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118
제118화
“제안?”
솔깃해서 되물었다. 그 오군이 내게 이런 제안을 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군의 권능은 과거보다 오늘날 더 강력해졌다. 제철(製鐵) 기술의 발전과 무기 제작 기술, 그리고 전쟁의 발전 덕분이다.
검과 갑주에 국한되었던 오군의 권능은 지금에 이르러 화기와 전차에도 손을 뻗칠 수 있게 되었다. 부작용이 극심하다는 단점을 제쳐 두고서라도 오군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건 내게 엄청난 메리트였다.
[그래. 내가 제물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사실쯤은 네놈도 알 테지.]“…….”
[제물을 바친다면 고맙게 받겠지만, 권능도 빌려주지 않는 내가 맨입으로 제물을 받는 건 염치가 없는 짓이지. 선지자를 등쳐 먹는 로아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오군의 목소리는 서늘하고 날카로웠으나, 내면에서는 열기가 들끓고 있었다.
오군은 그 스스로가 정직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것 또한 용납하지 않았다. 적어도 일관성은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융통성도 없이 정직을 강요하는 성격이 마음에 든다는 건 아니다.
“그래서 무슨 제안인데요?”
[나는 네가 비로소 정직해졌을 때 권능을 빌려줄 것이다. 제물을 받는 것도 그때로 하지.]“뭔 개소리야…….”
키이이이이…….
갑자기 쇠들이 비명을 토했다.
섬뜩하고 날카로운 소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주변이 갑자기 더워진 것 같았다. 제물로 바치려고 놓아둔 철제 갑주와 무기가 새빨갛게 달궈져 있었다. 하얀 연기가 가느다랗게 솟고 있었다.
오군이 화났다는 뜻이었다.
“……조금만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 주시겠어요?”
[그래, 알겠다.]말투를 고치자 그제야 쇠들이 잠잠해졌다. 갑작스러운 열기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오군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오군은 쇳소리와 같은 걸걸하고도 날카로운 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부두교의 교주인가, 피렌체의 학생인가. 반드시 둘 중 하나일 필요는 없다.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네가 되어라. 그것이 네가 비로소 정직해지는 길일 것이니.]“어렵네요.”
[정직이란 본디 어려운 것이지.]오군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과 동시에 쇠들의 울음소리도 멈췄다. 오군이 떠나간 자리에는 달궈진 쇠가 내뿜은 열기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손을 저어 열기를 몰아내며, 다른 간부들이 보낸 제물들을 뜯었다.
“오…….”
경상교단의 육은형 간부가 보낸 것은 물이었다. 물이 반쯤 담긴 500ml 페트병 겉에 ‘사하라의 소나기’라는 이름이 네임 펜으로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단 웨도, 그리고 물의 정령이신 그분께 바치면 될 것 같았다.
최상급품으로 칠 만한 것은 하나였지만, 바산 황소의 발굽이나 흑계(黑鷄)의 깃털처럼 상급품에 해당하는 제물도 많이 들어 있었다.
각각 보수와 마리네트에게 바치면 될 듯했다. 바데에게 바칠 만한 제물도 있었다. 육은형 간부가 보낸 제물들은 하나하나 구성이 알찼고 로아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다음으로 염만근이 보낸 제물을 열었다. 겉면에 청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상자를 여는 것만 해도 일이었다.
쿵!
그리고, 열자마자 뒷걸음을 치다 바닥에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이상하게 아프지가 않았다. 너무 놀라서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깜짝이야, 뭐야.”
전라교단의 염만근 간부가 보내온 것은 동물의 사체였다.
북슬북슬한 털이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차마 닫히지 않은 눈꺼풀 너머로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엿보였다. 동공은 가로로 뻗어 있었다. 양의 눈이었다.
사체 위로 염만근이 남긴 쪽지가 올려져 있었다.
[숫양 새깽입니다. 번개 맞아 죽은 것을 어렵사리 구했습니다.] [새깽이는 새끼의 방언이다.]고개를 갸웃대자 눈치 빠른 렉바가 바로 통역해줬다. 염만근의 걸걸한 사투리가 귓전에 울려 퍼지는 듯한 글이었다.
번개 맞아 죽은 새끼 숫양이라면 소보에게 바치는 제물이었다. 이 정도면 최상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수준의 제물이었다.
[나, 소보! 천둥과 번개의 로아로서 소신껏 한마디 하겠다.]“네, 하세요.”
소보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진지했다.
[지금까지 부려 먹었으니 저 정도 제물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안 주면 소보는…… 참을 수 없다!]“당연히 드리죠. 그간 고생하셨으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바보 같은 말투로 엄포를 놓는 소보를 위로했다.
소보의 권능은 때로 어둠을 밝히는 빛이었고, 마수를 태우는 불꽃이었다.
범용성이 높고 위력이 강한 반면 부작용은 적었기에, 나는 지금까지 소보의 권능을 애용해왔다. 그간 소보는 많이 고생했고, 아마 앞으로도 많이 고생할 것이다.
즉, 나중을 위해서 소보에게는 호감을 사두는 편이 좋다. 침묵 속에서 소보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동이다! 나도 앞으로 잘 부탁한다……!]“……네!”
살짝 죄책감이 들어서, 괜히 명랑하게 대답했다.
이후 제단을 통해 제물을 바쳤다. 단 웨도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고, 소보는 감격에 젖어 울먹거렸다.
[선지자여, 소보와 나는 쌍둥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내가 형이다. 그것을 알아주길 바란다…….]그러나 바데는 영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내가 바데에게 바친 제물이 좋은 것이긴 해도 소보나 단 웨도에게 바친 것에 비해 품질이 낮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다음에는 더 좋은 걸로 드릴게요. 지금은 여건이 안 돼서…….”
“그럼요, 알죠.”
[알아주니 고마울 따름이다!]바데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바데도 소보와 마찬가지로 권능의 효율이 좋으니, 미리 호감을 쌓아두는 편이 좋았다.
바데가 섭섭하지 않도록, 간부들에게 다음에는 바람과 관련된 제물을 구해달라고 부탁하면 될 것 같았다.
다음은 보수에게 제물을 바쳤다.
[보수는 힘이 넘친다! 예배당의 기둥을 모조리 뽑아버릴 수 있을 것 같다!]“예? 그건 안 되는데.”
보수는 간만에 제물을 받아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나는 그런 그를 말리는 한편, 윤창수에게 받은 약초들을 제단 위에 올렸다. 그러자 그란브와의 맑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선지자여, 마지막 약초를 제단 위에 올리는 걸 까먹은 것 같아요. 저것도 제단 위에 올려줘요.]“이건…… 약으로 달여서 제가 먹으려고 그랬는데.”
[……쳇, 결국 렉바의 말을 듣는군요. 실망이에요, 정말로!]“아니, 그런 게 아니라─”
[됐어요, 건강이나 잘 챙겨요. 몸도 좀 아껴 쓰고.]그란브와는 토라진 듯 쌀쌀맞은 말투로, 따스한 걱정의 말을 남기며 사라졌다. 그란브와를 마지막으로 간부들에게 받은 제물을 모두 바친 셈이었다.
본래 오군에게 바치려고 했던 철제 갑주와 무기를 제외하고.
“…….”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갑주와 무기를 보며 공연히 생각에 잠겼다.
[부두교의 교주인가, 피렌체의 학생인가.]오군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내가 피렌체에 들어온 이유는, 교황청 지하 감옥에 갇힌 어머니를 구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두교의 교주로서 가진 사명은 아니었다. 순전히 어머니의 아들로서 가진 사명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부두교의 교주로서 가진 사명은 무엇인가. 혹은, 가져야 할 사명은 무엇인가.
[반드시 둘 중 하나일 필요는 없다.]과연 오군이 내게 바라는 정직이란 무엇인가. 알 수 없었다. 그다지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널브러진 제물과 제단 앞에 냅다 드러누웠다.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남는 시간에 주술이나 연습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일찍 자는 것이 나을 거야.]그때 내가 사출했던 부두 마력이 보랏빛 안개로 바뀌어 너울너울 바닥에 내려앉았다. 안개는 흔들리고 흩어지다 이내 모였고, 마침내 형태를 갖추었다.
나타난 것은 새하얀 손이었다.
기다란 손가락은 나뭇가지처럼 삐쩍 말라 있었다. 목소리는 그 손가락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오랜만인가?]“오랜만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 요즘 시간 감각이 많이 희미해졌군. 죽을 때가 되었나, 하하하…….]바론 삼디가 웃었다. 죽음의 로아인 그가 죽음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농담이었던 셈이지만,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정색을 하며 손바닥을 노려보았다. 손바닥이 무안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내 시선을 몰아내려고 했다.
[그렇게까지 노려볼 것은 없지 않나. 이거 참 서운한데?]“몸은 어쩌고 손만 왔어요?”
[교차로에 두고 왔지.]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바론 삼디의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때로는 의미심장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의 말은 언제나 그랬다.
그의 희멀건 손이 허공을 유영하듯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아까 말했듯, 지금 얼른 자는 편이 좋을 거다. 지금 자두지 않으면 내일 아주 피곤할 거야.]“내일……. 내일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괜히 불안해서 물었다.
바론 삼디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마치 대답을 주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글쎄, 그건 내일이 되어야 알겠지. 나도 정확히는 몰라.]“거참, 싱겁네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적당히 새겨들으면 도움이 될 거다. 늘 그랬듯이.]바론 삼디는 내 투정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비명과 울부짖음을 경계해라. 그것은 거짓된 고통의 메아리야.]“…….”
[머리의 말을 믿지 마라.]“또 알 수 없는 말만 하시네요. 손가락 꺾어도 될까요?”
나는 바론 삼디의 손가락을 쥐며 물었다. 그는 안개가 되어 내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안개는 다시 손의 형태를 갖추었다.
어느새 나타난 마르고 길쭉한 그의 검지가 나를 겨누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말 중 가장 직접적인 예언이다. 내일이 되면 알게 될 거야.]“내일…….”
[너무 걱정할 것 없다.]바론 삼디의 손이 안개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안개가 흩어지고 희미해짐에 따라 바론 삼디의 목소리도 덩달아 작아졌다.
그러나 결코 희미하지는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결코 또렷함을 잃지 않았다. 인간의 목소리가 가질 수 없는 신묘한 특성이었다.
[내일은 아주 즐거운 날이 될 테니. 너에게도, 나에게도.]* * *
이른 아침, 회의장에 모인 교사와 교직원들은 총 12명이었다. 3명은 각 과의 교수인 소도진, 하예진, 김복동이었고, 나머지 8명은 전직(前職) 성전사나 성기사로 근무했거나, 혹은 성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전투 인력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김창원이었다.
“갑자기 불러내어 많이 당황스러우셨을 텐데, 이렇게 다들 와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여러분을 불러낸 이유는……. 아, 먼저 이것부터 받아 주십시오.”
지이이익─
김창원은 회의실 원탁 위에 올려두었던 배낭의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모세의 떨기나무 가지’였다.
하나만 해도 값이 상당할 그것을 김창원은 무려 11개나 꺼내 들었고, 불러낸 교사들에게 각각 하나씩 주었다. 교사들은 영문도 모르고 그것을 받아 들었다.
“사탄교 색출 작업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사탄교도 입장에서 보기에, 지금 상황은 아주 못마땅할 겁니다. 대충 겁주면 분열하고 흩어질 줄 알았던 우리가, 오히려 사탄교를 색출하기 위해 똘똘 뭉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교사들은 의아하다는 듯한 얼굴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김창원이 무슨 말을 하려고 자기네들을 여기에 부른 건지, 아직도 짐작이 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아마 조만간 큰 말썽을 하나 피우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탄교도가 사건을 일으켰을 때에는 언제나 CCTV며 보안 시스템 같은 것이 먹통이 되었죠. 그때에 가서는 휴대폰이나 무전기와 같은 전자기기 또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탄교도가 지나간 자리의 CCTV는 언제나 부서지거나 망가져 있었다. 보안 시스템도 마찬가지였다. 사탄교도는 늘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전자기기들을 먹통으로 만들었다.
“여러분께 떨기나무 가지를 드린 것도 그때를 위한 대비입니다. 전투에 있어 유능하신 여러분이 서로 연락을 취하며 움직인다면, 학생들을 조속히 대피시키는 것은 물론 적을 제압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고…….”
그때, 김창원이 말을 멈추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했다.
손바닥에 묻어 나온 피를 휴지로 적당히 닦아낸 뒤,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반대로 연락을 취하지 못하게 되면, 제일 우선 되어야 할 학생들의 대피조차 이뤄지지 못할 가능성이 높지요.”
김창원의 눈에서 탁한 이채가 반짝이고 있었다. 두려움과 신념이 섞여 만들어진 빛이었다.
그가 첫째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학생들의 인명 피해였다. 교사의 과실과 미흡한 대처로 인해 학생들이 피해를 보는 일만큼은 결단코 없어야 했다.
그렇기에 김창원은 전투가 가능한 교사들을 주축으로 한 교내 조직을 꾸리려고 했으며, 그 선행으로 떨기나무 가지를 보급하여 그들만의 연락망을 구축한 것이었다.
“지금 당장 지원해드릴 수 있는 게 이 정도밖에 없어 정말 죄송스럽습니다. 이것조차도 갑작스럽게 준비한 것이라…….”
“아이고, 아닙니다. 이만하면 충분하고 남습니다, 이사장님.”
“그럼요. 사탄교도 그놈이 뭐 대숩니까. 방심하지만 않으면 그런 놈은 한 주먹거리도 아닙니다.”
김창원이 고개를 숙이며 하는 말에 몇몇 교직원들이 마주 고개를 숙이며 다급하게 말했다.
김창원은 고개를 들며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인자하고 온화하지만, 그럼에도 심지 굳은 신뢰가 느껴지는 묘한 웃음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만 믿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김창원은 교사들에게 떨기나무 가지를 하나씩 들려서 교무실로 돌려보냈다. 한 명 한 명에게 각기 다른 격려의 말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교사들은 김창원의 인품에 새삼스러운 감탄을 느끼는 한편, 이사장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나름의 자부심까지 느끼며 교무실로 돌아갔다.
“죄송하지만, 소도진 선생님은 이사장실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모든 교사들이 돌아가고 오직 소도진만 남았을 때, 김창원이 소도진에게 건넨 말이었다.
소도진은 영문도 모른 채 김창원을 따라 이사장실로 들어갔다. 책상을 뒤적거리던 김창원이 소도진에게 건넨 것은 웬 시약병이었다. 병 안에 든 액체는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성유다 전 추기경님이 만든 시약인데, ‘계약’ 흑마법을 정화하는 효능이 있지.”
‘계약’은 인간을 악마종, 또는 인간형 마수로 만드는 흑마법이다. 이 흑마법 탓에 수많은 성직자들이 자신의 검으로 동료의 심장을 찔러야만 했다. 성직자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흑마법이 바로 ‘계약’이었다.
“아직은 개발 단계라, 이미 악마종이 되었거나 마수가 된 자를 사람으로 되돌릴 수는 없어. 그러나 악마화, 마수화의 진행을 잠시 멈출 수는 있지.”
“저번에 도난당했다던 그 시약이군요.”
“그래. 이사장실보다는 연구실 쪽이 보안이 허술하니까, 그쪽에 있는 하나를 훔친 모양이야. 아마 사탄교도의 짓이겠지.”
김창원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시약병을 소도진에게 건넸다. 소도진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저 뒷짐을 진 채, 멀뚱멀뚱 시약병에 담긴 빛나는 액체를 쳐다보고 있었다.
“받게.”
“갑자기 그렇게 받으라고 하시면……. 이유라도 말씀해 주시지요.”
“이 시약을 지켜 주었으면 하네. 유사시에는 자네 재량하에 사용해도 되고.”
“…….”
갑작스레 중책을 떠맡게 된 소도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김창원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그저 지그시 웃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것을 은퇴한 지 한참 지난 늙은이의 손에 둘 수는 없잖은가. 현직 종사자인 자네 손에 있는 편이 훨씬 안전하겠지.”
그렇게 말하며 김창원은 소도진에게 억지로 시약병을 쥐게 했다.
“무엇보다, 나는 이미 판단력이 흐릴 대로 흐려졌어. 시약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게 최선이지만, 만일 그런 상황이 온다면…… 아마 내 판단에는 사적 감정이 개입되어 있을 거야.”
“이사장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달리, 저는 전혀 냉정하지 않습니다.”
소도진은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김복동에게 맡기는 것이 나을 겁니다. 보기와 다르게 판단이 날카롭고 이성적인 친구입니다.”
“김복동 선생에게는 이미 같은 제안을 했던 적이 있어. 그 친구는 자네가 이 일에 적합할 것이라 판단하며 거절하던데. 자네 말대로 판단이 날카롭고 이성적인 그가 자네를 적극 추천했으니, 자네가 이 일을 맡는 것이 옳지 않겠나?”
김창원의 얼굴에 미소가 깊어졌다. 소도진이 당혹스럽다는 듯 시선을 바닥에 내리깔았다. 이제 더는 거절할 명분이 남아 있지 않았다.
소도진은 결례를 무릅쓰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두렵습니다. 시약의 사용이 온전히 제 판단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너무 부담스럽고, 또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생각하면…….”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김창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시약병을 쥔 소도진의 왼손에 양손을 포갰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자네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은 나니까. 그러니 부담 갖지 말게.”
그렇게 말하며 소도진을 바라보는 김창원의 눈빛은 확신과 각오에 차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