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78
제 78 화
“풍습이요?”
“그래. 사혈의 북부 지방에는 예전부터 내려오는 풍습이 하나 있어. 귀한 아이에게 부모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는 거지. 나도 내 아이를 낳으면 내 이름을 물려주려고.”
“그럼 선배 아이의 이름도 선배와 같은 한하림이 되는 건가요?”
“그렇지.”
“음…… 그럼 선배와 아이를 부를 때, 큰 하림, 작은 하림이라고 불러야겠네요.”
“하하하. 그렇게 할 필요 없어, 아이에게 이름을 물려주면 보통 부모에게는 이름 뒤나 앞에 작은 호칭이 부여되거든. 여튼 자식을 낳으면 내 이름을 주고 싶어.”
“그럼 딸이고 아들이고 다 한하림인 거예요?”
“응. 왜?”
“아뇨, 선배 때문인지 하림이란 이름은 남자애 느낌이 강한 거 같아서요. 딸한테 주기엔 좀…….”
“그런가? 그러면 조금 다르게 지어주지 뭐.”
“어떻게요?”
그 질문에 그가 씨익 하고 웃었다.
***
“……림.”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만 같았다.
“한유림.”
날카로우면서도 살짝 낮은 목소리.
……데몽?
“한유림, 정신 좀 차려봐.”
다급하게 불러오는 목소리에 유림이 무거운 눈꺼풀을 조심스럽게 밀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다행이란 표정을 짓고 있는 데몽이 보였다.
“데몽……?”
“하아- 다행이다. 안 일어나서 엄청 놀랐다고. 괜찮아?”
유림은 데몽의 목소리를 들으며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 순간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머리가 아팠다, 정확히는 뒤통수가. 뭔가에 크게 부딪힌 것처럼 골이 울려왔다.
미간을 구기며 아픈 뒤통수를 부여잡자, 혹이라도 난 건지 단단하고도 뭉툭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유림은 화끈거리는 통증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아파…….”
“위에서 떨어진 거 같아. 괜찮아?”
“으…….”
위에서 떨어지다니, 대체 어쩌다……?
유림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머리가 아파서 그런 건가?
유난히도 굳은 손가락.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온몸이 덜덜 떨렸다.
추웠다, 마치 엄동설한에 외투 하나 없이 버려진 것처럼. 물론 요즘 날씨가 추워지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추운 거지?
닭살이 돋은 팔뚝을 쓸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들은 지금 어둑한 동굴의 안에 있었다. 회색의 돌벽으로 이루어진 굴은 지나치리만큼 춥고 습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목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유림은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두 눈에 흑색의 책 한 권이 들어왔다. 바로 아버지의 이름이 기재된 책이었다. 그 주변엔 제 가방과 몇 개의 자료가 같이 나뒹굴고 있었다.
이게 뭐야? 여긴 어디고? 아니, 그보다 나 왜 여기 있는 거야?
대체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유림은 몸을 부르르 떨며 데몽을 바라봤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도서관에서 이동되었어. 기억 안 나?”
도서관?
데몽의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잡아끌었다.
시험 기간을 맞아 데몽과 함께 도서관에 갔고, 4구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서 발견한 세룬 교수님의 서고와 책. 그리고 갑작스러운 이동.
“아!”
그제야 모든 상황을 떠올린 유림이 경악 어린 표정으로 데몽을 바라봤다.
“뭐야?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라의 문이 발동됐어.”
“라의 문? 라의 문이면 그거 아냐? 그 순간 이동 문.”
데몽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의 문은 고대부터 이어진 순간 이동 마법의 결정체였다. ‘문’이란 단어가 붙지만 실제 문처럼 생긴 것은 아니고, 마법진이나 원판, 혹은 거대한 구슬 같은 것을 이용했다.
거기다 라의 문은 순간 이동 마법과 달리 술자가 없어도 사용할 수 있어 늄이 없는 사람들도 이용 가능했다. 물론, 쉽게 만들 수 없는 데다 만드는 사람의 실력에 따라 이동되는 거리나 라의 문이 유지되는 시간이 달라졌기에 그 값이 어마어마했지만 말이다.
하여튼 결론을 말하자면 이런 곳에서 발동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근데 그게 왜 여기서 발동돼?”
“그걸 알면 이러고 있겠냐. 이런 정체 모를 곳에 오지도 않았겠지.”
데몽이 앞머리를 헤집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새하얀 입김이 눈앞에서 흩뿌려졌다.
유림은 꽁꽁 언 손가락을 주무르며 말했다.
“도통 모르겠단 말이야. 왜 클레이즈에 라의 문이 있는 거지? 그것도 도서관에.”
“글쎄. 한 가지 확실한 건, 조건이 뭐든 우리가 그걸 만족했다는 거지.”
“라의 문은 시동인이 없으면 발동되지 않잖아.”
“아니, 정확히는 시동인이 지정해 놓은 특정 조건이 없으면이야. 보통 라의 문에 시동인이 필요한 이유는 남용을 막기 위함이야. 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이나 왕성 안에 있는 것처럼 특정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경우에는 시동인 대신 시동 조건이 부여돼.”
“오…… 잘 안다.”
“……너 내가 펠리탄 제국의 수습 학자인 거 잊었냐?”
“아, 미안.”
반박할 수 없는 이유에 유림이 괜히 아픈 뒤통수만 벅벅 비볐다.
어쨌든 이대로 계속 있을 수 없기에 치마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움직임에 다리를 타고 한기가 올라왔다.
으으- 추워. 진짜 추워.
“여튼 일단 구조 요청부터 하자. 키르가 이럴 땐 편하네.”
유림은 어서 키르를 꺼내라며 데몽을 재촉했다. 그러다 마주한 그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당황하고 말았다. 녀석이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난처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데몽이 저런 표정도 짓다니…….
그 정도로 상황이 안 좋은가 싶어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
유림이 조심스럽게 바라보자 데몽이 시선을 슬쩍 피하며 뒷목을 긁적였다.
그는 이 사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지 입술만 달싹였다. 그러더니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리야, 한유림.”
“무리라니? 뭐가?”
“키르…… 안 된다고.”
“……뭐?”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유림이 당혹감에 마른침만 꼴깍꼴깍 삼키자, 데몽이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키르를 꺼내 들었다. 마치 직접 확인하라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걸 본 순간, 유림의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
투명했다.
아무런 색도 섞이지 않은 키르는 지나칠 정도로 투명해, 손바닥이 고스란히 비쳐 보였다. 그리고 그게 주는 의미는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데몽의 형을 상징해 붉은빛을 띠고 있어야 할 키르가 본연의 힘을 잃고 만 것이다.
맙소사.
끔찍한 현실에 유림이 황급히 제 키르를 찾아 꺼냈다.
“…….”
손에 감기는 차갑고 매끈한 감촉, 그리고 그 끝에 보이는 것은 데몽의 것처럼 투명한 색으로 변한 키르였다.
그것은 마치 평범한 구슬이라도 된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늄을 부여해도 색이 변하지 않았으며, 늄의 증폭은 물론 통신도 되지 않았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학기 초에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키르는 클레이즈 내부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고.
그렇다는 건…….
“서, 설마 여기가 학교 밖인 건 아니겠지?”
“…….”
“대답해! 아니라고!!”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닐 거야, 아마…….”
아마는 무슨 아마야!!
아니, 이건 또 무슨 돼지 똥 싸는 상황이냐고!
유림은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벽에 머릴 박았다.
갑자기 발동된 라의 문과 어딘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장소. 그리고 그곳에서 갇혀 구조 신호조차 보낼 수 없는 상황.
유림은 자신들이 처한 그 처참한 현실에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상황을 파악한 데몽과 유림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걷는 것이었다. 우선 이곳이 어디고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를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동굴 속에서 그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들어온다는 것은 입구든 출구든 나가는 곳이 있단 의미니 말이다.
밖이 가까워졌는지 점점 강해지는 추위. 유림은 저도 모르게 책이 들어 있는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밖에 뭐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운 곳이란 건 알 수 있었다.
“겁나 춥다…….”
“그러게. 젠장, 대체 어디인 거야.”
“설마 펜시리움(빙설의 땅)인 건 아니겠지?”
“설마 같은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데몽의 일침에 유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다시 불안을 토해냈다.
“큰일이다. 키르도 안 되고…… 우리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까?”
“글쎄, 일단 상황을 좀 살펴봐야지 알 것 같은데.”
데몽의 담담한 말에 유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왜 일이 또 이렇게 꼬이냐. 시험공부 할 시간은 있는 건가? 잠깐, 지금 몇 시지?
“데몽, 시계 있어?”
“아니, 없어.”
“우리 여기 얼마나 있었어?”
“몰라, 나도 너 깨우기 직전에 일어난 거라. 알 수 있는 건, 라의 문이 동굴 천장이랑 이어져 있었단 거야.”
“……그럼 시간이 많이 지났을 수도 있단 거네.”
“많이는 아닐 거야. 그랬다면 진즉에 동사했겠지.”
확실히 그랬다. 이렇게 추운 굴 안에서 땅에 쓰러진 채 오랫동안 있었다면, 적어도 손발 하나는 꽁꽁 얼어 마비되었어야 하는 게 맞았다.
“그건 다행이네. ……우리 돌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 분명 학교로 갈 방법이 있을 거야. 그건 확실해.”
“어떻게 알아?”
유림이 가방을 꼭 끌어안으며 물었다.
“라의 문이 클레이즈 내부에 있었어, 그것도 도서관에.”
“그게 왜?”
“이렇게 이상한 곳으로 이동되는 문치곤 너무 공개적인 곳에 있다, 이거지.”
“학생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구역이었잖아.”
“그렇다고 못 갈 곳도 아니잖아. 거기다 우리가 한 일은 별로 없었어. 자료 찾고 앨범을 본 게 다니까. 쉽게 말해 발동 조건이 어려운 건 아니란 거야.”
“요점이 뭔데?”
“이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교수님들이 사용하는 곳일 수도 있단 거지.”
“…….”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근데 여기가 교수님들이 이용하는 곳이라면 왜 키르가 안 되는 걸까? 아니지. 왜 학교 밖에 클레이즈 교수들이 이용하는 곳을 만들었냐고 해야 하나?”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 학자잖아.”
“……학자라고 모든 걸 다 아냐? 그냥 남들보다 더 공부하고, 아는 게 조금 더 많을 뿐
이라고.”
언젠 다 안다는 것처럼 말했으면서…….
자신을 보며 혀를 차는 데몽의 모습에 유림이 미간을 팍 구기며 발을 굴렀다. 어쩐지 추위가 한층 더 심해졌다, 귀와 코가 얼고,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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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