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101
제101화
“아, 오, 와…….”
흐르는 신음을 억지로 삼키며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젓가락이 박혔던 등허리로부터 아찔한 통증이 번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불덩이가 척추를 훑고 지나가는 듯한 통증이었으나, 하판석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다. 교주로서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거짓말을 하지 말았어야지.]오군의 서늘한 목소리가 나를 비웃듯이 울렸다.
“좀 살살 꽂든가. 아파 죽겠네…….”
[불평은 말지. 원래는 심장에 꽂을 생각이었으니. 자비를 베풀어 등에 꽂은 것이지.]“진짜 융통성 없네.”
[정직하지 않은 자에게 융통성을 베풀 필요는 없지.]오군의 말투는 몹시 냉소적이었다. 지금까지의 대화로 짐작할 수 있듯, 나와 오군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오군은 정직한 자를 좋아하고, 거짓을 일삼는 자를 싫어한다. 그리고 나는 종종, 아니 자주 거짓말을 한다.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나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군의 권능을 사용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충고 하나 하지.]“무슨 또 충고를……. 그냥 가주시면 안 될까요?”
[거짓된 삶에 너무 몰입하지 말도록 하지. 거짓이 진실을 삼켜버릴지 모르니.]거짓된 삶. 그것은 거짓 신분을 이용하여 학교에 다니고 있는, 피렌체 학생으로서 나의 삶을 의미했다.
[주시하도록 하지.]오군이 경고하듯 마지막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오군은 원래 융통성 없고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놈이다. 소문이 파다해.]그 빈자리를 렉바가 메웠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오군의 험담을 하는 렉바의 마음씨가 고마워서,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바론 삼디랑 사이가 틀어지고 나서 정직에 집착하게 된 놈이야. 불쌍한 친구다. 이해해라.]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오군은 바론 삼디에게 배신을 당한 이후로 정직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론 삼디가 사기를 쳤다고 그랬나…….
자세히는 모른다. 어릴 적 어머니가 해주셨던 이야기의 일부를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오군은 바론 삼디와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 애초에 바론 삼디와 사이가 좋은 로아가 드물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오군의 충언은 새겨듣는 편이 좋을 것 같군.]숙소에 도착했을 무렵, 렉바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벌써 새벽 2시였다. 하루 동안 로아의 권능을 너무 많이 사용한 탓인지,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 * *
산장의 아침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로 시작되었다. 창밖으로 보이던 어둠에 휘감긴 산의 으스스한 풍경은 어느덧 사라지고, 따스한 햇살에 반짝이는 잎사귀들이 아침을 알리듯 살랑거리고 있었다.
셋 중 가장 먼저 눈을 뜬 강지아는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두 잔 탔다. 스승님께 드릴 것 하나, 그리고 자신이 마실 것 하나.
투르르르─!
“앗, 뜨…….”
뜨거운 물을 컵에 담아 내리려는 순간, 요란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화들짝 놀란 강지아는 그만 물에 손을 데고 말았다.
빨갛게 부은 살갗을 대충 찬물로 씻으며, 그녀는 얼른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 중앙에 난 작은 구멍 틈으로, 초인종을 누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
순간 그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가, 곧이어 원래의 무표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태연하게 부엌으로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마저 커피를 탔다.
투르르르─! 투르르르─!
쾅쾅─!
무시하려 했건만, 초인종 소리에 이어 이제는 아예 문을 쾅쾅 두드리기까지 했다. 하는 수 없이 강지아는 다시금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문을 확 밀어젖혔다.
쿵!
“아, 아야…….”
너머에는 하수영이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열린 문에 부딪힌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반란 세력의 주축인 충청교단 간부, 하판석의 딸. 주제도 모르고 교주 자리를 넘보는 오만한 아이였다.
강지아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하수영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무슨 일로?”
말투에서 명백한 적개심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하수영은 날카롭게 치켜세운 눈매로 강지아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도선, 교주님 어딨어?”
“주무시고 계신데, 이따가 오세요.”
“어, 잠깐─!”
강지아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며 문을 닫으려 하자, 하수영이 소리를 지르며 문틈에 발을 끼워 넣었다. 억지로 닫아보려고 했지만 닫히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힘에 있어서는 강지아보다 하수영이 우위에 있었다.
“아, 교주님이랑 얘기 좀 하겠다니까. 그리고 너, 사람 앞에 두고 문 그렇게 닫는 거 예의 아니다.”
“아침부터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 행패 부리는 건 어느 나라 예의인가요?”
“뭐? ……참 나, 이제는 하다 하다 뭔 똘마니 새끼가─!”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려던 하수영이 대뜸 말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은 강지아의 어깨 너머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수영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강지아의 눈앞으로, 방금 막 잠에서 깬 듯한 교주가 비척비척 걸어오고 있었다.
“아침부터 엄청 시끄럽네. 뭐 하고 있었어요?”
“잡상인이 와서 내쫓고 있었습니다.”
“잡상인?”
도선우는 의아하다는 듯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수영이 잔뜩 악이 받친 얼굴로 강지아를 바라보며 씩씩대고 있었다.
“하수영? 네가 여길 왜 왔어?”
“아, 물어볼 것도 있고 할 말도 있고, 아무튼 왔는데 저 새끼가─!”
하수영이 강지아를 삿대질로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도선우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저 새끼?”
“……저 여자가! 지 멋대로 문을 닫으려고─”
“저 여자.”
“저, 저분이. 자꾸 문을 닫으려고 하잖아.”
하수영이 기가 눌린 듯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도선우는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졸린 눈으로 하수영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온 건데?”
“……어제 나 안 자고 있었어. 그거 때문에 온 거야.”
하수영이 다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넸다. 도선우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시선을 강지아에게 옮겼다.
“……음, 누나.”
그가 잠긴 목을 풀며 말을 이었다.
“잠시만 나갔다 올 테니까 삼촌한테 말해줘요.”
“네, 알겠습니다. 편히 다녀오십시오.”
“고마워요. 빨리 다녀올게요.”
강지아는 착잡한 심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도선우는 숙소를 나가 하수영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강지아는 문을 닫고 커피를 마저 따랐다. 펄펄 끓던 물이 어느덧 식어 있었다.
그러는 사이 잠에서 깬 이진성이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가다듬으며 강지아에게 다가왔다.
“여기 침대 좋다. 완전 푹 잤네. ……뭐야, 이 커피는 누구 마시라고 탄 거냐?”
“제 거 타는 김에 스승님 것도 같이 탔습니다.”
이진성이 떨떠름한 얼굴로 잔을 받아 들었다.
“오히려 내가 돈을 줘도 모자랄 판에 왜 시키지도 않은 자원봉사를 하고 있냐. 나야 고맙기는 한데……. 참, 선우는? 아직 자나?”
“하수영과 할 이야기가 있다고 잠깐 나가셨습니다.”
“아침부터 할 이야기가 뭐 그리 많아? 어젯밤에 산에서 눈 맞았나, 하여튼…….”
이진성이 커피를 홀짝였다. 강지아는 기껏 타놓은 커피를 마시지도 않고, 다만 불안한 눈빛으로 이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주님께서는 커피를 안 좋아하시나요?”
뜬금없는 강지아의 물음에 이진성이 고개를 갸웃댔다.
“아마? 일단 나처럼 하루에 몇 잔씩 마시지는 않지. 걔는 어리잖아. 카페인 없어도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잘 돌아갈 때니까.”
“그렇군요…….”
강지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 한 모금 홀짝인 커피가 미지근했고, 썼다.
* * *
산장과 예배당 사이, 거대한 석쇠 불판을 중심으로 목재 식탁과 의자가 둥글게 펼쳐진 공간. 바비큐 파티 같은 것을 하기 위해 윤창수가 제작한 야외 식당이었다.
나는 하수영을 끌고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아무 의자에나 가 앉았다. 하수영은 맞은편에 앉았다.
“어제 안 자고 있었다고?”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하수영이 주저하듯 말했다. 어제 하판석을 감화하기 위해 숙소에 찾아갔을 때, 하수영은 자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표정을 보았을 때, 나와 하판석이 나눈 대화를 얼핏 엿듣기도 한 것 같았다.
그래도 별 상관은 없었다. 하수영이 들어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들어서 나쁠 게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으니까.
“어디부터 어디까지 들었어?”
“……피렌체 다닌다는 거. 그리고 우리 오빠 꺼내 주겠다고 한 거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들어서 나쁠 게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들어줘서 고마운 부분만 들은 셈이었다.
하수영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눈빛에 다양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놀란 기색도 있고, 슬픈 기색도 얼핏 엿보였다.
“진짜야?”
그녀가 물었다.
“뭐가?”
“그거, 뭐야.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찾아온다고 그랬나? 그 말.”
“당연히 진짜지. 오군 앞에서는 거짓말 못 치는 거, 너도 알지 않아?”
“알지, 아는데…….”
하수영이 고개를 숙였다. 알면서도 굳이 물어본 이유는, 내 입으로 직접 진실임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녀가 지금 어떤 심정일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교황청 지하 감옥에 혈육이 갇혀 있다는 점에서, 그녀와 나는 처지가 같았으므로.
“걱정하지 마. 살아 계실 테니까.”
아버지가 화형 당한 직후, 지하 감옥에 끌려간 어머니도. ‘별 없는 밤’, 부두교도들을 무참히 불태워 죽이던 레위단의 단장을 살해한 죄로 지하 감옥에 끌려간 하수영의 오빠도. 전부 살아 있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빈말이라도 고맙네요, 교주님.”
하수영이 웃으며 넉살을 떨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기에 울고 있는 줄 알았는데, 눈가를 보니 눈물은커녕 물기조차 없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얘기 끝났지? 간다?”
“아니, 아니아니, 잠깐만. 물어볼 거 하나 남았어.”
돌아가려는 나를 하수영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녀는 손끝으로 부두 마력을 사출하더니, 주술진을 세 개 그려 융합했다. 두 개의 주술진을 융합하는 것조차 벅찼던 어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향상되어 있었다.
고작 하룻밤 만에 그녀는 이만큼 성장한 것이다.
“어제 연습하다 보니까 세 개까지 융합이 됐는데……. 이러면 원리는 어떻게 계산해?”
놀랄 틈도 없이 하수영이 질문을 던졌다. 조금 난감했다.
두 개의 주술진을 합쳐 만든 융합 주술진의 원리는 어찌어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세 개 이상부터는 설명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각 주술 간의 특징이 서로서로 얽히면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고민하던 찰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굳이 내가 설명을 해줄 필요가 없었다.
“다음 간부 회의가 언제지?”
“7월 아닌가?”
“그때 너도 오지?”
“아마? 아니다. 아마가 아니라 무조건 오겠는데.”
하수영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그럼…… 세 개 이상의 주술진을 융합했을 때, 주술 발동의 원리에 대해서 알아 오기. 7월에 다시 여기로 올 때까지 숙제야.”
“어? 숙제? 아니 숙제는 무슨. 그냥 좀 알려줘. 좀 알려줘요.”
하수영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며 칭얼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주술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어. 스스로 깨치면서 배워야 실력이 빠르게 늘지.”
[원효 같은 소리를 하는구나.]렉바가 끼어들더니,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의아함에 고개가 기울어졌다.
원효가 누군데?
[아, 이런. 그러고 보니 너는 모르겠군. 분서갱유(焚書坑儒)……. 아니다, 나중에 설명하지. 계속해라.]렉바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반복했다. 원효, 분서갱유, 그런 말들은 내가 배운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나중에 설명해 준다고 하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하수영은 고개를 기울인 채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7월까지라고?”
“그래. 7월까지.”
“……그래, 그럼 7월에 다시 오면─”
“어, 잠시만.”
잠시 하수영의 말허리를 잘랐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전화가 오고 있었다. 휴대폰을 바꾸면서 연락처가 초기화되어 버린 탓에, 누구에게서 오는 전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삼촌이나 강지아가 빨리 오라고 전화를 한 게 아닐까 싶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일단 삼촌은 아닌 것 같았다. 삼촌이라면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용건만 말하고 곧바로 끊었을 테니. 아무래도 강지아일 가능성이 높았다.
“누나예요?”
– ……누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맑고, 조금 차가웠다. 겨울의 계곡물 같은 소리였다. 일단 강지아는 확실히 아니었고, 이 목소리는 아마도 김진서였다.
“너구나. 휴대폰 초기화돼서 누군지 몰랐네. 왜 전화했어?”
얼른 해명했다. 수화기 너머로 무서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 그냥, 오늘 뭐 하나 해서.
“친척집 와서 저녁에나 돌아갈 거 같은데.”
– 아.
내뱉은 탄식에서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친척집을 왔다는 건 방금 지어낸 거짓말이었다. 아니, 친척이 있기는 하니까 마냥 거짓말은 아닌 셈인가.
아무튼 적당히 둘러댔다. 부두교 간부 회의를 왔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 응, 근데…… 네가 외동이었나?
“어? 응. 외동이지.”
– 그래? 근데 전화를 받자마자 누나라고 하는 건 무슨 상황일까?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묻어 나왔다. 그러나 결코 호의적인 의미를 가진 웃음은 아니었다. 그제야 내가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른 둘러댈 말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건 이제, 친척 누나인 줄 알고 그랬지.”
– 그렇다고 하기에는 말투가 너무 다정하던데.
“다정은 무슨.”
– 흐음.
김진서가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주말에 친척집에 왔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길래 친척 누나인 줄 알았다. 이만하면 충분히 앞뒤가 맞는 해명이었다.
나는 지금 부두교 간부 회의에 와 있었으므로, 아무리 사소한 의심이라도 미연에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 알겠어. 그럼, 다음에 시간 나면…….
“뭐야? 여자야? 왜 그렇게 쩔쩔매?”
김진서의 말을 자른 것은 하수영이었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수영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정체가 탄로 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수화기 너머로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고, 하수영은 아무것도 모르는 양 순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누구?
김진서가 짧고 간결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까는 친척 누나라고 했으니까, 지금은 친척 동생이라고 하면 되나? 아니, 너무 뻔한 거짓말이었다. 같은 패턴으로 같은 거짓말을 하는 건 초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친척 동생.”
근데, 딱히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사촌 동생이라는 어정쩡한 거짓말로 해명을 했다. 이를 들은 하수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친척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웁……!”
얼른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수영이 버둥거렸으나 아랑곳 않았다. 이건 내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 친척동생은 아닌 거 같은데?
그러나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김진서가 의심이 가득 묻어나는 말투로, 나를 추궁하듯 물어왔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들통 났다는 건, 김진서 입장에서 나를 의심할 만한 명분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지금 당장은 사소한 의심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왜 거짓말을 했냐는 의문으로 시작해서 차츰 의심이 커지기 시작하면 문제가 커질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친척 동생 비슷한 거……?”
– 그럼 그냥 아는 동생이네.
“그런 셈이지.”
– 아는 동생.
김진서가 되풀이했다. 말투는 평소와 비할 바 없이 차갑고 서늘했다. 항상 그녀 앞에서는 거짓말을 하면 들키고 말았다. 김진서의 눈치가 남들보다 월등히 빠른 탓도 있었지만, 그녀 앞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든 탓도 있었다.
– 그래. 월요일에 보자.
전화는 그것으로 끊겼다. 월요일에 보자는 말이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경고처럼 느껴졌다.
“아…….”
머리가 조금 아팠다.
* * *
관자놀이를 짚으며 눈을 질끈 감는 도선우를 본 하수영은 문득 의문을 느꼈다.
“누군데 그래?”
전화 상대가 도대체 누구길래 저렇게 당황하는 걸까?
전화를 할 때 도선우는 어제의 카리스마 있고 강인한 모습이 아니었다. 학교에 널리고 널린 평범한 남자아이들처럼, 이따금 버벅거리기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하는 모습이었다. 하수영은 그런 도선우가 어쩐지 낯설었다.
“내가 피렌체 다닌다는 거 말했었지?”
“어? 응, 알지.”
정확히는 도선우가 아버지에게 말한 것을 엿들었을 뿐이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다. 도선우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피렌체에서…… 어쩌다 보니 만난 애야.”
“만나? 그럼 여자친구야?”
하수영이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도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친구.”
“그냥 친구? 근데 왜 그렇게 쩔쩔매? 너 뭐 약점 잡혔어?”
“너?”
“아, 말실수요. 아무튼, 뭐 약점 잡혔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도선우가 고개를 저었다. 약점을 잡힌 게 아니라면 도대체 뭐지? 학교에서 왕따라도 당하는 건가? 도선우의 성격을 고려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성격 더럽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도선우를 저렇게 벌벌 떨게 만들다니……. 로마니카교 성직자들의 악랄함은 그녀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악마 같은 성직자 지망생들이 바글바글한 피렌체에 잠입한 도선우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피렌체 있으면 안 힘들어요? 거기 나쁜 놈들밖에 없잖아.”
“별로 안 힘들어. 그리고 생각보다 착한 애들도 많아.”
“착한 애들?”
하수영이 고개를 갸웃댔다. 그녀의 기억 속에 로마니카교 신자들은 죄다 악마였다.
학살을 자행한 뒤, 신과 교리를 앞세워 그것을 정당화하는 뻔뻔스러운 족속들. 그것이 로마니카교 신도들을 향한 그녀의 인식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생각보다 착한 애들이 많다는 도선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응. 착한 애들도 꽤 있어. 나쁜 애들도 당연히 있고.”
“다 쓰레기들 아니야?”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그런 거지. 어느 종교나 다 그래. 부두교나, 로마니카교나.”
곧바로 납득하기는 어려웠지만 하수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부터 궁금한 게 많았던 그녀는 곧바로 질문을 이었다.
“근데, 교주님은 신성도 잘 써? 거기는 시험도 다 신성으로 한다던데.”
“주술보다는 훨씬 못 쓰지.”
“그럼 성적은 어떻게 따?”
“로아의 권능을 몰래 쓰면 돼.”
“오.”
하수영이 짧은 탄성을 흘렸다. 주술은 부두 마력을 사출해야 하지만, 로아의 권능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 몰래 사용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듯했다.
로아의 권능을 사용해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는 그것이 무척 참신한 발상처럼 느껴졌다.
“그럼 다 1등이겠네? 로아 님의 권능은 사기잖아.”
“아니, 꼭 그렇지는 않은데……. 1등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그래.”
“그래도, 부럽다.”
하수영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나도 써보고 싶다…….”
그녀는 먼 옛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부두교도가 죽임을 당했던. 새까만 안개가 하늘을 가려 별 하나 보이지 않았던 그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수영의 어머니는 ‘별 없는 밤’, 레위단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져 불타 죽었다. 그녀의 오빠는 그런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레위단장을 암살했다가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녀는 내심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도선우가 아니라 내가 선지자였다면. 로아 님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 도선우가 아니라 나였다면. 엄마도, 오빠도 전부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미안.”
상념에 잠겨 있던 하수영이 고개를 벌떡 들었다. 도선우가 대뜸 던진 사과의 말 때문이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사과를 하는 그를 보며, 하수영은 놀랍기도 했고 의아하기도 했다.
대답할 틈도 없이, 도선우가 갑자기 주술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 야, 너 뭐─!”
사아아아…….
말릴 틈도 없이 주술진은 완성되었다. 흘러나온 안개를 들이마신 하수영은 의식을 잃기 전에 도선우가 그린 주술진을 분석했다. 두 개의 주술을 합쳐 만든 융합 주술진이었다.
하나는 환청이나 환각 계열의 주술인 것 같았으나, 다른 하나는 무슨 주술인지 알 수 없었다.
“아?”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녀는 의식을 잃지 않았다. 대신 머리가 아팠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릴 만큼 격심한 두통이었다.
희미했던 통증은 차츰 뚜렷해졌다.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듯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통의 크기가 커질수록,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도 커졌다.
[들…… 나……?]“너, 너 뭐 한 거야. 뭐, 이상한 소리가 자꾸……!”
[반우보갑리름다, 구달새면이로인아운가? 름선하다지하! 운자그밤여. 럴이나리다. 는가결렉없국바, 지. 돌모나고든는돌로죽아아음교의이차지니로배까. 구자나. 다.] [보오조수디용는오히제가좀물겹해이치요. 급잖선하아! 지다! 주자얼인가른공아제은픈물번것을개같바인으치나니도다! 까. 록!]“이거, 소리. 소리가…… 헉, 우욱……!”
수많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울리고 있었다. 목소리의 말투는 전부 달랐다. 톤도, 크기도 전부 달랐다.
수십의 목소리가 한데 모여 뒤섞이고 엉키면서 소음을 자아냈다. 그건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종류의 소음이었다.
채 2초도 지나지 않아 헛구역질이 몰려왔고, 숨이 막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그녀는 자신의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청은 끝났다. 환청이 들렸던 것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하수영에게는 억겁의 시간과도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하수영은 젖어서 뭉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도선우를 노려보았다.
“너, 왜 갑자기 이딴……!”
“선지자가 되면 그런 소리가 들려.”
도선우가 멍하니 하수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항상 열의나 신념 같은 것으로 들어차 있던 그의 눈빛으로 허무가 엿보였다. 하수영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한 1년 정도……. 잘 때 빼고, 눈을 뜨자마자 그런 소리가 들려. 자기 전에도 들리고.”
“…….”
“사전에 준비를 해놓으면 괜찮다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어. 너무 갑작스럽게 교주가 되고, 선지자가 되고 그랬거든.”
고작 3, 4초 들은 것만으로 숨이 멎고 헛구역질이 몰려왔다. 그런데 이런 소리를 1년 내내, 매일같이 듣는다면……. 정신이 나갈 게 분명했다.
요새 층간 소음 탓에 잠을 못 이루는 하수영은, 소음이 사람을 얼마나 미치게 하는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층간 소음은 로아의 소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는 나도 제정신이 아니어서, ‘별 없는 밤’ 때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미안하다고 한 거고…….”
도선우가 고개를 숙이며 말끝을 흐렸다가, 체념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말하고 보니까 핑계네. 그냥 내가 무능했던 거지, 뭐.”
“아니, 음……. 아니야.”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도선우를 싫어했던 건 실제로 그가 교주로서 무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로마니카교가 성전 전후로 부두교를 핍박했던 것, 그리고 로마니카교 극단주의 단체인 레위단이 학살을 자행했던 것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복수도 하지 않는 그가 한심스러웠고, 또 원망스러웠다.
어느 순간 그녀는 엄마의 죽음과 오빠의 수감이 도선우의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를 향한 원망은 더욱 커졌다. 끝내는 도선우를 밀어내고, 차라리 자신이 교주가 되겠다는 결심까지 했다.
“슬슬 가자.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해놓고 너무 오래 나와 있었네.”
“어? 어…….”
하수영은 멍한 얼굴로 도선우를 따르며, 그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면서 갑작스레 부모를 잃고, 교주가 되고, 선지자가 되고, 몇 초만 들어도 정신이 나가 버릴 것 같은 소음을 견디며, 교주로서 간부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을 쳐왔을 그의 삶을 상상해 보았다.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녀는 도선우가 그저 운이 좋아서 교주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아, 좀 천천히 가요!”
자신보다 키가 한참은 작은 하수영의 보폭 따위는 생각도 않은 채, 저 혼자 성큼성큼 걸어가는 도선우를 보며 하수영이 소리쳤다. 도선우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며 걸음을 기다려 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도선우를 원망했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했다. 로아 님의 권능을 마음대로 부리는 그가 부러웠고, 그런 힘을 갖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근데, 이런 얘기를 왜 나한테 해? 하소연할 사람이 그렇게 없어?”
“그래, 없어.”
“……그렇게 수긍해 버리면 내가 뭐가 돼요?”
하수영이 도선우를 바라보았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조금 측은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