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 fragrance goes ten thousand miles RAW novel - Chapter 165
165화
165. 청향만리
나는 즉시 소리쳤다.
“그만-!”
그냥 외친 게 아니라, 창룡음을 펼친 거다.
그렇지 않으면 만인을 제압하는 힘이 있다는 천마야소(天魔野嘯)의 살벌한 위력을 막아낼 수 없었으니까.
움찔한 혼마가 한 걸음 물러나면서 웃음이 뚝 끊겼다. 나도 충돌의 여파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고.
혼마는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뭔가 긴장이 풀린 듯 초점을 잃고 의자에 주저앉는 희상을 지나쳐 마부석에 올라섰다.
그리고.
“나는 이미 너를 아득히 넘어섰다. 이제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으며, 천하에서 나보다 존귀한 사람은 없다.”
혼마의 오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한마디 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랄도 풍년이다.”
쟁자수로 있을 때 배운 말이다.
혼마는 웃었다.
“믿지 않으니, 직접 실감케 해줄 수밖에.”
마부석을 박차고 날아오른 혼마가 허공에서 나를 향해 손을 내뻗는데, 막대한 장력이 쏘아졌다. 내 움직임까지 제약하는 엄청난 압력과 함께.
문제는 장력이 미치는 범위가 너무 넓다는 것.
충분히 거리를 벌린 줄 알았으나, 뒤에서 지켜보는 이들 중에서 절정고수 정도의 무림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죽을 거다.
나만 노리면 되었지, 굳이 기력을 과도하게 소모하면서까지 광대한 범위의 장력을 펼쳐야 했을까?
‘그렇군. 내가 피하지 못하게 하려는 노림수인 거야.’
그렇다면 통했다.
나는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항룡장으로 맞섰다.
광-
어깨에 묵직한 힘이 실리고, 다리는 무릎까지 땅을 파고들었다.
내 상태가 이 정도니, 주위의 풍경이 더욱 엉망으로 짓눌린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항룡장으로 마주쳐 장력의 절반 이상을 상쇄했는데도, 그 여파가 미쳐 고통을 호소하며 나뒹구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피해는 제후들이 몰려 있는 앞쪽에도 일어났다.
혼마는 소속을 가리지도 않을 작정인 모양이다.
사실 제후들이 돌아섰으니, 굳이 사정을 봐주며 싸울 필요가 없긴 했다.
그런 면에서 평가하자면 혼마는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건 아니다.
혼마가 땅에서 빠져나오는 내게 발길질을 날렸다.
더 거세면서 변화가 컸지만, 촌장 사타의 파천암전각이 골격인 무공이었다.
땅이 거대한 크기의 손 모양으로 짓눌린 처음의 장력은 교마의 대수인이 원형이고.
공방을 주고받다 보니 혼마의 무공 대부분이 그렇게 익숙했다.
그 대부분의 무공이 천마의 무공이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 경험하는 낯선 무공도 있었지만, 많지 않았고, 위력도 약했다.
‘혼마의 무공이로군.’
하지만 천마의 무공보다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의미이지, 이곳에서 내가 아닌 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여하튼, 혼마가 완성한 천마신공의 구 할은 천마귀공이 원형이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천마는 대대로 무공에, 그리고 혼마는 술법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의 혼마는 선조들과 달리 술법에만 만족하지 않고, 무공까지 욕심을 낸 것.
쉽지 않은 도전이었으나, 결과적으로 혼마는 성공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과과과광-
혼마의 장력과 발길질이 날아올 때마다 땅이 뒤집히고, 이에 떠밀린 나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뒹굴다가 벗어나길 반복했다.
-비굴하게 발악하는 네 모습을 보아라. 너는 더 이상 내 적수가 아니다. 이건 어리석게도 과거의 영광만을 믿고 내게 대적한 결과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는 현실을 진작에 깨달았어야지.
새사람이 옛사람을 대신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혼마는 현생의 나보다 옛사람이었다. 내가 일존이었다는 주장을 펼친다고 해도 동시대의 사람이니, 역시 내가 옛사람이라 주장할 처지가 아니고.
하지만 정작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왜 갑자기 전음입밀을 쓰는가였다.
지금까지는 누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대놓고 외치더니.
-하지만 나는 영원히 살 수 있는 비술을 알고 있다.
저 말이 하고 싶어서 장강을 들먹인 건가?
-무명자,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나보다 못할 뿐, 네 능력은 높이 평가하고 있다. 나를 따르라. 그럼 네게도 영원한 삶을 주겠다.
갑자기 무슨 수작이지?
-아들아, 너는 내가 품은 뜻을 잘못 알고 있다. 혼돈은 흔하고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느닷없이 나타나는, 새롭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혼돈은 파괴인 동시에 창조이며, 죽은 것의 최종 목적지이자 새로운 것의 근원이다. 즉, 혼돈은 새로운 질서 태동의 징조이며, 창조의 텃밭이니, 네가 진정으로 천하와 백성을 위한다면 나를 따르는 게 옳다.
정말 이런 헛소리로 나를 설득하겠다고?
흡수한 나를 감당하지 못해 잉태하는 방식으로 내보낼 계획을 세우고, 평생 고통에 시달리라며 끔찍한 상태가 되도록 저주를 걸어 출산하고, 낳자마자 죽음을 가장하여 자식과 형제에 대해서 신경도 쓰지 않는 아비와 가족에게 내던져둔 채 떠났으면서 모자 사이라고 주장해?
‘어처구니가 없군.’
환환소혼무에, 주술의 힘을 뒤섞어 추잡한 냄새를 풍긴다고 내가 현혹될 거라 믿는 건가?
이미 강심신공과 환환소혼무를 파훼할 수 있는 청정순환심공과 환락환희무를 창안한 내게?
아마도 성주의 별궁에서 현혹되었던 것이 혼마에게 과분한 자신감을 심어준 모양이다.
사람들이 혼마의 광폭하고 광대한 공격에 휘말려 다치지 않도록, 모두가 더욱 멀리 물러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 묵묵히 방어만 할 생각이었으나.
-혼마, 천하는 본래부터 혼란스럽다. 그렇기에 사람이라면 응당 어짊과 의로움과 예의와 지혜와 믿음을 세워, 조금이라도 바른 마음가짐으로 이롭게 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게 마땅하다.
더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너 같이 천하를 어지럽힐 생각밖에 하지 않는 미친 자가 비틀린 신념으로 난장판을 치게 둘 수는 없어.
혼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명자, 아직도 자존심을 내세우느냐.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나는 무명자가 아니라, 진천이다.
-어리석은 놈.
혼마가 내뿜는 기세가 한층 강해졌다.
그러나 사람들이 충분히 멀어졌으니, 나도 이제는 방어만 하지 않겠다.
광-
장력과 장력이 충돌하고, 나는 이미 만들어진 고랑에 더 깊은 고랑을 만들며 한참을 밀려났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점은, 혼마 역시 나처럼 고랑을 만들며 밀려났다는 것.
충격이 컸던 만큼 혼마의 표정도 가관이다.
-너, 힘을 숨기고 있었구나.
숨긴 적 없다.
이제껏 최선을 다해 방어에 집중했을 뿐이지.
그리고 이제부터는 공격에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제법이지만, 나도 모든 힘을 다 쓴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놀랄 일이긴 했다.
혼마가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광-
확실히 위력이 세졌다.
격돌할 때마다 몸에 가해지는 충격이 한층 증가했고, 주변이 황폐해지는 정도도 더 심해졌다.
-너는 내 덕분에 현생으로 가져온 공력을 믿고, 나보다 기력에서 우위에 있다고 착각했겠지?
덕분은 무슨.
-내 전생의 공력까지 차지하려다가, 능력이 부족해 뱉어냈으면서 무슨 도움.
내가 공력을 잃지 않고 지킬 수 있던 건, 진 상궁을 비롯한 스승님들의 희생 덕분이다.
하지만 혼마는 못 들은 것처럼 자기 할 말만 했다.
-네 잡다한 무공도 나의 무공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너와 나의 진짜 격차는 공력에 있다. 전생에서야 네놈의 무상제일공이 최고였겠지만, 지금은 내 천마신공이 최고거든.
인정한다. 천마신공은 혼마가 나를 흡수해서 획득한 무상제일공까지 참고해서 완성한 무공이니까.
광광-
-제법 잘 버티는구나. 하지만 그런 식으로 대책 없이 공력을 쏟아내면, 얼마나 갈까? 기껏해야 열 번의 공방이면 네놈의 공력과 선천기는 고갈하고, 너는 목내이처럼 말라 죽게 될 거다. 그 전에 내 손에 머리가 터지고, 육신이 네 조각으로 나뉘어 저 논밭의 거름으로 던져지겠지. 아니, 생각해 보니 팔다리만 자르고, 머리는 남겨 두는 게 좋겠다. 벌써 죽어서는 안 되지. 네놈에게 죽음은 징벌이 아닌, 선물이니까. 네놈의 멍청한 추종자들, 허현의 잡것들, 나의 명령을 거부하고, 나를 배반한 자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 내가 이겼고, 내가 옳았다는 걸 지켜본 후에 괴로워하다 죽는 것이 앞으로 네게 주어질 숙명이다.
저주하듯 막말을 내뱉은 혼마는 자신감에 차서 거침없이 공격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맞섰고.
혼마는 내가 익히고, 창안한 무공을 잡다하다고 깎아내렸지만, 기술적으로 나를 압도하지 못했다.
공력도 마찬가지.
한 번은 혼마가, 한 번은 내가, 서로 주고받으며 누가 이기고 질 걸 간단히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박빙을 이루었다.
그렇게 열 번 넘게 공방을 이어가고, 스무 번에 이르게 되자, 혼마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어렸다.
자신은 이제 기력이 달려 전음입밀로 말을 할 여유조차 없는데,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공력이 고갈되고도 남았을 시점에 내 공격은 여전히 위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광-
나는 이전과 비교해 절반을 밀려났고.
“악!”
혼마는 비명까지 지르며 두 배 더 밀려나 땅을 뒹굴었다.
나는 덜 밀려난 만큼 한층 빨리, 그리고 혼마가 일어나기도 전에 지척에 이르러 항룡장을 내질렀다.
광-
혼마는 양팔을 엇갈려 막아냈다.
그러나 나는 이어서 항룡장을 내질렀고, 혼마가 밀려나면 다시 항룡장을 내지르기를 반복했으니, 매번 혼마의 대응하는 방식이 달랐던 만큼, 내가 항룡장을 펼치는 동작도 제각각이었다.
계속 반복하여 공격하다 보니, 두서없던 동작이 바로 잡히고, 규칙성이 생겼다.
태극권, 면장 등의 다른 무공이 가진 장점도 합치면서 공격력을 높였다.
그렇게 항룡장을 교정하고, 늘리고, 발전시키면서 일정하게 반복하게 된 동작의 숫자를 세어보니.
‘열여덟 개.’
그렇다면 오늘부터 항룡십팔장으로 부르는 게 어떨까.
“어떻게, 어떻게 네놈은 기력이 떨어지지 않는 거냐!”
혼마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만신창이가 되고, 내상까지 입어 입가로 흐르는 피를 튀기며 악을 썼다.
이해가 안 되겠지.
그럴 수밖에 없다.
혼마진기, 천마귀공, 그리고 천마신공처럼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힘을 체내에 쌓는 방식에 익숙해졌다면 감을 잡을 수도 없으니까.
사실은 나도 얼마 전까지는 혼마와 다르지 않았다.
힘의 근원이 다르긴 하지만, 특정적인 힘을 끌어와 체내에 쌓는다는 점에서 무상제일공 역시 천마신공과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천마신공과 무상제일공은 기존 무공의 정점에 올라 쌍벽을 이룬, 마치 쌍둥이와 같았다.
그렇기에 무상제일공을 뒤집어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혼마를 이길 수 없었으리라.
즉, 지금 내가 펼치는 무공은 무상제일공이 아니라, 혼천강룡신공(混天降龍神功)이다.
기존 강룡신공에 혼천을 더한 것은, 지극히 감정에 치중된 무공이기 때문이다.
무상제일공은 감정을 억제하다 못해 지울수록 강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자연적이지 않다.
사람도 본래는 자연의 일부.
그러나 기존의 내공심법은 자연에 속하면서도 그 일부만 선별하여 몸에 축적하고,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모든 것인 듯 무공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감정을 되찾고, 그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 중에, 있는 그 자체로 자연에 동화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나의 몸 일부에 특정된 기운을 흡수하여 축적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기운을 그대로 가져와 실시간으로 활용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걸 이해했다.
모든 게 공허하기에 육신에 집착하는 무상제일공이 아니라, 모든 것일 수 있기에 육신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의 힘을 끌어다 쓰는 혼천강룡신공이기에.
-혼마, 나의 공력은 고갈되지 않는다.
그러나 혼마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한편으로 혼마가 힘을 끌어모으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래서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혼마가 가능한 모든 힘을 끌어모아 반격할 수 있도록.
그리고 혼마는 내가 따라오지 못하도록 높이 높이 뛰어올랐다.
물론, 나는 마음만 먹으면 혼마보다 더 높이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땅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죽어라!”
하늘 저 끝에서 혼마가 양손을 모아 장력을 내뿜었다.
선명한 회색빛 원.
마치 측량할 수 없는 크기로 자라난 태고의 괴물이 잔뜩 독이 올라 입을 벌리고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의 보름달이 힘을 잃고 덧없이 추락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나는 물론이고, 그사이에 더욱 멀리 물러날 수밖에 없던 사람들까지 한 번에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강대하고 거대했다.
나는 오른 손목을 내밀고,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잡았다.
우웅-
손목으로 공력을 내보내서 강기를 기반으로 한 유형의 손을 만들었다.
혼천강룡신공을 운용해 주변에서 기운을 끌어와 오른팔로 내보냈다.
점점 밝게 빛나던 오른손이 붉어지고, 그 중심은 새파랗게 달아올랐다.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그저 자연에서 불러왔고, 자연 그대로의 힘으로 분출하고 있으니, 이름 따위는 필요 없고, 무의미했다.
‘가라.’
하늘로 던졌다.
높이를 더할수록 크기를 키워나간 그것은 혼마가 보낸 원보다 커져, 마치 달을 가려버리는 태양과 같았다.
충돌했고, 소리는 없었다.
곧 가지에서 떨어진 나뭇잎처럼 혼마가 추락했다.
혼마는 죽지 않았다.
“살, 살려줘.”
혼마가 생사에 연연하고 있었던가?
그리고.
“중, 중원만이 천하가 아니다. 천하는 더 넓고, 위험하다. 서쪽엔 온갖 신들의 하수인이 날뛰고, 북쪽엔 기괴한 짐승을 조종하는 야인들이, 동쪽에는 천인의 후인이 신선의 힘을 갈고닦으면 중원을 감시하고 있다. 너 혼자서는 하나도 감당할 수 없어. 그러니까……”.
사실 여부를 떠나 혼마의 말이기에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살려다오. 너의 종이 되어 주인으로…….”
목숨을 구걸하며 금지된 주술을 준비하고 있는 건 지극히 혼마다웠다.
그래서 손을 뻗어 눈을 감겨주었다.
동시에 혼마가 발동하려던 주술의 힘을 막아내며 역행시키자, 혼마의 의식은 나도 어디인지 추정할 수 없는 어느 곳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혼마가 환생할 일은 생기지 않으리라.
격공섭물로 혼마의 시신을 파헤쳐진 구덩이로 밀어 넣고, 흙으로 덮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셀 수도 없이 다양한 감정을 제각각 드리운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천하제일무술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 * *
무림맹은 대회를 통해 서열이 정해진 열 명의 고수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진 방주가 초대 맹주를 맡아주시오.”
그렇게 되었다.
희오는 혼이 나간 동생 대신 왕으로 추존되었고, 왕명은 희오의 바람과 군웅들의 예가 조화를 이루어, 기세가 굳건하다는 의미를 담아서 위열왕(威烈王)으로 정해졌다.
“허현을 진 방주에게 식읍으로 내리겠다.”
희상은 내게 여러 번 권유했고, 따로 자리를 만들어 애걸도 했고, 왜 식읍으로 주려는지 이해도 되었지만, 거절했다.
허현은 강호 무림의 고향으로,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고 오가며, 무림맹을 중심으로 천하의 협객을 지원하는 총본산으로 남아야지,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는 전례를 남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만, 희상과 군웅들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경고했다.
“앞으로 관과 무림은 강과 바다처럼 서로 침범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강과 바다는 결국 만나고 합쳐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 과정은 길고도 먼 여정이니, 함부로 물길을 틀고, 선을 넘지 말자는 의미였다.
물론, 나조차도 그 선을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나, 당장은 그렇게라도 말을 해서 서로의 의심과 불안을 해소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나의 경고가 지켜질지 말지, 혹은 말로만 끝나게 될지는 내가 허현으로 다시 돌아올 때쯤이면 알 수 있으리라.
“인사도 하지 않고 야반도주하듯 떠나면 모두 실망할 거예요.”
혁련미림이 밤하늘을 헤치며 지붕을 타고 넘어가는 나를 따라서 몸을 날리며 우려했다.
그래서 물었다.
“내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떠날 줄 어찌 알고 따라온 겁니까?”
“여자의 감이죠.”
혁련미림은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취옥장을 가리켰다.
“선물만 받고 튀는 건 예의가 아닐 텐데요?”
대꾸할 말이 없어 화제를 돌렸다.
“탕 선배는요?”
혁련미림도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목적지는 어딘가요?”
“일단 중원 밖입니다.”
“중원 밖은 넓은데요.”
“그러니 오래 걸리겠죠.”
“그렇게 오래 맹을 비우려고요?”
“나는 그동안 욕심이 컸습니다. 단번에 꽃을 피워내 천하가 좋은 향기로 가득하고, 천리만리 퍼져 나가도록 만들려 했지요.”
“꿈을 클수록 좋은 거예요.”
“맞습니다. 하지만 천하는 넓고, 깊으며, 어떤 꿈이든 이루어지기까지는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죠.”
어느새 멀어진 허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이제 막 씨를 뿌린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거름과 물을 주어 싹을 틔우는 건 내가 아니라 무림맹과 그에 속한 이들의 몫입니다.”
아마도 꽃을 피우기까지는 이후로도 몇 세대를 넘기며, 또 다른 이들에게 맡겨질 터였다.
혁련미림도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잘할 거예요.”
“압니다. 그래서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습니다.”
혁련미림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우리 어디로 갈까요?”
혁련미림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고, 듣고 싶었던 대답이 있었다.
그러나 함께하고 있기에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글쎄요. 일단은 바람을 따라서 가볼까요?”
혁련미림은 살짝 입에 머금었던 검지를 하늘로 들어 보이고는 말했다.
“바람이 안 부는데요?”
그렇다면.
“구름을 따라갑시다.”
하늘을 올려다본 혁련미림은 말했다.
“저 구름이 서쪽으로 가고 있어요.”
“그럼, 서쪽으로 가야겠군요.”
“그런데, 진 상궁님에게 인사하고 안 가요?”
“인사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진 상궁은 내 마음에 있어, 앞으로도 쭉 나와 함께 할 테니까요.”
그리고 희호소 사부님, 임충 사부님, 백온 사부님, 육오 사부님…… 나를 가르치고 지지하고 아껴주었던 분들도 영원히 나와 함께하리라.
혁련미림은 웃었고, 양팔을 크게 벌리며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공기가 참 맑아요. 여행을 떠나기 딱 좋은 날이에요.”
물론, 여정 내내 좋은 날만 계속되진 않으리라.
어느 날은 춥고, 어느 날은 덥고, 어느 날은 황사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하지만.
‘그렇기에 좋은 날은 좋은 날이 될 수 있는 거겠지.’
나는 혁련미림을 보고, 거울을 비추듯 그녀를 따라 환하게 웃었고.
“신나게 달려볼까요?”
맑은 향기가 천리만리 퍼져 나가듯.
“좋아요.”
바람을 느끼며 구름 따라 달려갔다.
大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