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56
제 56 화
유림이 히야스의 헛소리를 듣고 있을 때, 디하르는 2형의 교실에 있었다.
클레이즈의 형 중 가장 많은 인원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1형과 2형이었기에 그 교실은 꽤 컸고, 적잖은 수가 한 장소에 모여 그룹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디하르는 자신이 속해 있을 그룹이 아닌, 한 치의 흩트림도 없는 반듯한 자세로 리리아의 앞에 서 있었다.
주위에서 각종 무기를 제련하고 기술을 연마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두 사람만큼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의외네. 디하르가 나한테 이런 걸 부탁할 줄 몰랐어.”
리리아가 흥미롭다는 듯 옅게 웃었다.
자신의 키만 한 장검을 드는 기사답지 않은 우아한 외모와 고운 피부, 그리고 그 속에 자리한 강인한 아름다움. 존경하고 또 존경하는 스승이었지만 이 외모만큼은 적응되지 않았다. 더욱이 흥미가 가득 담긴 소녀 같은 눈빛은 더더욱.
유림들에게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사실 디하르는 2형 선배들에게 동아리 가입을 권유받았었다. 리리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많은 도움이 될 테니 해보라며 추천했었다.
그랬는데 이렇게 동아리 승인서를 들이밀다니. 어떻게 보면 꽤 건방진 행동이었다.
리리아는 마른침을 삼키는 디하르를 빤히 쳐다봤다.
분명 저번까지만 해도 2형 동아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리 마음을 바꾼 걸까. 대체 무슨 동아리기에?
리리아가 가는 손가락으로 턱 끝을 매만졌다. 그러다 문뜩 디하르가 잔뜩 긴장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왜 그렇게 긴장해. 권유받은 동아리 때문이라면 긴장 풀어. 어디까지나 추천이지 강요는 아니니까. 거기다 이런 것도 좋잖아, 신입생이 동아리도 만들고.”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디하르가 건넨 승인서를 읽었다. 동아리명 ‘마법 연구부’. 동아리장 ‘한유림’. 담당 교수는 공석이며 교수 승인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음? 잠깐, 한유림? 유난히도 귀에 익는데?
리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유림이란 이름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 안 있어 그녀의 머리 위로 지난번 온실에서 하진의 키르를 통해 들었던 하민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도박장의 코니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당찬 신입생. 덴 케이의 담당 학생이자 올해 입학한 유일한 8형. 거기다 약 일주일 전부터 일어난 ‘한유림’ 쟁탈전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설마, 이 한유림이 그 한유림?”
그 한유림이 뭘 뜻하는지 정확히 알 순 없었으나 도박장 사건을 비롯해 이상할 정도로 유명해진 유림을 떠올린 디하르가 그렇다며 답했다.
리리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오호~ 둘이 친구인가 봐?”
“소꿉친구입니다.”
“정말? 그럼 함께 들어온 거야?”
“아니요. 어릴 적에 헤어졌다가 입학 시험 때 다시 만났습니다.”
어린 시절의 일을 떠올리듯 디하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라?
리리아는 의외라는 듯 그를 빤히 쳐다봤다. 견고할 정도로 아름다운 오드아이와 매력적인 눈물점을 가진 미남형의 제자. 화려한 외모 덕에 성격도 그럴 것 같았으나 여느 제자들과 달리 오직 실력 하나만으로 자신을 스승으로 인정한 고지식하고 딱딱한 녀석이었다. 그런데 그런 디하르의 얼굴에 따스한 봄 햇살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것이 어쩐지 재밌어, 리리아가 작게 웃으며 물었다.
“설마 유림이 때문에 이 동아리 들어가려는 거야?”
“네.”
단호한 대답에 웃음이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반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이렇게 확답하다니.
리리아는 놀랍다는 듯 두 눈을 깜빡였다.
지금의 그는 평소와 달랐다. 무언가 강인한, 그러면서도 봄바람처럼 유해 보이는 아이러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편으론 살짝 달큰해 보이기도 했다.
설마…….
“디하르, 내가 그 대답의 이유를 궁금해하는 건, 실례일까?”
“아닙니다,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그것이 정답입니다.”
어머어머, 이게 웬일이야!
그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이제 보니 디하르의 귓가가 쑥스러운 듯 살짝 붉어져 있었다. 설마 자신의 고지식한 제자가 이런 순애보를 가진 녀석이었다니!
“언제부터?”
“감정의 시작을 묻는 거라면…… 처음 만났을 때부터입니다.”
꺄악, 뭐야! 이거 너무 좋잖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라니! 소꿉친구면 어릴 때 만난 거 아니야? 적어도 10년은 된 이야기일 텐데, 그 감정이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어머머- 멋져라!
리리아는 보기 드물 정도로 달뜬 표정으로 디하르를 바라봤다. 눈이 별이라도 박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유림이는? 어떻대?”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지금은 떨어져 있던 시간에 대해 듣고 있습니다. 유림이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제 감정만 우선시했다간 부담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두근두근.
리리아는 저도 모르게 두 뺨을 가렸다. 조심스럽게 말을 잇는 자신의 제자. 유림을 생각하고 있는지 눈에 띌 정도로 온화해진 표정이 매력적일 만큼 멋있었다.
부럽네, 한유림.
리리아는 가볍게 흥얼거리며 펜을 꺼내 들었다. 제자의 사랑이라면 응원해 주는 것이 스승의 올바른 태도겠지?
그녀는 승인 교수란에 서명했다. 그러다 문뜩 무언가를 떠올리곤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담당 교수란이 비어 있던데 생각해 둔 사람이 있는 거야?”
“아니요. 아직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리리아가 눈꼬리를 휘며 디하르를 바라봤다. 예의 고혹적인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그럼 동아리 담당 교수 내가 해줄게. 어차피 맡은 동아리도 없으니까.”
“그래만 주신다면야……!”
디하르는 정말로 기뻤는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머릴 숙여 인사했다.
리리아는 그런 디하르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앞으로 보게 될 풋풋한 광경을 떠올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 *
하진의 개인 연구실의 문이 열리며 하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민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제 형을 불렀지만 그를 맞이하는 건 방 안의 휑한 공기였다.
서명을 받기 위해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달려왔는데, 설마 형이 없을 줄이야…….
허탕을 쳤단 생각에 하민이 뺨을 긁적이며 몸을 돌리던 그때, 그의 등 뒤로 온화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민이?”
하민은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천장에 가깝게 달아두었던 검은색의 해먹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 올라와 이리저리 흔들었다.
7번 의자의 주인인 해우였다.
“해우 교수님.”
하진의 연구실에서 쉬고 있던 해우가 앓는 소리와 함께 해먹에서 내려왔다. 제법 깊게 자고 있었는지 뒷머리가 부스스하고 뺨엔 해먹 자국도 나 있었다.
그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하민에게 다가갔다.
“으하암- 교수님은 무슨, 그냥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교수님 소리는 수업 시간에만 해도 충분해. 존대도 안 해도 되고.”
해우는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 몇 시지? 수업 끝났어?”
“아니, 쉬는 시간이야. 그보다 형은 수업 어쩌고 왜 여기 있어?”
“난 어제 잔업 하느라 너무 피곤해서 다른 교수님들께 부탁하고 쉬러 왔지. 이 방이 낮잠 자기엔 딱이거든.”
해우는 머리 정리가 다 되었는지 다시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와 하진이 자주 애용하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푹신한 시트가 피곤한 몸을 감쌌다.
“그보다 넌 여기 왜 왔어? 수업 시간 아냐?”
“실은 동아리 승인받으…… 아, 맞다. 형도 가능하지.”
하민은 해우도 하진과 같은 의자의 주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 동아리 승인서를 꺼냈다.
“형,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간절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하민의 모습에 해우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귀여운 동생이 하는 부탁을 이 형이 못 들어줄 리가 없지.
“뭔데? 형이 다 들어줄게.”
그 말에 하민이 승인서를 건넸다. 해우는 그 종이를 받아 천천히 읽었다. 동아리 개설이라니. 의아하면서도 기특한 생각이 들었다.
동아리명, 마법 연구부.
이건 괜찮네. 의외로 이런 동아리는 우리 학교에 없으니까.
하민이가 들어도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동아리명에 해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읽었다. 그러다 순간 눈에 들어온 세 글자에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말았다.
동아리장 ‘한유림’.
한유림? 설마 내가 알고 있는 그 한유림?
“이거 유림이가 만드는 동아리야?”
설마 하는 마음에 묻자 하민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박, 누구누구 들어가는데?”
“일단 나, 유림이, 디하르, 은하.”
예상치 못한 조합에 해우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리리아가 인정할 만큼 타고난 기사인 디하르에, 세룬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천부적인 재능의 은하. 거기다 신입생 환영회 이후, 그 이름 석 자만으로도 학교를 들끓게 하는 유림. 한마디로 말해 무지막지한 신입생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모여 동아리를 만들고자 하고 있다.
해우는 생각보다 흥미로운 구성원에 상기된 표정으로 펜을 꺼냈다. 물론 유림의 등장에 저 ‘마법 연구’란 이름이 급격히 걸리기 시작했지만, 뭐 어쩌리. 재밌기만 하면 장땡인 것을.
“담당 교수는 누가 하는데?”
“없어. 아직 미정이야.”
“미정이라고?”
해우는 서명하던 손을 멈추고 하민을 바라봤다.
동아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해우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담당 교수라고 답할 것이다. 교수가 누구냐에 따라 동아리의 분위기며 방향, 그리고 받는 대우가 달라졌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동아리 교수가 아직 미정이라니.
“왜 미정이야? 생각해 둔 사람 없어?”
“응. 일단 서명부터 받기로 했어. 승인을 못 받을 수도 있고 우리가 다 1클래스라 아는 교수님이 몇 분 안 되거든.”
그 말에 해우가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이 바보들. 가장 좋은 교수를 끌어모을 수 있는 구성이면서 그걸 모르다니.
그는 안타깝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쉰 뒤 부드럽게 웃으며 하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휴, 어쩔 수 없지. 그럼 형이 해줄게.”
그 말에 하민의 표정이 몰라보게 밝아졌다. 가장 고민하던 부분이 의외의 곳에서, 그것도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해 풀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래.”
그 말이 정말로 기뻤는지 하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해우의 손을 꼭 잡았다.
“진짜지? 진짜 해주는 거다!”
“그래그래. 형이 해줄게.”
“형, 진짜 고마워! 내가 이 은혜 두고두고 갚을게!”
하민이 해우를 얼싸안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갚다니 뭘?”
낮은 목소리가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하민과 해우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그곳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하진이 문틀에 기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형!”
하민의 부름에 하진이 인상을 풀고 다가왔다.
“언제 왔어, 올 거면 연락하지.”
그리고 하민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해우가 앉아 있는 의자를 가볍게 걷어찼다. 그 움직임이 워낙 미약해 하민은 알아채지 못했으나, 자리에 앉아 있던 해우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하여간, 지 동생이 누구랑 잘 지내는 꼴을 못 본다니까.
해우는 입을 삐죽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옆 소파에 앉았다. 하진은 그런 해우를 한 번 흘겨본 뒤, 시선을 다시 동생에게로 옮겼다.
“많이 기다렸어?”
“얼마 안 됐어.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아냐. 그보다 갚다니 뭘?”
“아, 이거!”
하민이 자랑스럽다는 듯 종이를 내밀었다. 종이를 확인한 하진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무언가가 맘에 안 든다는 듯 말이다.
그는 다시금 종이를 찬찬히 읽었다. 그곳엔 ‘마법 연구 동아리’라는 이름과 함께 해우의 것으로 추정되는 승인 사인이 적혀 있었다.
“동아리?”
“응, 해우 형이 승인해 줬어.”
하진이 ‘그걸 왜 네가 해줘?’라는 눈빛으로 노려보자 해우가 능청을 떨었다. 하진은 시선을 다시 하민에게로 옮겼다.
“동아리 만들게?”
“응, 친구들하고 만들기로 했어.”
“친구라니 누구?”
“디하르랑 은하랑 림이.”
림이. 순간 하진의 머릿속에 유림에 대한 모든 소문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능하면 제 동생이 절대 친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골치 아픈 존재.
하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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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