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151
제151화
“한 번만 더 하자.”
“아니, 진짜 못 해. 힘들어서 죽을 거 같아…….”
“엄살 부리지 말고, 빨리 해.”
엄살이 아니라 진짜로 힘들어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김진서는 아랑곳 않고 나를 재촉했다. 심지어는 빙긋빙긋 웃기까지 했다.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즐기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운동하자고 했을 때 도망을 가는 건데…….
우연히 만난 김진서와 함께 하게 된 운동은, 내 생각 이상으로 괜찮았다.
그녀는 가히 트레이너 수준의 운동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녀와 함께 하면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높은 효율을 뽑아내는 것이 가능했다. 어지간한 PT보다 나았다.
문제는 운동 강도였다. 그녀와 함께 하는 운동은 중량부터 반복 횟수까지, 그 강도가 너무 셌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건 운동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빨리 자세 안 잡아? 한 번만 더 하면 된다니까.”
“엄살이 아니라 진짜로, 숨이 잘…….”
“그래? 인공호흡이라도 해줄까?”
그녀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웃음에서 악마를 보았다.
김진서는 내가 뭐라고 하든 운동 강도를 낮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얼른 끝내버리고 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악으로 깡으로 김진서의 지시를 따르며, 이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나기를 바랐다.
“수고했어.”
몸이 너덜너덜해졌을 무렵, 비로소 운동은 끝이 났다. 이 지옥 같은 루틴을 끝마쳤다는 성취감에 젖은 채 숨을 고르던 그때, 김진서는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쉴 거야?”
“……끝난 거 아니었어?”
“한 종목만 더 해.”
농담인 줄 알았는데, 표정을 보니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디 하나 힘이 남아도는 곳이 없었지만, 여기까지 해놓고 이제 와서 힘들다고 내빼기도 자존심이 상했다.
마지막 운동은 벤치 프레스였다. 결심과 달리 벤치에 누워 바벨을 보자마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벤치는 못 하겠다.”
“왜?”
“깔릴 거 같아서.”
“이 정도로는 깔려도 안 죽어.”
“그래, 맞지…….”
맞는 말이었다. 깔려서 다치기는커녕 압박감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운 무게였으니.
나는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죽도록 힘들기는 하지만, 운동은 원래 힘든 것이다. 무엇보다 김진서가 이렇게 열심히 나를 도와주고 있는데 성의 없이 대충 임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세를 잡고 바벨을 들었다.
“얍. 중량 추가.”
“읍, 야……!”
그때, 김진서가 바벨 위에 손을 얹었다. 갑작스럽게 추가된 중량에 당황한 나는 그대로 몸에 힘을 빼버렸고, 바벨은 고스란히 내 몸을 깔고 앉았다.
반동을 주어 억지로라도 바벨을 들어보려 했지만, 더는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좀 도와줘. 보고만 있지 말고.”
“왜? 보기 좋은데.”
도움을 청해 보았지만, 김진서는 나를 약 올릴 뿐 도움을 주지 않았다.
보수의 권능을 쓸까? 아니, 이따위 사소한 일에 보수의 권능을 쓰는 건 지나친 낭비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바벨에 깔려 있자니 쪽팔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깔려도 쪽팔리지 않는 무게가 있고, 쪽팔리는 무게가 있는데, 지금은 후자의 경우에 속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진서는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와줄까?”
“두고 보자, 김진서…….”
“뭐?”
김진서가 바벨에 손을 얹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게가 더해졌다.
“별로 간절하지가 않나 보네.”
“……미안. 도와줘.”
“좋아.”
김진서는 그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바벨을 들어주었다. 나는 벤치에 그대로 누운 채 숨을 골랐다.
김진서는 옆 바닥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나를 쳐다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저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또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왜 웃냐?”
나는 조금 심술이 나서 물었다. 김진서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 힘들어하는 거 보니까 좋아서.”
“…….”
더는 대답할 여력도 없었다.
* * *
“죽을 뻔했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운동이 끝났을 때는 초저녁 어스름이었다. 돌아가는 길에도 김진서는 어김없이 내 곁에 따라붙어 걸었다.
그녀의 얼굴은 싸늘한 무표정에 덮여 있었다.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보며 보였던 웃음은 어느덧 사라진 채였다.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다음에는 더 많이 할 거야.”
“다음에는 너랑 안 해.”
“왜? 오늘 좋았잖아.”
김진서가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귀를 타고 들어와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이마를 눌러 밀어냈다.
“그거 하지 마. 소름 끼쳐.”
“밀 것까지는 없잖아.”
“너무 가까이 붙으니까 그렇지.”
김진서가 찌푸린 얼굴로 혀를 찼다.
길을 가던 도중 매점이 보였다. 피렌체의 매점은 꽤 늦은 시간에도 열려 있었다. 무인 매점인 덕분이었다.
김진서는 거기로 날 끌고 가서는, 운동 후에 먹을 만한 음식을 골라 집었다. 사흘을 먹어도 다 못 먹을 만큼 많은 양이었다.
계산은 김진서가 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가 계산해서,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너무 많은데.”
“많이 먹으면 되잖아. 원래 먹는 것까지 운동이야.”
김진서는 그렇게 말하며 꿋꿋이 내 가방에 음식이며 음료수 같은 것들을 담았다. 홀쭉했던 가방이 순식간에 통통해졌다.
그녀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 가방을 툭툭 쳤다. 부스럭, 하고 가방 안에서 비닐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기숙사로 가?”
매점을 나올 때 그녀가 물었다.
“응. 곧 입실 시간이라.”
“바래다줄게.”
“굳이?”
“오랜만에 보는 건데, 오래 보면 좋잖아.”
그렇게 말하는 김진서의 얼굴은 태연했다. 나는 그녀의 말투에서 체념 섞인 짜증을 읽었다.
대충 들으면 모르고 지나쳤을지도 모르지만, 말투나 표정을 보면 그녀가 지금 내게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뻔했다. 말없이 조기 퇴원을 한 것도 모자라, 휴교 기간 내내 그녀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것 때문이리라.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그녀에게 굳이 연락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서로 얼굴과 이름을 알고, 만나면 가끔 짧게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는 관계. 보통은 그걸 남이라고 한다.
“혼자 가도 돼. 어차피 코앞이야.”
나는 저 멀리 보이는 기숙사 건물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같이 가도 되잖아.”
“혼자 가는 게 편해.”
나는 한사코 그녀의 배웅을 거부했다. 그러나 김진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 나를 따라왔다.
“왜 자꾸 따라와. 괜찮다니까.”
“나는 같이 가는 게 편한데.”
“내가 불편해. 오지 마.”
“따로 가면 내가 불편해.”
김진서는 아무래도 떨어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도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나를 바래다주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하지 말라면 그냥……. 하지 마.”
한숨을 쉬다 무심코 혼잣말이 나왔다. 아, 무심코는 아니다. 언젠가는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말이었으니, 한숨을 빌려 속내를 토해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나는 언젠가 어머니를 만나게 되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성전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어머니를 구할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 안주하고 살아갈 것인지. 피렌체에서 맺은 인연은 그 선택에 크든 작든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김진서의 존재는 아마, 그 선택에 꽤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것도 부두교가 아닌 로마니카교에 속한 사람이 내 선택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건 이상한 일이다. 나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나의 의지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한 이유로, 조금은 선을 긋고 싶었다.
그녀가 내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못하도록, 내가 그녀에게 속박되지 않도록. 무엇보다, 내가 그녀에게 의존하게 될 일이 없도록.
“…….”
함께 걷던 김진서는 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표정은 없다. 나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눈동자가 어둡고 탁했으며,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한참이나 말없이 내 눈을 쳐다보고 있던 김진서가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응, 그러네. 내가 너무 집착했네.”
목소리는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바람결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김진서는 곧 고개를 들고,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쌀쌀맞은 냉소였다.
“다음에는 또 언제 사라질 거야?”
그녀가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뭔 소리…… 내가 왜 사라져?”
“저번에 그랬잖아.”
그녀가 내게 성큼 다가왔다.
“말도 없이 사라지고, 찾고 보니까 죽어 있었잖아.”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내 멱살을 잡았다. 잡는 힘이 강하지는 않았다. 뿌리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뿌리치지 않았던 것은, 내 멱살을 쥐고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시울이 붉었던 탓이다.
“그래 놓고, 퇴원하고는 연락 한 번을 안 해?”
“연락할 시간이 없었어.”
“핑계 대지 마. 누가 매일 하래?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잖아. 일주일에 한 번 연락할 시간도 없어? 뭐 하는데 그렇게 바빠, 도대체?”
김진서가 어깨를 잘게 떨면서 말을 이었다.
“너 죽었을 때 내가…… 내 상태가 어땠는지는 알아? 모르겠지. 생각해본 적도 없겠지.”
“알아.”
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울고 있는 김진서의 모습이었다.
병원비도 나중에 수납할 때 보니까 김진서가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써준 상태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진서가 내 가슴팍에 박치기를 했다. 조금 아팠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면서 그딴 식으로 말해? 이, 이…… 쓰레기.”
“…….”
“죽을 뻔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 맨날 병원이고, 의사는 죽는다, 산다, 그딴 말만 하는데……! 이러는데, 내가 집착 안 하게 생겼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김진서는 가쁜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말라고? 너는? 내가 죽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너는 내가 하지 말라는 짓만 계속 했잖아. 이, 개새끼야……!”
“말이 심하네…….”
“너는 욕 좀 들어도 싸.”
그녀가 내 멱살을 놓았다. 그러고는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럴 거면 애초에 멱살은 왜 잡았는지 모르겠다.
잠깐 침묵이 흐르는 동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까맣게 칠해진 밤하늘에 보름달만 덩그러니 떠 있었다. 별은 없다.
우리는 다시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았다. 아까는 화가 나서 눈매가 위로 가파르게 솟구쳐 있었는데, 지금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가 아래로 떨어트린 시선을 들어, 내 눈치를 살피기나 하려는 듯 흘깃 나를 보았다.
“……욕해서 미안해.”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에게 온갖 욕을 해가며 화를 내던 때와 달리, 말투나 태도가 무척 위축되어 있었다.
“아까는 욕 좀 들어도 싸다며.”
“그건…… 그냥 한 말이야. 아니, 그냥 한 말이 아니라…….”
김진서가 허둥대며 말하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반쯤 깨문 입술이 엿보였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필사적으로 표정을 감추려는 몸짓이었다.
“울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보려 했으나, 그녀는 한사코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보는 각도를 달리 하면, 그녀 역시 손바닥의 각도를 달리하여 표정을 가렸다.
얼굴을 보려는 자와 가리려는 자의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방어는 결국 무너졌다. 얼굴을 가리던 손바닥이 사라지고, 그녀의 표정이 드러났다. 나를 째려보는 눈가에 눈물이 고여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우는데?”
“헛소리하지 마. 안 울어.”
“설마 했는데 진짜 우네.”
“아, 안 운다고…….”
김진서가 눈을 가늘게 좁혀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눈물은 멎은 것 같았지만, 눈가는 아직도 촉촉했다.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노려보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죄책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그런 감정이 들었다.
“아, 왜 이러지. 진짜.”
“볼 때마다 우네. 저번에도 그렇고.”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무래도 눈물이 잘 멎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그녀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그녀는 금세 울음을 멈췄다. 그 대신 원망에 찬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눈물은 멎었지만 눈시울은 여전히 붉어서, 아무리 노려봐도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네가 울리는 거잖아.”
“칭찬이야?”
김진서가 나를 노려보았다.
“……나 원래 안 이래.”
“원래는 어떤데?”
“원래는 진짜 안 우는데. 집착도…… 아무튼, 원래 안 이러는데.”
“근데 지금은 왜 그래.”
“나도 몰라……. 좀 닥쳐.”
김진서가 그렇게 말하며 내 배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별로 아프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김진서 말대로 결국 나는 닥치게 되었다.
다시 기숙사 건물을 향해 걷는 동안은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토라질 대로 토라진 그녀는 내 말에 대답을 하려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내 얼굴조차 보려고 하지 않았다.
“방금 든 생각인데……. 너는 우는 게 더 낫네.”
걸음이 C동 기숙사에 거의 다다를 무렵이었다. 나는 분위기를 풀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해보았다.
“그래서 울렸냐? 진짜 개쓰레기 새끼…….”
그녀에게서 돌아온 말은 거칠었다. 결과적으로 분위기를 풀기는커녕 화만 돋운 셈이었다.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며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음을 지었다.
“빨리 들어가기나 해.”
“안 그래도 그럴 거야.”
“앞으로 연락도 하지 마. 하든 말든 신경 안 쓸 거니까.”
“그래?”
“……가끔은 해도 되고. 너 하는 거 봐서 답장도 해줄게.”
김진서는 그렇게 말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정확히는 한 번 뒤를 돌아보고 떠났다. 나는 웃으며 그녀를 보냈다.
기숙사에 들어가던 중,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맺어진 인연을 굳이 끊어낼 필요가 있는 건지, 꼭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는 건지, 이대로 현실에 안주해도 사실은 괜찮은 게 아닐지…….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든다.
언젠가 삼촌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냥 이대로, 부두교는 명맥만 유지하며, 강지아랑, 삼촌이랑, 간부들 몇몇이랑, 피렌체에서 만난 친구들도 가끔 만나고, 떡하니 살아 있는 엄마는 감옥에 그냥 두고 나와서…….
“아.”
턱에서 뚝 소리가 났다. 이를 지나치게 악문 탓이다. 목이 뻣뻣하게 굳어서 아팠다. 입이 마비라도 된 것처럼 떨렸다. 입가를 만져보니 웃는 것도 뭣도 아닌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숙사로 들어가자 사감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반겼다.
“입실 시간 넘었네. 10시 5분. 벌점이에요. 들어가세요.”
“네.”
늦었네.
들어와서 김진서가 사준 음식들을 이것저것 꺼내서 먹어보았다. 음료수도 먹었다.
제각기 맛이 조금씩 다르기는 한데, 그 차이가 뚜렷하지는 않았다. 다 거기서 거기다. 배를 채울 만큼만 먹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었다.
새벽까지 공부를 했다. 정인아가 공부를 하는 방식을 참고해서, 백지에 내가 아는 것들을 쭉 써보았다. 글씨보다 여백이 더 많았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여백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았다.
잠이 오면 손등을 펜으로 찍었다. 별로 안 아파서 잠을 깨는 데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잡생각이 많다.
내일은 주말이니, 오후까지 그냥 푹 자는 게 좋겠다. 아니, 조금만 자자. 할 일이 많으니까. 어차피 잠도 안 올 것 같고.
일단 자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