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57
제 57 화
“꼭 해야겠어?”
차마 뭐라 하진 못하겠는 하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하민 몰래 왜 서명해 줬냔 의미로 해우의 발을 밟았다. 물론 우리의 해우는 공격을 당하고도 가만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그 또한 하민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하진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묵직한 충격에 하진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제 딴에는 통증 때문에 반응한 것이었는데, 하민의 눈에는 그것이 다른 의미로 보였다.
“왜? 별로야?”
“어?”
“동아리. 형이 보기엔 별로야?”
하진의 태도에 무언가 불안함을 느꼈는지 하민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하진의 얼굴 또한 어두워졌다.
팔불출이란 말이 딱 맞을 정도로 하진은 동생들에게 약했다. 그들의 부탁이라면 달이라도 따다 줄 정도로. 그런 하진에게 지금 하민의 표정은 그 어떤 약점을 후벼 파는 것보다 무서운 공격이었다.
결국, 하진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아니, 별로라기보단 담당 교수님도 없고, 그냥 있는 동아리를 들어가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해우 형이 담당 교수님 해준대!”
이 개자식이.
하진이 짤막한 욕설을 삼키며 해우를 노려보자, 그가 입꼬리를 얄밉게 말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진이 해우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하민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덴 케이만 해도 짜증 나 죽겠는데 해우까지?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라지.
하진은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이번은 강하게 나가야 할 듯싶었다.
“형은 반대야.”
“형.”
“솔직히 동아리를 만드는 건 좀 이르다고 봐. 좀 더 상황을 보고 판단하도록 해. 거기다 요즘 한유림 때문에 학교가 시끄럽잖아. 형은 네가 그 일에 휘말려 피 보는 거 싫어.”
하진은 스스로의 다짐을 실천하듯 꽤나 강하게 말했다. 문제는 그런다고 물러날 하민이 아니란 거였다.
“……그렇지만 형.”
“응?”
“난 림이와 (동아리를) 함께하기로 했는 걸. 이미 (동아리의) 미래를 약속했어.”
…….
묘한 침묵이 세 사람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뭐라고?
하진은 하민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난 림이와 함께하기로 했는 걸. 이미 미래를 약속했어’……라니? 림이와 함께하기로 했다고? 미래를 약속해? 뭐, 뭘 어째?!!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진은 벙찐 표정으로 자신의 소중한 막냇동생을 바라봤다. 딸이 시집간다고 남자를 데려와도 이보다 더 큰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나의 소중하고도 소중한 동생 하민이가…….
“형?”
하진은 하민이 하고자 하는 말의 본뜻을 파악하지 못한 채,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해우가 꺽꺽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아 미친다. 어떡해. 나, 이 형제 너무 좋아.
차마 하진 앞에서 대놓고 웃을 수 없는 해우는 죽을힘을 다해 웃음을 참았다. 그러나 터져 나오는 소리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하민의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생각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어쩜 저렇게 중요한 말만 쏙쏙 요약했을까. 물론 알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민이 영리하고 똑똑하긴 했지만 영악하진 않았으니까. 무의식적으로 한 거겠지,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큭큭큭큭. 아 어떡해. 웃음이 안 멈춰.
한쪽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한쪽은 뭐가 그리 웃긴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음을 참고 있는 묘한 상황. 그저 하민만이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형?”
하민은 의아한 얼굴로 제 형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그때 하진이 무언갈 결심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한다.”
“뭐?”
“어?”
음험한 말에 두 사람이 반문하자 하진이 다시 힘을 줘 말했다.
“이 동아리 담당 교수 내가 한다!”
“에?!”
“엑?!”
예상치 못한 말에 하민은 물론 해우마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하진은 그 두 사람의 반응 따윈 상관없다는 듯 동아리 승인서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정확히는 적혀 있는 유림의 이름을.
감히 내 소중한 동생을 건들다니.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내가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진의 투지 어린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 * *
“으힉?!”
갑자기 등을 타고 올라온 한기에 유림은 저도 모르게 소릴 내질렀다. 그 소리에 아슈팔과 히야스의 시선이 유림에게로 향해졌다.
“왜 그러냐?”
“아뇨, 갑자기 한기가…….”
“싱겁긴. 그보다 한유림. 내가 할래. 나 시켜줘.”
……뭐래, 이 미친 교수가.
유림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노려봤다.
조금 전부터 자신을 향해 동아리 교수를 시켜달라며 떼를 쓰는 히야스. 아니, 말이 떼지 표정으로 봐선 ‘안 시켜 주면 뒤에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의 내용을 담은 협박이었다.
“그니까 그게…….”
“뭐가 문제인데? 동아리 담당 교수님도 없다며.”
“아, 그거야 그렇지만.”
댁을 내 친구들한테 어떻게 소개해, 무슨 욕을 들으라고.
유림은 뒷머리를 가볍게 긁었다. 사실 히야스가 담당 교수님이 되면 유림에겐 좋은 일이었다. 물론 그가 멀쩡한 교수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선 알고 있으니 말이다. 또 그의 성격을 보면 특별한 간섭이 없을 게 분명했다. 문제는 이 동아리가 저 혼자 하는 동아리가 아니라는 거였다.
“그럼…… 먼저 애들한테 물어볼게요. 그래서 괜찮다고 하면 그때 하기로 해요.”
“……뭔가 자존심 상하는 발언이군.”
“으에?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삐쳤다는 듯 퉁명스런 히야스의 목소리에 유림이 아니라며 두 팔을 휘휘 저었다. 그때였다.
“유림이 여기 있니?”
등 뒤에서 간드러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고운지 꼭 노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유림은 고개를 돌렸다. 히야스와 아슈팔 또한 고개를 돌려 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어머, 여기 있었네.”
교실의 뒷문. 그곳에 환한 미소를 짓는 아리따운 여인과 디하르가 서 있었다. 순간 유림은 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뭐야. 리리아, 네가 여기 왜 와?”
히야스가 친절하게도 그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었다.
리리아는 투덜거리는 히야스를 향해 가볍게 콧방귀를 뀐 후 유림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넘실거리는 게 꼭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너 보러 온 거 아니네요~ 안녕, 유림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지?”
“아…… 안녕하세요.”
“난 제2형 교수, 리리아. 디하르의 스승이야.”
리리아가 유림의 손을 꼬옥 잡았다.
곱상하고도 여린 외모와 달리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에 유림은 그녀가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검을 잡고 살았는지 알게 했다.
“아, 네. 근데 무슨 일로……?”
“동아리 건 때문에 왔어.”
동아리? 무슨 동아리?
“내가 너희가 만드는 동아리의 담당 교수가 되고 싶어서 말이야. 어때?”
“네?!”
리리아의 말에 유림이 저도 모르게 소릴 내질렀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야, 잠깐! 검 뚱땡이 넌 빠져. 유림이네 동아리 교수는 이미 나로 정해졌다고!”
유림이 패닉 상태에 빠져 있을 때, 교탁에 걸터앉아 있던 히야스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리아는 그런 그를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뭐? 미쳤어? 방구석 폐인인 네가 동아리 교수라니! 우리 예쁜 제자들을 다 망칠 셈이
야?”
“적어도 너보단 나!”
“웃겨, 정말!”
히야스와 리리아는 정말 이들이 클레이즈 최고의 간부 교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유치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유림은 그 사이에 껴서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동아리 교수를 시켜 달라는 히야스와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에게 매력을 발산…… 아니, 동아리 교수를 하고 싶다는 리리아.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유림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디하르를 바라봤다. 그 또한 상황이 제법 복잡하게 돌아갈 것을 짐작했는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간신히 편해졌다 싶었더니 다시 골치 아픈 일이……. 너무 어이가 없어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더 기막힌 상황은 유림이 이 상황을 해결하기도 전에 벌어졌다.
“한유림, 나와!”
쾅 소리와 함께 뒷문이 열리며 거친 남성의 목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이번엔 유림을 비롯한 다섯 사람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조금 전 리리아와 디하르가 들어왔던 방향에 서 있는 세 사람. 그중 하나는 잘 알고 있는 상큼이 하민이였고 하나는 최고 인기인 해우 교수님이었으며 또 하나는 유림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정체불명의 교수님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가 누구인지 별 탈 없이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형, 잠깐만!”
하민이가 그의 팔을 부여잡으며 그가 누구인지를 낱낱이 가르쳐 줬으니 말이다.
“뭐야? 찐따 새낀 또 왜 왔어?”
“어라, 동생 바보들? 여긴 웬일이야?”
교수들의 반응은 파격적이었다. 교내 최고의 냉혈인한테 찐따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히야스와 자기가 들어야 할 질문을 두 사람에게 건네는 리리아. 더 웃긴 것은 그 말을 잇는 하진의 발언이었다.
“마법 연구 동아리 내가 관리한다.”
단호하게 떨어지는 음성에 미묘한 침묵이 교실 안을 감돌았다. 유림은 천천히 그가 한 말을 분석했다. ‘마법 연구 동아리 내가 관리한다’라는 건 지금 내 앞에서 싸우는 두 사람처럼 자신이 담당 교수를 하겠단 소리인 건가?
아니, 이 미친 인간들이 왜 단체로 찾아와서 이래?!
저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정말 화딱지가 나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에 반박하는 것은 동아리장인 유림도 아니고 리리아를 끌고 온 디하르도 아니었으며 자신의 형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하민도 아니었다. 바로 교수들 본인이었다.
“엑?!”
“미친!”
“잠깐, 나 안 한다고 말한 적 없다!”
한 마디씩 던지는 세 사람의 모습에 하진이 미간을 팍 구겼다.
“시끄러워. 내가 한다.”
“미친, 너야말로 닥쳐라. 왜 네가 해?! 내가 하기로 이미 결정 났어.”
히야스의 발언에 네 사람이 서로를 노려봤다.
“웃기지 마. 네가 하면 동아리 망해. 내 동생 망치라는 거냐?”
하진이 히야스를 바라보며 말했고,
“잠깐, 하진아. 그렇게 치면 너도 안돼. 네가 들어가면 애들 위병 나서 죽을걸. 그냥 나한테 맡겨. 그 편이 가장 무난해.”
해우가 하진을 향해 말했으며,
“어머머, 그렇게 치면 내가 가장 알맞지. 너흴 어떻게 믿고 내 제자들을 맡겨?”
리리아가 해우를 향해 외치자,
“야! 잠깐, 검 뚱땡이. 유림이가 왜 네 제자야?! 네놈 제자는 저기 저 짝눈이지! 그리고 유림이 동아린 내가 맡기로 했다고!!”
히야스가 리리아를 향해 발악했다.
서로를 노려보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 졸지에 네 명의 교수 사이에 낀 유림은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디하르와 하민을 바라봤다.
하하하하하. 이 교수님들 참 웃겨, 그치? 누가 시켜준데? 왜 지들이 나서서 그래?!
유림은 그대로 책상에 고개를 파묻었다. 선배들의 집요한 권유가 싫어서 동아리를 만들었는데 설마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그땐 도망치고 외면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이번엔 교수였다. 즉 선배들처럼 대할 수 없단 소리였다.
으어어어어어어어.
끔찍한 비명이 언어가 되지 못한 채 입안에서 맴돌았다. 아슈팔은 이 씁쓸한 현실에 안타까워하며 유림의 어깨를 토닥였다.
“힘내, 후배.”
“네…… 힘내야죠.”
눈물이 날 정도로 우울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30초 후, 유림은 자신의 팔자를 저주하며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다.
바로,
“림림! 세룬 교수님께서 담당 교수님 해주신대!!”
라면서 세룬을 끌고 온 은하에 의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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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