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67
제 67 화
졸려 죽을 것만 같았다.
유림은 바닥에 디비져 무거운 눈꺼풀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냥 이대로 자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손에 잡혀 있는 깃발이 사라질 것만 같아 잠들 수가 없었다.
그때 유림의 몽롱한 정신을 가르고 히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유림, 살아 있냐?”
살아 있냐니. 죽은 걸로 보입니까?
저 빌어먹을 교수의 멱살이라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큭큭큭. 살아 있는 시체군. 그래도 굉장하네. 단 한 번도 팔찌의 색을 백색으로 만들지 않았어. 그건 아슈팔도 힘들었는데 말이지.”
히야스의 말에 유림에게 손부채질을 해주고 있던 아슈팔이 답했다.
“전 그냥 부쉈었죠. 폭력은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왜 그냥 부쉈다는 말이 폭력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과 이어지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너무 피곤했기에 따지는 건 뒤로 미루기로 했다.
“졸려요…….”
“자.”
“정말요?”
유림은 두 눈을 간신히 뜨며 히야스를 올려다봤다. 그가 그 질문에 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날카로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어차피 저녁 먹고 또 할 거야.”
망할. 나 자퇴할 거야.
유림은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참으며 그대로 엎어졌다.
땅바닥에서 시린 한기가 올라왔지만, 그것보단 밀려오는 잠이 먼저였다.
아… 딱딱한 데서 자면 허리 아픈데. 아니다, 차피 죽어나는 몸뚱이, 어디서 자든 큰 상관없겠구나.
유림은 눈을 감고 온몸에 힘을 풀었다. 피곤을 동반한 깊은 수마가 덮쳐 오고 있었다.
“유림아, 여기서 자면 감기 걸린다. 적어도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서 자.”
“……그냥 여기서 잘래요.”
“감기 걸려.”
“걸리라죠……”
대답은 제대로 하고 있으나 목소리는 이미 잠에 잠겨 있었다.
결국, 히야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슈팔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곤 그대로 쭉 잡아당겨 단번에 두꺼운 솜이불로 변형시켰다.
시린 땅바닥에 푹신한 솜이불이 떨어졌다.
아슈팔은 자빠져 있는 유림을 끌고 와 이불 위에 올리더니 그대로 둘둘 말았다.
빙글빙글. 마치 김말이를 만든 것처럼 푹신한 이불에 쏙 들어가 모습을 숨긴 유림. 그 모습이 꽤 답답해 보였지만 무심한 두 남자는 그 사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슈팔이 유림을 둘러업었다.
“이거 기숙사로 가져가면 되는 거죠?”
“음…… 아니다. 그냥 내 연구실로 옮겨.”
연구실?
그 말에 아슈팔이 히야스의 연구실을 떠올렸다.
그의 방은 돼지가 친구를 하자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더러웠다. 방의 구석엔 곰팡이가 대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고 바닥엔 이상한 약병들과 고철들이 제집처럼 뒹굴고 있었다.
지저분하다 못해 오는 이들 모두가 청소하고 싶어 날뛰는 장소. 또 깔끔하고 평온한 걸 좋아하는 아슈팔이 정말로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장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슈팔은 보기 드물게 침체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연구실이요?”
“그래. 일어나면 밥 먹이고 바로 끌고 와야 하니까 차라리 거기가 편해. 어차피 얘 일어나면 기숙사 식당도 닫을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거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내 연구실이 뭐?”
“……제 생각에 썩 좋은 환경이 아닌 거 같은데요.”
“걱정하지 마. 그 꼴로 봐선 거기서도 잘만 잘 거야.”
유림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그녀를 그곳에 두기 위해 자신이 간다는 사실이 썩 내키지 않아 한 말이었으나, 히야스는 알아듣지 못했다. 결국, 이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 귀찮았던 아슈팔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탁하지.”
아슈팔은 히야스에게 가볍게 묵례한 뒤 자리를 이동했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혼자 지하에 남게 된 히야스는 주위가 차츰 조용해지자 뒤를 돌아 미로를 바라봤다. 유림과 아슈팔이 열심히 날뛰었던 미로가 제 존재를 뽐내듯 그 자리에 고고하게 남아 있었다.
히야스는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 순간 공기가 공명하는 소리가 지하를 울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미로의 모습이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얼마 안 있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광활한 지하엔 거대한 연무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7호.”
히야스의 부름에 안젤리카 7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아버지.」
“이곳에 있는 모든 늄의 흔적을 지워라.”
「모두 다 말입니까?」
“그래. 내 것도, 아슈팔 것도, 유림이 것도. 그리고 네 것도.”
「알겠습니다.」
안젤리카 7호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좀 전까지 미로의 입구가 있던 곳으로 가 땅바닥에 두 손을 올렸다. 순간 그의 늄과 대기에 섞여 있던 늄의 잔상들이 섞이더니, 차츰 녹아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젤리카 7호가 주위의 모든 흔적을 지운 것을 확인한 히야스는 그와 함께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이윽고 연무장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 * *
데몽과 륜, 테오, 그리고 레이먼은 도서관에 와 있었다.
역시 중간시험이 다가오고 있음을 가르쳐 주듯 많은 학생이 공부하고 있었다.
클레이즈의 도서관은 크게 열람실과 서고로 나누어졌다. 정중앙에는 둥근 나무 책상들로 이루어진 휴게실이 있었고, 그 주위론 서고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오오오-”
“겁나 큰데?”
“클레이즈는 클레이즈구나.”
데몽을 제외한 세 사람이 감탄 섞인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실로 셋 다 도서관은 처음이었다.
특히 레이먼은 웅장하리만큼 거대한 도서관과 시야를 가득 메울 만큼 빼곡히 채워져 있는 책을 보며 흥분했다.
“우리 학교 도서관이 이렇게 넓었구나!”
목소리에서 그가 얼마나 들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데몽은 입꼬릴 말며 장난치듯 말했다.
“뒤쪽에 더 있어.”
그 말에 세 사람의 눈이 크게 떠졌다.
“대박. 그 정도로 커?!”
“어. 뭐, 그쪽은 4클래스랑 교수님들밖에 못 들어가는 곳이지만.”
“가보고 싶다.”
레이먼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모습에 데몽은 학생회는 클래스 상관없이 그쪽에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함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일 레이먼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같이 가자고 떼를 쓸 것이 안 봐도 뻔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4클래스 되면 들어가라.”
“빨리 진급해야겠다.”
의욕이 가득 찬 눈으로 주먹을 꽉 쥐는 레이먼의 모습에 데몽은 다시금 그 사실을 함구하기로 마음먹었다.
“난 서쪽 서고로 가야 하는데, 너흰?”
데몽이 레이먼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륜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말에 모두 자신이 찾아야 하는 책을 확인했다.
“나도 서쪽.”
“난 동쪽.”
“나도 동쪽인데!”
얼추 가야 할 곳이 확인된 그들은 여기서 잠깐 갈라지기로 했다.
“그러면 나랑 테오는 서쪽으로 갈게.”
“난 데몽이랑 동쪽으로~”
“좀 있다 중앙 테이블에서 보자고.”
“알았~ 으.”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각자 자신이 필요한 책을 찾기 위해 흩어졌다.
테오와 륜이 서쪽으로 빠지고 데몽은 레이먼과 함께 동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책들이 빼곡히 쌓여 있는 동쪽 서고의 모습에 레이먼이 실실 쪼개며 데몽을 뒤따랐다. 가는 중간중간 책장의 난간 다리를 툭툭 건들여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몽몽, 넌 여기 자주 와?”
“최근 들어 좀. 그게 아니더라도 학생회 때문에 종종 오니까. 그보다 그 몽몽 좀 그만하지?”
“왜 귀엽잖아, 몽몽.”
개 짖는 소리 같잖아.
데몽은 미간을 팍 구기며 앞장섰다.
레이먼은 나이를 어디로 먹었는지 열아홉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아이 같았다. 박은하수야 워낙 맹탕에 바보 같아서 그렇다 치지만 똑똑한 녀석이 저렇게 행동하니 좀 거북했다.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애들은 다 저런가?
은하의 엄청난 재능도 그렇고 레이먼의 쪽빛 눈동자도 그런 것을 보니 어쩌면 천부적으로 타고난 녀석들의 특징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원래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가. 재능을 준 대신 머리에 들어가야 할 기본적인 것들을 뺀 것이다.
‘……공평이고 나발이고 그게 뭐가 중요하냐. 귀찮은 게 문제지.’
데몽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쯤에서 흩어지자.”
“어? 그래도 돼?”
“안 될 건 또 어딨어. 거기다 따로 찾는 게 더 빨라.”
데몽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먼을 뒤로한 채, 서둘러 제가 찾고자 하는 부분으로 이동했다.
어쩌다 저렇게 귀찮은 녀석과 한 방을 쓰게 된 건지…….
딱히 레이먼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귀찮은 건 사실이었다.
밝은 곳이 아니면 자지도 못해, 혼자 있는 건 겁나 싫어해, 그뿐 아니라 미묘하게 똑똑하고 운이 좋아서 더 귀찮았다.
그래도 뭐 애는 착하니까…….
데몽은 그렇게 자위하며 고개를 들어 끝없이 펼쳐진 책들을 바라봤다.
굳이 관련 책들을 다 빌려갈 필욘 없었기에 쓸 만한 것을 몇 권 추려가기로 한 데몽은 괜찮아 보이는 책 열두 권을 꺼내 바닥에 쌓은 뒤,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한 권씩 펼쳐 목차를 보고, 책장을 넘기며 내용을 대충 살폈다.
클레이즈는 도서관도 컸지만, 책의 질도 좋았다. 졸업을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 있는 책을 다 읽고 졸업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쓸 만한 세 권의 책을 추려낸 데몽은 다른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놓았다.
그때였다.
“어라, 그때 그 후배네?”
어디선가 들어본 익숙한 목소리가 데몽의 귀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훤칠한 키의 사내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옅은 갈색의 단정한 머릿결과 밝은 초록색 눈동자. 피부는 살짝 황색을 띠고 있었는데 혼혈이 아니면 남쪽 출신의 사람 같았다.
누구지?
“잘 지냈어?”
데몽이 그의 정체에 대해 생각할 때, 청년의 목소리가 생각을 가르고 들려왔다.
목소리는 귀에 익었으나 데몽이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더욱이 넥타이에 달린 잎 세 개짜리 배지는 그가 3클래스임을 증명해 주고 있었는데, 데몽이 아는 선배 중 그와 같은 얼굴의 사람은 없었다.
“누구……?”
데몽은 미간을 찌푸리며 앞의 남자를 살폈다. 그러다 문뜩 그의 목에 시선을 고정했다. 정확히는 태양 모양의 투명한 보라색 펜던트를 말이다.
데몽은 저 펜던트를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바로 이 도서관에서.
“아……!”
그제야 그가 누군지 떠오른 데몽이 입을 열었다.
자신을 도와줬던 선배, 그리고 같이 왔던 금발 친구에 의해 돌아갔던 선배.
그제야 외워두었던 이름이 떠올라 그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데몽이 아닌 제삼자의 입에서 들려왔다.
“샨……?”
데몽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당혹 어린 목소리.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레이먼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데몽의 앞에 있는 소년, 아니 샨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런 레이먼을 향해 ‘샨’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레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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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