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135
제135화
교차로란 영혼의 왕국이며, 렉바와 칼푸, 두 로아는 교차로의 주인이다.
렉바는 교차로에 있는 로아를 물질의 왕국, 즉 속세(俗世)로 이끌어 인간과 대화하게 만든다. 칼푸는 속세의 인간을 교차로로 이끌어 로아와 대화하게 만든다.
이러한 까닭으로, 칼푸는 렉바의 반신(半身)이나 분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칼푸는 죽음의 문턱에 선 나를 교차로로 이끌었다.
아니, 바론 삼디와 맺은 사자의 계약으로 인해 입구가 열렸고, 내가 그 입구를 통해 교차로로 들어섰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바론 삼디는 공중에 다릴 꼬고 앉아 왼손으로 시가를 피우다, 이내 불편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오른손잡이는 힘들구나.”
치이이이…….
바론 삼디는 불을 바닥에 비벼 끄더니, 반나마 남은 시가를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머릿속을 울리지 않고, 평범하게 귀로 흘러 들어와 들렸다. 나는 바론 삼디의 사라진 오른손을 보며 물었다.
“손은 어디에 뒀어요?”
“속세에 두고 왔지. 어제 말하지 않았나?”
바론 삼디가 킬킬대며 웃었다.
어제 바론 삼디의 손이 내게 예언을 전하러 왔을 때, 내가 몸은 어디에 두고 왔냐고 묻자 그는 교차로에 두고 왔다고 답했다. 여느 때와 같은 시시한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던 모양이다.
“일단 걷자. 얘기도 좀 하고. 참, 걸을 수는 있나?”
“아까는 못 걸었는데, 지금은 걸을 수 있네요.”
“그렇겠지. 걷고자 하면 충분히 걸을 수 있을 거야.”
바론 삼디와 나는 걸었다. 교차로는 코앞에 있는 듯 가까워 보였으나,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교차로에 오자 움직이지 않던 다리가 움직였으나, 움직이지 않던 왼손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왼손은 아직도 으스러져 있었다.
칼푸에게 바친 손.
“손은 안 낫네요?”
“당연하지. 계약으로 바친 손가락이니까. 아마 폐도 그대로일 거다. 숨 쉬기가 좀 불편하지 않나?”
“…….”
듣고 보니 괜히 숨이 막히는 것도 같았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 뻔했다.
그런 나를 보며 바론 삼디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손 한 짝, 폐 한 짝 정도는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다. 언젠가는 나을 거고 말이야.”
“폐도 나아요?”
“손보다는 느리겠지만, 언젠가는 낫겠지. 뭐…….”
바론 삼디가 눈썹을 찌푸리며 과장되게 웃었다.
“내 폐는 아니니까, 내 알 바는 아니지 않나? 하하. 농담이다.”
“…….”
“농담이다, 농담. 언젠가는 나을 거라는 말은 진실이야. 칼푸의 주술은 과격하긴 하지만, 시전자의 몸을 완전히 부수고 빼앗아갈 만큼 잔혹하지는 않다.”
바론 삼디는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보았다. 나도 덩달아 하늘을 보았다. 둥글던 달이 가늘게 이지러지고 있었다. 칼푸가 웃는 모습이었다.
교차로는 어둠만이 가득했고, 칼푸가 내뿜는 붉은 달빛만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달이 이지러지면 교차로는 어두워졌고, 차오르면 밝아졌다.
“……오, 저기 지팡이를 잃어버린 노인이 하나 계시는데.”
교차로는 아득하게 멀다가도 눈 깜짝할 사이 코앞에 있었다. 교차로의 중심에, 마치 이정표처럼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절름발이였고,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오른손에 파이프 담배를 들고 있었다.
렉바의 현현(顯現)이었다.
“어르신, 거동이 불편해 보이십니다? 지팡이가 없어서 그런가요?”
바론 삼디가 실크해트를 벗어 보이며 격식을 떠는 척을 했다. 렉바가 눈썹을 구기며 못마땅한 눈으로 바론 삼디를 쏘아보았다.
“삼디, 너는 이만 가라. 선지자와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아하, 교차로의 주인이 아니면 가라 이건가?”
“듣고 싶다면 들어도 좋지만, 들어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를 할 예정이라.”
“오, 그러십니까.”
바론 삼디가 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유난히 붉게 빛나고 있었다.
“길 너머에서 기다리겠다. Fè yon chwa ou pap regrèt!”
바론 삼디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연기가 되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 그는 처음부터 이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이곳 교차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당연한 세상이었다.
렉바가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왜, 이런 모습으로는 처음이라 당황스럽나?”
그의 왼발은 물질의 왕국인 속세에 있고, 오른발은 영혼의 왕국인 교차로에 있다. 두 발을 각각 다른 세계에 딛고 있으니, 그는 속세에서나 교차로에서나 다리를 절룩거렸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전처럼 대하기는 조금 불편하네요.”
다만, 렉바가 노인이라는 사실을 새삼 체감하고 나니 전처럼 대하기가 조금 껄끄러웠다. 렉바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편하게 대해라. 목소리의 형태나 육신의 형태나, 나는 나다.”
“편하게……. 이참에 말도 놓을까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거라.”
내 농담을 렉바가 웃으며 받아쳤다.
교차로에 오는 것은 분명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처음이 아닌 것처럼 익숙하고 편했다.
애당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인 것처럼 들이마신 공기는 아늑하고 따스했다. 이토록 진심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피를 많이 흘렸구나.”
렉바가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물었다. 파이프에서 솟은 둥근 연기가 둥근 달과 겹쳐졌다. 바론 삼디나 렉바나, 왜 담배를 못 피워서 안달들인지 모르겠다. 나는 기침을 하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학생 앞에서 담배를 그렇게 피우시면…….”
“감내해라. 배에 칼이 꽂히는 건 아무렇지도 않고, 폐에 연기가 들어오는 건 거슬리나?”
“이제 폐가 하나라서 그런가, 좀 아프네요.”
“참, 그랬지. 그럼 나도 절반만 피우마.”
렉바가 웃으며 연기를 뱉었다. 연기는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렉바는 발을 절룩거리며 교차로의 중앙에 서더니, 대뜸 정색을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식으로 무식하게 부딪힐 필요는 없었다.”
“뭘요?”
곧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어서 되물었다.
“너무 결론부터 말했군. 조금 돌아가서, 너는 사탄교도가 구준혁이라는 사실을 얼핏 알고 있었다. 맞나?”
“얼핏은……. 네.”
알고 있긴 했다. 말 그대로 ‘얼핏’이었기에, 확신하지 못했을 뿐. 구준혁을 사탄교도라고 확신하기에는 근거가 부족했다. 심증조차 어렴풋했고, 확증은 거의 없었다.
“아니, 확신할 만도 했다.”
렉바는 파이프 담배를 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연기는 반원이었고, 그에 맞추듯 달도 반달로 야위었다.
“사탄교도와의 추격전에서, 너는 그의 체형과 뒷목에 새겨진 문신을 보았을 터. 사탄교도는 도망에 빨랐고, 구준혁도 그랬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나?”
“충분하지는…… 않죠.”
“자선의 성호 재선출 시험 직전, 구준혁은 ‘액땜’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기도 했지. 그건 로마니카교인은 모르거나, 알아도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단어였다. 이래도 충분하지 않나?”
“너무 결과론으로 생각하는 거 아닌가요? 고작 그걸로 어떻게 사람을 의심해요?”
렉바는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조용히 내 말을 들었다. 그의 말은 나를 추궁하는 듯했으나, 표정이나 어조는 인자하기 평온했다.
붉은 달빛에 부딪혀 부서지는 연기를 바라보며 렉바는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정인아라는 아이의 모습을 본뜬 박제가 너를 안았지. 박제는 죽었을 때 머리카락을 남겼다.”
“예.”
“그 머리카락의 출처가 어디인지, 짐작 가는 데가 있지 않느냐.”
구준혁은 종종 정인아의 머리카락을 뽑는 장난을 쳤다.
김진서의 머리카락은 아이덴 동산에 새 마수가 나타났던 날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혹은 체육관에서 스파링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
성하연의 머리카락은 조별 과제 때. 접점이 거의 없는 마유현이나 강대만의 박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결과론에 의한 추리다. 지금은 구준혁이 사탄교도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머리카락은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어요. 고작 이런 걸로, 확신하기에는…….”
“늘 네 근처에서 일어난 사건들. 그가 실수로 내뱉은 말. 부자연스러운 행동. 체육관 아래에 있던 은신처. 너와 친한 이들을 꿰고 있는 인물. 그뿐만이 아니지.”
하나 남은 폐가 서서히 조여 오는 것 같았다.
“하나하나의 단서는 초라하고 조잡하지. 그러나 모아놓고 보면, 그 모든 단서가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래도 부족한가?”
“부족합니다. 심증이 아니라, 확증이 필요했으니까.”
“그 심증으로 말미암아, 너는 구준혁이 사탄교도일 것이라 추측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그를 추궁하지는 않았지. 그건 네가 너 스스로를 의심하였기 때문이고, 구준혁이 사탄교도가 아니기를 내심 바랐기 때문이다.”
“그건, 렉바! 당신이 내 추리가 비약적이라고 해서……!”
“실제로 네 첫 번째 추리는 비약적이고, 타당하지 않았다. 그럼 그 추리를 타당하게 만들기 위해 그를 추궁하거나, 상황을 조성해 심리적으로 몰아넣으며 확고한 증거를 손에 넣어야 했다. 기어코 사건이 터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렉바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잠깐 숨을 가다듬었다. 흥분할 일이 아니었다. 렉바는 내게 길을 제시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격앙된 마음을 진정시켰다.
“……추궁. 만약의 일이지만, 추궁했는데 구준혁이 사탄교도가 아니었으면. 잘만 지내던 친구랑 사이가 파탄이 났겠네요.”
“네 말대로 그가 사탄교도가 아니었다면 피렌체에 다니는 신실한 로마니카교인이었을 테지. 어느 쪽이든 네 친구가 될 수는 없다.”
“…….”
“너는 적의 품에서 적과 동화되었고, 그 결과 수동적이었다. 이는 부정할 여지가 없지 않느냐.”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입 안이 떫어서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이방인이었으므로 선민과 친구가 될 수 없었고, 다른 이방인과도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사이비(似而非)인 나는 겉으로는 그들과 비슷해 보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달랐다.
그것을 나는 잠깐 잊고 있었다. 구준혁이 사탄교도일 것이라 생각하는 동시에, 그가 사탄교도가 아니기를 바랐다.
구준혁을, 정인아를 친구로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의심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랬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착각이면 죄송한데, 마치 구준혁이 사탄교도였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시네요.”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었다.”
렉바는 아무렇지 않은 양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렉바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중간에 알았으면, 그때라도 알려 줬어야죠. 내가…… 내가 어떻게, 얼마나……!”
기껏 진정시킨 마음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목에 뭐가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구준혁이 사탄교도라는 사실을, 나중에라도 렉바가 알려 줬더라면 상황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애초에 절름발이를 믿으면 안 됐는데. 보통 이럴 때 절름발이가 범인이더라고.”
“비하인가?”
“네. 마음 같아서는 때리고 싶은데 참고 있어요.”
“그거 고맙구나.”
웃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렉바는 내 말을 듣고 웃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때 너는 너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지. 믿음의 주축이 되어야 할 교주가 스스로를 의심하니, 너 스스로 의심에서 탈피하기를 기다렸다. 허나 너는 끝까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더구나.”
“날 시험했다는 말을 그렇게 빙빙 돌려서 하실 필요가 있나요?”
“그래, 널 시험했다. 교주로서, 선지자로서 적합한지에 대해.”
“그러세요? 채점은 다 하셨나요? 보나 마나 부적합이었겠네요.”
기분이 상했고, 배신감이 치밀어서 되는 대로 막 뱉은 말이었다.
렉바는 교차로의 중앙에 서서, 하염없이 파이프를 빨았다. 내뱉은 연기는 여전히 반원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며 바스러지는 연기를 바라보았다. 붉은 달이 피곤한 듯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오늘, 너는 구준혁이 사탄교도라는 사실만 확인하고 도망쳤어도 됐다.”
“네, 그렇겠죠.”
“제 살을 깎으며 기어코 싸움에 임할 필요는 없었어. 차라리 도망치고 교황청이나 성기사단에 도움을 청하는 게 나았을 거다. 안전하게 공로를 쌓을 수 있는 방법이지.”
“그게 로아가 할 말인가요?”
“……그럼에도 너는 싸웠고, 그 결과 교차로에 서 있다. 도망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지?”
렉바는 내 말에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꿋꿋이 말을 이었다.
나는 렉바의 질문에 대답할 말을 찾았다.
도망을 치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지만, 나는 끝내 구준혁과 싸웠다. 그 결과 나는 이렇게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되었다.
도망치지 않고 싸운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배신감이나 분노 같은 감정적인 이유도 있었고. 구준혁이 내게 선제공격을 가해 왔으므로, 이에 저항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싸웠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냥…… 싸워도 지지는 않을 것 같아서.”
그러나 그중 하나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었다.
나는 구준혁과 싸워서 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결과만 따지면 이겼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결코 졌다고 할 수는 없었다.
렉바는 내 대답을 듣고 헛웃음을 흘리며 피우던 파이프 담배를 앞섶에 잠시 끼워 넣었다.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는 의심이 없었구나.”
“그나마?”
“말대꾸하는 걸 보니 자존심도 아주 세고. 교주로서는 나름 적합한 것 같기도 하군.”
렉바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대답이 나와서 조금 당황했다.
“그럼, 선지자로서는 부적합인가요?”
“글쎄, 그건 아직 채점을 하지 않은 것으로 하지. 지팡이를 구해 오면 재고해 보도록 하겠다. 거동이 불편해서 채점하기가 쉽지 않구나.”
장난으로 하는 말인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달빛이 눈을 깜빡였다. 렉바는 하늘을 바라보며 달을 보았다. 렉바와 칼푸가 모종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처럼 보였다.
머지않아 렉바는 까마득히 먼 교차로 너머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슬슬 갈 때가 되었다. 자, 여기 두 갈래 길이 있으니, 하나를 택해서 걸어라.”
“뭐 이렇게 갑자기……. 아무 길이나 가면 됩니까?”
“마음이 끌리는 길로 가라. 네가 가는 길이 정답이다.”
렉바는 그리 말하며, 절름대는 걸음으로 차츰 멀어졌다. 렉바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교차로에는 나 홀로 남았다. 하늘에 뜬 붉은 달만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골라서 걸었다. 왼쪽 길이었는지, 오른쪽 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저 내 마음이 끌리는 길로 갔다.
길은 넓어지기도 했고 좁아지기도 했다. 평탄할 때도 있었고 험난할 때도 있었다. 아주 길고 먼 길을 걷는 것 같기도 했으며, 짧고 가까운 길을 걷는 것 같기도 했다. 교차로에서는 모든 것이 큰 의미를 갖지 않았다. 그저 흐르는 대로 흘러갔다.
달그락, 달그락…….
저 멀리, 길의 끝이 보였다. 그곳에서 바론 삼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돌 두 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바론 삼디는 돌이 아니라 주사위 두 개를 손가락 위에서 굴리면서 놀고 있었다. 손놀림이 무척 현란했다.
“아! 왔군. 표정을 보니 렉바에게 대판 깨진 모양인데?”
주사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바론 삼디가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뭐 하고 있어요?”
“연습을 좀 하고 있었지. 신경 쓸 것 없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주사위 두 개를 나에게 건넸다. 주사위에는 눈금이 없었다.
딱!
바론 삼디가 손가락을 튕기자, 비로소 주사위에 눈금이 새겨졌다. 피처럼 불길하게 검붉은 눈금이었다.
“일단은 주사위 놀이부터 하자!”
바론 삼디의 쾌활한 외침이 공허한 교차로를 가득 메우며 울렸다.
* * *
털썩.
여민서는 가브리엘을 소도진의 앞에 놓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숨을 골랐다.
“아…….”
‘침식’에 의해 몸이 불타고 있는 가브리엘을 본 소도진이 탄식을 흘렸다. 침식에 걸린 사람은 둘. 약은 하나였고, 살릴 수 있는 사람도 하나다. 선택에 대한 책임이 두 배가 됐다.
소도진은 자기도 모르게 도선우의 입에 대고 있던 약병을 뗐다.
탁.
보고 있던 김진서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를 바라보는 김진서의 눈동자가 애처롭게 떨렸다.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뭐, 뭐 하는 거예요.”
“…….”
“뭐 하는 거예요. 부, 불이 계속 커지는데, 어?”
“……기다려. 생각하는 중이니까.”
“이, 이러다 죽겠어. 그거, 그거 줘요. 차라리 내가 할 테니까……!”
타악!
김진서가 뻗은 손을 소도진이 내쳤다. 그의 눈은 가브리엘을 보고 있었다. 하반신이 침식에 의해 거의 썩어 버렸지만, 그 외의 상처는 없다.
그에 반해 도선우의 몸은 절반 가까이 썩어버렸고, 침식으로 인한 게 아닌 외상도 심각했다.
도선우는 약을 먹어도 죽을 가능성이 있다. 가브리엘은 약을 먹으면 확실하게 살 수 있다. 가브리엘에게 먹이는 편이 보다 안전하게 약을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가쁜 숨을 내쉬던 여민서가 소도진과 김진서의 대화를 듣고 눈을 번쩍 떴다.
“흐, 흐으……. 그, 약. 그거지. 흑마법 멈추는, 이번에. 도난…… 아오, 썅…….”
여민서가 떨리는 손끝으로 약병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소도진, 선생님. 내가, 나는…… 선생님이 그렇게 안 좋거든요? 그, 솔직히…… 뒤에서 욕도 조금 했어. 병신이라고…….”
“…….”
“근데…… 병신도 이 정도 사리 분별은 할 줄 알 거 아니야……?”
여민서가 기침을 했다. 그녀의 입에서 피가 덩어리째 튀어나왔다.
“유사시 구조 대상자, 우선순위……. 교계순인 거…… 아시죠? 나는 죽어도 되는데, 이, 가브리엘…… 장로! 장로님은 살려야 한다는 말이지…….”
“……알고 있어.”
소도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유사시 구조 대상자 우선순위는 일단 민간인이다. 그다음이 성직자인데, 성직자만 쳤을 때 구조 대상자 우선순위는 교계를 기준으로 책정된다. 당연히 교계가 높을수록 우선순위도 높다.
도선우는 부제(副祭). 가브리엘 장로는 전 대주교, 현 몬시뇰(Monsignor). 대주교이든 몬시뇰이든, 일단 부제보다는 교계가 높다. 그러니 원칙대로라면 가브리엘에게 약을 먹이는 것이 옳다.
소도진은 비가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약병의 입구를 가린 채, 가브리엘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전투 도중 다리를 다친 까닭에 걸음이 느렸다. 아니, 부상 때문이 아니었다. 그냥 걸음이 잘 떼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탓인지도 모른다.
소도진이라고 도선우를 포기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자괴감과 죄책감에 애꿎은 약병만 꾹 움켜쥐었다.
“선생님……?”
김진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은 소도진이 들고 있는 약병과, 부상을 입고 죽어가는 도선우를 번갈아 쫓고 있었다.
“아, 아까는. 도선우한테 주기로 했잖아. 선생님……?”
“……원칙대로 하면, 장로님에게 주는 게 맞아.”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김진서가 말을 더듬거리며 소도진에게 걸어갔다. 걸음에 힘이 없었다. 걸음만이 아니라, 전신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숨이 가빴고 머리가 아팠다. 입 안이 말라서 침이 제대로 삼켜지지 않았다.
찰랑.
약병 안에 들어 있던 액체가 격하게 흔들렸다. 김진서가 소도진의 손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이러지 마라.”
소도진이 붙잡힌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예상외로 김진서의 힘이 너무 강한 탓이었다. 부상에 의해 소도진의 힘이 너무 약해진 것도 있었다.
“사, 사탄교도를 잡은 건 도선우잖아요.”
“…….”
“살리고 나면, 교, 교계도 오를 거고. 그럼 결과적으로…… 도선우를 살리는 게 맞잖아. 아니면, 아니면! 절반씩 주면 돼요. 절반씩 주면 둘 다 살릴 수, 있어…….”
“지랄, 하고 있네. 지가 솔로몬인 줄 알어, 무슨……. 흐, 흐흐…….”
듣고 있던 여민서가 비웃음을 흘렸다. 김진서가 텅 빈 눈동자로 여민서를 응시했다.
“넌 좀 닥치고 있어…….”
“반, 사…… 씨X아…….”
“그만.”
소도진은 두 사람의 싸움을 중재하고 나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느릿하게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절반씩 주는 건 안 돼. 둘 다 살아나지 않을 가능성이 커. 괜히 용량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김진서, 놔. 이 이상 나를 막으면 네게 손을 쓸 수밖에 없어.”
“그래, 살려야 돼. 가브리엘…… 가브리엘을 살려야 돼. 그러니까 막지 마, 이 씨X 새끼야……!”
여민서는 악을 질렀다. 김진서가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일 듯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여민서도 물러나지 않고 광기가 형형한 눈으로 김진서를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공기가 싸늘했다. 가느다란 빗방울이 두 사람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어? 다, 다 여깄네. 잘됐다. 야!”
두 사람의 싸움을 본의 아니게 중재하게 된 것은 뒤늦게 여민서를 쫓아온 마유현이었다. 그 뒤를 성하연이 종종걸음으로 쫓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척 보기에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성하연은 박제에게 맞아 죽을 뻔했던 친구 김라희를 성기사단 구조대에 넘겨 주고 오는 길에, 마유현을 만나 갑자기 여기로 오게 되었다.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유현은 전신에 피 칠갑을 하고도 태연하게 욕지거리를 하던 여민서를 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으니, 피차 심정은 비슷했다.
“야, 근처에 사제가 없어. 성기사밖에 없어서……. 그래서 일단 그, 성하연 데려왔는데. 어…….”
“……이거 무슨 상황이에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마유현과 성하연이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소도진은 약을 들고 있고, 김진서는 교사인 소도진의 손목을 부러트릴 기세로 잡고 있다. 여민서도 죽어가는 중이고, 가브리엘과 도선우는 검은 불꽃에 타오르며 썩고 있다.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성하연은 타오르는 도선우를 떨리는 손끝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어, 저거…… 저게, 그러니까 그…… 박제? 박제죠?”
“……뭐?”
“아니, 아까만 해도 저 사람 멀쩡했는데? 갑자기 저렇게 될 사람이 아니잖아요……?”
성하연은 가장 먼저 저것이 박제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일전에 도선우가 기적을 재현하는 모습을 보았다.
진짜 도선우는 저렇게 쉽게 죽을 만큼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서는 톱밥과 솜이 아닌 붉고 선명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아무튼 박제였다. 박제가 아니면 안 됐다.
마유현은 혹시나 해서 눈가에 신성력으로 원을 그렸다. 그리고 원 너머로 죽어가는 도선우를 보았다.
유심히, 아주 유심히 그의 몸에 흐르는 ‘기류’를 보았다. 마유현은 착잡함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박제는 아닌 것 같은─”
“박제…… 맞아. 이건 박제구나…….”
절망스럽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마유현의 말을 끊어낸 것은 김진서였다. 그녀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도선우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지금 죽어가고 있는 건 박제다. 도선우의 모양을 취한 박제에 불과하다.
어쩐지 좀 이상했다. 그럼, 진짜 도선우는 어디에 있지? 산책하다가 만났던 걔가 진짜 도선우인가? 맞네. 걔가 진짜 도선우네…….
“어……?”
그렇게 생각하던 김진서의 생각이 정지했다.
그 도선우는 죽었다.
아니, 죽였다. 내 손으로.
박제는 피를 흘리지 않았다.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도선우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주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럼 아까 만났던 도선우가 박제다.
지금 눈앞에 있는 도선우는, 어? 아까 만난 게 진짜, 아니, 그럼 내가 아까 죽인 건 누구…….
“마유현…… 저거, 저 새끼 막아─!”
혼란에 잠긴 김진서의 몸에 힘이 축 빠졌다. 여민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유현에게 소리를 질렀다.
여민서의 의도를 대충 알아들은 마유현이 뛰어들어 김진서를 말렸다.
“야, 이…… 이거, 힘이 왜 이렇게 세냐……!”
허나 김진서를 말리기에 마유현의 힘은 턱없이 약했다. 김진서는 살기가 어린 눈으로 마유현을 지그시 노려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놔. 죽여 버리기 전에…….”
“오, 오우…….”
김진서의 위협에, 마유현이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을 쳤다. 여민서가 그런 마유현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니, 병신아……. 말릴 거면 제대로, 말리든가……!”
“아, 아니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상황을 알아야 말리든 말든 하지!”
“X 까고, 일단 말려. 제발……!”
말리지 않기에는 여민서의 외침이 너무 애절했다. 그렇다고 말리기에는 김진서의 눈빛이 너무 무섭고 싸늘했다.
여민서와 김진서 사이에서 마유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학교에 온 지 며칠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따위 사건에 휘말리게 될 줄은 몰랐다. 학교는 괜히 와가지고…….
으득.
그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던 성하연은 상황을 파악한 직후 손가락을 씹어 피를 냈다. 신성력을 사출했다. 재생의 축복진, 그리고 쓸 수 있는 모든 치유진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정화의 축복진을 그리고, 거기에 피를 흘려 넣었다.
“다들 그렇게 심각할 거 없잖아요. 흑마법 같은 건 그냥 없애면 그만─”
화륵─!
“꺅……!”
검은 불꽃이 튀어 올랐다. 성하연이 놀라 뒷걸음을 쳤다.
이번 정화의 축복진은 성하연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완벽했다. 그럼에도 도선우의 몸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맹렬히 타오르며 그의 몸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 이거 왜, 안 사라지지. 피가 부족한가? 아, 아닌데?”
‘침식’은 흑마법진이 아닌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 발현되는 흑마법이며, 흑마법 중 가장 악명이 높았다.
정화의 일족이라 하더라도 침식에 정통으로 맞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정화의 축복진으로도 침식을 완벽히 정화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직자들이 수많은 흑마법 중 침식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이유도 이것이었다.
“……김진서.”
소도진은 체념이 서린 눈으로 김진서를 응시했다. 그는 지금 그녀의 손을 뿌리칠 힘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뿌리치고 싶지도 않았다. 소도진은 도선우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저 빌어먹을 장로가 다 뭐라고.
교계, 원칙,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어른이자, 교사로서 죽어가는 학생을 눈앞에 두고도 곧바로 살리지 못하고 교계 따위를 계산해야 하는 원칙. 그 원칙부터 잘못되었다, 소도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가브리엘에게 약을 먹이는 게 하나라도 확실하게 살릴 수 있는 방법이야.”
“…….”
“도선우는 약을 먹어도 살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다. 아니, 약을 먹어도 죽을 거야. 그러니 이제 좀 놔라. 부탁한다…….”
하지만, 교계나 원칙을 배제하고 생각해도 가브리엘에게 약을 먹이는 편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도선우는 흑마법이 아닌 다른 이유로도 충분히 죽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가브리엘에게 약을 먹이면, 그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살릴 수 있었다.
“왜 죽었다고 하는 거야.”
“…….”
“아직 살아 있잖아요. 왜 벌써부터 죽은 것처럼…….”
그녀가 말하는 동안, 소도진은 절망에 잠긴 눈동자로 도선우를 처연히 응시하고 있었다.
김진서가 하던 말을 멈추고 도선우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상태를 재확인했다. 약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도선우의 숨은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성하연의 정화로도 흑마법의 불길은 떨어져 나가지 않았고, 치유로도 몸에 뚫린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다.
“…….”
그녀는 쥐고 있던 소도진의 손목을 천천히 놓았다. 그건 그야말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살아 있기를 바랐기에, 살아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조금 빨리 왔으면 결과가 달랐을까. 아니, 애초에 그때 교장실을 같이 갔으면…….
타오르며 썩어가는 도선우 앞에서, 그녀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녀는 모든 것에 익숙하고 무던했지만, 이 아픔에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었다. 애초에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은 아픔이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 삼키며 제 팔의 살갗을 손톱으로 긁어 뜯었다. 머리가 아팠으나 눈물이 흐르지 않았고, 팔은 아프지 않았으나 피는 잘만 흘렀다.
“미쳐 돌아가네…….”
보고 있던 마유현이 제 뒤통수를 박박 긁으며 중얼거렸다.
소도진은 약병을 기울여 가브리엘에게 약을 먹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김진서가 절망이 깃든 눈동자로 멍하니 쳐다보았다.
한쪽에선 정화의 축복진에서 흘러나온 빛이 도선우의 몸을 감싸고, 썩어가는 살갗 위로 성하연의 피가 뚝뚝 떨어졌다. 여민서는 가는 숨을 내쉬며 실성한 듯 웃고 있었다.
마유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달이 크고 붉었다. 쏟아져 내리는 달빛이 불길했다.
사륵.
그 순간, 도선우의 몸에 붙은 불이 꺼졌다.
* * *
“주사위 놀이?”
이해가 되지 않아 되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교차로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주사위 놀이를 하라니.
바론 삼디가 하는 말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바론 삼디는 웃으며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주사위 두 개를 가리켰다.
“그래, 주사위 놀이지. 그 주사위를 굴리면 된다.”
“보통 이런 건 뭘 걸고 하지 않나요? 규칙 같은 건 없어요?”
“판돈은 이미 걸려 있다. 규칙은 없어. 너는 주사위를 굴리기만 하면 돼.”
짝.
바론 삼디가 박수를 쳤다. 철제 탁자와 의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바론 삼디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의자를 끌어와 앉고는, 다리를 꼬았다.
“앉아. 다리가 아프지 않나? 꽤 오래 걸었을 텐데.”
나는 사양하지 않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달그락.
철제 탁자 위에 주사위를 올린 뒤 이리저리 굴리며 눈금을 확인했다.
평범한 주사위와 달리, 1부터 6까지가 아니라 0부터 5까지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 다른 하나는 눈금 대신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문자였다.
“……이게 무슨 주사위죠?”
“사자(死者)의 계약을 위한, 아주 특별한 주사위지. 교차로에서만 파는 아주 비싼 주사위다.”
“얼만데요?”
“부르는 게 값이야.”
“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놀라는 시늉이라도 했다. 바론 삼디가 킬킬댔다.
“놀라는 척은 잘하는구나. 여기에 처음 오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처음인데요?”
“아, 그때는 네가 아니었나? 뭐, 어쨌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
바론 삼디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는 머쓱하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이제 주사위를 던질 시간이다. 내가 던질까, 아니면 네가 던질래?”
바론 삼디가 철제 책상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탁자는 붉은 달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주사위를 들었다.
“제가 던질게요. 사기를 칠 수도 있으니까.”
“하하! 내 손이 이 지경인데, 어떻게 사기를 쳐?”
바론 삼디가 잘린 오른팔을 들었다.
하지만 바론 삼디는 한 손만으로도 충분히 사기를 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론 삼디를 못 믿는 건 아니다.
하지만 ‘주사위를 든 바론 삼디’는 의심할 필요가 있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오군의 경우만 봐도 그랬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그래, 네가 던져라. 누가 던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거든.”
“……이 주사위로, 사자의 계약의 대가를 정하는 건가요?”
“비슷해.”
그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바론 삼디는 하늘에 떠 있는 붉은 달을 보고,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나는 바론 삼디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지만, 그가 정확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붉은 달이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자, 시간이 없다! 슬슬 주사위를 굴려야 할 시간이야.”
“아, 네.”
영문도 모른 채 주사위를 굴렸다.
데구르르.
주사위는 팽이처럼 빙글빙글 요란하게 회전하며 테이블 위를 돌다가, 머지않아 멈추었다.
눈금 두 개. ‘2’였다. 글자가 적힌 주사위의 문자는 읽을 수가 없었다.
바론 삼디는 주사위를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놀란 것 같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다. 기묘한 얼굴이었다.
“이러면 되는 건가요?”
“……그래. 이것으로 됐다. 이제 날 따라오기만 하면 돼.”
바론 삼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탁자와 의자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나는 바론 삼디를 따라 걸었다.
교차로는 풍경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전부 어둠이었다. 바론 삼디가 가는 곳이 곧 길이었고, 붉은 달빛이 비추는 곳이 곧 길이었다.
바론 삼디는 말없이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우뚝 멈춰 섰다. 붉은 달빛이 더 이상 앞을 비추지 않고 있었다.
길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바론 삼디가 길 너머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 앞으로 가면, 너는 물질의 왕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거야.”
“이렇게 간단해도 되나요? 명색이 사자의 계약인데.”
“죽음이라는 게 생각보다 그리 복잡한 게 아니거든. 부활도 마찬가지고.”
바론 삼디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말이 부활이지 몸에 난 상처가 순식간에 낫지는 않을 거다. 아마 몇 주는 병원에 누워만 있게 될 거야.”
“…….”
“방금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던 놈이 갑자기 멀쩡하게 살아나도 이상하잖아? 내 나름대로 배려를 한 거다.”
그건 그랬다. 너무 갑자기 멀쩡해져도 괜한 의심을 살 염려가 있었다.
물론 내 몸의 절반은 악마의 불꽃에 타서 썩었고, 배에는 구멍이 뚫렸다. 이런 부상을 입고도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 자체로 이미 의심의 여지는 충분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 그럼. 사자의 계약에 따라, 선지자 도선우는 대가를 바치고 죽음을 비틀었다. 이것으로 도선우는 죽음의 운명을 두 번 스쳐 갔다.”
바론 삼디가 말했다. 두 번?
“……잠시만요. 왜 두 번이죠?”
“지금까지 네 몸이 너무 빠르게 나았다는 생각 안 했나? 그게 정말 네 몸이 튼튼해서 그런 줄 알았어?”
“네? 그게 무슨 뜻─!”
투욱.
바론 삼디가 내 등을 슬며시 밀었다. 미약한 힘이었음에도, 내 몸은 튕겨 나가듯 교차로의 끝을 향해 날아갔다.
저 멀리 바론 삼디의 붉은 안광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곁으로 렉바가 걸음을 절룩거리며 다가왔다. 바론 삼디와 렉바, 두 로아가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에 또 놀러 오면 그때 알려주마.”
바론 삼디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츰 멀어졌다.
바론 삼디가 멀어지고, 렉바가 멀어지고, 교차로에서 멀어지면서 내 마음은 허무하고 쓸쓸해졌다.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타향으로 떠나는 길처럼 걸음이 무겁고 가슴이 답답했다.
눈을 떴다. 뿌옇게 흐려져 있던 시야가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이덴 동산. 구준혁과 내가 싸웠던 그곳에서 성기사들이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김진서와 성하연, 여민서, 마유현, 소도진……. 그 외, 많은 선민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
입을 떼어, 겨우 목소리를 냈다. 목소리는 말이 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던 김진서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녀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눈을 떴다는 사실이 차마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녀의 손길이 닿는 뺨에서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
그녀는 말없이 내 품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소리 없이 울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성하연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마유현과 소도진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선연했다. 성기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피부에 닿는 모든 촉감이 희미했다.
나는 입에 피를 머금고 있었으나, 피는 아무런 맛이 없었다. 비릿한 향기가 코끝에 아른거릴 뿐이었다.
“아…….”
마냥 기뻐하기에는 잃은 게 너무 많았다. 아이들이 나를 보고 뭐라 뭐라 소리를 쳤다. 그들의 목소리와 발소리가 복잡하게 뒤엉켜 귀에 맴돌았다. 졸리고, 피곤하고, 시끄러워서 나는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크고 붉은 달이 나를 보고 있었다. 달빛만이 따스하고 포근했다.
* * *
눈을 떴을 때, 내게 가장 먼저 병문안을 온 것은 성직자들이었다. 로마니카교 성직자 세 명.
한 사람은 인상이 아주 험악했고, 두 사람은 뱀처럼 눈이 날카롭게 째져 있어서 거짓말을 잘할 것처럼 생겼다.
다들 내가 처음 보는 이상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성직자라고 하기 믿기 힘든, 사이비 같은 인상의 성직자들이었다.
“학생, 아직 정신이 없을 텐데 갑자기 와서 미안하네. 하나 물을 게 있어서 그러는데, 이것만 얼른 하고 갈 테니까…….”
“…….”
험악한 인상의 성직자가 말했다.
이야기는 오직 험악한 성직자만 했고, 나머지 둘은 그 말을 받아 적기에 급급했다.
얼추 그들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험악한 성직자가 말을 이었다.
“구준혁이라는 학생과 아는 사이였나?”
‘구준혁이라는 학생’? 그 말에서 어딘가 이상한 기류가 느껴진다.
나는 헛기침으로 잠긴 목을 풀며 입을 열었다.
“같은 반이었어요.”
“그래? 그럼 친했나?”
나는 성직자들의 표정을 살폈다. 아닌 척하고 있지만, 그들의 눈동자에서 긴장이 엿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성직자들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창문 너머로 살랑거리는 나뭇가지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같은 반이었으니까요.”
“……그래? 그렇다면 아주 상심이 크겠군.”
성직자가 물었다. 걱정을 하는 듯한 말과 달리, 표정은 대놓고 나를 추궁하는 기색이었다.
“상심이요?”
나는 태연한 척 되물었다. 그들이 내게 찾아온 의도를 떠본 것이었다.
“아니, 학교에 그런 일이 생겼으니…… 누구라도 상심이 크지 않겠나. 그냥 해본 말이니, 신경 쓸 것 없네.”
“아하, 네.”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볼 게 있는데…….”
성직자들은 내게 몇 개의 질문을 더 했다. 아까는 물어볼 게 하나 있다더니, 성직자들에게 거짓말은 기본 소양인 모양이었다.
전부 사탄교도와 구준혁의 평소 행실에 대한 질문이었다. 어딘지 어색하고 모호한 질문들이어서, 나도 어색하고 모호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 힘들 텐데 성실하게 답해주어서 정말 고맙고, 건강 잘 챙기고…….”
성직자가 흘긋 내 팔을 보았다. 악마의 불꽃에 타서 반쯤 썩어버린 오른팔이었다.
“……팔은, 낫는다고 하던가?”
“예, 조금씩 낫고 있다고 합니다. 기적적으로.”
“그래? 그거 참 기적적인 일이군. 하기야, 이번 일 자체가…… 아니, 아니야. 아도나이께 감사하게.”
성직자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황급히 저으며, 아도나이께 감사하라는 말로 대화를 일축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주 감사하네요.”
“그래, 아주 감사한 일이지…….”
성직자가 내리깐 눈으로 내 얼굴을 훑어보았다. 눈빛에는 여전히 의심하는 기색이 선연하다.
“너무 갑작스럽게 와서 미안하구나. 다음에는 미리 연락을 하고 올 테니, 연락처를 줄 수 있을까?”
“……네, 당연하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양 그들에게 내 휴대폰 번호를 읊어주었다. 뒤에 있던 얍삽한 인상의 성직자들이 그것을 받아 적었다.
“아도나이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겠네. 그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성직자들은 급히 병실을 나갔다.
다음 날은 뉴스를 봤다. 병실 구석에 달린 TV에서는 연일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2주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뉴스는 아직까지 그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나는 뉴스를 통해 사건을 보았다. 아니, 사건이 ‘어떻게’ 정해졌는지를 보았다.
피렌체에 사탄교도가 나타났고, 그와 동시에 서울 각지에서 악마가 나타나 수십 명의 성기사들이 죽었다.
피렌체 학생 둘과 교사 하나가 실종되었지만, 사건에 비해 피해가 작아서 크게 보도되지는 않았다.
사건의 중심지인 피렌체에서 추가적인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그런 보도가 이어졌다.
똑똑.
그때, 들려온 노크 소리에 집중이 깨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강지아였다. 삼촌은 곁에 없었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은근히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 앉았다.
“교…… 음. 뭐 하고 계셨나요? 뭐 하다가 그렇게 다치셨나요? 상태는 어떠세요?”
“질문은 한 번에 하나만 해주세요.”
“……상태는 어떠세요?”
“그럭저럭 괜찮습니다.”
나는 빙긋 웃어 보이며, 계속 뉴스만 보았다.
서울 각지에 등장한 악마의 죽음에 대한 증언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붉은 손이 하늘에서 내려와 악마의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고 했고, 누군가는 하늘에서 신성한 빛이 내려와 악마들을 깔아뭉갰다고 했다.
현장에 있던 생존자 대부분이 정신 착란 증세를 겪고 있었으므로, 무엇 하나 신빙성 있는 증언은 없었다.
‘기적’이 아니냐는 추측이 유력했으나, 이후 ‘기적’의 그릇이 된 선지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이 불거졌다고 한다.
악마를 죽인 것은 칼푸의 주술이었으니, 로마니카교 입장에서는 혼란을 겪을 만도 했다.
나는 칼푸의 주술을 위해 바쳤던 왼쪽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썩어버린 몸뚱이는 차츰 낫고 있었지만, 손가락만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폐도 아마 그럴 것이다.
“계속 뉴스 보고 계셨나요?”
“네.”
“몸조리를 하시는 편이 나을 텐데요.”
“어차피 누워 있는데요, 뭐.”
강지아는 내게 그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입을 다문 채 나와 함께 뉴스를 보았다.
피렌체에는 긴 휴교령이 내려졌다. 원래는 1개월이었으나, 연장되어 이제는 2개월이라고 한다. 아마 3, 4개월까지 연장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다.
다친 학생들의 부상과 정신 치료가 끝날 때까지는 휴교 기간을 계속 연장할 생각인 것 같았다.
“정말 기적일까요?”
함께 뉴스를 보던 강지아가 말했다.
피렌체와 악마가 나타난 곳곳에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큰 부상을 입은 사람 중 몇몇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중 하나는 나였다. 인간의 사고로 이해하기 힘든 끔찍한 사건과 기적적인 일이 연이어 발생한 탓에,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하는 종말론자들도 생겼다.
“글쎄요.”
내가 살아난 것은 사자의 계약 덕분이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은 나 외에도 더러 있었다. 흑마법이 알아서 정화되거나, 부상에 의해 불구가 되었다가 금방 다시 걷게 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진정 ‘기적’인가, 혹은 로마니카교의 날조인가. 나는 그것을 구분할 수 없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계속 뉴스를 보고 있을 때, 강지아가 가방에서 텀블러를 하나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뚜껑을 열자 지독한 냄새가 났다. 저번처럼 약재를 달인 물인 것 같았다.
“이번에는 진짜 사약인가요?”
“예. 회복에 좋은 사약입니다. 얼른 드시지요.”
“오……. 맛있겠네요.”
나는 약재를 달인 물을 천천히 들이켜 음미하며 마셨다. 강지아는 그런 내 모습을 옆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많이 쓰지는 않나요? 저번보다 조금 더 독한 약재를 썼는데…….”
“좀 많이 쓴데요. 이걸 먹으라고 주신 건가요?”
“……몸에 좋은 약은 원래 입에 씁니다.”
장난스레 말하자, 강지아가 투덜거리듯 대꾸했다. 기분이 조금 상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웃으며, 그녀가 준 시꺼먼 약물을 홀짝홀짝 음미하며 마셨다. 약은 향이 독했지만 맛은 거의 없었고, 김이 풀풀 나고 있었지만 미지근했다.
내가 ‘사자의 계약’으로 죽음을 비튼 대가로 바친 것은 미각과 촉각이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온전한 것도 아니었다.
주사위를 굴렸을 때 숫자 2가 나와서 이 정도였다. 5가 나왔으면 오감을 전부 잃었을까. 모를 일이다.
TV에서는 아직도 뉴스가 한창이었다. 이번에는 사탄교도의 신원에 대한 보도였다.
– 피렌체에서 검거된 사탄교도는 신원 파악 결과, 평소 사회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던 중년 부랑자로 밝혀졌으며…….
사탄교도는 신원이 불분명한 길거리 부랑자였다.
어느 날 사탄에게 홀려 피렌체를 습격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구준혁은 실종된 학생들 중 하나로 처리되었다. 로마니카교에 의해 그렇게 정해졌다.
명망 높은 피렌체 아카데미에 사탄교도가 위장 입학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제 찾아온 성직자들은 내게 구준혁과 친했냐고 물었고, 구준혁이 어디로 갔는지 아냐고 물었다. 그리고 사탄교도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이는 내가 진실을 알고 있는지 떠보기 위한 질문이었다.
어제 그냥 간 것은 내가 구준혁이 사탄교도라는 사실을 모를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며, 연락처를 받아 간 것은 그 판단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쓸데없는 일로 괜한 의심을 받고 있었다. 낭보는 아니었다.
그리고, 사탄교도는 당일 처형되었다. 처형식은 비공개로 치러졌다.
“…….”
이렇게 될 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착잡했다.
고대 주술은 도박 수였고, 그마저도 동귀어진이었다. 심지어는 그러고도 구준혁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내지 못했다.
이는 선지자로서, 그리고 교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는 어머니를 구할 수도, 부두교를 재건할 수도 없었다.
그 이전에, 로마니카교와 사탄교에 의해 살해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더 강해져야만 했다. 교주로서, 선지자로서.
그때 어디선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병실에 있는 것은 나와 강지아, 둘이었다. 허나 그녀는 뉴스에 집중하고 있을 뿐 웃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기는커녕 이렇다 할 표정조차 없었다.
나는 뒤늦게 그 웃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머리를 믿지 마라’…….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TV 아래에서 바론 삼디가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 * *
교황청 지하 감옥은 창문이 없어 하늘을 볼 수 없다. 하늘을 볼 수 없으니 시간을 알 수 없다. 사방이 어둠이라 공간감을 찾기 힘들다.
이곳에서 수십 년을 지낸 수감자들은 으레 정신을 놓아 버리고는 했다. 시간과 공간이 흐릿한 공간에서는 의식조차 흐릿해지기 때문이었다.
아악, 아, 아아아아악─!
그곳의 유일한 자극은, 지하 감옥의 중앙에 설치된 고문실로부터 흘러나오는 비명이다.
수감자들은 그 비명을 들으며 잠에서 깼다. 그리고 공포로 몸을 떨었다. 그들 모두 고문실에서 저토록 애절한 비명을 질러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 아아악. 아, 으아아…….”
고문실에서 비명을 지르던 구준혁이 혼절하듯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를 심문하던 이단 심문관이 구준혁의 안면에 물을 뿌렸다. 물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났다. 성수였다.
치이이이…….
“아, 아아악! 거 씨X, 잠 좀 잡시다! 여기는 그, 인권이 없나?”
살가죽이 녹아서 뜯어지는 것 같은 통증에, 구준혁은 눈을 떴다. 이단 심문관은 그런 구준혁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사람 같은 새끼들이어야 인권을 주지.”
“나도 사람이야.”
“머리만 남고도 그렇게 살아 있는 게 어떻게 사람인가? 너희는 악마다. 사람 행세할 생각 하지 마.”
“악마? 그거 우리 업계에서는 아주 큰 칭찬인데.”
쪼르르르르…….
“아, 아아아악! 잘못했어요, 잘못했다고! 이 개새끼야!”
웃으며 여유를 부리는 구준혁의 머리에 성수가 쏟아졌다.
이단 심문관은 다 쓴 성수병을 바닥에 내던지며, 전선이 연결된 침으로 그의 혀를 찔렀다. 침은 귀와 혀, 그리고 눈두덩이에 꽂혔다.
직후 이단 심문관이 스위치에 손을 올린 채 입을 열었다.
“다시 묻겠다. 부두교의 교주는 누구지?”
“…….”
“입 다물고 있을 생각 하지 마. 네 은신처에서 부두교의 흔적이 나왔다. 너는 교주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텐데?”
구준혁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단 심문관이 못마땅하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스위치를 내렸다.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전선을 타고 스파크가 튀었다.
지지지직─!
구준혁의 머리통이 경련하며 흔들렸다. 머리카락이 바짝 섰다. 고문실에 희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찼다.
이곳의 고문은 피고문자의 목숨을 고려해주지 않았다. 살면 사는 거고, 죽으면 죽는 거였다. 이곳에 온 수감자들은 전부 대외적으로는 이미 사망 처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딸칵.
이단 심문관은 스위치를 올려 고문을 멈췄다. 구준혁의 머리가 통째로 새까맣게 그을렸다. 그의 눈에서 흘러나온 촉수가 손상된 부분을 수복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을 가진 구준혁은 이윽고 눈을 떴다.
“자, 다시. 두 개의 질문에 답해라. 하나, ‘시기’와 ‘분노’ 외에 다른 사탄교도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둘, 부두교의 교주가 누구인가.”
“……다른 사탄교도는 나도 몰라. 우리가 그렇게 가족 같은 사이는 아니어서.”
“그래? 그럼 부두교의 교주가 누구인지는 안다는 뜻이군.”
“모르지. 그걸 왜 나한테 묻냐? 전지전능하단 느그 신한테 기도해서 물어보든가. 아도나이가 아가리 죽 닥치고 있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
지지지직─!
“아가가각, 아, 각……!”
“죽지 않으니, 강도를 조절할 필요가 없어서 좋군.”
이단 심문관이 웃었다.
고문이 끝나자, 다시 촉수가 기어 나와 구준혁의 머리에서 손상된 부분을 수복했다. 그러나 고통에 의해 망가진 정신은 수복되지 않았다.
구준혁의 머리에 공포가 주입되고 있었다. 이단 심문관은 위협하듯 스위치에 손가락을 올린 채로 입을 열었다.
“자, 묻겠다.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으면 스위치를 내린 채 밥을 먹으러 갈 거야.”
이단 심문관이 섬뜩하게 웃었다. 구준혁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마, 말할게요. 부, 부두교. 거시기, 그거, 말한다고. 말하겠습니다. 하, 하아…….”
“그래. 누구지?”
“부, 부두교의 3대 교주, 교주는…….”
구준혁이 말끝을 흐리며 숨을 골랐다. 이단 심문관은 그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네 엄마다! 깔깔, 그럼 네가 부두교 4대 교주가 되겠네. 이야, 앞길이 창창한데?”
“이, 이 악마 새끼가!”
지지지직─!
“아아아악, 아악……!”
뇌를 통째로 구워 삶는 고통 속에서 구준혁은 힘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고문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아아…….”
고통에 떠는 그의 모습을 이단 심문관은 흡족한 듯이 보고 있었다. 이단을 처단하는 자신을 보고 있을 아도나이를 생각하며 그는 숭고함에 젖었다.
눈을 완전히 까뒤집은 채 쉼 없이 경련하던 구준혁의 머리가 전기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툭.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문실의 바닥을 청소하던 구준혁의 머리에 누군가의 발이 닿았다.
상처로 뒤덮인 발목.
구준혁은 혀로 고개를 억지로 돌려, 고문실 벽에 걸린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내뱉는 숨마다 어깨가 잘게 오르내리는 모습만 간신히 비쳐 보일 뿐이었다.
또각, 또각.
넋을 잃은 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던 구준혁을 향해, 이단 심문관이 불길한 발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머리밖에 없어서 그런지 고정하기가 쉽지 않군. 고문할 곳도 많지 않고…….”
그렇게 말하며 이단 심문관은 구준혁의 머리채를 들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전선과 연결된 침을 같은 자리에 꽂았다.
구준혁은 혀끝으로 여자가 걸려 있던 벽면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 여자는 누구야? 네 와이프냐?”
지지지직─!
“아아아악!”
이단 심문관은 대답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곧장 스위치부터 내렸다. 비명과 함께 희뿌연 연기가 솟구쳤다.
심문관은 스위치를 올린 뒤, 구준혁의 머리가 나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단 심문관은 웃음기를 머금은 새까만 눈동자로 구준혁과 여인을 번갈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부두교의 전(前) 선지자다. 너보다 7년 선배니까 깍듯이 모셔라.”
이단 심문관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어둠 속에서 새하얀 이가 빛났다.
스르르…….
그가 웃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구준혁의 눈에서 돋아난 촉수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하나를 들어 삼켰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