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13
제13화
1. (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2. 고해한 지 (며칠, 몇 주일, 몇 달) 됩니다.
3. 고해를 함. 그다음,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
4. (신부님의 보속과 말씀을 듣고) 감사합니다.
서울 서부, 어느 성당의 고해소. 그 앞에 적힌 문장을 남자는 하나하나 유의 깊게 정독하고 있었다. 남자는 적힌 글귀대로 성호를 그으며 입을 열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첫 고해입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신께서 용서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뻔뻔스럽게 이 자리에 찾아왔습니다.”
남자는 죄를 고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흔 둘의 죄 없는 가축을 죽였고, 여섯의 사람을 죽였으며, 그 여섯 중 셋은 성직자였습니다. 대주교 둘, 추기경 하나.”
“……신자님? 거짓을 고하시면 안 됩니다.”
창살문 너머, 사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고해가 거짓이기를, 장난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목소리였다.
남자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곧, 나는 수십의 사람을 죽일 것입니다. 이 밖에 앞으로 지을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만한 아량이 있으시다면.”
드르륵!
사제가 창살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신성을 모독한 고해자의 낯짝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고해자가 있었을 자리에는, 고해자 대신 죽은 토끼의 사체가 머물러 있었다.
“아아, 신이시여…….”
사제는 두려움에 몸을 떨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 * *
“야, 너 1등이더라? 어떻게 했냐?”
“어쩌다 보니.”
악마종 퇴치 실습이 끝난 다음 날 아침. 자습을 하고 있던 내게 구준혁이 다가왔다.
어떻게 1등을 했냐고 묻는 말에 나는 대충 얼버무려 대답했다. 성하연과 김라희와의 치열한 심리전과 배신극을 전부 설명하면 말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았다.
“정인아가 너 재수 없대. 왜인 줄 알아?”
“왜?”
“운 좋아서 진단평가 1등. 어쩌다 보니 실습 1등이라.”
“사실인데 어떡해.”
“오, 정인아가 왜 너보고 재수 없다 그러는지 알 것 같다.”
진단평가는 정말로 운이 좋았다. 렉바의 도움이 없었다면 1등은커녕 중위권도 벅찼을 테니까. 실습도 정말 어쩌다 보니 1등을 했던 거다. 내 말에 거짓은 없었다.
남들이 듣기에는 재수가 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도 다 사정이 있다. 남들에게는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라 에둘러 표현할 뿐.
“근데 너는 아침마다 나와서 공부하냐? 안 피곤해?”
묵묵히 문제를 풀고 있자니, 구준혁이 물었다.
“피곤해도 그냥 하는 거지. 너도 맨날 7시 30분에 오잖아.”
“나야 뭐. 일찍 와도 공부는 안 하니까.”
그러고 보니 구준혁이 공부를 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차피 와서 떠들 거면 뭐 하러 일찍 오냐. 차라리 잠을 더 자든가. 너 수업 시간엔 또 졸잖아.”
“아니 이게, 아침엔 그냥 눈이 떠진다니까? 근데 수업 들으면 졸려. 이상하게.”
“아, 그래.”
들으나 마나 한 이야기였다. 나는 대충 흘려듣고 공부에 열중했다.
평소 같으면 쉴 새 없이 말을 걸며 나를 방해했을 구준혁이 오늘따라 조용했다. 잠을 덜 잔 모양인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 있었다.
그렇게 8시 15분이 되었을 때, 낯선 사람이 교실에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하예진 선생님 대타로 나온 유정학입니다. 조회 시작하겠습니다.”
하예진은 어디 가고 왜 유정학이 조회를 하지?
다른 아이들도 나와 같은 의문을 느꼈는지, 의아한 얼굴로 유정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새벽, 서울 서부 지역에 있는 성당에 사탄교도가 나타났고, 하예진 선생님을 포함한 몇몇 분들이 그쪽으로 파견 근무를 가게 되었습니다. 하여 오늘 조회는 제가 합니다. 근무가 길어지면 내일까지 제가 할 수도 있고요.”
이어진 유정학의 설명으로 의문은 풀렸다. 아이들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당장은 파견을 나간 선생님들이 너무 많으셔서, 단축 수업이 이뤄질 예정입니다. 11시 30분 무렵에 끝날 것 같습니다. 이상 전달 사항 없습니다.”
유정학은 딱딱한 조회를 마치고 교실을 나갔다.
날씨가 좋다는 둥, 밤길에 사탄교도에게 납치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둥. 조회마다 이런저런 잡설을 늘어놓던 하예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간결한 건 좋았지만 어딘가 허전했다.
“아으. 쌤이 뭐래? 자느라 못 들었다…….”
책을 꺼내 다시 공부를 하고 있으니, 정인아가 졸린 눈을 비비며 다가와 말했다.
그녀도 구준혁과 마찬가지로 잠을 잘 못 잔 듯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다.
“오늘 단축이래. 11시 30분에 끝난다는데.”
“아 그래? 잘됐다. 마침 졸렸는데…… 집 가서 좀 자야겠네. 피렌체 오고 나서 너무 바빠진 것 같아…….”
그녀가 하품을 하며 힘없이 말했다. 멀찍이 대화를 듣고 있던 구준혁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너도 못 잤냐? 나 어제 3시에 잠. 4시간밖에 못 잤어.”
“난 3시간밖에 못 잤거든.”
“진짜? 야, 그러다 죽어. 그래도 4시간은 자야지.”
나는 그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둘은 마치 서로의 수면 부족을 자랑하듯 떠들었다. 나름 성장기 고등학생인데 하루에 6시간 정도는 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엔, 나도 어제 4시간밖에 못 잤다. 7년 전에 생긴 불면증 탓이었다. 피차 수면 부족이긴 마찬가지였다.
“단축이니까 오늘은 빨리 집 가서 자야…… 아니다. 야, 점심에 나가서 밥 먹을래?”
수면 패턴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구준혁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나가서?”
“오늘 급식도 없잖아. 나 오늘 점심 먹고 들어가야 돼.”
“음…….”
정인아가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든가. 근데 어디서?”
“바로 앞에 양식집 하나 생겼잖아. 엄청 맛있다는데. 가격도 싸고.”
“오! 괜찮다. 나 거기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도선우, 너도 가지?”
구준혁이 내가 보고 있던 책을 확 덮으며 물었다. 공부 그만하고 대답이나 하라는 의미였다.
나는 자취를 하기 때문에, 일찍 집으로 돌아가도 할 게 없었다. 기껏해야 책을 읽거나, 렉바와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고작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같이 점심을 먹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 가자.”
“그럼 먹고 해산? 아님 먹고 나서 좀 놀래?”
구준혁이 내심 기대하듯 물었다. 아까 피곤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구준혁은 공부보다 노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인 것 같았다. 이맘때 학생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놀 생각에 신난 구준혁과 달리, 정인아는 아직도 피곤에 절어 있었다. 그녀는 연신 하품을 하다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나 오늘 진짜 너무 피곤한데. 밥만 먹고 그냥 해산하자.”
“그러게 적어도 4시간은 자야 한다니까. 뭐 그럼 그냥 밥만 먹고 해산하든가.”
구준혁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어느덧 1교시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실습이 없었고, 전부 이론 수업이거나 자습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틈틈이 활용하여 시험 공부를 했다. 정인아와 구준혁은 계속 잠만 잤다.
얼마 뒤, 예정대로 11시 30분에 모든 수업이 끝났다.
“아마 내일은 정상 수업일 겁니다. 오늘은 다들 집 가서 쉬시면 됩니다. 내일 늦지 말고 오시고.”
유정학의 짧고 성의 없는 종례를 끝으로, 학생들이 가방을 챙겨 우르르 교실을 나갔다.
오전 내내 기운이 없어 보이던 구준혁과 정인아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기운을 되찾았다. 그들 둘은 짜기라도 한 듯 일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도선우, 나가자. 밥 먹게.”
“그래.”
“공부도 좀 적당히 하고. 정인아가 너보고 맨날 재수 없다고 그런다니까?”
“야. 내가 언제 그랬어? 죽을래, 너?”
구준혁과 정인아가 언제나처럼 티격태격했다. 나는 보던 책을 덮어 가방에 집어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을 나가 복도를 걷는 순간까지, 정인아와 구준혁의 만담은 계속되었다.
“얘들아.”
그때 누군가 뒤에서 우리를 불렀다. 우리는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배성현이었다.
그의 곁에는 패거리들이 시끄럽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밥 먹으러 가는 거지? 같이 가자.”
“엥? 굳이 너네랑? 우리가 왜?”
정인아가 진짜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평소와 달리 말이 직설적이었다. 피곤한 탓에 생각한 그대로 말이 나오는 듯했다.
배성현은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으나, 이내 가까스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도 말했잖아. 그냥 친해지자는 거지.”
“음, 솔직히 가기 싫은데. 너네가 살 거 아니면.”
정인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살 거야, 당연히. 최근에 좋은 일도 있고 해서.”
배성현이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그래?”
“아니, 야. 사준다는데 당연히 가야지 뭘 고민하냐. 자자, 얼른 밥 먹으러 갑시다.”
정인아는 여전히 탐탁지 않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고, 구준혁은 눈을 빛내며 배성현을 재촉했다. 배성현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패거리를 이끌고 우리를 지나쳐 앞장서 걸었다.
배성현의 평소 행실이 어떻든, 밥을 사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설령 친해질 생각이 없더라도 밥만 얻어먹고 내빼면 그만이었다.
이러든 저러든 손해 볼 건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배성현 패거리를 묵묵히 뒤쫓았다.
“무조건 비싼 데로 간다. 무조건.”
그 와중, 구준혁은 저 혼자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으며.
“저렇게 몰려다니면 안 쪽팔리나.”
정인아는 배성현 패거리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흘겨보고 있었다.
* * *
이윽고 배성현의 안내에 따라 식당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은 정인아와 구준혁이 근엄한 얼굴로 메뉴판을 살폈다.
한참 메뉴판을 살피던 그들의 얼굴이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거 버그냐? 0이 하나가 더 있는 거 같은데?”
구준혁이 가격을 보곤 아연실색하며 말했다. 정인아는 말없이 입만 벌리고 있었다. 말도 제대로 못 할 만큼 놀란 모양이었다.
배성현이 우리를 데려온 곳은, 피렌체에서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 위치한 파인 다이닝(Fine dining) 레스토랑이었다. 테마는 이탈리아 음식.
가격은 인당 기본 20만 원에서, 많게는 40만 원을 넘어가기도 했다. 결코 학생이 올 만한 곳은 아니었다.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 dBP 회장의 아들인 배성현이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데 처음 오나 봐. 주문하기 어려우면 그냥 내가 할게.”
“아, 응.”
결국, 구준혁과 정인아는 메뉴를 고르지 못하고 배성현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배성현은 종업원을 불러 능숙하게 음식을 주문했다. 자주 와본 티가 났다.
“아, 도선우. 네 것도 그냥 내가 주문했어. 괜찮지?”
“상관없어.”
“그래. 어차피 모를 테니까.”
배성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모를 테니까’라. 무슨 의미인지 알 만했다.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날 무시하든 말든, 어쨌거나 결제를 하는 건 배성현이었으니까.
실제로 잘 모르기도 했고.
이윽고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전채와 수프, 생선 요리에 이어 메인 메뉴까지. 맛은 물론이고 플레이팅까지 전부 고급스러운 음식들뿐이었다.
정인아와 구준혁은 기죽은 얼굴로 포크와 나이프를 달그락거리며 음식을 먹었다. 보는 내가 다 체할 것 같았다.
“그렇게 먹는 게 아닐걸.”
만족스럽게 식사를 하고 후식을 먹던 도중, 배성현이 나이프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응? 뭐가.”
“시럽이랑 같이 떠서 먹는 거야. 섞어서 먹는 게 아니라. 이탈리아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먹으면 뺨 맞는다, 너.”
“아하, 고맙다.”
배성현이 식사 예절을 지적했다. 나는 빙긋 웃었다.
애초에 이러려고 우리를 식사에 초대한 모양이었다. 재력을 과시하고, 식사 예절을 가르치며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과연 배성현다운 생각이었다.
나는 배성현의 말대로 시럽을 그대로 떠서 먹었다. 이렇게 먹나 저렇게 먹나, 맛에 별 차이는 없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지적이야.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거지. 어이없어. 돈 자랑 하려고 불렀나…….”
정인아가 내 옆에서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작아서 배성현에게 들리지는 않았다.
뭐라 말하고는 싶은데, 대놓고 말할 깡은 없으니 소심하게 중얼거린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정인아와 구준혁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웠다.
“어째 기분이 더 안 좋아진 것 같네.”
“나도. 근데 음식은 맛있었어.”
구준혁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정인아가 그를 어이가 없다는 듯 흘겨보았다.
배성현은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고 있었으며, 패거리들은 그 곁에서 시끄럽게 노닥거리고 있었다.
종업원 몇몇이 그들을 아니꼬운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패거리들은 아랑곳 않았다.
그때, 의기양양하게 카드를 꺼내 든 배성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드가 정지됐다고요?”
“네. 다른 카드 없으신가요?”
종업원이 직업적인 미소를 입에 머금은 채로 물었다. 배성현이 황급히 지갑을 뒤졌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현금과 교통 카드, 학생증만 있을 뿐 다른 카드는 없었다.
“자, 잠시만요.”
배성현은 휴대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본 건 아니었지만, 나는 왠지 전화 상대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배정환이겠지.
“아버지, 카드가 정지됐다고. 네? 단축이고 어머니도 깨어나셨으니까 그냥 애들 밥이나 사주려고 그런 건데. 과소비가 아니라 그냥, 네. 아니 말대꾸가 아니구요. 하, 아니 한숨 쉰 거 아니에요. 숨이 좀 차서…….”
우리 앞에선 어깨를 잔뜩 세운 채 거들먹거리던 그조차, 아버지 앞에서는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수화기를 붙잡고 쩔쩔매던 배성현은 이내 망연자실한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인 배정환 쪽에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듯했다.
“아.”
배성현이 나지막이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분위기가 싸늘했다. 늘 미소를 머금고 있던 종업원조차 딱딱한 얼굴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전부 무전취식 현행범으로 체포를 당할 듯했다.
“그냥 이걸로 결제해 주세요, 그럼.”
나는 하는 수 없이 내 카드를 내밀었다. 따지고 보면 내 카드는 아니긴 하지만.
종업원은 카드를 받아 긁더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아! 결제 완료됐습니다. 혹 주차권 필요하신가요?”
“네? 아뇨.”
차도 없고, 운전면허도 없다. 주차권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언제나 와주심에 감사합니다. 가는 길 살펴 가십시오.”
종업원이 한결 깍듯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한편, 다른 아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섣불리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뭐 해. 나가야지.”
선 채로 굳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아이들은 떨떠름한 듯, 놀란 듯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식당을 나오던 도중 정인아가 내 곁에 따라붙었다. 그녀는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아니, 너 괜찮아? 엄청 많이 나왔잖아.”
“괜찮을걸.”
“‘괜찮을걸’은 뭐야. 괘, 괜찮은 거 맞지?”
당연히 괜찮다. 이건 내 돈이 아니니까. 배정환이 내게 쓰라고 준 카드다.
따지고 보면 배성현 돈으로 결제한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성현아, 선우한테 잘 먹었습니다~ 해야지?”
“…….”
배성현은 고개를 숙인 채 힘없이 터덜터덜 걷고 있었고, 구준혁은 그런 그를 놀리고 있었다.
저러다가 한 대 맞겠다 싶었지만 배성현은 의외로 얌전했다. 카드가 정지되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구준혁을 때릴 힘조차 없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배성현의 카드가 정지된 것도 따지고 보면 나 때문일 수도 있겠다. 배성현에게는 살짝 미안했다.
진짜 ‘살짝’만 미안했다.
* * *
단축 수업 덕에 일찍 기숙사로 들어온 성하연은, 어제 있었던 악마종 퇴치 실습의 결과를 곱씹었다.
100조는 압도적인 격차로 1등을 차지했으며, 성하연이 속한 32조는 19등이었다. 마냥 나쁘지는 않았지만, 결코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본래 계획은 100조를 배신하고 1등을 차지하는 것이었으나, 도선우가 마기(魔氣)의 안개에도 의식을 잃지 않은 탓에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도리어 의식을 잃은 것은 성하연이었다.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도선우를 보고 까무러치게 놀라버린 탓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생겼지.’
성하연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도선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표정 하나 없이, 깊고 공허한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던 도선우를.
그것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악마가 따로 없었다.
“으.”
이 이상 생각해 봐야 마음만 심란해질 뿐이다. 성하연은 자신이 평소 즐기는 취미 생활을 하며 어제의 일을 잊기로 했다.
자신의 기숙사 방구석에 위치한 책장 서랍. 그 세 번째 칸을 열고, 이중 바닥을 들어낸다.
그러면 책이 한 권 나온다.
그녀가 이중 바닥 구조까지 활용해 가며 꽁꽁 숨긴 이 책의 정체는, 다름 아닌 순정 만화였다.
“어머.”
성하연은 만화 속 남녀의 밀회를 지켜보며 감탄을 흘렸다. 만화 속 남자 주인공은 외모부터 성격까지 모든 부분에서 완벽했다. 여자 주인공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둘의 사랑 이야기는 더없이 아름답고 환상적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현실과 괴리가 느껴졌다.
타악!
성하연은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으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러곤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하필 그 사람이야.’
성하연의 몸이 축 늘어졌다.
성하연은 ‘정화의 가문’ 출신. 가문의 아이는 모두 정화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다. 가문은 대대로 교황의 곁을 지키는 고위 성직자였으며, 몇 대에 걸쳐 막대한 부와 명예를 쌓았다.
그저 좋은 피를 타고난 것만으로 편한 인생을 산다며 가문을 비하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가문의 아이가 짊어지는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
성하연은 늘 가지고 다니던 수첩을 꺼내 펼쳤다. 아버지에게 받은 것으로, 수첩에는 ‘정화의 가문’의 정의와 책임이 적혀 있었다.
1. 성(聖)씨를 가진 정화의 가문은 대대로 정화의 피를 가지고 태어난다. 가문의 사람들을 이하 ‘일족’이라 칭한다.
2. 정화의 피를 가진 자는 모든 불결한 것에 면역을 가진다. 이는 저주, 주술, 마기(魔氣)를 포함한다.
3. 극히 드물게, 정화의 가문이 아님에도 정화의 피를 타고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을 연분(緣分)이라 한다.
4. 일족의 연애 및 혼인 대상은 오직 연분이다. 그 외의 대상과는 연애 및 혼인을 일절 금한다.
5. 출산을 하여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에, 아이의 성은 반드시 성(聖)씨로 한다.
6. 위 같은 조항은 대대로 교황의 곁을 지켰던 일족의 피가, 다른 천한 피와 섞이는 것을 방지하는 데에 목적을 둔다.
“하.”
새삼 수첩의 내용을 정독한 성하연이 한숨을 흘렸다.
요약하자면, 성하연은 연애 및 결혼 상대를 정할 수 없고, 오직 연분하고만 연애 및 결혼이 가능하다는 거였다.
원하는 상대와는 만날 수 없으며, 원하지도 않는 생판 모르는 사람과 만나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다 끼쳤다.
근데 도선우가 정화의 피를 타고난 ‘연분’인 것 같다.
그게 제일 큰 문제이자, 성하연을 절망에 빠지게 한 원인이었다.
도선우는 악마종 퇴치 실습 당시, 김라희의 축복을 맞고 정신을 잃지 않았다. 게다가 마기를 머금은 안개를 들이마시고도 끄떡하지 않았다.
정화의 피를 가진 자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 하필이면. 도대체 왜.”
성하연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혼잣말을 뱉어댔다.
그녀는 일족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후손. 반드시 연분을 찾아 혼인하여 대를 이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기껏 찾은 연분이 도선우라니.
만화 주인공처럼 완벽한 남자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에 가까운 남자를 바랐다.
그런 성하연의 눈으로 봤을 때, 도선우는 솔직히 말해서 기준 미달이었다.
도선우는 잘생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성격이 좋지도 않으니까.
“쯧.”
성하연은 홧김에 들고 있던 수첩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냥 다 포기하고 비혼으로 살까 생각도 해봤지만, 가문의 원로와 가족으로부터 들을 구박이 두려웠다.
‘아니 근데, 생각해 보니까 꼭 지금 만날 필요는 없잖아?’
고심하던 성하연의 뇌리에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꼭 당장 연애를 하거나 혼인을 할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하겠지만, 그게 지금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외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꿀리는 것도 없으니, 만나고 싶을 때 만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터.
정말 외롭거나 혹은 충직한 부하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때 도선우와 만나도 충분할 것 같았다. 자신같이 완벽한 사람이 만나 주겠다는데 도선우 따위가 감히 거절할 수 있을 리 없다.
아무튼, 지금 당장은 결혼은 물론, 연애도 할 생각이 없으니. 도선우와 만나는 것은 최대한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자.
“하.”
그리 생각해도 기분은 여전히 우중충했다.
성하연은 아까 덮어두었던 책을 다시 펼치곤, 그 너머 이상과 환상이 가득한 세상에 의식을 내던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