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156
제156화
내막은 이러했다.
마유현은 사인펜을 들고 오지 않아서, 매 시험마다 교사에게 사인펜을 빌려 썼다.
헌데 그 사인펜이 불량이었던 탓에, 기계가 마유현의 답안지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전 과목 0점으로 처리된 자신의 간이 성적표를 본 마유현은 항의를 하러 갔고, 그 과정에서 실랑이를 벌이게 된 것.
인식이 안 되는 사인펜을 사용한 것은 학생 과실이므로 원래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하나 마유현이 사용한 것이 하필이면 학생들에게 대여해줄 목적으로 교무실에 비치한 사인펜이어서, 마유현의 답안지를 다시 채점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 결과, 마유현의 점수는 4과목을 합산하여 400점 만점에 398점. 말할 것도 없이 전교 1등에 해당하는 점수였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야기는 학생들의 입을 타고 오르내리며 삽시간에 전교에 퍼졌다.
당연히 석차에도 변동이 일어났다. 나는 61등에서 62등으로, 그리고 정인아는 1등에서 2등으로.
나는 간이 성적표를 받아 든 정인아의 표정을 보았다. 무표정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고,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괜찮냐고 묻기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기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정인아는 대수롭지 않은 듯 성적표를 반으로 접어 책상 서랍에 집어넣었다.
“2등도 잘한 거지?”
정인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늘 그렇듯 밝고 환한 미소였다.
나는 착잡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그녀의 미소에 화답하듯 작게 웃었다. 미소로 가린 속내를 정인아가 몰라주었으면 좋겠다. 알았더라도 모른 척해 주었으면 한다.
나는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난 62등이라 잘 모르겠는데.”
“62등도 잘한 거지!”
“기만?”
“기, 기만이 아니라!”
정인아가 허둥대며 다급히 해명을 이었다.
“그래도 상위권이잖아. 저번에 그, 진단 평가보다는 못 봤지만.”
“성적 떨어졌다고 돌려 까네…….”
“아, 아니야. 아니라고. 너 왜 자꾸 부정적으로만 듣냐!”
그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농담을 건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유현이 일으킨 소동으로 나는 61등에서 62등이 되었다. 내 위에 있던 사람이 60명에서 61명으로, 고작 하나 늘었을 뿐이다. 그러나 정인아는 수석에서 차석이 된 것이다. 그녀는 시험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수석을 목표로 공부했으니, 나보다 훨씬 충격이 클 것이다.
고작 이걸로 그녀의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당장의 충격에서 벗어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정인아의 표정을 살폈다. 웃음에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앞으로 시험을 몇 개나 더 봐야 되지?”
“어? 음…….”
정인아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3학년은 뺀다 치면……. 한 여섯 번 남았지? 왜?”
“기회 많네. 여섯 번 다 네가 1등 해.”
정인아는 내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이해를 잘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댔다. 그러다 곧 웃음을 터트렸다.
“야, 그게 쉽냐? 다른 애들이 공부를 안 해주는 것도 아니고.”
“왜, 못 해?”
“……아니? 하면 하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정인아는, 말을 끝내자마자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입술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짙었다.
몸을 움츠린 그녀는 체념 어린 미소를 지으며 힘겹게 입을 뗐다.
“아니다, 취소.”
“…….”
“못 할 것 같아. 지난 몇 달 동안 진짜 열심히 했는데…… 이 이상 열심히 할 자신이 없어. 아니, 솔직히 열심히 한 것도 아니지. 다른 애들은, 더 열심히 했겠지…….”
나는 그녀의 눈망울을 보았다. 눈동자가 멍하니 비어 있었고, 눈매는 축 처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흐릿한 절망과 체념의 감정을 느꼈다. 한때는 너무나 뚜렷하게 엿보였던 그녀의 기분이 오늘따라 흐리고 멀게만 느껴진다. 그녀와 나 사이에 무겁고 짙은 안개 같은 것이 끼어 있는 것처럼.
뻔한 위로를 해봐야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끝나고 저녁이나 먹을까?”
이번 주말은 예배당에서 보낼 생각이라, 오늘 사감에게 얘기해서 외박 허가를 받았다. 덕분에 시간은 넉넉했다. 적어도 정인아와 밥 한 끼 할 시간 정도는 있었다.
* * *
밖으로 나왔을 때 보이는 것은 운동장을 달리는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뙤약볕 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장을 돌고 있었다.
강대만이 주축인 것으로 보아, 전부 근면반에 속한 학생들인 것 같았다. 한수련이 그늘진 곳에 앉아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 지켜보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별안간 까르르 웃었다.
교실에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나와 보니 여름 햇살이 아주 따가웠다. 외투를 벗어 팔에 걸쳐 들었다. 정인아는 교복 위에 후드 티를 입은, 여느 때와 같은 차림이었다.
“안 더워?”
내가 묻자, 정인아는 대수롭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직은 그냥 따뜻한데?”
“더위를 안 타나 보네.”
“응, 나 여름이랑 친해. 겨울이랑은 좀 서먹하고.”
“여름이랑 친해?”
참 신기한 표현이었다. 나는 웃으며 괜히 그녀의 말을 되풀이해 보았다. 정인아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흘겨보았다.
“뭐야, 왜 웃어? 나도 같이 좀 웃자.”
“아니…… 나도 그래. 여름이 더 좋아.”
정인아의 물음에 얼버무리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나도 겨울보다는 여름이 좋았다.
더울 때는 가만히 있으면 시원한데, 겨울은 그게 안 된다.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더 추웠다. 그렇다고 여름을 좋아한다는 건 아니다. 사실 여름이고 겨울이고 다 싫다.
정인아는 내 곁을 나란히 걸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너도 여름이랑 친해?”
“응. 근데 너랑 더 친해.”
정인아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 의미 없이 한 말이라, 개의치 않고 교문 쪽으로 걸었다. 그녀가 뒤따라왔다.
걷던 도중 건물을 나오는 소도진과 하예진이 보였다.
며칠 전에 퇴원한 소도진은 아직도 목발을 짚고 다녔다. 나란히 걷던 하예진이 대뜸 소도진의 목발을 찼다. 넘어진 소도진이 살기가 형형한 눈으로 하예진을 올려다보았다. 하예진이 웃으며 소도진을 일으켜 주었다.
어디를 보아도 사람이 참 많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정인아가 하예진과 소도진을 보고 쿡쿡 웃으며 입을 열었다.
“두 분이 같이 다니실 때 보면 되게 귀여운 것 같아.”
“귀엽다고?”
“그냥 느낌이 그렇지 않아?”
정인아는 그렇게 말하며, 울타리를 넘어 뻗은 가지에 내걸린 나뭇잎을 스르르 매만지며 걸었다. 잎이 그녀의 손길에 호응하듯 흔들거렸다. 나뭇잎과 악수라도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운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카페에 가서 후식도 먹었다. 오가는 대화에는 두서가 없었다.
시험 이야기도 하고, 정인아의 친구 이야기도 하고, 떠도는 소문 이야기도 했다. 대부분 그녀가 말하고 나는 듣기만 했다. 가끔 적당히 맞장구나 쳤을 뿐이다.
“그래서 걔가…….”
내 맞은편에 앉은 정인아는 한창 말하다가, 문득 표정을 굳히며 황급히 말을 맺었다.
그녀의 시선은 내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보고 저렇게 놀랐나 싶어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왜? 뭐 있어?”
“어, 아니……. 음,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 잘못 봤나 보다.”
내가 묻자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또 듣기만 했다.
카페를 나왔을 때, 하늘에 떠 있던 해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사라진 해가 남기고 간 어슴푸레한 잔광이 밤을 미루고 있었다.
내가 하늘을 보는 동안 정인아는 기지개를 켰다. 그녀의 몸 어딘가에서 우둑, 하고 뼈 소리가 났다.
“끄으으……. 아우. 너무 오래 앉아 있었다. 이제 어디 가?”
“음…….”
나는 그녀의 물음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달리 생각해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은 하루 계획을 세세하게 잡아 두는 편이지만,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가끔은 아무런 계획 없이 발길 가는 대로 돌아다니면서 놀 때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도, 정인아도.
행선지 없이 마냥 걸으며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강변을 따라 늘어진 꽃들이었다.
“근처에 꽃집 있나?”
* * *
정인아의 안내를 받아 꽃집으로 갔다. 상당히 허름하지만, 그런대로 분위기가 있는 곳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부터 꽃 냄새가 났다. 수십, 수백 개의 꽃이 뭉쳐서 자아내는 내음은 향기롭기보다 독했다.
“갑자기 웬 꽃?”
“하나 키우려고.”
그란브와는 용서를 대가로 내게 꽃을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권능을 쓰기 위해서는 일단 부탁을 들어줘야만 했다.
나는 꽃집에 진열된 꽃과 씨앗들을 보았다. 이왕이면 키우기 쉬운 걸로 고르고 싶은데, 뭐가 키우기 쉬운 꽃인지 알 도리가 없으니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좋아하는 꽃 같은 거 있어?”
“응?”
자그마한 미소를 머금은 채 진열된 꽃들을 둘러보던 정인아가, 내 물음에 고개를 벌떡 들었다.
“어…… 벚꽃?”
[벚꽃은 키우기 힘들 거예요.]정인아가 말을 끝내자마자 그란브와가 끼어들어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키우기 힘들 것 같기는 하다.
“말고 다른 거.”
“음…… 그럼 그거, 뭐지? 있었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물초?”
“물망초.”
“오, 맞는 거 같다. 물망초.”
정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되풀이했다. 물망초 정도면 키울 만할 것 같다. 아무렴 벚꽃나무를 기르는 것보다는 쉽겠지.
나는 꽃집 주인에게 물망초 씨앗이 어디 있는지 묻고, 그 자리에서 바로 구매했다. 화분이나 흙 같은 것도 샀다.
씨앗은 작고 둥글둥글했다. 이 자그마한 게 자라면 꽃이 된다고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꽃집을 나오자 어느덧 밤이었다. 새까만 밤하늘 한구석에 그믐달이 기울어져 있었다. 정인아는 하품을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피곤해?”
내가 묻자, 그녀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체력이 약해져서…….”
“운동 좀 해. 맨날 앉아 있으니까 체력이 약해지지.”
“운동하거든, 나도”
“뭐 하는데.”
정인아는 머뭇거리다가 툭, 내뱉듯 말했다.
“……실기 끝나면 할 거야.”
“말만 그렇게 하지, 또.”
“할 거라구. 이제 잔소리 그만.”
정인아는 그렇게 말하고 귀를 틀어막았다.
“말 좀 들어. 맨날 골골대지 말고.”
“너도 내 말 안 들으면서. 누구는 안 골골대는 줄 알아. 지도 말라가지고…….”
정인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말대꾸하지 마.”
나는 살짝 기분이 상해서 말했다. 정인아가 입을 벌리며 놀라는 시늉을 했다.
“우와, 꼰대다.”
“아니야.”
“맞는데? 이 꼰대야.”
나를 놀리려는 의도가 명백한 말투였다. 표정도 나를 약 올리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조금 열이 받았지만 참았다. 나를 놀리는 그녀가 아주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걸으면서도 정인아는 나를 계속 놀렸고, 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걷기만 했다.
“근데 우리 어디 가?”
날 따라 걷던 그녀가 물었다.
“글쎄. 너네 집 갈까?”
“어……? 우리 집 와서 뭐, 뭐 하게. 한밤중에.”
“누가 너도 오래? 나만 갈 거야.”
“아, 장난치지 말고. 진짜로.”
정인아가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일단 걷자, 그럼. 운동이나 할 겸.”
“힘든데.”
“징징대지 마.”
“너…… 말 좀 착하게 해.”
“네가 말을 들어야 착하게 하지.”
“허, 차! 어이없네. 진짜 어이가 없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팔에 걸쳐 가지고 다녔던 외투를 다시 입었다. 낮에는 더웠는데, 해가 지고 나니 제법 선선했기 때문이다.
정인아는 기분이 상한 듯 나를 흘겨보면서도 묵묵히 나를 따라 걸어왔다. 걸음이 멈춘 것은 우리가 학교 앞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밤에도 피렌체의 위용은 그대로였다. 본관의 높게 솟은 지붕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기숙사 건물에 규칙적으로 난 창문에서 흐릿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인아는 의아한 얼굴로 그 수많은 건물들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학교는 왜?”
“놓고 온 게 있어서 좀 가져오려고.”
“그래? 빨리 가져와, 그럼. 여기 있을게.”
“혼자 가면 무서워. 같이 가.”
나는 그렇게 말하며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무섭다는 말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정인아는 교문 언저리에 서서, 학교 안으로 들어오길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나 데리고 간다고 뭐가 달라져?”
“좀 덜 무섭지 않을까?”
“그, 그냥 혼자 다녀오면 안 되나.”
“너무하네. 친구가 무섭다는데.”
“……아, 알겠어. 가.”
정인아는 마지못해 답하며 나를 따라왔다. 몸을 움츠린 채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꼴을 보니 어두운 걸 무서워하는 모양이었다.
특히 어둠이 드리운 학교는 평소보다 더 스산하고 괴괴한 분위기를 풍겼다. 기숙사에 머물고 있는 나는 학교에서 맞는 밤이 익숙했지만, 그녀는 익숙하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론 삼디에게 주사위를 받았던 그 외진 길목이었다. 벤치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어느새 자란 꽃과 풀들이 벤치를 꾸며주고 있었다.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 너 뭐 가지러 왔다며. 이런 데는 왜 와?”
정인아가 경계하는 빛이 역력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벤치에 앉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당연히 거짓말이지.”
“날 속였어…….”
“좀 속이면 어때.”
웃으며 말했다. 정인아는 내게 슬금슬금 다가와,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간격을 유지하며 내 옆에 앉았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유난히 어두워서, 바로 옆에 앉은 정인아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자 꽃과 풀이 살랑거리며 옷깃에 스쳤다.
“분위기는 괜찮네. 조용하고.”
정인아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사람이 많이 안 와서 좋아.”
“담배를 어디서 피우나 했더니. 이런 곳이 있었구만.”
“안 피운다니까…….”
“어이구. 그래, 그런 걸로 하자!”
정인아가 선심 쓰듯 말했다. 나는 체념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나서 대화가 끊겼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가녀린 숨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나는 그 고요와 적막 틈에서, 바론 삼디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
[그 친구가 갈 때가 됐다는 뜻이지.]보랏빛 담배 연기로 가득 메워진 방 안에서, 바론 삼디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연기에 목이 메어 나오던 기침은 그 무렵에서 멈췄다. 숨이 막혀서 기침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왜, 아니……. 왜요?”
[원래 죽음에는 이유라는 게 없는 법이야.]“건강……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죽을 것 같지는 않았는데. 조금 마른 것 빼고는…….”
[죽음에는 전조도 없지.]“이런 씨발, 그럼 있는 게 뭐야!”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외침에서는 답답하고 메마른 소리가 났다. 부풀어 오른 혀가 목구멍을 막아버린 것만 같았다. 소리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입 안을 맴돌다 삼켜졌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보랏빛 연기가 폐부에 가득 들어찼다. 낯선 현기증이 일었다.
“그럼 곧 죽겠네요, 걔는.”
나는 격앙된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물었다. 내뱉은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럴 가능성은 있지. 나의 시가 냄새를 맡았다는 건, 그만큼 죽음과 가까워졌다는 뜻이니.]“…….”
[죽음이라는 건 다양한 형태로 내재하고 있다. 그 친구에게 내재하는 죽음의 형태가 남들보다 또렷할 뿐, 그 친구가 반드시 죽는다는 뜻은 아니야. 가령……]바론 삼디가 말을 이었다. 일시적으로 몸이나 정신이 쇠약해진 상태이거나, 지병을 앓고 있거나, 혹은 죽음을 무덤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등.
건강, 정신, 마음가짐, 그 밖에 다양한 요소에 의해 죽음의 형태는 또렷해질 수 있다고.
어느 하나 위안이 될 만한 말은 없었다. 어쨌거나 정인아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공부를 너무 무리하게 해서, 이런저런 일로 마음 쓸 일이 많아서, 다양한 원인으로 그녀의 죽음은 또렷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에는 내 잘못도 있을 것이다. 정윤아를 아직까지 사람으로 돌려놓지 못한 나의 죄가 클 것이다.
“뭐 봐?”
그때, 정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늘.”
“뭐가 있다고 그렇게 뚫어져라 봐.”
“별. 자세히 보면 보여.”
“그래?”
정인아가 나를 따라 하려는 듯 고개를 훌쩍 들었다. 그리고 몇 초간 하늘을 지그시 응시하다 말을 이었다.
“자세히 보니까 보이긴 하네. 한두 개 정도.”
“세어보면 꽤 많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어 정인아와 함께 하늘을 보았다.
몰려오는 졸음을 내쫓고, 감기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며 책을 보아도, 도저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있다.
시험공부를 하다 보면 으레 그런 순간이 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와, 이곳에 앉아 렉바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조차 질리면, 그때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별을 셌다. 땅의 어둠이 짙을수록 밤하늘의 별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별 하나를 헤아리면 그 곁에 숨어 있던 별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그것을 다시 헤아리면, 또 다른 하나가 나타났다.
그렇게 하나, 둘, 별을 헤아리다, 몇 개의 별을 헤아렸는지 긴가민가한 때에 나는 밤하늘을 둘러보았다.
그러면 내가 헤아렸던 별들이 밤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어두웠던 밤하늘이 어느덧 빛으로 촘촘하게 메워지고, 멀었던 별들이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 가까워지는 그 순간이 나는 좋았다.
밤을 새우는 일은 고단하지만, 밤을 세는 일은 즐거웠다. 나는 그녀에게 문득 밤을 세는 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녀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였다.
“좀 쉬어.”
“응?”
내 말에 정인아가 의아하다는 듯 답했다. 눈은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좀 쉬면서 해, 공부든 뭐든. 수명 깎아먹지 말고.”
“……무슨, 뭐 얼마나 열심히 했다고. 그리고 수명 좀 깎이면 어때.”
“너는 오래 살아야 돼.”
적어도 정윤아가 온전히 회복될 때까지는 살아 주었으면 했다. 이왕이면 그 이후로도 쭉.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죄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되도록 죄책감인 것으로 두고 싶다. 정인아는 내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몇 살까지? 뭐, 한 100살까지 살까?”
“아니, 한 500살 정도.”
“야, 그건 너무 간 거 아니냐.”
“왜, 오래 살면 좋지.”
“너무 오래 살면 질리지 않을까? ……근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 오래 살고 싶다고 살아지는 것도 아니고.”
정인아는 그렇게 말하며 하늘에 닿아 있던 시선을 땅에 떨어뜨렸다.
별을 다 센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뒤꿈치로 흙바닥을 의미 없이 내리찍었다.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응, 물어봐.”
“음, 너…….”
그녀는 말할 듯 말 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말끝을 흐렸다.
“……아니다, 까먹었어.”
“이러면 궁금해서 잠 못 자는데.”
“안 자면 되지, 그럼.”
“너무하네.”
나는 실없이 웃었다. 그녀도 나를 따라 작게 웃었다. 어둠 너머로 희미하게 보였던 그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 웃음이 떠나간 자리에는 자그마한 서글픔이 남았다.
정인아는 열기인지, 냉기인지 모를 묘한 기운이 서린 눈으로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거짓말하지 말아줘.”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해버린 셈이었다. 정인아는 내 응답에 만족한 듯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느덧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 건지,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그녀의 미소가 지금은 너무나도 잘 보였다.
정인아와 헤어진 뒤, 예배당으로 왔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을 보았다.
피부가 조금 창백할 뿐 생김새는 정인아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둘은 많이 닮았고 그래서 슬펐다.
나는 바닥에 앉아 입을 반쯤 벌린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정윤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미안해. 조금만 더 기다려줄 수 있을까.”
정윤아는 내 말에 대답이나 하려는 듯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지금은 고개를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지만, 그날이 오면 이 아이도 정인아와 같은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겠지.
그날이 오면 모든 게 다 잘될 거다. 다들 행복해질 것이다.
그날이 오면…….
“미안해. 정말, 미안합니다…….”
익숙한 현기증과 두통이 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