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61
제 61 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느긋한 목소리에 교수들의 몸이 일순 굳어버렸다. 이번에는 히야스도 제법 당황했는지 눈에 띌 정도로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뻣뻣한 고개를 돌려 그 자리에 나타난 인물을 바라봤다.
언제 왔는지 곰방대를 문 채 느긋하게 서 있는 덴 케이. 여유로운 어투와 달리 그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특별히 인상을 찌푸리거나 표정을 구긴 건 아니었다. 그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지독한 무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차라리 분노를 표출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섭고 서늘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가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유림은 처음 보는 덴 케이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마른침만 계속 넘어갔고 서늘한 눈빛에 피부가 따끔거렸으며 손끝이 잘게 떨렸다.
처음이었다. 저렇게 굳은 표정의 이사장은.
한편으론 저 사람이 여태 자신이 알고 지낸 이사장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케이는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대련을 허락했지?”
“케이……!”
“그니까……!”
다급하게 터져 나오는 변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뒷말이 이어졌다.
“그것도 학생들이 위험할 정도로?”
일곱 교수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윽, 그게…….”
“어쩌다 보니까…….”
말을 잇지 못한 채 중얼거리는 리리아의 모습에 덴 케이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쩌다 보니까?”
그러곤 보기 드물 정도로 날카로운 눈매로 그들을 노려봤다.
“건방지네. 너희가 언제부터 나한테 어쩌다 보니까란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할 수 있게 되었지?”
날카롭게 떨어지는 말은 칼처럼 모두를 찔렀다. 저 말에 해당하는 인물이 아닌 유림조차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갈 정도였다.
교수들은 케이의 말에 미간을 구기며 항변했다.
“…잠깐, 말이 심하다?”
“되지도 않는 변명이라니…….”
“그래, 우리가 잘못한 건 알지만 그래도 말이 좀…….”
케이는 곰방대를 털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새카만 재가 떨어졌고, 알싸한 향이 한층 더 짙어졌다.
“후, 확실히 우리가 오래 알긴 했지. 너희가 이런 멍청한 말까지 지껄일 정도면 말이야.”
“……야.”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난 지금 이사장으로 여기에 있는 거야. 이젠 좀 이해가 가나?”
“…….”
그 말에 교수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이었다. 덴 케이가 그들과 오랜 친구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보다 상사인 이사장이었고 이 학교의 최고 계급자이자 모든 결정권을 가진 권력자였다.
더욱이 클레이즈는 가벼운 시범용 경기면 모를까, 이런 식의 대련은 학생들이 다치거나 학교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기에 엄금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걸 허락도 없이, 심지어 아슈팔이나 세룬이 없었다면 유림이들이 심하게 다쳤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두는 괜히 입술만 짓씹으며 시선을 내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이 입을 다물자 덴 케이가 다시 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돌려 신입생들을 바라봤다.
다들 놀란 표정으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특히 유림은 이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지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케이와 히야스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한유림.”
케이의 부름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몸이 크게 떨렸다. 유림은 마른침을 삼키며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네…….”
“넌 입학 때부터 사고를 몰고 오는군.”
내용과 달리 딱히 탓하는 어투는 아니었으나,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교수님들도 괜히 저 때문에 이리 혼나는 것 같았다.
유림이 눈동자를 굴리며 케이의 눈치를 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어깨에 힘을 뺐다.
“뭐, 어차피 예상한 일이니까.”
“네?”
어차피 예상한 일이라고? 그게 무슨…….
“다친 곳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질문에 유림이 고개를 퍼뜩 들고 답했다.
“아, 없습니다. 저도 제 친구들도요.”
“다행이군. 하긴 아슈팔이 함께 있었으니 당연한 건가.”
정말로 다행이라는 듯한 어투에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유일하게 평온을 유지하던 아슈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덴 케이는 다시금 곰방대를 깊이 빨아들였다.
후- 하는 숨소리와 함께 알싸한 향을 품은 흰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우선, 직접 대련을 한 넷에겐 추후 징계가 내려질 거야. 물론 세룬에게도 별도의 징계가 내려질 거고. 또 학생들이 위험해 처한 걸 봤음에도 재빨리 돕지 않은 이즈네와 다단도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자고.”
“보스, 전……!”
“그리고 이 동아리 건은 여기서 접는다. 너희는 동아리 담당 교수를 맡을 자격이 없어.”
그 말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자신들의 잘못은 인정하나 이건 아니었다. 거기다 한유림 쟁탈전이 시작된 이유는 최
강 교수를 뽑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냥 멈추다니.
“케이, 우리가 잘못한 건 알지만 이 건은 네가……”
“아니, 너희는 손 떼.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이 동아리를 맡는 게 아니라 더는 유림이 동아리 쟁탈전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는 거야. 덧붙여 이 때문에 생길 2차 피해도 막는 거지.”
그 말에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느긋하고 태평함의 대명사인 덴 케이였지만, 그 누구보다 고집 있고 무서운 것도 바로 그였다. 거기다 그가 내린 명령은 거진 절대적이라 누가 따진다 해서 바뀔 내용이 아니었다. 그것이 클레이즈 이사장이 가진 권력이었다.
결국, 담당 교수를 포기한 채 더는 한유림 쟁탈전이 생기지 않도록 뒤처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아쉬움을 토해내며 학생들을 바라봤다.
디하르의 연애를 지켜보고 싶었던 리리아와 하민이 죽도록 걱정되는 하진, 그리고 재미난 걸 빼앗겨 버린 듯한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 해우와 히야스였다.
그때 가만히 서 있던 세룬이 케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덴 케이, 그럼 유림이네 동아리 담당 교수 누가 해요?”
“…….”
모두의 시선이 케이에게로 모였다. 이는 유림을 비롯한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케이는 가볍게 흠- 하고 침음성을 내뱉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 * *
클레이즈 제6번 의자의 주인이자 여우 눈이 매력적인 교수 ‘진유’는 작은 나무집에 들어와 있었다.
혼자 살기에 딱 좋아 보이는 아담한 집은 작은 거실과 큰 방 그리고 창고를 겸한 다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거실엔 작은 나무 식탁과 의자, 그리고 편히 쉴 수 있는 2인용 소파가 자리 잡고 있었고,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하는 방에는 큰 침대와 작은 좌식 책상 하나만이 휑하니 놓여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가구들이 지나치게 간소했다.
그는 부엌에 다가가 개수대의 수납장과 선반들을 하나씩 열어봤다. 뭘 먹고 살았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축적된 음식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거라곤 장류가 전부였다. 음식물을 담아놓는 상자도 싹이 난 고구마 세 개가 전부였다.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빈집이거나 아니면 주인이 제법 오랜 시간 출타한 것으로 느껴질 법한 분위기였으나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방은 어수선했지만, 물건들은 깨끗한 상태였고 주위에 갖춰진 장작들은 자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들이 대부분이었다. 더욱이 쌓인 먼지를 봤을 때 사람이 떠난 집은 아니었다.
진유는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미묘할 정도로 조용한 집과 적은 양의 가구들. 고작 몇 권 있는 책도 집주인의 취향을 알 수 없는 들쑥날쑥한 분야의 책이었다.
분명 여자애가 혼자 산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치곤 지나치게 휑했다. 화사하거나 아기자기한 장식물은커녕 그 흔한 인형조차 없었다. 그뿐 아니라 옷장 안에 든 몇 벌 안 되는 옷도 다 투박했다.
한편으론 누가 일부러 꾸며놓은 것 같았다. 오죽하면 먼지가 잔뜩 쌓인 캄캄하고 지저분한 창고가 더 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진유는 혹시 숨겨둔 방이 있을까 싶어 샅샅이 뒤지고 늄까지 이용해 추적해 봤지만 드
러나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이런 곳에 살고 있었단 건가?
그는 다시금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역시 걸리는 건 없었다.
이 집은 누차 강조하듯 지나칠 정도로 가구 수가 적었고, 그나마 있는 거라곤 작은 지게와 비녀로 추정되는 액세서리, 그리고 부엌 옆에 자리한 이상한 항아리 두 개가 전부였다.
아무리 뒤져도 뭐 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다시 방을 살펴야 하나 고민했다. 그때였다. 울림과 함께 통신구가 통신을 알려왔다.
클레이즈 밖에선 키르가 제힘을 잃어 사용할 수 없었기에 그 대신 뭉툭한 회색의 통신구를 들고 온 진유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연락을 받았다.
회색이었던 통신구가 노란빛을 뽐냈다.
[진.]덴 케이였다.
“네, 케이. 무슨 일이시죠?”
[밖의 일은 순조롭나?]그 말에 진유의 눈썹이 가볍게 들썩였다. 그가 입술을 핥은 뒤 입을 열었다.
“흐음- 네, 아마 다 끝난 것 같습니다. 그보다 무슨 일이죠?”
[네가 해야 할 일이 생겼어.]내가 해야 할 일이라니?
진유는 눈을 가늘게 뜨며 통신구를 바라봤다. 그곳에선 계속 덴 케이의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혹시 더 들러야 하는 곳이 있는 건가? 아니면 조달해야 할 물건이라도?
단 한 번도 추가로 일을 시킨 적이 없던 케이였기에 진유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통신구를 바라봤다. 얼마 안 있어 케이의 목적이 들려왔다.
[동아리를 맡아줬으면 한다.]“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멍청한 반문이 튀어나왔다.
동아리라니?
황당하다 못해 놀랄 만한 말에 당황한 진유는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전 딱히 동아리를 맡을 생각이 없는데요? 다른 교수님이 맡으면 안 되는 건가요.”
[안 돼. 네가 해야 해.]어째서?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차마 물어볼 수도 없었다. 클레이즈는 덴 케이가 곧 법이 아니던가.
그는 가는 눈을 얇게 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죠. 그보다 웬 동아리예요?”
[쓸데없는 일이 빚어낸 쓸모없는 결과물이지.]“뭐죠, 그 쓸데없는 설명과 쓸모없어 보이는 동아리는. 하기 두려워지는 동아리네요. 무슨 장점은 없는 건가요?”
[음, 최강 교수의 자리를 얻게 될 거야.]“네?”
최강 교수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진유는 덴 케이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 뒷말은 해줄 생각이 없는지 별도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진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알겠습니다. 자세한 건 학교에서 듣도록 하죠.”
[그래.]그 말을 끝으로 통신구의 불빛이 사라졌다.
진유는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된 것 같아 작게 투덜거리며 집을 나섰다. 그러다 문뜩 벽에 쓰여 있던 낙서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현관문에서 약 20㎝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낙서.
키가 자랄 때마다 표시한 것인지 짧게 그어진 선과 옆에 적혀 있는 날짜는 진유가 잊고 있던 동심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 글귀를 읽었을 때 저도 모르게 웃고만 진유였다.
-유림이 키 발전 상황. 딸내미 빨빨리 크렴. 너, 인간적으로 너무 작다.
재밌는 부녀네 하고 말이다.
===============
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