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105
제105화
장로회 및 교사 전용 중앙 도서관은, 학생들도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한 일반 도서관과 연결되어 있다. 일반 도서관과 중앙 도서관 건물 사이에 놓인 구름다리를 건너, 출입 카드를 통해 문을 열면 비로소 중앙 도서관에 다다를 수 있는 구조다.
교사들은 교사증에 출입 카드 기능이 포함되어 있으나, 임원은 사서에게 중앙 도서관 출입 카드를 그때그때 발급받아야만 했다.
방과 후에 도서관으로 향한 나는 가장 먼저 사서에게 출입 카드를 발급받으러 갔다.
“자선의 성호? 새로 뽑혔다는 그 학생인가요?”
자선의 성호임을 밝히고 중앙 도서관 출입 카드를 달라고 요청하자, 사서가 내 얼굴을 훑어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뽑힌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중앙 도서관은 무슨 용무로 방문하려는 건가요?”
“학생회 일로 기획안 작성할 게 있는데, 자료가 필요해서요.”
“아, 기획안……. 네.”
사서의 말투는 무척 딱딱했다. 초면임에도 나를 대하는 태도에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묻어났다.
어째서 사서가 나를 이렇게까지 경계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새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았을 수도 있고, 사서의 성격이 원래 까칠한 것일 수도 있다.
얼굴을 찌푸린 채 키보드를 두들기던 사서가 문득 생각난 듯이 눈썹을 치켜떴다.
“참, 허가증은 가져왔나요?”
“네? 웬 허가증…….”
“장로님이나 이사장님, 아니면 교장이나 교감 선생님한테 허가증 받아 와야 돼요. 이번에 방침이 바뀌어서 없으면 못 들어가요.”
“아.”
중앙성기사단에 들어가려면 대주교급 이상 성직자의 추천서가 필요하고, 중앙 도서관에 출입하려면 또 허가증이 필요하고. ‘중앙’이 붙은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늘 윗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든든한 뒷배가 있거나, 아첨을 기가 막히게 떠는 재주가 있는 게 아니면 도저히 뭘 할 수가 없는 구조였다.
[그게 교계라는 제도를 유지시키는 기반일 것이다.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하면서, 저들끼리 나름의 소속감을 느끼게 하려는 이유도 있을 테고.]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일반 도서관을 의미 없이 배회하던 도중, 렉바가 말했다.
[게다가 너는 이사장과 친분이 있지 않느냐. 그걸 잘 활용하면 될 것으로 보이는데?]“…….”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장 김창원과는 나름 안면을 튼 사이였고, 그에게 허가증을 받아 오면 중앙 도서관에는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기획안을 내일까지 완성해야 하는 상황이라, 나는 지체하지 않고 곧장 이사장실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툭.
“아! ……죄송합니다.”
그러다 돌부리 같은 것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공부를 하던 학생들이 쏘아내는 날카로운 시선을 빠른 사과로 막아내며, 발에 걸린 물건의 정체를 확인했다.
자고 있는 누군가의 발이 책상 너머로 툭 튀어나와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눕듯이 앉아 머리카락을 안대 삼아 빛을 가린 채,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저건 허리를 부수고 목을 뒤트는 자세구나. 요즘 애들은 앉는 자세부터 고쳐야…….]렉바가 한탄하듯 읊조렸다. 요즘 애들이라 하니 세대 차이도 좀 느껴지는 것 같고, 듣기가 조금 불편했지만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야.”
나는 그녀의 머리통을 톡톡 쳐서 깨웠다.
“으응…….”
정인아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털 산발이 되어버린 머리를 대충 쓸어 정리한 그녀가 잠이 덜 깬 눈으로 멍하니 나를 응시했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음…… 음? 어! 뭐야!”
느릿느릿 자세를 고쳐 앉던 정인아가 뒤늦게 놀라서는 호들갑을 떨었다.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던 아이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다시금 우리에게 꽂혔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추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주위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 일단 좀 나가자…….”
정인아가 눈치를 살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도서관을 나가는 그녀를 따라갔다. 나가는 도중에도 공부하는 아이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여실히 느껴졌다.
덜컹─!
도서관 입구 옆, 자전거 거치대에 놓인 허름한 자판기에서 정인아가 인스턴트커피 두 캔을 뽑았다. 하나는 바로 까서 본인이 마셨고, 다른 하나는 내게 줬다.
벤치 위 노랗게 말라붙은 낙엽을 옷깃으로 치우며 자리에 앉은 정인아가 나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너 원래 도서관 다녔어? 처음 보는 거 같네.”
“오늘 처음 와.”
“그치? 널 봤으면 내가 기억을 못 할 리가…….”
그렇게 말하던 정인아가 잠깐 말을 멈췄다.
“좀 앉아! 왜 그러고 서 있어. 불안하게.”
“뭔 화를 그렇게 갑자기…….”
“그냥 앉으라구, 빨리!”
재촉에 못 이겨 마지못해 옆자리에 앉았다. 정인아는 캔 커피를 양손으로 꼭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며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도서관은 왜 온 거야? 공부하러?”
“아니, 학생회 일로 뭐 조사할 게 있어서.”
“아, 학생회……. 난 또, 오늘부터 우리 도선우 씨가 드디어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먹은 줄 알았지. 하긴 네가 그럴 리가 없겠네!”
학생회, 하고 말끝을 흐리는 대목에서 그녀의 얼굴은 잠시 어두워졌다가, 직후 어색한 미소와 함께 밝아졌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자그맣게 떨리고 있었다. 말투도 어딘가 어색했다. 내가 학생회 활동을 하는 게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는 공부하러 온 거지?”
나는 화제를 돌릴 요량으로 물었다. 정인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꼬았다.
“응, 나는 별일 없으면 맨날 도서관 와서 공부해. 하루 종일.”
“그래? 자러 오는 게 아니라?”
장난스레 묻자 정인아가 당황한 듯 시선을 떨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 아까는 잠깐 너무 졸려서 한 20분…… 아니, 10분 정도 잔 거고. 그 전까지는 엄청 열심히 했거든.”
“엄청 깊게 자던데.”
“……나는 짧고 깊게 자는 타입이라서. 원래 공부는 체력 관리도 중요한 거야. 오후에 낮잠도 좀 자고 그래야 밤까지 공부하지.”
정인아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것도 그렇고, 쫑알대는 게 꼭 귀여운 뱁새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 탓에 더욱 기분이 상했는지,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나를 흘겨보았다.
“왜 웃냐! 웃으라고 한 말 아니거든.”
“알겠어, 알겠어.”
“너, 대답하는 게 무슨 애 달래는 것처럼─”
“아이, 알겠다니까. 안 웃을게.”
“……지금도 웃잖아!”
정인아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녀는 교복 위에 사이즈가 무척 큰 아이보리색 후드 티를 입고 있었는데, 화를 낼 때마다 옷이 날개처럼 펄럭거렸다. 그걸 보고 있으니 웃음을 참기가 더 힘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웃는 나를 은근히 쏘아보았다.
이윽고 정인아는 더 이상 화를 내기도 지쳤다는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러다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며 허리를 짚었다.
“허리 아파?”
“아니, 막 아프지는 않은데. 음, 그냥 조금…… 공부를 너무 열심히 했나?”
정인아는 고통으로 손끝을 파르르 떨면서도 억지로 웃음 지으며 말했다.
“자세가 안 좋은 거 아니야?”
“어? 그런가……?”
“지금도 다리 꼬고 있고, 아까 잘 때도 보니까 자세가…….”
내 말을 들은 정인아가 은근슬쩍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그러고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치마를 정리했다.
“이제 안 아파! 그러니까 잔소리 그만.”
“이건 잔소리가 아니고 걱정이지.”
“누가 누굴 걱정해. 너도 맨날 입원하고 그러면서.”
할 말이 없었다.
“……그건 별개야.”
“별개는 무슨! 불리하니까 또 말 돌리지. 그리고 나는 진짜 괜찮아. 요즘 신기술 하나 터득했거든.”
그렇게 말하는 정인아의 손끝에서 얕은 빛이 흘러나왔다. 집중하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극히 적은 양의 신성력이었다.
그녀는 그것으로 엄지손톱 크기의 작은 축복진을 하나, 그리고 손바닥 크기의 축복진을 하나 그렸다. 그려진 각각의 축복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융합되었고, 뿜어진 빛이 그녀의 허리를 어루만지듯 휘감았다.
“짠! 이러면 진짜 안 아프다.”
“……뭐 한 거야?”
나로서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축복을 사용한 건지, 치유를 사용한 건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정인아가 뿌듯하다는 듯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재생 축복이랑 치유를 적당히 합친 거야. 신성력 비율은 7:3 정도? 이러면 진통도 되고, 몸도 조금씩 낫고, 부작용도 거의 없어.”
“비율을 맞출 수가 있어?”
“응. 이렇게, 이렇게 잘 하면 돼.”
신성력의 비율을 조절하면 뭐가 달라지는 건지, 애초에 비율을 조절하는 방법이 있기는 있는 건지.
정인아 말로는 어찌어찌 잘 하면 된다는데, 설명이 너무 빈약하고 불친절해서 무슨 소린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아무튼 신기하지? 나 이걸로 소논문 대회나 나가려구. 1등 해서 상 받아야지. 1등 할 수 있겠지?”
“신기하긴 한데, 1등은 좀.”
“이씨, 그냥 1등 할 거라고 말해주면 안 돼? 자신감이라도 좀 달란 말이야.”
정인아가 너풀거리는 옷깃으로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입가에 장난기 어린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 덩달아 웃었다.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좋네. 1등도 가능할 것 같아.”
“이거 완전 엎드려 인사받기잖아…….”
떨떠름한 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정인아가 고개를 숙여 손목시계를 보더니,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금 허리 통증이 밀려온 듯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며 입을 열었다.
“어, 헐. 나 너무 오래 나와 있었다. 시간 빠듯한데…….”
“아프면 좀 쉬지.”
나는 정인아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결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안 돼! 오늘 쉬면 내일도 쉬고 싶을 거 아니야.”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아? 컨디션 관리한다 치고.”
“그렇게 말하면, 음, 어…….”
정인아가 도서관으로 향하려던 걸음을 멈춘 채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녀는 요새 눈에 띄게 말라가고 있었다. 시험 기간이라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한 것이 분명했다. 저번 일로 알게 된 건데, 그녀는 우울한 일이나 몰두할 일이 있으면 식사를 거르는 안 좋은 버릇이 있었다.
“그래도 오늘 시작한 공부는 끝낼래. 내일은 쉬고. 이게 낫겠다.”
정인아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저러다가 언젠가 또 쓰러지겠다 싶어 휴식을 권한 거였는데, 그녀는 오늘만큼은 죽어도 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시험 당일 날 아프면 어쩌게.”
“에이, 안 그래.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이번 시험은 1등 할 생각이라서 좀 열심히 하는 거지, 시험 끝나면 펑펑 놀 거야.”
“1등?”
정인아의 목표는 터무니없다고 느껴질 만큼 높았다. 아니, 노력하는 걸 보면 마냥 터무니없는 목표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조금 의아했다. 그녀가 공부에 집착하거나 욕심을 부리는 타입처럼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피렌체 1등 정도면, 성기사들도 내 말을 좀 들어주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도 들고. ……그냥, 그냥 목표는 크게 잡아보려고. 1등을 목표로 공부하면 한 20등 정도는 하지 않을까.”
그녀가 머금고 있던 환한 웃음이 차츰 탁하게 흐려졌다. 나는 차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중간고사에서 1등을 하려고 했던 건, 동생을 찾으러 성기사단에 갔을 때 느꼈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서인 모양이었다.
입을 다문 채 정색을 하고 있기도, 대수롭지 않은 양 애써 웃음을 짓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정인아가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야~ 괜히 어색하게 왜 그러냐. 내가 한두 번 이러는 것도 아니구.”
“…….”
“그리고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어! 너나 나나, 구준혁이나 다 그냥 사연 하나씩은……. 음, 아무튼 그렇게 막 정색할 일도 아니라는 거지. 알겠어?”
그녀가 훈계하듯이 말했다. 말투는 장난스러웠고 명랑했다. 괜히 우울해지지 말라고 나를 배려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을 배려할 처지가 아니었고, 나는 배려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빛나는 손끝을 내 머리 위에 살그머니 올렸다.
“너 뭐 하는─”
“가만히 있어봐.”
내가 뱉은 말을 매몰차게 잘라낸 그녀가, 내 머리 위로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축복진인지 치유진인지, 아무튼 뭔가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한 빛이 내 머리를 감쌌다. 잠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가 싶더니, 직후 정신이 맑아지며 시야가 또렷해졌다.
“어때?”
“……뭐가 달라진 거야?”
“정신이 맑아지거나, 피로가 풀리거나 뭐 그런 느낌 없어?”
그러고 보니, 조금이지만 정신이 맑아진 것 같았다. 머릿속에 얹혀 있던 돌덩이 몇 개를 걷어낸 느낌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인아가 티 없이 순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것도 신기술! 평안이랑 치유랑, 이것저것 섞었어. 정신을 치유한다는 콘셉트인데…… 어때?”
“괜찮네.”
“괜찮아? 다행이다.”
정인아가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거 너한테 쓰려고 연구한 축복진이거든. 요즘 피곤해 보이길래.”
“내가?”
“응. 요즘 너 회의도 가고 공부도 하고, 되게 바쁘게 살잖아. 그래서…….”
정인아가 하던 말을 멈추고 시계를 봤다.
“……와, 너랑 얘기하다 보니까 시간 녹았다. 나 진짜 들어간다! 내일 봐!”
정인아가 다 마신 캔 커피를 구겨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뒤, 내게 손을 흔들며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 이사장실로 걸음을 옮기던 도중, 목이 말라서 캔 커피를 전부 마셔버렸다. 그러면서 정인아가 내게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어!”
그 말에 나는 우습게도 위안을 느끼고 있었다.
종종 느끼는 거지만, 정인아는 남을 위로하거나 보살피는 일에 능숙했다.
이런 언니 밑에서 자란 동생은 아주 행복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는 길에 공중 화장실에 들러 마셨던 커피를 전부 토해냈다.
* * *
무거운 걸음을 옮겨 비로소 도착한 이사장실.
“아이고, 이사장님은 지금 회의를 가셔서…….”
나를 반긴 것은 이사장이 아닌 그의 비서였다. 이사장은 현재 학교 내에서 일어난 정체불명의 소동으로 회의 중에 있으며, 회의는 7시 무렵에 끝날 것 같다는 말을 비서로부터 전해 들었다.
지금이 5시 반이었으니, 앞으로 1시간 반 정도는 이사장을 만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1시간 반 동안 이사장실에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고, 차라리 예배당에 들렀다가 다시 오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피렌체를 나와, 삭막한 풍경의 골목을 지나 예배당으로 향했다.
[완전히 헛걸음만 쳤군.]노을조차 사라지고, 골목의 가로등이 하나둘 빛을 뿜기 시작할 무렵에 렉바가 말했다.
괜히 허탈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따금 신기하다 싶을 정도로 일이 잘 풀리는 날이 있고, 경이롭다 싶을 정도로 일이 안 풀리는 날이 있는데, 오늘은 후자인 듯했다.
휘익!
허무에 잠겨 발이 가는 대로 걷던 도중, 찌그러진 캔이 나를 향해 느릿느릿 날아왔다. 고개를 숙여서 피했다.
가만 보니, 맞은편에서 웬 여자가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며 사방에 닥치는 대로 쓰레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플라스틱, 캔, 종이, 고철, 병…….”
달그락!
콜라 캔이나 서류 뭉치, 쇠못이나 소주병. 맞아도 별문제가 없는 것들, 그리고 맞으면 위험한 것들, 자칫 잘못 맞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것들.
여자는 가리지 않았다. 골목에 널브러진 쓰레기봉투를 터트리고, 흘러나온 쓰레기를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 막무가내로 던질 뿐이었다. 여자의 행동에서는 조금의 규칙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광인인가.]렉바가 나지막이 말했다.
여자의 모습은 그야말로 광인(狂人)이었다. 이리저리 뻗쳐 산발이 된 머리에, 초점 없이 붉게 충혈된 눈, 침이 질질 흘러나오는 입…….
상종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걸음을 재촉했다. 여자의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하며 얼른 골목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쨍그랑!
그 순간, 내 발치에 소주병이 떨어졌다. 미치광이 여인은 바닥에 흩어진 녹색 유리 조각들을 한 번, 그리고 내 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았다.
“유리……?”
그러고는 어깨를 덜그럭거리며 나를 향해 느릿느릿 다가오기 시작했다.
텅 빈 눈동자가 내 얼굴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반쯤 벌린 입술 사이로 보이는 이빨은, 인간이 아니라 맹수의 것처럼 날카롭고 뾰족했다. 그 자체로도 위협적인데, 여자는 심지어 왼쪽 손에 깨진 유리 조각을 들고 있었다.
“오지 마세요.”
“유리……? 유리…….”
오지 말라는 경고에도 여자는 들은 체도 않은 채 묵묵히 걸음을 내게로 옮겼다.
나는 한숨을 쉬며, 왼손 소지에 낀 반지를 바라보았다. 중앙에 박힌 유골 보석이 보랏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현재 유골 보석에 각인된 주술은 아마 ‘혼절’ 또는 ‘환각’. 둘 중 뭐가 됐든, 미치광이 여인 하나를 제압하기는 충분했다.
“아, 오늘 진짜…….”
그건 그렇다 쳐도, 오늘은 정말이지 경이로울 정도로 일이 안 풀리는 날이었다.
빠직!
나는 반지를 전봇대에 부딪쳐, 보석에 금을 냈다. 균열로부터 실처럼 가느다란 안개가 천천히 뿜어져 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