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68
제 68 화
도서관 동쪽 후문에 자리한 인적 드문 정원. 바람만이 적적하게 흘러가는 그곳에서 데몽은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서관에서 책 고르느라 바빴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하고 있는 샨과 레이먼을 바라봤다.
정말 놀랍게도 저 두 사람은 아는 사이였다. 그러나 마냥 좋게만 넘길 사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레이먼이 다짜고짜 샨의 멱살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란 사실에 놀라야 하는 건지, 아니면 레이먼이 누군가의 멱살을 끌고 나왔다는 점에 놀라야 하는 건진 잘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썩 좋은 분위기는 아니란 거였다.
데몽은 안경을 고쳐 쓰며 최대한 기척을 죽였다. 그리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표정이 왜 그래?”
귀에 들려오는 샨의 부드러운 어조. 그 물음에 레이먼이 입술을 짓씹었다.
“…….”
“레이.”
“시끄러워.”
낮게 깔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적의가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그러나 샨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볍게 앞머리를 쓸어 넘길 뿐이었다. 오히려 뒤에 숨어 있던 데몽이 놀라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저게 정말 내가 알고 있는 레이먼이 맞다고?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의심될 정도로 평소와 다른 행동, 다른 표정 그리고 다른 목소리였다.
“후-”
샨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고갤 들었다.
레이먼은 지금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샨이 사라진 것은 유림이 사라지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갑자기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 샨. 그리고 그를 따르듯 없어진 유림.
그 때문에 레이먼과 루아, 그리고 디하르는 아무런 말도 없이 황망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걱정이 됐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 걱정은 차차 시간이 흐를수록 화가 되어 레이먼을 잡아먹었다.
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건지 이해되지 않았고, 그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달랠 수 없었다. 그리고 계속된 화는 마치 익숙해진 것처럼 낙담이 되어 남아 있게 되었다. 우습게도 레이먼은 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체념을 했을 때에야 조금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그들을 사랑했듯 자신들을 사랑한 그들이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을 거라고.
그래서 레이먼은 유림을 다시 만났을 때, 루아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살아 있단 사실에 고마워했고, 이런 식으로라도 만났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하지만 샨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저와 우연히 만났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한 낯짝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레이먼은 샨이 저를 비롯한 모두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모른척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레이먼은 그 태연함에 화가 났다.
속이 뒤틀렸고, 잊고 있던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 그렇게 멀쩡해? 왜 놀라지 않아?
알고 있었으면서 왜 만나러 오지 않은 거야? 너에게 우린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아?
“더럽게 치사한 자식. 너 진짜 짜증 나.”
낮게 지껄이는 욕설엔 지난 세월의 설움이 담겨 있었다.
“갑자기 사라져 놓고, 이렇게 나타나냐? 그것도 말도 없이?! 뭘 잘했다고 그렇게 태평해? 넌 유림이보다 더 나쁜 새끼야. 차라리 걔처럼 놀라기라도 해! 그편이 덜 비참하다고!!”
분노를 가득 담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건 숨어 있던 데몽이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그 화를 받고 있는 샨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지금 레이먼의 모습은 그저 어린애가 화풀이를 하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레이, 화났어?”
“아, 또! 또 애 어르듯 해! 나 지금 진짜 화났다고!”
샨이 작게 키득거렸다. 그리고 그 태도에 레이먼의 미간이 구겨진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샨!”
“알았어. 미안 미안. 하지만 오래간만에 보니까 기분 좋아서.”
“그런 애가 이렇게 만날 때까지 꼭꼭 숨어 있냐?!”
레이먼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너…… 어떻게 지낸 거야?”
“걱정하지 마. 생각보다 잘 지냈어. 몇 년 전부턴 요한이랑 같이 있었고.”
요한.
그 이름에 데몽의 눈이 가볍게 떠졌다. 왠지 귀에 익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딱히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도서관에서 샨을 부르던 금발의 이름이 요한인가?’
혹여 그때 들었던 이름인가 싶어 생각해 봤지만, 그의 이름이 언급된 기억은 없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귀에 익지?
데몽은 눈을 흘겨 레이먼들을 바라봤다.
그 요한이란 이름을 레이먼도 잘 알고 있는지, 적잖게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틈으로 평소의 어벙한 얼굴이 다시 드러났다.
“뭐……? 잠깐, 그렇다면 녀석도 여기 있어?!”
“응, 여기에 입학했어.”
젠장, 요한 이 빌어먹을 자식. 갑자기 여행 간다고 몇 년째 연락이 안 되더니만 다 뻥이었어!
“으으- 요한 이 자식 진짜!”
레이먼은 짜증을 표출하듯 머리를 헤집었다.
“아- 열받아. 너나 요한이나 진짜 짜증나! 너네 우리가 여기 있는 것도 다 알고 있었지?”
“응.”
“근데 왜 안 만나러 온 거야? 진짜 일부러 그런 거야?!”
“…….”
낮은 침묵.
그 침묵이 긍정보다 더한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을 파악한 레이먼이 이마를 쓸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림이 그랬듯이 샨도 자신들이 먼저 발견하지 않으면 나타날 생각이 없었던 거다.
제기랄. 더러운 똥고집들!
“일단 요한부터 불러. 아니, 애들 다 부르자. 다 같이 만나서 이야기…….”
“아냐, 레이.”
샨은 키르를 꺼내는 레이먼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그리고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은 안 돼.”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레이먼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직은 안 돼? 왜?”
“내가 나중에 직접 나타날게. 그니까 그때까지만 참아줘.”
그때까지라니?
레이먼은 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치 않은 그의 말에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한편으론 체한 것 같았다. 때문에 묻고 싶었다. 왜 만나는 것을 미루느냐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고 말이다.
그러나 레이먼은 그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샨의 표정이 너무나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묻는 것만으로도 미안할 것만 같은 표정.
레이먼은 다시금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소리가 되지 못한 질문이 입안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
결국, 레이먼은 하고픈 질문을 목구멍 아래로 삼켜 버렸다.
그래. 어차피 클레이즈 밖으론 나갈 수 없으니까. 전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좀만 더 기다려 주자.
가까스로 스스로를 설득한 레이먼이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단 투로 말했다.
“하- 알았어. 대신 네 통신 번호 넘겨.”
“하하하. 레이 치밀하네.”
“당연하지. 요한 것도 넘겨. 나중에 따로 연락해야겠어.”
“알았어.”
레이먼의 요구에 샨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키르를 받아 들었다. 그는 레이먼의 키르에 자신과 요한의 통신 번호를 입력했다.
레이먼은 그런 샨을 빤히 바라봤다.
어릴 적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자신의 친구. 물론 그때에 비해 키가 쑥쑥 컸지만 그렇다고 분위기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 특유의 편안한 인상은 과거의 시간이 지금과 이어졌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레이먼이 계속 샨을 빤히 쳐다보자, 그 시선을 느낀 그가 살짝 웃으며 물어왔다.
“왜 그렇게 쳐다봐?”
“응?”
“자꾸 쳐다봐서. 뭐 묻었어?”
“아니, 그냥 좀 신기해서. 네 외모가 크게 변한 것도 아닌데 왜 못 알아봤을까. 내가 네 얼굴을 까먹은 것도 아니고 또 잊고 살았던 것도 아닌데…….”
“그래?”
“그렇잖아. 입학시험 때도 못 보고 입학하고 나서도 계속 못 봤다니……. 왜 몰랐지? 그게 가능한가?”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아니, 어떻게 단 한 번도 못 만난 걸까. 입학시험 때야 인원도 많고 정신없어서 그랬다고 치지만, 입학식이나 신입생 환영회 때 보지 못한 건 이해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거야?”
“만나지 못했던 게 당연한 거야.”
“엥?”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음표를 잔뜩 그리는 레이먼의 모습에 샨이 대답 대신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레이먼의 시선이 샨의 손을 따라 이동했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 정확히는 교복 재킷의 깃에 붙어 있는 배지를 발견한 순간, 동그란 두 눈이 호두알만큼 커졌다.
그의 가슴팍엔 다이아 잎 세 개의 배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3클래스를 의미하는 배지가 말이다.
“……에?”
레이먼은 샨과 배지를 번갈아 봤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지 바보 같은 표정이 얼굴에 걸렸다.
“샨, 이게 대체……?”
그리고 그런 레이먼을 향해 샨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 * *
고소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식욕을 자극하는 그 향에 유림이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뺨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제야 유림은 저가 이불 안에 감싸져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둘둘 말려서.
어째서 내가 이런 상태로 있는 걸까.
일단 탈출부터 해야겠단 생각에 몸을 굴려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따스한 햇볕이 눈가에 드리웠다.
아…… 눈부셔.
유림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머리가 몽롱했고 시야가 뿌옜다. 그래도 후각 하나만큼은 제구실을 했다.
유림이 코를 킁킁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배고파…….”
잠이 가시니 허기가 찾아오다니, 참으로 동물스러운 반응이었다.
“일어났어?”
유림이 한창 눈을 비비며 배고픔을 호소할 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아슈팔이 예의 평온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잘 잤어?”
“음…… 아마도요. 그보다 여긴 어디예요?”
“히야스 교수님 연구실.”
“…….”
“걱정하지 마. 이상한 곳 아니니까.”
유림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었는지 아슈팔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쉽게 풀릴 의심이 아니었다.
미친놈 집단인 클레이즈 교수 중 가장 미친놈인 히야스가 아니던가. 그런 그의 연구실이 평범할 리 없었다.
어…… 여기 있어도 되는 거야?
유림은 머리카락에 엉킨 비녀를 뺀 뒤, 손으로 다듬었다. 그리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다시 머릴 올려 비녀로 고정했다.
그걸 신기하게 보고 있던 아슈팔이 짧게 말했다.
“능숙하네.”
“하하하. 1, 2년 하는 게 아니잖아요.”
“몸은 괜찮아?”
아슈팔의 질문에 유림이 대답 대신 자신의 팔다리를 꾹꾹 주물렀다. 근육이 심하게 당기고,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아팠다. 움직일 때마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이 한편으론 막노동을 한 다음 날 같았다.
움직임에 따라 그악스럽게 비명을 질러대는 몸뚱이.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극도의 허기였다.
“배고파요.”
“그럴 것 같았어. 좀만 참아. 곧 교수님이 음식을 들고 올 테니까.”
유림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잠이나 깰 겸 주위를 둘러 방 안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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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