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66
제 66 화
데몽은 거만하게 다리를 꼰 채 방바닥에 자릴 깐 세 사람을 바라봤다.
하나는 자신의 룸메이트인 레이먼이었고 다른 두 사람은 자신의 소꿉친구인 테오와 륜이었다.
그들은 데몽의 방에 모여 가벼운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걸고 있는 상품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잘사는 집 아들임을 증명하듯, 세 사람은 평범한 사람은 꿈도 못 꿀 값비싼 물건들을 칩 삼아 게임하고 있었다.
테오야 장군의 아들이고 륜이야 외조부가 준 재산이 많아 부자인 건 알았지만, 설마 레이먼이 그 두 사람 못지않게 부자일 줄이야.
데몽은 평민의 석 달 월급은 돼 보이는 물건을 픽픽 넘기는 세 사람의 모습에 미간을 구겼다. 제들 딴에는 가볍다곤 하지만, 결론이 어떻든 평범한 사람을 대표하는 데몽에게 있어 그들의 놀이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데몽이 안경을 고쳐 쓰며 낮게 말했다.
“이보게, 친구들.”
“응?”
“왜?”
“어여?”
그 음산한 질문에 세 사람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세 쌍의 눈이 데몽을 향해 있었지만, 카드를 섞는 륜의 손이나 시계를 푸는 레이먼의 손만큼은 멈춰지지 않았다.
“하-”
데몽의 입을 타고 한탄의 한숨 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제 너희 방으로 좀 가지?”
“여기가 내 방인데?”
“넌 좀 닥치고, 거기 둘. 이제 좀 꺼져. 금요일 저녁에 남의 방에서 뭐 하는 거야?”
데몽은 레이먼에게 짧게 경고한 후, 테오와 륜을 향해 눈총을 날렸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금요일 저녁이니까 여기 있어야지.”
“맞아. 금요일 저녁이잖아.”
“그럼 니들 방에 가서 놀아. 왜 여기서 노는데?”
“너 때문에 여기 있는 거잖아.”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너 요즘 학생회 때문에 바빠서 주말 말곤 마땅히 놀 시간도 없잖아.”
데몽은 테오의 말에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요즘 많이 바쁘긴 했다. 학생
회 일이 생각보다 많아 정신이 없었고, 그 외에도 개인적인 공부 때문에 늘 도서관이나 학생회실에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랬기에 더 쉬고 싶단 생각이 간절했다.
“후- 알았어, 그럼 내일 놀자. 지금은 너무 피곤하니까.”
“싫은데.”
“싫어.”
그럼 뭐 어쩌자고.
데몽은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담았다. 그때 꺼져 가는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것처럼 레이먼이 눈치 없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애들 내쫓지 마. 네가 안 되면 내가 놀아주면 되잖아. 여기 내방이기도 하거든?”
“…….”
데몽의 이성이 쨍그랑하고 깨졌다.
아, 결정했어. 저 녀석들을 다 싸잡아 죽이는 거야. 그래야 내가 좀 쉴 수 있겠지?
그가 후후후하고 음침하게 웃어 보였다. 음험하다 못해 살기가 잔뜩 섞인 웃음이었다.
그렇게 그가 그들의 도박판을 뒤집어엎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가만있던 륜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일 도서관 몇 시까지 열더라?”
“저녁 8시 아냐?”
“나 10시까지라고 들었는데?”
세 사람의 대화가 금요일에서 도서관으로 빠져 버렸다. 데몽은 갑자기 등장한 도서관에 하려던 것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논다던 애들이 왜 갑자기 도서관이란 건실한 주제를 떠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갑자기 웬 도서관?”
“책 빌려야지.”
“책 빌리러 가지.”
“책 빌리려고.”
짜기라도 한 듯 세 사람이 똑같은 이유를 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에 데몽의 의문이 더 깊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 책이라면 빨간책밖에 모르는 테오와 만화책밖에 모르는 륜, 그리고 책을 많이 읽긴 하지만 어지간해선 사서 보는 것이 주의인 레이먼이 아니던가.
그런 세 사람이 왜 책을 빌린단 걸까.
“왜?”
데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세 사람의 얼굴에 경악이 내려앉았다.
륜은 섞고 있던 카드를 떨어트렸고 테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으며 레이먼은 데몽을 향해 삿대질했다.
왜 저렇게 경악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표정이 너무나 노골적이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데몽은 세 사람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인상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데몽, 진짜 몰라?”
“뭘?”
그리고 그 질문에 레이먼이 보기 드물 정도로 정색하며 반문했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그니까 뭘.”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뻣뻣하게 굳은 세 사람은 입만 뻐끔거린 채 서로를 바라봤다. 이윽고 가장 경악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륜이 입을 열었다.
“우리 다다음 주 월요일에 중간시험 보잖아.”
그리고 그 말에 보기 드물 정도로 멍청한 표정을 짓고만 데몽이었다.
* * *
‘미친 짓이다.’
유림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그거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한 것은
‘아슈팔은 정말 슈팔 같은 인간이다’였다.
아무리 다르게 보려 해도 정말 미친놈이란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어떻게 아직도 팔팔하지? 난 죽을 거 같은데!
미로는 유림이 생각한 것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웅장한 크기를 뽐내듯 엄청난 넓이를 자랑했고, 어떤 특별한 장치라도 되어 있는지 한쪽 벽을 짚고 아무리 가도 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중간에 설치된 함정이었다.
갑자기 땅이 꺼지질 않나, 벽에서 뭐가 튀어나오지 않나. 한번은 늪 같은 곳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었다. 그뿐만 아니라 종종 이상한 목각 인형이 등장했는데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눈으로 쫓아가기 힘들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슈팔이 유림이 다치지 않도록 가드를 쳐줬다는 건데, 문제는 단순히 도와주기만 할 뿐, 절대로 앞장서거나 함정을 처리해 주진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움직이는 것은 오직 유림이 위험하다 싶을 때뿐이며, 그것이 아니면 그냥 자기가 함정에 걸릴 때였다.
하여튼 결론을 말하자면 유림은 저 슈팔스러운 아슈팔과 미로를 돌고 있었다.
그것도 무려 세 번이나 말이다.
제길, 감자랑 고구마를 왜 먹이나 했더니 이래서였어.
“후아…… 좀만 쉬면 안 돼요?”
유림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내뱉으며 물었다. 그러나 아슈팔은 그 말에 그냥 서 있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평온한 표정으로 유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숨도 안 차냐.
자그마치 다섯 시간 동안 미로 속에서 계속 뺑뺑 도는 짓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슈팔은 멀쩡했다.
유림은 그를 감탄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더욱이 그의 팔찌는 유림을 돕느라 더 많은 늄을 사용했음에도 아직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자신은 세 번밖에 안 썼는데도 벌써 노란 빛을 띠고 있는데.
뭐지? 대체 뭔 기준으로 색이 변하는 걸까. 도통 감이 안 서네.
유림은 턱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사고도 미로에 빠진 것 같았다. 뭐 하나 시원한 게 없었다.
팔찌도 팔찌였지만 깃발도 문제였다. 유림은 다섯 시간이 넘도록 깃발의 깃도 보지 못한 상태였다. 거기다 미로가 어찌나 넓은지 제 위치를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마음 같아선 벽을 다 뚫어버리고 싶었으나, 팔찌가 어디까지 버텨줄지를 모르니 늄 또한 맘대로 쓸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몇 시간의 고생으로 함정을 빠져나오는 속도가 눈에 띌 정도로 빨라졌다는 거? 하지만 그것도 큰 장점이 되진 못했다.
유림은 자신의 손에 채워진 팔찌를 바라봤다. 너무나 거슬렸다.
늄을 어느 정도 사용해야 팔찌가 다 다는지 알 수가 없어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고, 그러자고 팍팍 쓰자니 고문에 가까운 극기 훈련이 두려워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는 유림은 그냥 생각을 포기하고 단순하게 움직이기로 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막대기를 다잡은 후, 깃발을 찾아 뛰기 시작했다.
함정, 목각 인형, 함정, 목각 인형, 입구로 귀환, 함정, 목각 인형, 함정, 목각 인형, 입구로 귀환.
무한 반복의 수업. 그리고 유림이 깃발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 열 시간이 지난 후의 이야기였다.
* * *
“은하!”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은하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푸른색의 긴 생머리를 흩날리는 루아가 예의 그 예쁜 미소를 지으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은하는 두 손을 붕붕 흔들며 그녀를 반겼다.
“루아!”
한달음에 은하의 옆까지 달려온 루아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옆에 서서 흘러내린 머릴 쓸어 넘기며 물었다.
“식당 가는 거지? 나도 같이 가.”
그리고 뒷짐을 지며 작게 투덜거렸다.
“기숙사는 다 좋은데 밥 먹으러 다니기가 귀찮다니까. 방까지 배달해 주면 좀 좋아. 안 그래?”
“하지만 그러면 맛난 걸 골라 먹을 수 없잖아. 또 거기서 먹는 게 뒤처리도 쉽고.”
“그건 그래.”
확실히 클레이즈의 식당은 여느 파티나 유명 식당 부럽지 않은 음식과 메뉴를 제공했다.
루아는 고개를 끄덕이다 무언가 허전하단 것을 느끼곤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왠지 평소보다 조용하다 싶었는데, 아무리 봐도 유림이 안 보였다.
“유림인?”
“몰라.”
예상외의 대답에 루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몰라?”
“어제 갑자기 나가서 지금까지 안 왔어.”
“지금까지?”
루아가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 1시 22분.
해가 뜨다 못해 머리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까지 늦잠 자는 것도 아니고 안 들어왔다고?
“어디 갔는지 아예 모르는 거야?”
“응.”
“몇 시에 나갔는데?”
“음…… 8~9시쯤이었을걸?”
“헐, 근데 지금까지 안 들어온 거야?”
클레이즈의 특성상 밤에 불려 나가는 애들이 있긴 했다.
워낙 동아리 활동도 잦고, 교수들과의 교류도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나가서 대낮이 되도록 들어오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지간해선 교수와 선배들이 돌려보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다른 이도 아닌 유림이었다. 빨빨거리길 좋아하는 레이먼이나 부지런한 디하르였다면 일이 있겠거니 하겠지만, 유림은 귀찮아서 침대 밖으로도 잘 나가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런 애가 이 시간이 되도록 안 돌아오다니…….
“연락은 해봤어?”
“해봤는데, ‘으악?! 으힉?! 은하! 나중에 연락해!!’ 하고 끊었어.”
생생하게 재연하는 은하의 말에 루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으악?! 으힉?! 은하! 나중에 연락해!!’라니.
혹시 매주 한 번씩 하는 담당 교수 면담 일인가? 하고 생각해 봤지만 그건 아닌 듯싶었다. 루아가 기억하기로 그건 다른 요일이었고, 그냥 수다나 떨다 오는 게 다라고 했으니까.
화창한 토요일. 그것도 유림이 가장 좋아하고도 좋아하는 금요일 밤과 토요일 오전에 말도 없이 사라지다니.
뭐지?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뭐 특별한 말은 없었고?”
“그냥 별일 아니라고 먼저 자라던데?”
별일 아니라고 먼저 자?
루아는 유림이 남긴 말을 곱씹으며 그녀의 행보를 추리했다. 그러나 딱히 유림이 갈만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가는 곳은 기숙사와 학교, 그리고 이사장님과의 면담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유림이 괜찮다고 말했고, 연락도 했으니 크게 위험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닌 듯싶었다.
근데 진짜 얜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루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은하의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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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