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77
제 77 화
데몽은 미간을 찌푸리며 맞은편에 앉아 헤실헤실 웃고 있는 유림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와주겠다고 한 것도 그였고, 그에 따른 요구를 한 것도 그였다. 어떻게 보면 이 상황은 그에게 꽤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 데몽은 진심으로 이 자리를 박차고 싶었다.
유림의 시험공부를 돕기 위한 자리에서 그녀가 어느 정도인지를 측정하기 위해 가볍게 시험을 봤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상보다 참혹했다.
데몽은 유림을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야, 한유림.”
“응?”
“너 진짜로 하나도 안 했냐?”
“진짜 안 했으니까 널 소환한 거지.”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할 말이 없군.
데몽은 유림이 푼 문제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험지는 정말 말 그대로 유림이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듯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의외로 기초 상식이 많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무리였다.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하루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더욱이 자신이 돕겠다고 한 시점에서 낙제를 면하는 것으론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선생질해 주는데 고작 낙제를 면한다고? 적어도 10등 안에는 들어야지.
데몽은 학자로서의 자존심을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림에게 손짓했다.
“따라와.”
데몽의 말에 유림이 의아한 듯 그를 올려다봤다. 따라오라니?
“어딜?”
유림의 다소 덜떨어진 질문에 책들을 정리하던 데몽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네 성적 팍팍 올리러.”
유림은 클레이즈에 입학한 이래 처음으로 도서관에 왔다. 그것도 일반 학생들은 이용할 수 없는 구역에.
3구역의 입구. 분홍 머리가 매력적인 사서가 데몽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또 왔네. 오늘은 친구랑 함께 온 거야?”
데몽은 그를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유림이 보기엔 가식이 넘치다 못해 강을 이룰 정도로 뻔뻔한 얼굴이었지만, 슬프게도 사서는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3구역에 가려고 하는데 친구랑 같이 들어가도 괜찮죠?”
“교칙상 학생회가 아닌 애와 같이 들어가려면 이것저것 작성해야 하지만, 데몽은 믿을 수 있으니까. 거기다 한유림이라면야~”
사서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유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유림 쟁탈전으로 자신이 꽤 유명해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처음 보는 이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장부에 간단히 데몽과 유림의 이름을 적었다.
“자, 이제 들어가 돼. 시험공부 열심히 해~”
“수고하세요.”
그들은 사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3구역으로 이동했다.
유림은 데몽의 뒤를 쫓아가며 주변을 둘러봤다. 확실히 4클래스 이상에게만 허락된 공간답게 어렵고 전문적인 책이 잔뜩 꽂혀 있었다. 오래된 책도 많은지 책 특유의 달짝지근한 향이 퍼졌다.
“책 냄새 좋다.”
유림의 중얼거림에 데몽이 뒤를 흘끗 돌아봤다.
“그래?”
“응. 나중에 돈 많이 생기면 여기처럼 집의 벽을 다 책으로 채우고 싶어.”
“어마어마한 계획이네. 연금받아서 종일 책만 읽게?”
“아니, 그냥 미관용으로 둘 건데.”
“…….”
잔뜩 구겨진 데몽의 표정이 웃긴지 유림이 작게 키득거리다 이곳이 도서관임을 상기하곤 웃음을 삼켰다.
유림은 스스로를 꾸짖듯 가볍게 입을 툭툭 치더니 데몽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3구역은 꽤 넓었다. 유림은 끝없이 펼쳐진 책의 산을 보며 ‘이걸 다 팔면 얼마가 나올까’라는 찌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데몽이 몸을 가볍게 낮췄다.
“쉿-”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는 데몽의 행동에 유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덩달아 몸을 숙였다.
데몽은 책장에 기대 그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리고 주위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유림 또한 데몽을 따라 조심스레 움직였다.
둘은 점점 사람이 없는 구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책장은 높아졌고, 고대어로 적힌 전문적인 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시험공부를 도와준다며 따라오라고 했으면서 여긴 또 왜 온 걸까. 고대어 수업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의 난이도는 아닌데?
유림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지금까지의 갈색이 아닌 검은색으로 된 책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림은 이곳이 어디인지를 알게 되었다. 눈앞에 있는 팻말이 4구역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유림이 기억하기로 도서관의 4구역은 가장 안쪽에 자리한 곳으로 교수들만 이용할 수 있는 구간이었다.
아니, 근데 여긴 왜?
유림은 해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데몽을 빤히 바라봤다. 그 순간 머리 위로 무언가가 섬광처럼 지나갔다.
“야, 너 설마……!”
“쉿.”
조용히 하라며 입을 틀어막는 데몽의 모습에 유림이 설마 하는 생각으로 그를 쫓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자신의 설마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데몽, 너…….”
“응? 뭐가?”
유림은 경악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4구역의 가장 깊숙한 곳. 이곳에는 교수들이 여태 만들어놓은 시험지와 선배들이 봐온 시험지, 그리고 교수들이 시험지를 만드는 데 사용했던 자료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바로 교수들이 공식적인 자료나 혹은 연구자료에 사용한 문헌, 자료들을 꽂아두는 서고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데몽이 이런 곳에 자신을 끌고 오다니.
유림은 찜찜한 표정으로 데몽을 바라봤다.
“……컨닝 하잔 거야?”
“아니지. 그저 자료 수집을 하자 이거야, 핵심적으로.”
키득거리는 데몽의 말투에 유림이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하, 참 좋은 핵심이다. 그보다 4구역은 어떻게 들어온 거야?”
“3구역 끝에 연결된 길이 있더라고. 우연히 알게 됐어.”
“걸리면?”
“몰랐다고 하면 장땡이지 뭐.”
거, 참 좋은 변명이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데몽의 막무가내 행동에 왠지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쯤 되니 저 녀석이 학자인 것도 의심스러웠다.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연신 바라보자 그 표정의 의미를 파악했는지 데몽이 쓰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쉽게도 내 성적은 실력이야. 얍삽한 짓 할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고, 그런 거 안 해도 잘 나오니까.”
아씨, 저게 더 기분 나빠.
“거기다 엄밀하게 말하면 컨닝도 아냐. 그냥 출제자의 성향을 좀 보잔 거지.”
데몽이 특유의 말투로 설명했다.
“여태껏 어떤 식으로 냈는지를 알면 이번 시험도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측할 수 있잖아. 그럼 공부하기도 더 쉽고.”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유림이 이해한 듯 짧게 탄식하자 데몽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을 이었다.
“일단 관련 교수님들 시험지부터 찾아. 월요일, 화요일 것부터. 그것만 세 시간 정도 분석하고 그 뒤에 집중적으로 공부하자고-”
그 말에 유림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몽과 유림이 자료를 찾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아홉 권의 책과 40여 장의 시험지를 찾게 되었다.
구석진 자리에 숨듯이 앉은 그들은 시험지를 중점으로 유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월요일 수업은 그 유형이 뚜렷했다. 책의 문헌을 많이 이용했고, 그 의미를 묻는 내용이 많았다. 화요일 수업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상식적인 부분을 많이 내셨는데 조금 골치 아픈 건 서술형은 채점하기 귀찮으셨는지 괄호 채우기 문제가 더러 있단 것이었다.
어쨌든 생각보다 빨리 목록이 추려졌기에 유림과 데몽은 수요일과 목요일 수업의 자료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수업엔 당연히 세룬의 공통 수업도 있었다.
전임 교수여서 그런 걸까. 세룬의 전용 서고에는 다른 교수의 배나 되는 자료가 있었다. 관심 있는 분야 또한 다양했으며,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도 깊었다. 어떻게 보면 데몽과 비슷한 성향이었다.
유림과 데몽은 각자 아랫부분과 윗부분을 맡아 자료 찾기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어마어마한 자료의 산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눈과 손을 움직였다.
“늄의 개념, 늄의 형태, 늄의 반동, 늄의 철학, 신물과 성물의 관계, 고대의 전설…… 대륙 비슈아드, 4일의 밤, 현자와 사(死)…… 아씨, 뭔 책들이 이렇게 많아.”
유림은 책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책의 제목을 읽었다. 다양한 분야와 제목만으로도 골이 울렸다.
그때 유림의 눈에 책 한 권이 들어왔다. 다른 것들과 다르게 책등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검은 색의 책이었다.
유림은 호기심에 하던 일도 잊고 그 책을 꺼냈다. 값비싼 양장을 사용했는지 표지의 촉감이 무척 좋았다. 신기한 것은 책등뿐 아니라 책 표지 그 어디에도 글이 쓰여 있지 않단 거였다.
유림은 책을 살짝 펼쳐 봤다. 그때 위쪽을 살피던 데몽이 무언가를 찾은 듯 유림을 불러왔다.
“야, 세룬 교수님 논문하고 시험지 묶음 파일이다.”
“어…….”
“뭐야. 반응이 왜 그래?”
데몽은 사다리에서 내려와 유림을 바라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책이 들려 있었다.
“뭔 책이야?”
“졸업 관련 자료 같은데?”
“졸업 관련?”
유림이 고개를 끄덕이며 첫 장의 우측 하단에 있는 금박 문구를 가리켰다.
[1762년. 영광스런 졸업생들에게.]“졸업 앨범, 뭐 그런 건가?”
“그럴지도.”
데몽은 찾은 파일을 옆구리에 낀 채 유림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에 응하기라도 하듯 유림이 책장을 넘겼다. 그곳엔 다양한 글과 연구 기록, 그리고 졸업생들의 활동이 목차별로 나열되어 있었다.
“헐, 이런 것도 엮어? 대박인데?”
졸업생들의 모든 행보. 어떻게 보면 획기적이기까지 한 자료에 데몽이 눈을 빛냈다.
유림은 그 반응에 키득거리며 책장을 넘겼다. 그곳엔 당시 이사장이 졸업생들에게 쓴 글과 그들의 사진이 나열되어 있었다.
졸업생은 총 17명.
가장 처음에는 ‘수석’이란 타이틀과 함께 세룬 교수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지금 찍었다 해도 믿을 정도로 변함없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대박이다. 이때도 이렇게 작으셨구나.”
“그러게. 난 외모를 바꾼 줄 알았는데.”
“나도. 4형이어서 세포를 젊게 한다던가 뭐 그런 건 줄 알았어.”
데몽은 흥미롭다는 듯 한 명 한 명을 훑었다. 개중에는 데몽이 알 정도로 유명한 학자도 있었으며, 훌륭한 장군이나 기사도 적잖게 있었다.
어쩐지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해 데몽이 작게 키득거리며 유림을 불렀다.
“야, 한유림. 나중에 우리도 이런…….”
순간 데몽은 저도 모르게 하던 말을 멈춰버렸다. 무언가 예상치 못한 걸 발견한 것처럼 유림의 얼굴에 당혹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유림?”
데몽이 의아하다는 듯 불렀지만, 유림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저 앨범의 한 부분만을 계속 바라볼 뿐이었다.
쿵쿵쿵쿵.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바싹 말라오는 입안과 잘게 떨리는 손. 유림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사진을 뚫어질 듯 바라봤다.
어째서, 어째서 여기에 아버지가 있는 거지?
[1762년 상반기 졸업생 – 한하림 25세(제8형)]믿기지가 않았다. 아버지가 클레이즈의 졸업생이란 것도, 또 그가 8형이었다는 것도.
유림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였다.
《제 4구역. 특정 조건 확인. ‘라의 문’을 개방합니다.》
인간의 목소리라곤 할 수 없는 이질적인 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4구역을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소리에 유림과 데몽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그들의 발밑에 원 모양의 거대한 빛무리가 생겨났다. 그 빛은 점점 거대해지더니 이내 기둥처럼 뻗어 올라 두 사람을 감쌌다.
온몸을 감싸는 대량의 늄의 기운. 시야를 가득 채우는 금빛의 장막. 그리고 그 기운을 끝으로 두 사람은 빛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도서관 제4구역, 세룬 교수의 서고 앞. 그 앞엔 조금 전까지 누군가가 있었음을 알려주듯 무수히 많은 시험지와 책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
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