도 헉헉거리는 유림을 보며 느긋하게 웃었다. 약초꽃 향기처럼 은은한 담배 향이 퍼졌다.
“아쉽네, 좀만 더 늦지.”
‘어서 와’도 아니고 ‘아쉽네’라니. 늘어진 몸을 다시 긴장 상태로 되돌려 놓는 말에 유림이 표정을 구겼다.
“무, 무슨 짓을 하시려고요?”
“큭큭, 글쎄.”
‘글쎄’라는 짧은 단어와 달리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제법 살벌했다.
이런 돼지 똥 같은 인간이……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전신을 휘감는 소름과 등을 타고 오르는 불길함에 유림이 불안한 눈초리로 케이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 모습이 웃겼는지 그가 풋-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그는 긴 곰방대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괜찮아, 농이니까.”
웃기시네. 농 아닌 거 내가 제일 잘 알 거든요? 그거야말로 돼지 똥 싸는 소리지.
유림이 이번엔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자 케이가 다시금 실소를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진짜야. 거기다 늦은 이유도 얼추 알고 있고.”
“네?”
“들었거든.”
란 말과 함께 케이가 곰방대로 하민을 가리켰다. 유림의 시선이 자연스레 옮겨졌다.
그제야 덴 케이가 어떻게 자신의 상황을 알았는지를 깨달았다. 덧붙여 그나 하민이 키르로 별다른 연락을 취하지 않은 이유도.
유림이 긴 숨을 내쉬며 다시 등받이에 몸을 묻자 하민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유림에게 시원한 차를 건넸다.
“목마르지? 선배들이 아직도 쫓아다녀?”
상냥한 배려와 다정한 어투, 그리고 따스한 눈빛에 괜히 가슴이 뭉클했다.
큽, 역시 세상은 아직 따뜻했어…….
하민의 배려에 감동한 유림은 차를 받아 한 번에 들이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시원한 액체가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곤을 한 번에 싹 다 씻어주는 것 같았다.
마치 술을 마신 것처럼 캬- 하는 소리와 함께 탁하고 잔을 내려놓은 유림은 크게 숨을 들이켜더니 긴 한숨과 함께 투정을 내뱉었다.
“죽을 거 같아-! 으으~ 진짜 잠도 못 자고 있다니까. 아니, 난 내 건데 왜 지들이 날 주장하는 거지? 거기다 골치 아픈 사람이 둘이나 더 꼬여서 삼파전까지 벌인다니까. 아주 치고받고 장난도 아니야!!”
흥분한 탓에 엄청난 속도로 불평을 쏟아낸 유림이었으나 하민과 케이는 그 말을 단 한마디도 빼먹지 않고 제대로 알아들었다.
“골치 아픈 사람? 누구?”
“학생회, 도박장, 봉사 동아리요.”
그 말에 케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림은 잘 모르겠지만, 저 세 동아리는 이 클레이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네 개의 동아리에 속해 있었다. 규모도 거대했으며 벌어들이는 젬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많았다. 동아리원 또한 전부 훌륭한 인재들이었다.
그런 곳에서 유림이를 들이기 위해 싸우다니.
예상치 못한 재미난 상황에 케이가 턱을 쓸었다. 그러나 그걸 눈치채지 못한 유림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하소연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미치고 돌겠다니까! 이게 뭐야! 내가 왜 이러고 살아야 해! 난 충분히 한적하고 잉여로운 학교생활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힘들겠다. 좀 있으면 잠잠해질 거야. 조금만 힘내자.”
하민이 괜찮을 거라며 등을 다독여줬지만, 유림은 전혀 괜찮아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인간들의 성격이라면 유림이 동아리에 들어올 때까지 계속 괴롭힐 게 분명했다. 관심이 떨어진다 해도 분명 엄청 후의 이야기이리라.
으으~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유림이 한창 자신의 처지에 치를 떨 때, 옆에 있던 하민이 불쑥 물어왔다.
“넌 마음에 드는 곳 없어?”
“어?”
“동아리 중에 마음에 드는 곳이 하나도 없나 해서.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어디든 들어가는 게 좋잖아. 꼭 그 세 군데가 아니어도 말이야.”
유림은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야. 솔직히 그냥 쉬고 싶다가 내 의견이지만, 그래도 들어야 한다면 관심 있는 거 해야지 하고 찾아보긴 했는데…… 마땅한 게 없었어.”
“음… 골치 아프네.”
“그니까.”
유림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민에게 말했듯 만일 어디든 들어가야 한다면 가급적 맘에 드는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코니룸의 도박장에 들어가려 한 거였다. 그러나 그것도 미야와 재우의 개입에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물거품만 됐는가. 아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대환장극이 펼쳐졌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 이 상황에서 도박장에 들어간다는 건 다른 두 사람과 싸우자는 것과 진배없으니까. 학생회나 봉사 동아리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이다. 분명 어디에 들어가든 다른 두 사람이 보복할 것이다. 그렇다고 제3의 동아리를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거야말로 셋 다 적으로 돌리는 것이니까.
결국, 이 상황에서 유림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 무슨 이런 돼지 똥 싸는 경우가 다 있지?
“진짜 눈물 난다. 내가 왜 내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거지? 내 몸은 내 거라고오오…….”
유림이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잔뜩 헤집어진 머리를 꽉 움켜쥐었다. 그 덕에 가뜩이나 부산스러운 머리가 한층 더 부산스러워졌다.
그때 케이의 단호한 음성이 유림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주장해.”
간결하리만큼 간단한 말에 유림과 하민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케이가 다시 한 번, 그 말을 반복했다.
“주장하면 되잖아.”
뭐? 뭘 하라고?
“주장하라고요?”
유림이 두 눈을 깜빡이며 묻자 케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네 거라는 걸 주장하면 되지, 아무도 널 넘볼 수 없게끔.”
“어떻게요?”
정말로 모르겠다는 유림의 말에 케이가 피식 웃으며 담뱃재를 털었다. 은은한 향이 한층 더 짙어졌다.
“요점은 그거잖아. 네 주권을 지킬 동아리가 필요하단 거.”
“……그죠.”
“모든 동아리가 알아서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안 그래?”
케이의 말을 끝으로 미묘한 침묵이 그들을 덮었다.
설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지는 유림과 하민의 눈.
얼마 안 있어 두 사람이 손뼉을 치며 서로를 바라봤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단 하나의 돌파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보다. 한유림 진짜 바보다!!
케이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한 유림이 자신의 아둔함을 탓하며 한탄했다. 그러나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하민은 그런 유림을 바라보며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유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사장님!”
케이가 ‘왜?’라는 눈으로 유림을 올려다봤다.
“완전 사랑해요. 진짜 진짜 사랑해요!”
그러자 유림이 격한 말과 함께 케이의 손을 꼭 잡아 보였다. 케이는 그런 행동에 놀랐는지 평소엔 볼 수 없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하는 거라곤 뻣뻣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유림은 케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뭐가 그리 좋은지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 의욕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쫓아오던 졸음도 달아난 지 오래였다.
“좋아, 좋아. 그래. 그럼 되는 거야!”
그렇다. 굳이 동아리에 가입할 필요가 없었다. 요점은 안락하고 조용히 지낼 동아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냥 만들면 됐다. 본인 스스로가 말이다.
한유림 쟁탈전. 본의 아니게 본인을 쟁탈하기 위해 동아리를 만들기로 결심한 유림이었다.
유림은 이사장과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기숙사로 달려갔다. 동아리에 가입하라며 쫓아오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낮과 달리 씩씩하고 쾌활한 표정으로 무시할 수 있었다.
은하들이 의아해 할 정도로 확 바뀐 표정을 짓고 있는 유림은 기숙사에 도착하기 무섭게 사람이 가장 많이 있을 것 같은 식당으로 향했다. 도박장에서 있던 일과 이사장과의 만남으로 제법 많은 시간이 흘러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림의 예상대로 무시 못 할 만큼 많은 인원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귀가 아플 정도로 왁자지껄한 식당.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아 밥조차 좀 늦은 시간에 먹는 유림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후우…….”
유림의 등장에 학생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전교생이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해진 유림. 더욱이 근래 있던 쟁탈전 때문에 식당에 자주 오지 못했던 그녀의 등장은 모두의 행동을 멈추게 하기 충분했다.
유림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한번 쓱 훑었다. 그러곤 그들의 시선이 쉽게 닿을 수 있게끔 의자를 가져와 그 위에 올라섰다. 그제야 넓은 식당과 그곳을 가득 메운 다양한 색의 머리가 두 눈에 들어왔다.
마음 같아선 전교생을 이곳에 다 모아놓고 싶었지만, 이 정도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어차피 얼마 안 있으면 모두가 다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유림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신입생 한유림입니다! 자꾸 동아리에 가입하라고 하는데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말합니다! 전 어디에도 가입 안 해요! 제발 날 좀 끌어들이지 마세요!!”
우렁차고 쾌활한 목소리와 달리 식당엔 경악과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림은 그 기세를 몰아 뒷말을 이었다.
그녀의 큰 목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제 동아린 제가 만듭니다! 고로 한유림은 제가 쟁탈합니다!!”
===============
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