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y A.C RAW novel - Chapter 95
제 95 화
질문. 자신들의 동아리방에 모르는 남자가 제집마냥 앉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일까요?
1. 우리 방이 아닌가 보군. 이대로 나가야겠어.
2. 어디서 온 뉘신지 친절하게 물어봐야겠어.
3. 아니, 모르는 사람이 우리 방에?! 가서 멱살을 잡고 따져야겠군.
4. 도둑이야!!!
마음속에선 3번과 4번을 대답으로 꼽고 있지만, 가까스로 2번을 택한 유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실례지만 누구세요?”
그 질문에 사내가 환하게 웃었다. 그의 눈꼬리가 여우처럼 길게 휘었다.
빗장뼈까지 내려온 층이 진 머리칼, 큰 키와 마른 몸매, 단정할 정도로 다소곳한 자세는 어쩐지 쉽게 접하기 어려운 고급진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유림은 사내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팔꿈치로 디하르를 가볍게 툭툭 찔렀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사내의 정체를 알렸다.
“진유 교수님!”
하민이었다.
언제 왔는지 하민과 은하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방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진유 교수님?
그렇다면 설마 이분이…….
“우리 동아리 고문 교수님?”
그제야 사내, 아니, 6번 의자의 주인인 진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향해 인사했다.
“반가워요. 심심해서 구경차 왔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겠어요?”
꽤나 여유롭게 말이다.
좌식 테이블에 둥글게 모여 앉은 그들은 진유를 바라보며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특히 유림은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설마 이런 정상적인 분위기의 교수님이 있을 줄이야……!
반쯤 감동하고 있을 때, 진유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어왔다.
“궁금한 게 있나요?”
“네?”
“아까부터 계속 쳐다봐서요. 후훗.”
“……아, 아무것도요. 그것보다 말 놓으세요.”
“괜찮습니다. 서로 존중해야지요.”
으아아아아- 후광이다, 후광. 하민에게서 보이던 광채가 느껴지고 있어.
학생과 형 담당 교수님은 닮는 건가? 잠깐, 이건 내가 히야스 교수님과 닮았단 소리잖아.
“그러고 보니, 하민 군 말고는 다들 처음 보는 것 같네요.”
그제야 제 소개를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유림이 고갤 꾸뻑 숙였다.
“죄송해요, 정신이 없어서…….”
“괜찮아요. 저도 그랬는걸요. 그럼 제 소개부터 할까요? 전 진유라고 합니다. 이름은 진이지만 다들 진유라고 부르고 있어요. 6형 담당 교수이며 제6번 의자의 주인입니다.”
그의 자기소개에 네 사람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박수가 끝나자 진유의 왼쪽에 앉은 은하부터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헤헤, 박은하수예요. 은하라고 불러주세요. 1클래스, 4형이에요.”
“반가워요, 은하 양.”
“이덴 디하르입니다. 1클래스, 2형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한유림이에요. 친구들과 같은 1클래스. 그리고 8형이에요.”
유림의 말에 진유의 눈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8형이요? 그럼 올해 입학한 8형 학생이 유림 양이었어요?”
“네? 네.”
“아슈팔 군 혼자서 심심했는데 다행이네요.”
“아슈팔 선배도 아세요?”
“그럼요. 아슈팔 군은 클레이즈 역사상 몇 안 되는 천재니까요.”
……그 정도로 천재인 건가?
유림은 어쩐지 아슈팔의 멍하면서도 평화적인 이미지와 천재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아 미간을 찡그렸다. 그때, 가만있던 은하가 손을 번쩍 들며 물어왔다.
“진유 교수님,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뭐든 물어보세요.”
“저희 동아리, 오늘 처음 모이는 거잖아요. 뭐 안 하나요?”
애초에 잉여로운 생활을 목적으로 잡은 동아리긴 했으나, 그래도 이왕 만든 거 뭐라도 하고 싶었는지 은하가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게요. 뭘 하긴 해야 하는데…… 따로 하고 싶은 거 있나요?”
“파티 하고 싶어요! 아니면 단합식!!”
그 말에 하민과 디하르가 작게 웃었다.
“파티는 좀 거창하지만 단합회는 괜찮은 거 같아요, 친목 도모도 하고.”
하민이 덧붙이자 은하가 한층 더 눈을 빛냈다.
진유는 제자들의 모습에 부드럽게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실로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음~ 괜찮네요. 겸사겸사 앞으로의 동아리 방향을 정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하지만 괜찮겠어요? 이제 곧 엄청 바빠질 거예요.”
바빠질 거라니?
모두의 머리 위에 거대한 물음표가 그려졌다.
“바빠져요?”
“그럼요. 이것저것 준비하고, 주문하고, 또 학생회도 오가야 할 거예요. 흐음…… 우린 뭘 하는 게 좋을까요.”
진유가 계속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유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열었다.
“저희 무슨 일 있나요?”
그리고 이번엔 진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라? 여러분 오늘 그거 회의하려고 모인 거 아니었어요?”
“아뇨, 저흰 동아리방을 받아서 구경차…….”
순간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등을 타고 올라왔다. 정확히는 무언가가 터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지? 동아리 개설 때였나? 8형 수업 때?
아니다, 그보다 좀 더 최근이었어.
“그럼 동아리방을 이제 받은 거예요? 이 난잡한 시기에 방을 주다니……. 이사장님도 너무 했네요.”
진유의 말에 정신을 차린 유림이 고갤 들었다.
“난잡한 시기요?”
“정말로 모르고 있는 거예요?”
진유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열흘 후면 축제잖아요. 정말 모르고 있었어요?”
***
륜과 루아는 지금 복도를 걷고 있었다.
일요일 오전. 아직 9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다.
루아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평소 같으면 방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었을 텐데, 이른 주말부터 이게 무슨 일인지. 그래도 륜과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건 좋았다. 흔한 기회도 아니고 말이다.
루아는 륜에게 총총거리며 다가갔다.
“데몽이 우릴 부르다니. 무슨 일인지 알아요?”
“학생회 일을 좀 도와달래요.”
“학생회 일?”
“요즘 축제 때문에 정신이 없거든요.”
“축제? 아, 그러고 보니 열흘 뒤에 축제라고 했죠? 왠지 두근두근하네요.”
마치 처음으로 동물원에 간 아이처럼 들떠 보이는 모습에 륜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어…… 축제 좋아하세요?”
“그럼요. 륜은 싫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전 루아 씨가 축제를 싫어하실 줄 알았거든요.”
“왜요?”
“파티 같은 거 질리도록 했을 것 같아서요.”
“우리 집은 요란스러운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거기다 사실 저, 학교 자체가 처음이라 이렇게 직접 참여하고 준비하는 것도 처음이에요.”
루아의 말에 륜이 어라?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클레이즈는 학생이 원하면 신분을 숨길 수 있었고, 쌍둥이는 제 가문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제법 큰 가문의 귀족이란 건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디하르가 그들의 기사이지 않던가. 더욱이 레이먼과 루아의 행동, 종종 튀어나오는 고급스러운 어투, 씀씀이만 봐도 그들이 보통 신분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학교가 처음이라고?
보통의 귀족은 인맥 형성을 목적으로 왕립 학교나 거대한 학원 같은 곳에 입학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펠리탄이나 환 같은 제국, 혹은 교육 수준이 높은 국가로 유학을 떠
나는 것도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꽤나 있어 보이는 가문의 루아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고?
“혹시 귀족 아니셨어요?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네, 맞아요. 하지만 학교를 다니거나 유학을 가진 않았고, 일부 친한 몇 가문의 아이들과 가정교사를 불러 함께 교육받았어요.”
“그래요?”
륜은 왜 그런 방식으로 교육했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조금 난처해 보이는 루아의 표정에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가문을 숨긴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왜일까? 무슨 문제가 있어서일까?
아무리 클레이즈가 평민, 귀족 상관없이 지낸다 해도 계급에 대한 어느 정도의 위치는 존재했다. 클레이즈에서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렇기에 귀족의 경우는 자신의 가문을 드러내는 것을 선호했다. 인맥을 형성하기에도 유리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가면 학생회장님께 한 소리 듣겠네요.”
루아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난 륜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동아리요.”
“아…… 그러네요.”
륜과 루아는 1클래스 중 유일하게 가입한 동아리가 없었다.
륜의 경우는 마땅히 들 만한 동아리가 없어서였고, 루아는 륜과 같은 동아리에 들어가려고 눈치를 보다 졸지에 같이 아무것도 안 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종종 학생회에게 동아리 가입에 대한 경고를 받아 왔었다.
륜이 난처하단 눈으로 뺨을 긁적였다.
“마땅히 들고 싶은 동아리도 없는데…….”
“하지만 이제 슬슬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솔직히 학생회도 그렇고, 교수님들도 자주 말씀하셨잖아요.”
실로 클레이즈는 동아리에서 하는 활동이 많았다. 자기들끼리 연구하는 일도 잦았고, 이로 인해 새로운 학문의 길로 빠지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학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랬기에 교칙의 참뜻을 알고 있는 교수들조차 두 사람에게 동아리를 권유한 것이다.
“그건 그렇죠. 표면상 동아리는 의무이고, 동아리제도 있으니까요. 흠……. 이렇게 된 거 축제 전에 하나 드는 게 좋으려나……. 유림이네 동아리라도 들까요?”
“어디든 좋아요. 전 륜하고 같은 곳에 들 거니까.”
루아의 말에 륜이 뚝 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 움직임에 그녀 또한 걸음을 멈추고 그와 나란히 섰다.
짙은 푸른색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루아. 그 태도에 륜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와 같은 곳이요?”
“네.”
“어…… 왜요?”
“글쎄요. 왜일까요?”
루아의 입가에 다소 짓궂은 미소가 번졌다. 륜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에 따라 그의 짧은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어쩐지 륜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게 기분이 좋았다. 좀 더 자주 이렇게 봐줬으면 좋겠는데.
루아가 가까운 미래에 저와 함께 있는 그를 상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기분이 유난히도 들떴고, 재미난 일이 일어날 것처럼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아니다. 심장이 뛰는 건 다른 이유가 더 큰가?
그대로 뒷짐을 진 채, 작게 키득거린 루아가 빨리 오란 말을 남긴 채, 앞서 걸었다.
잠시 후 륜이 저를 따라오는, 반듯할 정도로 일정한 그의 발소리를 들으며 루아가 활짝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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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즈 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