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54
제 54 화
데몽은 미간을 찌푸렸다. 학생회장인 미야의 심부름으로 책을 빌리기 위해 도서관에 온 지도 언 10분. 도서관이 너무 광활해서 그런지 찾기도 전에 막막함이 들었다.
4층 높이를 그대로 터놓은 웅장한 돔형의 건물. 그곳에 자리한 거대한 책장과 책의 나열은 마치 빽빽한 미로를 연상시켰다.
이런 곳에서 각기 다른 분야의 정체 모를 책 여덟 권을 빌려오라니. 정말 이거야말로 한유림 말을 빌려 ‘돼지 똥 싸는 소리’였다.
클레이즈의 도서관은 세계 3대 도서관 중 한 곳으로 재학생과 관계자만이 이용할 수 있는 절대적 지식의 보관처였다. 크게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이중 4구역은 4클래스와 학생회, 그리고 교수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넓은 구역에 포진된 30단의 높은 책장, 그리고 책장의 10단마다 좁은 폭의 난간이 층을 표시하듯 테라스처럼 설치되어 있었는데, 어찌나 아슬아슬하게 있는지 까딱하다간 그대로 떨어질 것 같았다. 난간의 층별로 사다리도 있었지만, 이 또한 안전해 보이지는 않았다.
기가 막힌 건 저렇게 높은 책장과 난간 위에서 아무렇지 않게 책을 꺼내라는 선배란 작자였다. 거기다 일부는 아주 자연스럽게 난간과 난간 사이를 폴짝폴짝 넘나들고 있었다.
확실히 여러 의미로 대단한 도서관이었다.
근데 왠지,
‘내 예상보단 좀 작은 거 같단 말이지…….’
물론 클레이즈의 도서관이 작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세계 3대 도서관이라 불리는 다른 두 곳에 비해선 그 규모가 너무 작았다.
과거, 데몽은 펠리탄의 학자들과 세계 3대 도서관 중 한 곳인 슈리넬의 탑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 데몽이 들어갈 수 있던 곳만 해도 이곳의 두 배는 됐다.
‘가지고 있는 서적이 더 귀해서 그런가?’
어쨌든 지금은 심부름을 해결하는 것이 더 급했기에 데몽은 미야가 적어준 책 목록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탁.
데몽의 발 앞에 묵직한 책 한 권이 떨어졌다. 코앞을 스치고 떨어진 책은 그대로 반동에 살짝 튕겨 오르더니 착 하고 펴져 척 봐도 어려워 보이는 수식과 빼곡한 글씨를 뽐냈다.
“…….”
까딱하다간 그대로 머리를 맞을 뻔한 상황이었다.
허허허허. 어떤 무식한 놈이 날 죽이려고 이런 발칙한 짓을 한 걸까.
데몽은 입꼬리를 비틀며 위를 올려봤다.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
소리가 들려왔다.
“아, 미안.”
깔끔하게 정리된 갈색 머리의 사내가 데몽을 보며 쓰게 웃고 있었다. 입고 있는 교복과 옷깃에 달린 잎 세 개짜리의 배지가 아니었다면, 학생으로도 또 선배로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딱히 나이가 들어 보인다거나 목소리에 연륜이 묻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법 젊고 잘생겼으며, 목소리도 청년 특유의 산뜻함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좁은 난간에 눕다시피 기대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 여유로움이 이 도서관에서 몇십 년을 산 사람 같았다.
“괜찮아?”
“아, 네.”
데몽은 미간을 살짝 구기며 앞에 떨어진 책을 주웠다.
[늄의 제삼분할.]예상치 못한 제목에 데몽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가 펠리탄의 수습 학자 시절에 공부했던 전문 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어려워 다 공부하는데 무려 반년이나 걸린 책이기도 했다.
학생이 읽기엔 제법 수준 높은 내용이었다. 이런 책을 저런 자세로 읽고 있었다고?
데몽이 경악에 어려 있을 때, 난간에 앉아 있던 그가 사뿐히 내려왔다. 2층가량의 높이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정말 미안. 깜빡 졸아버렸어. 여긴 따듯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노곤하거든.”
데몽은 안경을 고쳐 쓰며 공손히 책을 건넸다.
“괜찮습니다.”
“그래? 다행이네. 응? 학생회야? 무슨 일로 온 거야?”
“아…….”
학생회 배지를 가리키며 묻는 말임을 알고 데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들고 있던 책의 목록을 보여주며 심부름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미야 선배가 시킨 건가 보네.”
“네? 아, 네.”
사내는 데몽을 향해 한 번 씨익 웃어준 뒤,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그리고 목록을 받아 그 여백에 책들의 위치를 상세히 적어주었다.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듯 말이다.
“이렇게 찾으면 돼. 이거 한 권은 이미 누가 빌려 가서 없어. 아마 다음 주에나 들어올 거야.”
뜻하지 않은 배려에 데몽이 옅게 웃었다. 언제 다 찾나 했는데 생각보다 금방 끝날 것 같았다.
데몽은 감사하단 말을 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인사보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더 빨랐다.
“샨.”
간결하리만큼 딱딱한 부름에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고개를 따라 데몽의 시선도 움직였다.
책장의 끝. 빛을 가득 담은 것처럼 화사한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그곳에서 지독한 무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하얀지 흡사 죽은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거기다 왠지 보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데몽은 스산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팔을 쓸었다. 그때 청년이 데몽을 향해 말했다.
“미안, 친구가 불러서 가봐야겠어.”
“괜찮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실례.”
남자는 데몽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더니 자신을 부른 금발의 청년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두 사람의 모습이 미로처럼 펼쳐진 책장 사이로 사라졌다.
데몽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학기 초부터 여러 곳을 돌아다닌 데다 학생회에 들어가면서 나름 많은 선배를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흐음.”
데몽은 몸을 돌리며 두 사람에 대한 건 나중에 선배들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금발에 푸른 눈을 한 선배와 갈색 머리에 태양 모양의 보라색 펜던트를 한 ‘샨’이란 선배를 아냐고 말이다
* * *
“일단 승인부터 받을까?”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건 디하르였다.
“승인 먼저?”
“그래. 전임 교수님은 아직 안 정했지만, 승인이라면 먼저 받을 수 있을 거야. 어차피 마지막에 이사장님께 넘기면 되는 거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거기다 이사장님의 성격으로 보면 굳이 순서를 따질 것 같지도 않았다.
“음…… 그럼 승인은 누구한테 받지?”
유림의 질문에 하민이 아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우리 형한테 하나 부탁해 볼까?”
1번 의자의 주인인 하진을 거론하는 하민의 말에 유림이 머릿속으로 그를 떠올렸다. 유림의 기억에 그는 깔끔하고 정갈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직접 이야기해 본 적은 없지만 하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꽤 건실하고 상냥한 성격이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흔쾌히 해줄 것 같았다.
“그럼 나야 좋지만, 괜찮겠어? 괜히 교수님이 곤란한 일 겪는 거 아니야?”
“아냐, 괜찮아. 어차피 승인 정도인데.”
괘념치 말라는 하민의 말에 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선 하민이가 하나 받고, 나머지 둘은 누구한테 받지?
유림이 아는 전임 교수는 몇 없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녀를 아는 교수가 몇 없었다(이는 어디까지나 유림의 생각이다). 그나마 이야기해 본 전임 교수는 끽해야 세룬이 전부가 아니던가.
세룬 교수님께 부탁해 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집어치웠다. 분명 ‘서명? 그래, 해줄게. 대신 돈 내놔’라고 말할 것이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었다.
유림이 한창 누구에게 서명받을지 고민할 때, 디하르가 입을 열었다.
“서명은 다른 종이에 받아도 되는 거지? 꼭 세 분을 한 종이에 받을 필욘 없잖아.”
“안내문에 그런 말 없었으니까 가능할 거야. 여분 종이도 줬거든.”
“그럼 내가 한 장 받아올게.”
“누구한테?”
“리리아 교수님.”
리리아 교수님? 그게 누구지?
유림이 누구냐는 의미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디하르가 옅게 웃으며 유림의 머리를 쓰
다듬었다.
“2형 교수님.”
2형 교수님? 2형 교수님이 누구지? 2번 의자에 앉아 있던 교수님인데…….
유림은 입학식 때 강당에서 해우가 소개했던 교수들을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 아리따운 여성 하나가 그려졌다.
“아, 그 엄청나게 예뻤던 교수님?!”
“응.”
리리아 교수님. 그 이름은 생소했지만, 얼굴만큼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2형이면 디하르와 테오 같은 무기 강화계 애들인데, 그런 애들의 담당치곤 지나치게 아름다운 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해주실까?”
“해주실 거야.”
“아…… 난 이 학교 교수님들에 대한 불신이 너무 폭발해서…….”
유림이 미심쩍은 얼굴로 말하자 디하르가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안 그러셔. 리리아 교수님은 정말로 훌륭한 분이시거든.”
디하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의 어투에서 자부심까지 느껴졌다. 도대체 어떤 교수님이시기에 저 우직한 디하르가 저런 말을 하는 걸까?
한참 리리아란 교수에 대해 생각할 때, 유림의 뒤에서 서류를 보고 있던 은하가 한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그럼 나도 한 장 가져갈래! 세룬 교수님께 부탁하면 되니까!”
은하의 담당 교수님이시자 4번 의자의 주인 세룬의 등장에 유림이 떫은 표정을 지었다. 지난 일도 있고, 또 여러 의미로 별로일 거라 단언한 교수님을 은하가 쌍수 들고 환영했기 때문이었다.
“세룬 교수님은 왠지 돈 내놓으라 할 거 같은데…….”
유림이 떨떠름한 어투로 말끝을 흐리자 은하가 허리에 손을 짚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거든! 세룬 교수님이 짱이거든! 교수님이 우리 4형 애들한테 얼마나 잘해주시는데! 네가 그 위대함을 못 봐서 그래!”
“…….”
우렁차리만큼 당당한 목소리와 어투에 말 문이 막혀 버렸다. 유림은 두 눈을 깜빡이며 은하와 하민, 그리고 디하르를 바라봤다. 그들의 표정에서 담당 교수님(하민이는 형)에 대한 자부심이 잔뜩 묻어났다. 어찌나 철철 넘치는지, 불신만 가득 찬 자신이 이상할 정도였다.
유림은 미간을 팍 구기며 자신의 담당 교수님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당초 유림은 자신의 담당 교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고, 유일하게 대화해 본 것도 ‘안젤리카’를 통한 것이 전부 아니던가. 기억날 리 만무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뭔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유림은 어라? 하며 표정을 구겼다. 그때 그런 그녀에게 쐐기를 박듯 하민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특유의 부드러운 음색이 뇌까지 흘러들어 왔다.
“어차피 내일이면 각자 형 수업 듣잖아. 그때 전임 교수님께 하나씩 받으면 되겠다.”
그리고 그 순간, 유림은 자신이 ‘히야스’를 찾고 있단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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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