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69
제 69 화
회백색의 벽이 유난히도 매끈한 연구실은 북쪽에 거대한 창을 트고 있었다.
크기는 기숙사의 서너 배는 됐지만, 벽 한쪽에 자리한 상자와 이상한 고철 더미 때문인지 그리 커 보이진 않았다.
방의 중앙엔 긴 소파가 하나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엔 히야스가 종종 입곤 하는 백색의 가운이 있었고, 바닥엔 이상한 물체들이 질서 없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더러웠다.
자신과 은하도 깨끗한 성격은 아니었기에 적잖게 더러운 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곳은 그보다 더했다(적어도 은하와 유림의 방은 침대와 그 주위는 깨끗했다). 가장 불편한 건 퀴퀴한 공기였다. 환기가 안 돼서 그런 건 아니었다. 대체 뭔 짓을 해야지 이런 냄새가 나는 거지?
유림은 미간을 팍 구기며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대로 창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아니, 시키려 했다.
“정지.”
자신의 귀를 방해하는 저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유림이 뒤를 돌아 자신의 움직임을 방해한 이를 바라봤다.
거대한 냄비를 하나 들고 등장한 히야스. 그는 길게 뻗은 앞머리를 사과 꽁지마냥 깜찍하게 올려 묶고 있었다. 그 꼴이 뭔가 싶으면서도 꽤나 잘 어울렸다.
“창문 열면 안 돼요?”
“안 돼.”
“왜요?”
“바로 위층이 이즈네 연구실이거든.”
이즈네 교수님? 그게 왜?
이즈네라면 이 학교에서 가장 정상이고 착실한 교수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왜?
“걔랑 사이가 안 좋아. 여기서 떠들면 내려온다고.”
“아…… 네.”
별 시답잖은 이유가 다 있네.
유림은 뒷머리를 박박 긁으며 이 윗방에 있을 이즈네를 생각했다. 그때였다, 동아리 사건 때 겪었던 날카롭고도 냉정한 시선이 떠오른 것이.
오싹하고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눈초리. 유림은 저도 모르게 팔을 쓸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그 느낌에 기분이 찜찜해졌다.
젠장, 이거 트라우마 되겠네.
유림이 혀를 차며 창에서 몸을 떼자 히야스가 잘했다는 듯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와서 밥이나 먹어.”
“네.”
히야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한 유림은 비명을 지르는 몸뚱이를 끌고 비척비척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거대한 냄비, 그 주위에 앉은 세 사람.
유림은 미심쩍은 느낌에 불안한 눈길로 히야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환하게 웃으며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 안엔 푸짐한 고기 수프가 냄비 가득 차려져 있었다. 히야스가 준비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먹음직스러운 모습에 군침이 절로 넘어갔다. 그건 아슈팔도 마찬가지였는지 유림의 옆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히야스는 제자들을 향해 특유의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릇과 수저를 건넸다. 그런 뒤 먹어보라며 손짓했다.
유림이 조심스럽게 한술 떴다. 순간 저도 모르게 감탄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맛있다!”
“그치? 이래 봬도 취미가 요리란 말이지.”
전혀 안 어울리는 취미를 당당히 고백하는 히야스에 유림은 대충 고개만 끄덕여 주고 연신 숟가락을 놀렸다.
맛있다. 배고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맛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종종 해달라고 하는 건데.
“많이 먹어. 이거 먹고 또 수업이니까.”
“…….”
젠장, 그걸 꼭 지금 말해야 합니까?
유림이 숟가락만 쪽쪽 빨며 항의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게 또 웃겼는지 히야스가 킬킬거렸다.
“왜 그래, 싫어?”
“알면서 묻는 건 뭐예요? 그걸 꼭 지금 말해야 해요? 입맛 뚝 떨어지게.”
“큭큭큭. 그럼 치울까?”
“아, 치사하게!!”
“큭큭큭큭.”
저 더러운 성격으로 봤을 때, 치운다는 저 말은 분명 진담이었으리라. 유림은 히야스가 냄비를 가져가지 못하게 손잡이를 꽉 잡고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그 모습이 정말 웃겼는지 히야스가 포복절도했다.
유림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속이나 든든하게 채우자고 생각하며 잔뜩 퍼먹었다.
유림이 전투적으로 수프를 떠먹자 그것이 내심 신기했는지 아슈팔이 두 눈을 깜빡였다. 배가 고프다곤 했지만, 이 정도로 잘 먹을 줄은 몰랐다. 더욱이 유림은 세계에서 입맛이 가장 까다롭다는 사혈 출신이 아니던가(은하가 잘 먹는 건 그냥 걔가 잡식성이기 때문이다).
“유림이 생각보다 잘 먹는구나.”
“에? 뭐가요?”
“사혈 출신은 느끼한 거 잘 못 먹잖아. 그쪽은 구이가 발달해서 매콤하고 담백한 음식이 많지 않나?”
“오~ 잘 아시네요. 근데 저 순수 사혈 출신이 아니라서 이런 것도 잘 먹어요.”
“순수 사혈 출신이 아니라니?”
“어릴 땐 슈리넬에서 살았어요. 사혈에 간 건 열한 살 때였나? 그쯤 돼요.”
아슈팔의 눈이 보기 드물게 커졌다.
“레바리움(남 대륙) 출신이라고?”
“정확한 출신지는 몰라요.”
“어째서?”
“고아거든요. 그냥 슈리넬의 고아원에서 살았어요. 아마 슈리넬 출신이 아닐까요?”
“전혀 몰랐어. 그럼 다른 친구들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사혈에서 만난 거야?”
유림은 그 말에 아주 잠깐 고민했다. 아슈팔이 말하는 ‘다른 친구들’이 누굴 말하는지 가늠이 잘 안 갔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는 후배라곤 동아리에 관련된 세 사람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해 묻는 걸까?
“음…… 하민이는 클레이즈에서 만난 거고 은하는 사혈에서, 그리고 디하르는 소꿉친구예요.”
“소꿉친구?”
“네. 디하르뿐만이 아니라 루아와 레이먼이란 친구도 소꿉친구예요.”
“그럼 계속 연락했던 거야?”
“아뇨, 제가 사혈에 가면서 연락이 끊겼다가 클레이즈에서 다시 만나게 됐어요.”
그 말에 아슈팔이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럼 그 소꿉친구들을 클레이즈에서 다 만난 거야?”
“뭐, 전부는 아니지만요.”
“전부는 아니라니?”
“어릴 때 친하게 지낸 애들이 몇 있어요. 저 포함해서 여섯 명이었는데, 나머지 둘은 아직도 연락이 되지 않고 있어요. 좀 일이 있었거든요. 아마 지금은 하려 해도 안 될 거예요.”
“……그럼 그 두 친구는 클레이즈에 오지 않았어? 혹시 늄이 없는 애들이야?”
“그건 아닐 거예요. 그 두 녀석 중 하나가 우리 중 가장 월등했거든요.”
“그럼 어째서……? 아, 혹시 나이가 다른 건가?”
“아뇨. 한 명만, 그니까 그 월등한 친구만 한 살이 많았어요.”
유림은 아슈팔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나머지는 다 동갑이고요.”
* * *
데몽이 방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륜과 테오가 다급히 따라갔다.
“야, 데몽!”
“무슨 일인데?”
그의 뒤를 따르던 테오와 륜이 소리치며 물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묵묵히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조금 전, 도서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데몽이 갑자기 자신들을 찾아와 그대로 끌고 나왔다. 레이먼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오는 내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지만 데몽이 하는 거라곤 좋지 않은 표정으로 걷는 것이 전부였다.
데몽의 방에서 모였던 평소와 달리 잘 오지도 않던 륜과 테오의 방에 온 데몽은 건넛방과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그대로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늄을 이용해 방 밖으로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차단했다. 그 행동에 테오와 륜이 긴장한 것은 당연했다.
“히넨.”
“무슨 일이야?”
긴장 섞인 두 사람의 목소리에 데몽이 그들을 바라보며 낮게 지껄였다.
“제길.”
신랄한 독설과 사람을 향한 비판은 자주 쏟아냈지만 어지간해선 욕은 하지 않는 데몽
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오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흠칫 떨었다.
욕을 했어? 저 녀석이?
“무슨 일이야?”
“뭐야?”
급격할 정도로 차분해진 륜과 미간이 지나칠 정도로 깊게 팬 테오가 대답을 재촉했다. 데몽은 앞머리를 헤집더니 이내 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한유림뿐만이 아니었어.”
“뭐?”
“앞뒤 잘라먹지 말고 말해.”
한유림뿐만이 아니었다니. 이해가 안 가는 말에 륜과 테오가 물었다. 그러자 데몽이 소리치듯 목소리에 힘을 줘 말했다.
“가짜 초대장 받은 사람!”
“……!!”
순간 테오의 눈이 보기 드물게 커졌다.
그걸 받은 사람이 또 있었다고?
유림은 클레이즈의 가짜 초대장을 받았다. 데몽은 입학시험 도중 그걸 알게 되었고, 테오 또한 직접 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데몽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유림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고, 은연중 최악의 결심까지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사실을 잘 모르는 륜은 미간을 찌푸리며 둘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가짜 초대장이라니?”
륜의 물음에 테오가 흠칫하고 떨었고, 데몽이 아차 하고 혀를 찼다. 륜의 목소리가 더할 수 없을 만큼 차가워졌다.
“뭐야. 무슨 일인데, 나만 몰라.”
“……미안. 일부러 말 안 했어. 한 명 정도는 객관적인 시야가 필요했으니까.”
“그럼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알았어. 일단 설명해 줘.”
륜의 질문에 데몽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안경을 가볍게 고쳐 썼다.
“한유림은 클레이즈의 가짜 초대장을 받았어. 그것도 작년에 한 번, 올해 한 번.”
“작년? 작년은 나이가 안 될 텐데?”
“그니까 가짜인 걸 아는 거지. 하여튼 그랬어. 알게 된 것은 입학시험 때. 루아들하고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됐어.”
그 말에 륜은 유난히도 친근하게 말을 걸던 루아를 생각했다.
데몽의 말이 사실이라면 루아들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단 건가?
“그래서?”
“그래서 일단 이 이야기를 테오하곤 나눴어. 너는 좀 더 객관적으로 봤으면 해서 이야기하지 않았고.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해.”
“……음. 아냐, 이해했어. 근데 지금은 왜 이야기해?”
“앞서 말했듯, 한유림 말고도 가짜 초대장을 받은 이가 또 있었어.”
“누구?”
“샨.”
데몽의 말에 륜과 테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샨?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현재 클레이즈 3클래스에 있는 선배야. 전에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어. 분위기로 봐선 도서관 죽돌이. 문제는 그게 아니야.”
“뭔데?”
“동갑이야.”
“뭐?”
“주어 떼지 말고.”
“우리랑 동갑이라고.”
두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배라며. 근데 어떻게 우리랑 동갑이야.”
“그래. 그니까 작년에 한유림이 가짜 초대장을 받을 때, 그 샨이란 인간한테도 갔단 소리야. 다른 점이 있다면 한 명은 안 오고, 한 놈은 입학시험을 받으러 온 거고.”
“그게 가능해?”
“이론상 불가능해.”
데몽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볍게 툭툭 치며 말했다.
“문제는 지금 이론에서 벗어난 일들이 펼쳐졌단 거지. 그니까 지금부터 이론 외의 상황으로 생각할 거야.”
“어떻게?”
“우리의 목적을 최우선으로 잡는다.”
꿀꺽.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고, 유달리도 진중한 표정이 세 사람의 얼굴 위에 그려졌다.
그 정도로 그들에겐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클레이즈가 아무리 세계적인 대학이라 해도, 군인인 테오와 학자인 데몽, 그리고 가문을 이을 륜에게 그렇게 큰 가치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클레이즈에 와서 공부하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자신의 본업에 힘쓰는 것이 더 유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이즈에 들어온 것은 과거부터 가지고 있던 단 하나의 목표 때문이었다.
그렇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단 하나의 목적.
미묘한 침묵이 세 사람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9년이야.”
데몽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진실을 알기까지 2년, 그리고 그걸 알고 준비하는 데 7년이 걸렸어.”
그가 다시금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스승님의 복수. 이제 모든 상황을 그곳에 적용할 거야-”
그 말과 함께 그 무엇보다 무겁고 날카로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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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