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76
제 76 화
인생이란 신기하게도 무언가를 마음먹고 하려 하면 이상하게 그것을 방해하는 일들이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살을 빼려고만 하면 갑자기 먹을 복이 터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한유림 또한 뜻하지 않게 그 현상을 제대로 체험하는 중이었다.
“…….”
미친 거다. 이건 미친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유림은 헤진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월요일, 시험을 알게 되었으나 코니룸의 부탁을 받고 도박장에서 일을 도왔다.
화요일, 학생회장인 미야가 불러 각 형의 대표자 회의를 하게 되었다(아쉽게도 아슈팔은 4클래스라서 대표에 해당하지 않는다).
수요일, 세룬 교수님께서 동아리장들을 소집하셔서 졸지에 회의하고 밥 먹고 자정이 다 돼서야 귀가했다.
목요일, 이사장과 면담을 하고 돌아가던 중 웬일인지 하진 교수님께서 오셔서 밥을 사준다는 빌미로 되먹지도 않는 협박을 하고 가셨다.
금요일, 이제야 드디어 공부하려 했는데 히야스 교수님께서 수업한대서 저녁부터 불려 갔다.
그리고 현재, 토요일 저녁. 유림은 공황 상태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내 일주일이 어디로 간 거지?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대체 이게 뭔 일이야?!!
그악스런 비명이 입안에서 계속 맴돌았다.
미쳤다. 미쳤어.
아무리 느긋하게 살자가 신조인 유림이라 해도 시험공부는 해야 했다. 물론 과거의 그녀였다면 ‘시험공부? 돼지 똥 싸는 소리 하고 있네’ 했겠지만, 연금을 위해선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첫 시험이라 문제 자체가 그리 어렵지 않을 거란 말은 들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그래, 이 정도로 놀면 안 된다고(따지고 보면 놀지도 않았다)!
심지어 저 바보 박은하수조차 공부를 하지 않았던가!
유림은 턱을 괴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진중한 눈빛으로 앞에 놓인 키르를 바라봤다.
“…….”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무언가가 말이다.
결국, 유림은 마지막 보루였던 비장의 카드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후…….”
속에서 올라오는 깊은 한숨. 잠시 후, 유림이 키르의 통신을 눌렀다.
* * *
“놓쳐?”
데몽의 질문에 륜이 멋쩍게 웃었다.
“미안. 지금까지 뒤져 봤는데 뭘 했는지를 모르겠어.”
유림을 본격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데몽들이 가장 먼저한 일은 바로 미행이었다.
우선적으로 그녀가 가는 이동 경로를 알아야 분석하기가 쉽다는 게 그들의 첫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쪽으로 유난히도 많은 재능을 타고난 륜이 시간 남을 때마다 유림을 미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제,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간에 체육복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간 유림을 미행하던 륜은 그로부터 정확히 10분 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중간에 딴짓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가 일어났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말이다.
혹시 몰라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찾아봤지만 더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기숙사 근처에서 유림을 기다리던 륜은 토요일 점심이 돼서야 기숙사로 돌아오는 그녈 발견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유림이 기숙사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그녀가 갔을 만한 곳을 찾다 이제야 제 방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테오는 륜의 이야길 다 듣더니 경악 어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네가 놓쳤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미안.”
륜의 사과에 데몽이 아니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미안할 거 없어. 아예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니까. 뭐, 누가 방해했단 가정이 붙는다면 말이야.”
그는 긴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네 미행을 알고 있었든 아니든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건 뭔가가 있단 거지. 그건 확실해. 그보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도 금요일이네. 다음 주까지 이러면 같은 곳에 가는 거야.”
“이제 어떻게 해? 계속 미행해?”
“음, 우선?”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여는 데몽의 모습에 륜이 침음성을 삼켰다. 그때 세 사람 사이로 작은 진동음이 파고들었다. 데몽의 키르였다.
“누구야?”
“한유림.”
하여간 양반은 못 됐다.
데몽은 통신을 연결했다.
“여- 한유림.”
[바쁘냐?]“뭐, 그럭저럭. 용건이 뭔데?”
[살려줘.]그니까 뭘?
앞 뒤 다 잘라먹은 말에 데몽이 미간을 팍 구겼다. 유림은 그런 그가 보이기라도 하는지 알아서 뒷말을 술술 풀어냈다. 급한지 평소보다 말이 빨랐다.
[내가 지금 똥줄이 타들어가다 못해 소멸할 지경이야.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하나도못했어! 진짜 말 그대로 책 한 줄도 못 봤어! 근데 시험이라니! 젠장!!]
데몽은 유림의 흥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귀찮다는 듯 펜을 가볍게 돌렸다.
“서술이 길다. 요점을 말해.”
[그래서 좀 미안하지만 펠리탄 학자의 뇌를 빌릴 수 있을까?]“내 뇌를 어떻게 빌려. 거기다 나 아직 수습이다.”
[아씨, 공부 도와달란 소리지.]그 말에 데몽이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자신들은 지금 저 때문에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당사자는 태평하게 시험공부나 도와달라고 하다니. 뭔가 맘에 안 들었다.
데몽은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 무언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이것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진하게 말리는 입꼬리, 얄밉게 휘어진 눈매. 데몽은 유림의 요구를 흔쾌히 승낙했다.
“알았어. 도와줄게. 그것도 파격적으로 도와주지.”
[진짜?]“이래 봬도 공부는 꽤 한다고. 꼼수도 많고.”
[오오! 역시 데몽! 갑이네.]“대신 맨입엔 안 되지-!”
그 말에 유림이 작게 투덜거렸다.
[개놈, 뭘 원하는 거야?]데몽은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소원 하나만 들어줘.”
* * *
레이먼은 제3교사 뒤의 정원에 앉아 있었다.
어슴푸레한 밤하늘이 머리 위에 자리하고 있었고,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스쳤다. 가을의 중반이 지나니 확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바람이 차졌다.
“으, 추운 건 싫은데.”
외투를 여미며 작게 중얼거리던 레이먼의 뒤로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만으로도 그게 누군지를 정확하게 알아차린 레이먼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샨이 이쪽을 향해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는 숨을 한 번 고르더니 레이먼의 옆에 앉았다.
“미안, 많이 기다렸어?”
“조금?”
“하하하, 진짜 미안. 요한한테 뭐 주고 온다는 게 늦어졌어.”
요한이란 말에 레이먼의 두 눈이 반짝였다.
샨과 재회한 지 이틀 후. 레이먼은 무감각의 대가라 볼 수 있는 요한과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녀석은 바뀐 게 하나도 없었다. 특유의 창백한 무표정도, 아무 반응 없는 무감각도, 괴상한 소설을 좋아하는 것도. 그저 키만 조금 더 컸을 뿐이었다.
레이먼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소꿉친구가 한 공간에 있단 사실에 괜히 뭉클해졌다.
헤어졌던 이들을 여기서 만나다니. 이 얼마나 운명적인가.
마음 같아선 옛날처럼 여섯 명이 함께 모여 놀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발설하지 말라고 샨이 신신당부했기 때문이었다.
“요한도 불러오지.”
“귀찮대.”
머리 위로 요한이 직접 ‘귀찮아’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레이먼은 작게 키득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까지 숨길 거야?”
“아직은.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뭘? 우리가 알면 안 되는 거야?”
“안 된다기보단…….”
샨이 말끝을 흐리더니 난처하다는 듯 뺨을 가볍게 긁적였다.
“너희는 좀 더 확실해진 뒤에 알았으면 해서.”
“확실?”
“음, 말하기 곤란해. 나중에 말해줄게.”
그 대답에 레이먼의 미간이 구겨졌다. 샨은 몇 년이 지났음에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겉으로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성격만큼은 변해 있었다. 좀 더 능글맞아졌고,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밀이 많아졌다.
레이먼은 그게 싫었다.
레이먼이 뚱하니 발만 까딱이자 샨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미안.”
“…….”
그리고 그 사과에 도리어 멋쩍어진 레이먼이었다.
딱히 사과를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아니야. 그냥 좀 서운해서…….”
“나중에 다 말해줄게, 모든 게 확실해지면.”
“그래, 대신 가장 먼저 말해줘.”
“응, 약속할게.”
샨의 말에 레이먼이 기분이 풀렸는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뜩 무언가가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샨에게 건넸다.
그가 부탁했던 일이자, 어떻게 보면 오늘 만남의 목적이기도 한 수첩이었다.
“부탁한 거.”
“아, 고마워.”
샨은 레이먼이 주는 수첩을 펼쳐 몇 장을 넘겼다. 그리고 그 내용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하게 웃어 보였다.
“그 정도면 돼?”
“충분해. 그보다 미안하네, 시험 기간인데 나 때문에 공부도 못하고.”
“아니. 뭐, 나야 원래 그런 거 신경 안 쓰니까. 거기다 안 해도 어느 정돈 나오고.”
그것이 자신의 천운임을 전혀 모르는 레이먼이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부럽네.”
샨은 연신 수첩을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중요한 부분을 가볍게 표시했다. 그때 레이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좀 놀랐어.”
“뭐가?”
“갑자기 이런 거 부탁해서.”
그 말에 샨이 레이먼을 바라봤다. 투명한 쪽빛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근데 샨,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잠시 후, 레이먼이 턱짓으로 수첩을 가리키며 물었다.
“데몽들에 대해선 왜 조사하는 거야?”
“…….”
샨은 아무 말 없이 레이먼을 빤히 쳐다보다 시선을 내려 수첩을 바라봤다. 그곳엔 데몽과 테오, 그리고 륜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레이먼이 조사해 준 자료들이었다.
“응?”
채근하는 듯한 질문에 샨이 아주 잠깐 고민했다.
레이먼이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해서 한 질문인지, 아니면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해 보이는 것과 달리 꽤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녀석이 아니던가. 전자라면 문제될 건 없지만, 후자라면 조금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샨은 선뜻 뭐라 답하기가 뭣해 레이먼의 눈치만 살폈다. 그때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말하기 뭣한 거야?”
“그렇다고 하면?”
“그럼 다음으로 미뤄둘게. 그래도 이건 꼭 말해줘, 위험한 일은 아닌 거지?”
“…….”
샨이 슬금슬금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이 뭘 의미하는 건지 깨달은 레이먼이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샨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뭔데, 빨리 말해봐. 진짜 위험한 일이야?”
“위험한 일은 아닐 거야. 아마도.”
“그 뒤에 붙은 아마도가 심히 걸리는데 말이지.”
“음… 너희한테 위험한 일은 아니야.”
너희한테 위험한 일은 아니라니? 레이먼은 그 말이 어쩐지 웃겨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럼 누구한테 위험한데? 너?”
샨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레이먼을 향해 특유의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데몽이란 친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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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