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8
제 8 화
륜은 지금 폭이 좁은 외나무다리 위에 위태로이 서 있었다. 입구부터 출구까지 길게 뻗어 있는 다리는 그리 길진 않았으나 애석하게 그 반도 가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음침하게 생긴 헝겊 인형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개같이 푹신푹신해 보이는 솜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인형. 머리엔 얼굴이랍시고 눈과 입을 그려놨는데, 그 표정이 어찌나 더러운지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곳이 평지거나 여유가 있는 길이었다면, 손쉽게 피해 지나치거나 뛰어넘어 갔을 텐데. 다리의 폭이 워낙 좁은 데다 밑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어둠이라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인형의 갑작스러운 공격(?)은 이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지도 못할 만큼 당황스럽게 했다.
륜은 턱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헝겊 인형을 바라봤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상한 인형. 왜 자신이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지 정확한 상황이 파악되지는 않았으나, 어찌 되었든 이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하하하하…….”
그가 평소처럼 힘 빠지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륜을 보며 헝겊 인형이 움직였다. 손가락이랍시고 울퉁불퉁하게 다섯 가락으로 묶인 솜뭉치. 인형은 륜을 향해 뭉툭한 손을 위협적으로 들이밀었다. 그리고,
[가위바위보!]솜뭉치 인형이 이상한 목소리를 내며 팔을 꺼냈다. 륜은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황급히 가위를 냈다. 그러나…….
“아…….”
그 뭉툭한 손가락을 접어 ‘묵’을 낸 헝겊 인형이었으니.
파칭!
륜의 패배를 확인한 순간, 인형의 눈빛이 반짝였다.
“하하하하하하하하…….”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 쳤다.
헝겊 인형은 가위바위보를 이긴 것이 기뻤는지 대충 그은 듯한 눈을 살짝 휘며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두 다리를 들어 륜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다다다다다다다다!!
그 경쾌한 스텝에 외나무다리가 요동쳤다.
“으아아아아아!!”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입구 쪽으로 도망친 륜과 그런 그를 무서운 기세로 쫓아가는 헝
겊 인형.
제2차 시험, 붉은 방의 가위바위보.
헝겊 인형과의 가위바위보에서 연속으로 다섯 번을 이길 것. 실패 시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라는 룰을 가지고 있는 마의 방이었다.
또다시 패배하고 만 륜은 헝겊 인형의 공격을 피해 출발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거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헉헉헉…….”
륜은 이를 악물며 뛰었다. 체력이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상황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 상태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도 출구를 나간 이가 없달…… 까(아니, 있는데 못 본 걸지도).
“후우, 돌겠네.”
서바이벌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선착순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열 명 안에는 탈출해야 안전하게 합격이란 것이다.
잠깐, 어차피 탈출이 목적이라면 굳이 가위바위보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륜은 뛰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끼익.
갑작스러운 멈춤에 그 속도를 이기지 못한 신발이 마찰을 일으키며 미끄러졌다. 그는 최대한 몸을 낮춘 후 등허리에 있는 두 개의 검을 뽑아 들었다.
차앙.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애초에 가위바위보를 하는 이유가 헝겊 인형을 이 길에서 치우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베어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
그는 검을 양손에 하나씩 잡은 후 몸을 낮춰 공격 자세를 취했다.
힘은 몰라도 속도와 기술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헝겊 인형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한쪽 다리를 벤 후 균형을 무너트려 외나무다리 밑으로 걷어차는 것이다. 그 뒤 출구를 향해 전력으로 뛰어가면 된다.
륜은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리고 인형이 사정권 안에 들어오자 팔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꺄아아아아악!!”
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비명에 중심이 흔들린 륜은 달려오는 인형을 피해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그가 뒤로 빠지기 무섭게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꺅!!”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치 짜 맞추기라도 하듯, 륜을 향해 뛰어오던 헝겊 인형 위로 떨어졌다.
푸욱!
인형의 솜이 뭉개지는 소리.
쿠웅.
그리고 그 무게에 외나무다리가 작은 진동을 울리며 흔들렸다.
몸을 최대한 낮춰 떨어지지 않게 균형을 잡은 륜은 멍청한 표정으로 엎어진 거대한 헝겊 인형과 그 위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발견했다.
불린 미역마냥 길게 흩어진 푸른색의 머릿결, 새하얀 피부와 늘씬한 팔다리, 그리고 입고 있는 짧은 바지와 쫙 달라붙는 셔츠. 다소 민망한 차림새에 얼굴이 괜히 달아올랐다.
륜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만 뻗어 칼끝으로 헝겊 인형의 머리 부분을 조심스럽게 쳤다.
“저, 저기요?”
갑자기 떨어지다니… 위쪽 다리에서 떨어진 건가?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륜은 퍼렇게 질린 얼굴로 헝겊 인형의 머리 부분을 다시 칼끝으로 툭툭 쳤다. 그러자 그 행동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쓰러져 있던 여인이 벌떡 일어났다.
“푸하! 죽는 줄 알았네!”
여자치곤 참으로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륜은 그 기세에 움찔하며 몸을 조금 더 뒤로 뺐다.
“…….”
그녀는 길게 흘러내린 머리를 헤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륜의 길을 막던 헝겊 인형을 발로 뻥 차, 저 아래로 떨어트려 버렸다.
“이건 또 뭐야?”
거침없는 발길질을 선보인 그녀는 목을 움직이며 경직된 몸을 풀었다. 발을 헛디뎠을 땐 그대로 탈락인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았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기 위해 고갤 들었다. 그러다 외나무다리에 주저앉다시피 한 륜을 발견했다. 사람이 없는 다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여자가 미안함에 머쓱한 얼굴로 바라보자, 도리어 어수룩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륜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여자는 괜찮단 의미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륜은 그제야 이 여자가 엄청난 미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괜찮아요. 아, 미안해요. 갑자기 떨어져서 놀랐죠? 실수로 그만 발이 미끄러져서요.”
“아뇨, 저도 덕분에 골치 아프던 걸 처리해서 괜찮아요.”
“오! 정말요? 다행이네.”
여인이 개구진 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다. 륜은 멀쩡해 보이는 여자의 모습에 긴장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 손에 들린 검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가위바위보 이기셨어요?”
“아뇨, 대충 처리하고 뛰려고 했죠.”
“하하……. 역시 꼭 안 이겨도 되나 보죠?”
“네, 그보다 우리 빨리 뛰어야 할 것 같아요.”
여인의 말에 륜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이런 곳에 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어수룩한 륜의 모습에 풋 하고 작게 미소 짓더니 주변을 가리켰다.
“주위에서도 그걸 알아챈 것 같아서요.”
“아!”
그제야 나머지 응시생들도 외나무다리에서 헝겊 인형을 떨어트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륜이었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여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가 허리를 짚으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럼 일단 나가볼까요?”
그리고 그 질문에 륜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때 먼저 시험을 마치고 나온 유림 일행은 레이먼과 마주하게 되었다.
디하르가 혼자 안 왔다고 했을 때 얼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그 느낌이 좀 색달랐다. 실감이 났다고 해야 하나, 낯설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디하르 못지않게 친했던 레이먼의 등장에 유림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아니, 여기가 동창회야? 왜 다 여기서 만나?
레이먼은 디하르를 보곤 터덜터덜 걸어왔다. 그러다 그 옆에 있는 유림을 발견하곤 자리에 뚝 하고 멈춰 섰다.
투명한 쪽빛 눈동자가 두어 번 깜빡였다. 그러더니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 크게 요동쳤다.
“어?!”
은하 못지않은 쩌렁쩌렁한 울림이었다.
유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목소리에 작게 흠칫하고 떨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을 향해 삿대질하는 새하얀 손이며 깜빡이는 쪽빛 눈동자며, 정말 옛 모습 그대로였다.
레이먼은 크게 당황한 얼굴로 유림과 디하르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유림에게 달려왔다. 반가움이 가득 섞여 있는 얼굴이었다.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잘 지냈냐, 어떻게 지냈냐, 등의 인사도 없이 대뜸 한다는 소리가 여기 왜 있냐니.
유림은 레이먼의 질문에 기가 차단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왜긴 왜야, 시험 보러 왔지. 너야말로 왜 여기 있냐?”
“나도 시험 보러 왔지.”
평이한 어조와 달리 정말 놀라긴 했는지 레이먼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물론 평소보다 높았다 해도, 변성기 이후의 목소리를 들은 적 없는 유림의 입장에선 낯설고도 낮은 목소리였지만 말이다.
“대박이다! 난 네가 갑자기 아무 말 없이 사라졌기에 죽은 줄 알았는데.”
죽은 줄 알았다니…….
“……약 8년 만에 만난 친구한테 그 말은 좀 너무하지 않아?”
“야, 갑자기 사라져서 그만큼 연락 안 하고 산 게 누구인데?”
키득거리는 레이먼의 모습에 그제야 유림 또한 따라 웃었다. 티격태격하는 말과 달리 두 사람의 대화엔 친근함이 가득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함없는 익숙함과 친근함. 향수에 불과했던 감각이 현실로 다가오자 왠지 낯간지럽단 생각이 들었다.
이게 진짜 뭔 일인지. 은하랑 시험을 보자 했을 때만 해도 소꿉친구들을 만날 거라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이거 잘하다간 과거에 어울렸던 여섯 명이 다 만나게 되는 거 아냐?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
에이 설마, 정말로 그럴 리가……. 생각하지 말자. 재수 없게 난 꼭 이런 불길함은 잘 맞으니까.
유림은 소꿉친구 중 남은 세 사람을 생각하며 미간을 구겼다. 그러다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아차 하고 혀를 차며 곁에 있던 은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 행동에 레이먼의 눈이 커진 건 안 봐도 뻔했다.
뽀송한 얼굴로 얼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레이먼의 모습에 유림이 키득대며 은하를 소개했다.
“소개할게. 이쪽은 내 친구, 박은하수.”
“네 친구?”
친구란 단어에 놀란 건지, 아니면 은하가 유림의 친구란 것에 놀란 건지는 모르겠으나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둘을 바라보는 레이먼이었다.
유림은 그 반응을 상큼하게 무시한 뒤, 이번엔 은하에게 레이먼을 소개했다.
“그리고 이쪽은 내 소꿉친구 중 한 놈, 레이먼.”
“뽀송이도 네 친구야?”
그 말에 레이먼이 발끈했다.
“뽀송이? 뭐래, 이 깜둥이가!”
“깜둥이?!”
이번엔 은하가 발끈했다.
“깜둥이라니,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완전 못됐어! 림!! 얘 진짜 네 친구야?!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이런 애? 어쭈! 지는 딱 봐도 멍청하게 생긴 주제에! 너 설마 이런 애랑 친구인 거야? 너 무식한 거 딱 질색이잖아!”
어린애처럼 서로를 헐뜯는 두 사람의 모습에 유림이 한숨을 내쉬며 허리를 짚었다. 둘 다 유치찬란한 정신연령을 가지고 있어 꿍짝이 잘 맞을 거라 생각했는데, 꼴을 보니 어째 그러긴 힘들어 보였다. 아니, 이건 다른 의미로 잘 맞는 건가.
유림은 아직도 서로를 향해 네가 더 나빴네를 주장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양손을 뻗어 두 사람의 입을 막았다. 읍 하는 소리와 함께 시끄럽던 소음이 사라지고, 동그란 두 쌍의 눈이 불만을 가득 담은 채 자신을 향했다.
유림은 그런 둘을 번갈아 보더니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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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