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93
제 93 화
“……미안해.”
“아니야. 내가 원해서 한 일이야.”
“그래서 더 미안해.”
샨은 괜찮다며 유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할 것 없어. 이건 내 선택이니까.”
그가 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그렇게 그걸 찾아다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어. 네 자료가 흘러들어 간 곳이 다름 아닌 클레이즈였다는 걸 말이야.”
순간 유림이 저도 모르게 데몽을 바라봤다. 방법이 어떻든 둘은 같은 결론을 도출해 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찾아 이곳까지 온 것이다.
“결국, 나도 저 친구들처럼 입학할 수밖에 없었어. 클레이즈는 외부인의 출입이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온 거야? 하지만 왜 굳이 1년을 앞당겨서 들어와야 해?”
“요한과 함께 움직이는 게 편했으니까. 거기다 걱정되는 부분도 몇 있다 보니 그럴 거면 아예 그들이 착각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보통 클레이즈의 초대장은 절대적이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그들이 널 의심한다 해도 나이가 다르니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하고. 거기다 이름까지 다르다면, 그 의심은 더 줄 테고.”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해했지만 그건 지나칠 만큼 무모한 도박이었다.
그 사실은 유림뿐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었다.
테오는 샨의 그 거침없는 행동을 지적했다.
“그랬다가 들켰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어쩌면 사혈에 있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었어. 너 때문에 위험에 노출됐단 생각은 안 해?”
“해. 하지만…….”
샨은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를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하여튼 림이 올해 입학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보단 안전하다고 생각했어. 실로 지금 림은 클레이즈에 입학했으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유림의 자료가 어디까지 넘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모르는 채로 그녀가 순순히 클레이즈에 입학했다간 그들에게 노출됐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올해에도 굳이 보낼 필요가 없었던 가짜 초대장을 보낸 건가? 적어도 이름은 다르게 하려고?
유림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금은 안 들킨 거야?”
“응. 히야스 교수님 덕분에.”
“히야스 교수님? 그분은 왜?”
갑자기 유림의 머리 위로 입학시험 4차 시 때 개입한 히야스가 생각났다, 덧붙여 안젤리카와 잘 안다는 듯한 샨의 태도도.
“잠깐, 그럼 히야스 교수님이 입학시험 때 개입했던 거 네 부탁 때문이었어?”
“그래. 그분은 믿을 수 있었거든.”
유림에게 있어 제일 괴짜인 히야스를 믿을 수 있다니.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너희가 입학시험 4차 때 겪었던 방, 기억나?”
샨의 말에 일행 모두가 입학시험 4차 때 겪었던 방을 떠올렸다. 가장 무섭고 끔찍했던 기억을 보여주던 그 방 말이다. 그곳에서 은하는 물에 빠졌고, 테오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에게 둘러싸였으며 루아네들은 과거를 다시 겪게 되었다.
“그 시험은 원래 2클래스가 3클래스로 진급할 때 받는 진급시험의 내용이야. 그리고 난 거기서 너희와 같은 것을 보았고, 그 시험의 담당이었던 히야스 교수님도 그걸 보셨지. 그래서 확신할 수 있어. 그분은 아니야. 만일 그분이 녀석들과 한편이었다면 분명 어떤 반응을 보였을 거야.”
샨의 말에 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그 일을 보셨고, 또 샨과 요한이 이리 확신하는 걸 보면 그는 아닐 것이다.
“후-”
유림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정리하자면 그거였다. 연구실에 있던 자신의 자료가 어디론가 넘어갔고 샨은 그걸 해결하기 위해 떠났다. 그리고 그게 클레이즈에 있는 누군가에게 넘어간 사실을 알고 이곳에 왔으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짜 초대장을 보냈다. 거기다 히야스에게 부탁해 저를 도와달라고 한 것이다.
이제 다 이해가 갔다. 히야스 교수님이 가짜 초대장을 아는 것도, 왜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지도, 또 샨이 왜 사라졌는지도 말이다.
대체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이렇게 많이 일어나는 건지.
유림은 착잡한 마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디하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젠 어쩔 건데.”
자신을 향한 말이 아님에도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에 하민이 왜 그러냐는 눈으로 디하르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계속 표정을 굳힌 채,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지금 넌 우리 앞에 나타났고, 우린 이 모든 상황을 알았어.”
“유림의 자료를 가진 이들은 이 학교에 숨어 있고.”
“그리고 그 사람은 우리 복수의 대상이기도 하고 말이지-”
디하르의 말을 잇듯 레이먼과 테오가 입을 열었다.
테오는 그들을 한번 바라보더니 시선을 돌려 다시 샨에게로 옮겼다.
“이건 그 자료를 찾는다고 끝날 일이 아니야.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이 남아 있으니까.”
“알고 있어.”
당연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답하는 샨의 모습에 테오가 혀를 찼다. 역시, 샨이 한 ‘정리’의 의미는 이것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테오는 그가 자신들과 같은 적을 가지고 있단 걸 깨달았다. 적의 적은 동지란 말이 있지 않던가.
“좋아. 그럼 이제 확실해졌군. 중요한 건 우린 적이 같단 거야. 그렇지?”
“그래.”
샨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테오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특유의 호탕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맹 맺자.”
그 말에 모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유림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테오를 바라봤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우리 셋으론 힘들어.”
테오는 자신들의 실력을 깔끔하게 인정했다. 물론, 세 사람의 실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적의 수와 규모를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게 걸렸다. 어쨌든 아군이 많아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러니 도와줬으면 해. 넌 자료를 정리하고, 우린 적을 처리한다. 애초에 그게 그건가?”
“……나쁘지 않네.”
샨이 입꼬리를 말았다.
테오는 그 대답에 호탕하게 웃더니 고갤 돌렸다. 그곳엔 디하르와 쌍둥이가 놀랍다는 눈으로 테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는?”
‘너희는’이라니.
유림의 정보가 넘어갔다는 걸 깨달은 시점에서 이 일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그 누구보다 그때의 일이 반복되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덧붙여 이건 올가미처럼 옭아매는 과거에서 벗어날 기회이기도 했다.
“좋아. 도울게.”
“나도. 더는 유림이 실험실의 쥐처럼 당하는 건 싫어.”
“힘이 된다면!”
심지어 옆에 있던 은하와 하민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림 도와줄 거야!!”
“나도 너희가 괜찮다면 돕고 싶어.”
“좋아쓰-!”
테오는 짝 소리가 나도록 손뼉을 쳤다. 그리고 앞에 있는 유림을 바라봤다. 마치 넌 어떻게 할 거냐는 듯 말이다. 세상에 이처럼 멍청한 질문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내 일인데 내가 빠지는 게 말이 돼? 대신 이거 하나만 짚고 가자.”
모두가 그게 뭐냔 눈으로 바라봤다.
“나는 누가 날 위해 희생하는 것도 싫고, 상처받고 고생하는 건 더 싫어. 그니까 나 때문에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안 할 건데.”
“원래 우리 목적은 그 자식들 잡는 거였어.”
딴죽을 거는 데몽과 테오의 모습에 유림이 이를 갈았다.
“누가 너네 말 하냐? 은하나 하민이 말이야. 솔직히 말해 난 루아네들도 안 했으면 좋겠어, 샨하고 요한, 너도.”
그래. 이미 자신으로 인해 그런 끔찍한 일을 겪었으면 됐다. 굳이 그 일을 지금까지 끌고 올 필요도, 이로 인해 그들이 또다시 상처받는 것도 싫었다.
“림…….”
유림이 무얼 걱정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은하가 그 앞에 쭈그려 앉으며 활짝 웃었다.
“림, 걱정하지 마. 괜찮을 거야. 그리고 너도 내가 이런 일 겪었으면 바로 나섰을 거 아냐.”
“당연하지.”
“그럼 우리도 당연한 거야. 그니까 신경 쓰지 마.”
“…….”
이 바보는 가끔 묘하게 사람 심금을 울린다.
고개를 돌리니 모두가 그런 걱정을 왜 사서 하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뭉클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조금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유림은 이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태연하게 말했다.
“진짜 똥고집들이라니까.”
이 중에서 제일 고집이 센 그녀가 이런 말을 하다니. 어쩐지 그 모습이 웃겨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림은 왠지 쑥스럽고 울컥하기도 해 뭐라 한마디 하려다 그냥 웃고 말았다.
어느새 해가 떴는지 푸르스름한 빛이 방을 밝혔고, 새벽 특유의 찬 공기가 창을 통해 들어왔다.
데몽은 방에 있는 모두를 돌아봤다.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머리가 아팠지만 한 가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들이 든든한 원군이 되었다는 것을.
유림에 대한 의심이 사라져서 그런 걸까. 아니면 원군이 생겨서 그런 걸까. 긴장이 풀리며 뒤늦은 피곤이 찾아왔다.
그는 긴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 연구에 관련된 사람들을 찾는 것. 단, 학교생활도 충실히 해야 해. 그래야지 의심을 받지 않으니까.”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얼추 상황이 정리된 것을 파악한 하민이 손뼉을 치며 방긋 웃었다.
“그럼 일단 학생의 본분답게 공부부터 해야겠다.”
공부라니. 이 분위기 깨는 끔찍한 말은 또 뭐란 말인가.
“공부?”
“이 분위기에 꼭…….”
모두가 지금 무슨 소릴 하냔 눈으로 바라봤다. 은하를 비롯한 일부는 질겁하기까지 했다.
하민은 그런 그들의 행동에 도리어 더 당황하고 말았다. 그의 동그란 눈이 다된 전구마냥 깜빡였다.
“아니, 공부해야지. 안 해?”
“갑자기 공부는 왜?”
“왜긴 왜야. 우리 시험 보잖아, 중간시험.”
“…….”
“…….”
“…….”
에에에에엑?!!!!!
하민의 말에 테오와 레이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건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 방 안에 있던 모두가 경악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잊고 있었다, 시험이 바로 내일이라는 것을!!
비명이 절로 튀어나오고,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경악이 끝없이 이어지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 하민이 쐐기를 박듯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 아직 시험 기간이다- 뭐 이거지.”
***
감겨 있던 덴 케이의 눈꺼풀이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그는 잠기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지,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늘 그래 왔듯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마치 거대한 벽처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식물들. 상쾌한 아침의 기운을 받아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늄을 뽐내고 있었다.
덴 케이는 손을 뻗어 근처의 잎사귀를 만졌다. 싱그러운 늄이 손을 타고 온몸에 퍼져
나갔다.
흐릿했던 시야가 가시고 몽롱했던 머리가 개운해졌다.
그때 그의 키르가 울리며 통신을 알렸다.
덴 케이는 옆에 놓인 키르를 들어 허공에 띄웠다.
“누구지?”
「이사장님, 접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이군.”
진유. 제6번 의자의 주인이자 심부름으로 밖에 나갔던 교수.
케이는 늄을 흡수하며 눈을 감았다. 온몸에 깨끗한 피가 도는 것처럼 개운했다. 정말이지 중독될 정도로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보고는 지금 할까요?」
케이는 그러란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이 보일 리 없음에도 알아들은 건지 키르 너머로 진유의 여유로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곧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끊겼다.
덴 케이는 눈을 떠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슴푸레한 하늘이 어느새 빛을 받아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눈부실 정도로 밝은 아침. 하루가 시작되는 경쾌하고도 가장 활발한 시간.
드디어 모든 교수가 학교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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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