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64
164화
164. 천하의 강국
곧 마부 노릇을 하던 장수가 이왕자 희상의 말을 듣고 공력에 실어 소리쳤다.
“천하의 군웅들은 나 효란왕의 말을 들어라!”
공손앙이 옆에서 속삭였다.
“진 방주, 이왕자 희상이 고왕의 뒤를 이어 효란왕이 되었소. 혼란을 잠재우고, 천하를 태평케 한다는 뜻이라고 하더이다.”
온전한 정신 상태가 아닌 이왕자가 지었을 리가 없으니, 혼마의 솜씨일 거다. 그 의미와 작명의 목적도 태평의 정반대일 것이고.
“개방 방주 진천은 무도한 자로 나의 부군을 시해하였으며, 저들은 나라에 반역하고,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니, 단 한 명도 살려두지 말고 멸살하라.”
중립을 선언한 무림인들은 깜짝 놀랐다.
천하의 고수 중 한 명인 검천신룡(劍天新龍) 여귀가 무림인들을 대표하여 청원했다.
“왕이시여, 우린 개방 방주를 알지도 못하고, 왕을 시해한 일과 무관합니다. 이미 싸움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으니, 왕께서는 우리에게 멀리 물러날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러나.
“너희 강호인들은 하늘 아래에서 아비 없이 태어난 것도 아닐 진데, 왕이 시해된 것에 분노하지 않고, 천자의 비고에 슬퍼하지 않으며, 반도들과 싸우겠다고 목이 터지도록 울분을 토하지는 못할망정, 중립을 선언한 것을 자랑스레 떠드는구나! 이는 무뢰배들과 다름없고, 천하의 안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해충임을 자인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군웅들은 들으라! 허현에 발 하나라도 디디고 있는 자는 역도이며, 어떤 예외도 적용 없이 항복을 불허하며, 참형에 처할 것이다! 또, 내 말을 거역하여 어리석게도 관용을 베푸는 자 또한 극형에 처할 것이니, 이를 명심하고 창칼을 들고 주나라 왕실의 위엄을 세우는 데 앞장서라!”
무림인들은 어이없어하고, 한편으로 분노했다.
“우리가 개돼지도 아닌데, 죽으란다고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아!”
“시발, 좋다, 어디 내가 죽나, 저것들이 죽나, 한 번 싸워보자!”
결국, 무림인들도 허현의 편으로 돌아섰으니, 그들의 참여를 바랐던 모두가 반겼다.
그러나.
‘혼마가 이왕자를 조종하여 혼란을 더욱 키우고 있구나.’
따로 괴군(怪軍)을 만들어 데려오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까?
어쨌든, 천하의 군웅들을 불러 모아 토벌전을 벌이는 혼마의 의도는 천하의 안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더욱 명확해졌다.
나는 군웅들의 반응을 보고, 혁련미림에게 취옥장을 맡긴 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나는 개방의 방주 진천이오! 강호의 무림대회를 더욱 뜻깊은 자리로 만들어준 왕실과 군웅들께 감사드리오.”
공력을 실은 내 음성은 드넓은 논밭을 가득 채우고, 태풍을 동반한 파도처럼 수많은 병력을 휩쓸었다.
즉, 아무도 내 말을 무시하고 생각 없이 경솔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물론.
“진 방주, 뭐 하는 건가?”
“그러다 화살비라도 쏟아지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저들은 방주님의 말을 뒷등으로도 듣지 않을 겁니다!”
“곧 전투가 시작될 거예요! 당장 돌아와요!”
지인들은 의문과 걱정과 염려로 나를 만류하기 바빴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오히려 뒤로 기세를 발산하여, 뒤따라서 오려는 이들을 막았다.
“모두 거기서 지켜봐요. 그리고……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 * *
전쟁이 일어나면 승자와 패자로 나뉜다고 하지만, 실상은 어느 쪽도 이겼다고 할 수 없었다.
둘 다 크나큰 사상자가 생기게 될 테니까.
그동안 나는 그걸 몰랐다.
아니, 외면했다.
싸움은 필요하고, 죽고 다치는 건 더 나은 앞날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통과의례라고 보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야말로 승리다.
물론, 싸우지 않고 끝낼 수 있는 전쟁은 드물다.
전쟁하는 대상이 혼란이 목적인 혼마일 경우에는 더더욱 피할 수 없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었다.
한 명, 혹은 두 명의 죽음으로 나머지는 전쟁의 필요성을 잃고 휴전하는 방식으로.
나는 말했다.
“개방이 천하제일무술대회를 개최하는 목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를 명성과 입소문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직접 무공을 겨루고, 대신 서로 죽이지 않는다는 조건에 따라 가능한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중에 의심과 논란 없이 서열을 정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공만을 앞세워 강함만을 추구하는 건 야생의 짐승들과 다를 바 없기에, 대회를 통해 실력을 증명한 고수들을 중심으로 무림인들의 연합을 구성하고, 의협을 떨치는 데 진정한 목적이 있다 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무림맹을 만들고, 대회에서 뽑힌 고수 중에 다수의 지지를 받는 한 명을 맹주로 추대할 겁니다.”
이때, 뒤에서 누군가 물었다.
“무림맹이고, 맹주고 상관은 없는데,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진 방주가 말하고자 하는 의협이 무엇이오? 경험할수록 이놈의 세상은 좋게만 보이지 않고, 나 또한 잔뜩 비틀려 있어서, 듣기는 많이 들어보았는데, 당최 의협이란 게 뭔지를 모르겠소. 소문에는 있다고 하는데 협객이란 자를 직접 본 적도 없으니, 그냥 다 개소리로만 들리니, 진 방주가 한 번 설명해 보시오.”
상황과 분위기를 따지지 않고 질문을 던진 건, 십괴의 일인 할심독편(割心毒鞭)이다.
성질이 괴팍하여, 심기에 거슬리면 상대가 누구든 참지 않고, 한 번 싸우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지라, 할심독편에게 멸문한 문파가 열을 넘었다.
그러니 의협이란 말에 의문을 가지고, 대답을 제대로 못 하면 나를 죽이기라도 할 듯이 노려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할심독편에 대한 소문만 들었지, 진정 어떤 인물인지 모르기에 섣불리 판단하진 않을 생각이다.
어쨌든, 좋은 질문을 받았고, 다른 이들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대답했다.
“의협이란 오직 악을 미워하고, 선을 추구하며, 도탄에 빠진 백성을 돕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어렵군, 어려워! 악은 누가 정하며, 선은 누가 인정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음을 어찌 판단하며, 때와 상황이 제각각인데, 잘잘못을 어찌 구분한단 말이오!”
할심독편은 당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무림인들 태반이 비슷했다.
하지만 지표 없이 자유분방하게 살아온 강호인들이기에, 예상한 반응이었다.
그래서 무림맹을 구상하는 중에 떠올린 생각을 말했다.
“당신이 만약 천하제일무술대회에서 좋은 결실을 보고, 천하의 고수가 되어, 다수의 지지 속에 맹주가 된다면 이런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순진한 자를 보호하고 약자를 보호하십시오. 정의를 지키고 폭정과 압제에 반대하십시오. 마지막 수단으로만 무력을 사용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응을 하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연민을 나타내십시오. 말과 행동에 정직하고 진실 하십시오. 위험에 직면했을 때 용기와 용감함을 보여주십시오. 훈련하고 준비하며, 더욱 노력하십시오. 행동에 규율과 자제력을 보여주십시오. 겸손을 유지하고 오만하거나 자랑하지 마십시오. 겸손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십시오.”
할심독편은 멍한 표정을 나를 바라봤다.
“만약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면, 무림맹의 맹주든, 맹의 주요 일원이든, 자격이 없음을 인정하고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
할심독편만이 아니라, 다들 복잡한 표정이다.
그러나 나도 단박에 받아들이고, 이해하길 기대하지 않았다.
이제 씨를 뿌린 것에 불과하니, 시간이 필요하겠지.
이러한 결론을 얻기까지 나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뿌린 씨 중에 일부는 살아남아 꽃을 피우게 될 거고, 더 많은 씨를 뿌리고, 더 많은 꽃을 피워 언젠가는 세상천지에 만발하여, 맑은 향기 가득하리라.
물론.
“본래 비무대는 허현의 중심에 마련했으나,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이곳만큼 좋은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당장은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여러분은 강호의 천하제일인이 누구일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잠시만 인내심을 발휘해 주시죠. 그 전에 대회의 개최를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니까. 사적으로 오래전부터 쌓아온 앙금을 털어내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이왕자의 옆에서 조용히 남편을 지지하고, 내조하는 현명한 여인처럼 내내 말없이 바라만 보던 혼마를 노려보았다.
“혼마. 나는 준비가 되었다!”
내막을 모르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상관없다. 혼마가 나서서 나와 단독으로 승부를 겨루겠다고만 하면 된다.
그런데.
“저 역도가 본왕을 능멸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군웅들은 당장 군을 움직여 반도들을 섬멸하라!”
혼마는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은밀히 희상을 조종하여 군웅들을 다그치고 압박했다.
솔직히 혼마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제후들이 자신들을 보좌하는 상대부들과 눈빛을 교환하고, 여러 장수가 상하좌우를 오가며 명령을 내리자 전차와 병사들이 곧 진격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대로라면 전투를 피할 수 없게 되고, 수많은 사상자도 생겨날 터.
그렇다면.
‘먼저 뛰어들 수밖에.’
혼마에게 당도하기도 전에 셀 수도 없이 많은 화살 비가 쏟아지겠지만, 군웅들이 움직이기 전에 혼마와 나, 둘만의 싸움으로 범위를 좁혀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그런데.
“둘째야, 찬물도 위아래가 있고, 장자인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함부로 왕을 자처하다니, 하늘이 경악하고 천하의 백성이 분노할 일이로구나!”
제나라의 무리 속에서 일왕자 희오가 걸어 나왔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욱 지저분해진 상거지꼴이었으나, 제후들은 그를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
희오의 뒤로 안 어르신과 제나라의 장수들이 있고, 선공에 이어 군주가 된 공자 대, 즉 강공이 제지하며 막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희오의 정체를 알았고, 이런 상황도 용인하기로 말을 맞추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이왕자 희상의 반응은?
“이미 오래전에 왕위를 노리고 부친의 목숨을 위협하다, 반역이 실패하여 도망친 자다! 강공, 이곳은 전장이니, 포박할 것도 없이, 즉결 처형하라! 당장 저놈의 목을 치란 말이다!”
그러나 강공은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이미 희오의 뒷배경이 되어주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강공, 왕명을 따르지 않겠다면, 그대 역시 반역자가 될 것이다! 제나라는 스스로 역도임을 증명하고 있으니, 군웅들은 강공을 제압하여 내 앞에 꿇리라!”
하지만 다른 군웅들도 강공처럼 침묵했다.
일왕자 희오의 등장이 그 정도로 심각한 문제일까?
다들 저 정도로 장자 승계를 지지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갑자기 미처 살피지 않았던 게 눈에 들어왔다.
진나라의 유공과 시선이 마주쳤다. 웃고 있었다. 어찌 되었든 나를 대부로 임명하였으니, 명분상 지지하겠다는 의미일까?
그보다는 자신보다 강성한 대부들 문제도 버거운데, 이런 일에 병력이 손실되는 걸 피할 목적이 보였다. 한편으로 희오를 도우면 주나라의 지지도 받고, 대부들도 견제할 수 있으니, 돌 하나를 던져 새 두 마리를 잡는 격이랄까.
희오를 무리에 섞어 데려온 제 강공은 내내 옆에 둔 전화와 숙덕이고 있다. 그리고 전화는 나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를 보냈고.
전화의 독단적 의지인지, 사전에 안환자의 조언을 받은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희상의 명령에 따를 분위기가 아니다.
서쪽의 진나라 군주는 희오 때문이 아니라, 낙읍의 주인인 환공 희게 때문에 희상의 지시를 거부하는 걸로 보였다.
어떻게 아냐고?
부하들이 군주와 뒤쪽에 진형을 갖춘 희게 사이를 계속 오가고 있었으니까.
초나라 간왕 웅중의 태도는 가장 의외였다. 비록 초나라 땅에서는 왕을 자처하고, 오랫동안 주나라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으며, 다른 제후국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의 딸이 혼마가 아끼는 제자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웅사여이기 때문에 희상의 말을 따르려 하지 않는지도.’
간왕의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방관자처럼 구경하는 웅사여가 보였다.
조금도 웃지 않는 그녀는 철탑웅패가 그 옆에 서서 지키고 있음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엇이 그녀를 긴장하게 하는 걸까?
당연히 혼마겠지.
웅사여는 대단히 영악한 여자였다.
모두가 혐오하고 기피 하는 사내와 혼인할 생각도 할 만큼 권력욕이 강하고, 욕망에 충실하기까지.
그런 여자가 혼마의 밑에 있으려고 할까?
‘어쩌면 혼마의 명령으로 군웅들에게 충성을 요구한 게 아니라, 역으로 혼마의 위험성을 알려 희상과 함께 제거할 계획을 세웠던 게 아닐까? 천하의 안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어쨌든 천하의 강국들은 희상과 혼마의 계획을 따르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다른 중소 제후국들은 강국의 눈치를 보는 만큼 그 행보를 따를 테고.
지금 어느 한 나라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그 증거.
판은 깔렸고, 이렇게 된 이상 혼마도 참지 못하리라.
천하의 혼마라도 제자와 철탑웅패의 배반을 알아채고 크게 당황했을 테니.
그런데.
“하하하-!”
혼마가 웃었다.
웅사여와 철탑웅패를 쳐다보고, 다른 군웅들도 둘러보았지만, 당황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는 걸로 보였다.
‘이 모든 걸 예상한 건가, 아니면 예상하지 못했던 것조차 예상한 건가.’
혼마가 초나라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더 정확히는 일왕자 희오를 노려봤고, 웃음소리가 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