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157
제157화
내가 예배당에 머무는 동안 강지아는 늘 있었고, 삼촌은 토요일에 잠깐 얼굴만 비추러 왔다.
삼촌의 설명에 따르면 해외 도피 중인 경기교단 간부를 한국에 들여오느라 바쁘고, 그래서 예배당에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삼촌은 못 본 새 무척 수척해진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열심이야?”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삼촌이 무엇을 위해 저렇게 노력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그는 남을 위해 제 몸을 불사를 만큼 희생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삼촌은 내 말을 듣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동료였기도 하고, 뭐……. 원래는 이렇게까지 도와줄 생각은 없었는데, 얼굴 보니까 또 사람 마음이라는 게…….”
삼촌이 장황하게 둘러댔다.
“왜, 예뻐지니까 없던 동정심이 막 생겨?”
나는 피식 웃으며 농담조로 물었다.
삼촌은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평소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야, 인마. 그 말이 아니라……. 그럼 울고불고 매달리는 애를 그냥 내치리? 부두교가 그렇게 정 없는 곳이었어?”
“이게 부두교랑 무슨 상관이야?”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그러는 게 이치에 맞는 거지. 아니, 이치가 아니라 교리에.”
삼촌은 불리할 때 부두교를 들먹이곤 했다.
“내가 언제 도와주지 말래? 마음대로 해. 나한테 피해만 안 주면 간섭 안 할 거니까.”
삼촌이 경기교단 간부를 데려오든 말든, 나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나는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그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긴 하지만, 성격과 별개로 능력은 있는 사람이니, 데려오면 부두교 측에는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래, 나도 뭐 좋아서 도와주는 건 아니야. 그냥 불쌍해서…….”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그 사람 좋아해?”
“그 소리 나올 줄 알았다. 그런 거 아니야.”
삼촌과 잠깐 실랑이를 했다. 강지아는 웃으며 언쟁 아닌 언쟁을 나누는 우리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힐끔힐끔 휴대폰을 확인하던 삼촌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 씨……. 선우야, 나 간다. 좀 더 있고 싶은데 이게 좀 급한 일이라.”
“어, 가.”
우리가 배웅을 해줄 틈도 없이 삼촌은 옷을 챙겨 입고 허둥지둥 예배당을 나가버렸다. 어지간히 급한 일인 듯했다.
강지아는 삼촌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피포트에 물을 받아 끓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어디선가 곱게 간 커피가루와, 난생처음 보는 특이한 기계를 하나 꺼냈다.
강지아는 기계에 가루를 담아, 끓는 물을 그 위에 천천히 부었다.
카페에서 맡아본 적 있는 향긋한 냄새가 부드럽게 퍼졌다. 커피를 타는 모습이 제법 전문적으로 보였다.
“바리스타 준비하시나?”
내가 장난스레 묻자, 강지아가 흘깃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취미로…….”
“아, 진짜 해요?”
“예배당에 있으면 할 게 없어서…….”
강지아가 자못 부끄러운 듯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취미가 참 많았다.
요리도 아마 취미로 시작했던 것이고, 약학도 취미로 공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니 자연스레 취미도 많아진 모양이다.
“교주님은 어떤 취미가 있나요?”
강지아가 식탁 위에 커피 잔을 두 개 올려놓으며 물었다.
나는 원래 커피를 마시지 않지만, 직접 내려준 것이니 마다하기도 뭐해서 일단 마시기로 했다.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며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
“글쎄요…… 운동?”
“그건 취미보다, 그냥 해야 하니까 하는 거 아닐까요?”
“그래요? 운동 말고는 뭐…… 취미라고 할 만한 게 없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며 두 모금 정도 커피를 더 마셨다.
지금까지는 커피 특유의 쓴맛이 싫어서 먹지 않았던 것인데, 지금은 쓴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고소한 향이 나는 검은 물’이라고 생각하니 제법 먹을 만했다.
“취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꽃을 키우는 것도 취미가 될까요?”
“당연하죠. 심신 안정에 좋겠네요.”
심신 안정이라……. 요즘 심신을 조금 안정시킬 필요를 느끼고 있기는 하다.
“그래서 하나 키우려고요.”
“좋네요. 교주님과 어울리지는 않지만.”
“흠……. 무슨 뜻이지?”
“농담입니다.”
강지아가 피식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강지아가 농담을 하는 모습을 보는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도 옛날에 비하면 참 많이 변했다. 새삼스럽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말이 끝나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화분에 씨앗을 심는 일이었다.
인터넷과 그란브와의 도움을 받아 씨앗을 알맞게 심는 법을 배웠고, 이왕 배우는 김에 물을 주는 법이나 분갈이를 하는 법도 숙지했다.
“죽지 마.”
나는 씨앗이 심긴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누르며 당부하듯 말했다.
이런다고 죽을 씨앗이 살아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냥 한번 말해보고 싶었다. 이 씨앗에 내 시간과 정성을 들이겠다는 다짐이었다.
학교에 갔다. 필기고사 성적이 고지된 후, 실기를 앞둔 학생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필기 성적에 좌절하여 생기 잃은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이렇게 된 이상 실기에 모든 것을 건다며 떵떵 소리를 치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시험 이야기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정인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인사를 하려는 것 같은데, 그럴 거면 손을 흔들지 왜 고개를 흔드는 건지 잘 모르겠다.
“자! 시험 하나 가지고 너무 상심하지들 말고. 오늘 하루도 무사히~”
하예진은 들어와서 이 한마디를 남기고 교실을 나갔다.
어째서인지 가면 갈수록 조회가 짧아지는 것 같았다.
조회를 하는 동안 잠깐 조용했던 교실이 다시 소란스러워지려는 찰나, 하예진이 앞문을 거칠게 열고 다시 교실로 들어왔다.
“이걸 깜빡했네. 도선우, 잠깐 교무실로 내려와요!”
적막 속에서 하예진의 카랑카랑한 외침이 교실에 울려 퍼졌다. 아이들의 시선이 잠깐 나에게 모아졌다가 흩어졌다.
정인아가 의문 섞인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들을 뒤로하고, 영문도 모른 채 교무실로 내려갔다.
* * *
하예진은 내가 오자마자 불쑥 종이 뭉치를 건넸다.
“이거 각반 임원들한테 하나씩 나눠주고, 작성해서 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라고 전해줘요. 너도 작성해서 올리고.”
“제출은 언제까지 하면 될까요?”
“오늘…… 아니다, 언제까지더라. 아, 내일까지.”
나는 흘깃 종이를 살폈다. 선교 여행에 대한 추가 동의서였다.
일전에 신청서를 받아 걷기는 했지만, 여러 사건 탓에 일정이 조율되었으니 추가로 동의서를 받으려는 모양이었다.
이걸 왜 내가 나눠줘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왜? 하기 싫어요?”
하예진은 내 표정을 보더니, 내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방금 표정 관리를 못 한 모양이다.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하기 싫은 건 아닌데…….”
“네, 그럼 군말 없이 다녀오세요~”
하예진은 방실방실 웃으며 말하고는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좀 귀찮기는 한데,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그냥 군말 없이 다녀오기로 했다.
가장 처음으로는 친절반으로 갔다. 교무실과 가장 가까운 교실이 여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찾던 여민서는 없었다.
나는 그때서야 여민서가 아직 퇴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도 일단 전해주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앞문 쪽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무리 중 한 남자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여민서 오면 이것 좀 전해줘.”
“어? 여, 여민서?”
그 아이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는 두어 번 뒷걸음을 치기까지 했다.
내가 종이를 건네도 아이는 한사코 종이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미, 미안. 별로 안 친해서, 주기가 좀…….”
“그래? 그럼 여민서랑 친한 애는 누구야?”
“어, 음…….”
아이는 이 일을 떠넘길 적당한 상대를 찾으려는 듯 교실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어떤 아이도 남자아이와 내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반에는 여민서와 친한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미안, 누구랑 친한지도 사실 잘 몰라서…….”
“아니야, 그냥 내가 직접 전해줄게. 고마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친절반을 나왔다.
내가 들어가서 여민서의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던 친절반은, 내가 나오자마자 다시 왁자지껄해졌다.
문틈으로 흘깃 본 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다음은 인내반으로 갔다. 인내반은 친절반 바로 옆에 있었다.
김진서를 찾아보았으나 역시 보이지 않았다.
인내반은 친절반에 비해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여서, 아무나 붙잡고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
“누구 찾아? 진서?”
그때 한 여자아이가 와서 물었다. 내가 김진서를 찾는 줄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잘된 일이었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접객용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응, 전해줄 게 있어서. 어디 있는 지 알아?”
“글쎄, 운동하러 갔거나, 훈련하러 간 거 같은데…….”
“그래? 그럼 교실 오면 이것 좀 전해줄 수 있어?”
“응? 아니?”
내가 종이를 건네자, 여자아이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
여자아이는 배시시 웃다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직접 전해주면 되지.”
“아니……. 언제 올 줄 알고. 걔 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잖아.”
“좀 기다려주면 진서가 좋아할 텐데.”
“안 돼. 바빠.”
아직 가야 할 곳이 다섯 반이나 남았다.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문자나 전화 한 통이나 남기면 될 것 같았다.
다음 반으로 향하며, 휴대폰을 켜서 김진서에게 전화를 했다. 안 받았다. 그래서 그냥 문자를 보냈다.
문요셉에게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찍혀 있었는데, 다시 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사실 다시 걸고 싶지가 않았다.
다음 반은 근면반이었다. 다행히 강대만은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도선우! 무슨 일인가!”
강대만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목소리는 한결같이 크고 쩌렁쩌렁했다. 나는 종이를 건넸다.
“선교 여행 추가 동의서. 내일까지 하예진 쌤한테 제출해.”
“오, 고맙다! 내일까지. 내일 아침이면 되나? 아니면 점심까지?”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내일까지. 근데…….”
나는 흘깃 근면반의 교실 뒤편을 보았다.
남녀 가릴 것 없이 어울려 놀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책상을 양손으로 짚고 팔 힘만으로 자신의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그러다 실패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걸 보고 있던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넘어진 아이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한 아이가 실패해서 넘어지면, 다른 아이가 와서 같은 동작을 시도하고, 넘어지면 또 다른 아이가 와서 같은 동작을 시도했다.
그것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 저거?”
“아, 저건 우리 반에서 유행 중인 ‘플란체 챌린지’라는 거다. 너도 도전해보는 건 어떤가?”
“아니……. 난 바빠서.”
“그럼 다음에 기회 되면 해보도록 해라!”
강대만은 그렇게 말하고는 교실 뒤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다른 아이들이 숱하게 실패했던 그 동작을 말끔하게 해냈다. 지켜보고 있던 아이들이 탄성을 내지르며 박수를 쳤다.
근면반은 다른 반보다 훨씬 시끄럽고 활기찼다.
다음은 겸손반.
당연히 없을 줄 알았던 마유현이 의외로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피부색이 워낙 어두워서, 인파 사이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책상 네 개를 붙여놓고 다른 아이들과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 어어, 잠깐만. 이 판만 끝내고.”
내가 부르자, 그는 정신없이 대답하고는 카드 게임에 몰두했다. 평소보다 살짝 초췌한 몰골이었다.
신중한 얼굴로 자신의 패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그는, 자신의 앞에 쌓여 있던 지폐를 던지거나 모으거나 하며 게임을 계속했다.
“어? 이런 판은 죽을 수가 없지. 콜. 까볼까?”
“아, 씨발! 왜 저 새끼만 패가 저렇게 잘 붙어. 이거 사기 아니야? 이번 판 딜러 누구야?”
“사기는 무슨, 다 운이지. 아무튼 고맙다! 오늘 밥값 벌었네.”
룰을 몰라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마유현이 이긴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이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며 절규하는 동안, 마유현은 돈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승리의 기쁨에 취한 것처럼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야, 너 오니까 패가 잘 붙네. 그래서 무슨 일? 너도 카드 치러 왔냐?”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마유현에게 나는 동의서를 건넸다.
“내일까지 하예진 쌤한테 제출해.”
“……아, 나 그 쌤이랑 사이 안 좋은데.”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동의서만 주고 얼른 교실을 나왔다.
마유현은 잠깐 나를 쳐다보다가, 친구들의 재촉에 못 이겨 다시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카드를 받은 아이들이 담담한 척 실망과 희열을 드러냈다.
학교에서 카드 게임을 하는 건 가끔 봤지만, 진짜 돈을 걸고 도박을 하는 새끼들은 처음 본다.
겸손반은 근면반과 달리 남자와 여자가 거의 따로 놀았다.
반마다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고, 우리 반은 그나마 평범한 축에 속한다는 게 참 다행으로 여겨졌다.
다음은 절제반. 한수련은 창틀에 걸터앉아 친구들과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겸손반에서의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인지, 절제반의 분위기는 한없이 평범하게 느껴졌다.
“어, 어어? 안녕! 네가 왜 여기…… 있을까?”
한수련은 내 눈을 보더니,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리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도둑질을 하다 걸린 어린아이와 같은 반응이었다.
내게 잘못한 것이라도 있나 싶어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짚이는 것은 없었다. 애초에 나는 한수련과 접점도 없다.
일단 종이를 건네주었다.
“선교 여행 동의서. 내일까지 예진 쌤한테 제출해.”
“아? 그, 저기 뭐야. 땡큐! 고마워.”
종이를 받는 한수련의 이마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한수련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실없이 미소를 짓거나 했다. 내게 뭔가를 잘못했거나, 아니면 숨기는 게 있는 듯한 반응이다.
영 미심쩍긴 하지만,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기기로 했다. 나는 절제반 교실을 나와, 마지막 순결반으로 걸음을 돌렸다.
“저기.”
그때, 한수련이 나를 뒤따라와 조심스레 불렀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거나,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다 말을 이었다.
“그, 있지. 너 혹시…… 다, 담배 피우나?”
“뭐?”
나는 어이가 없어서 언성을 높여 되물었고, 한수련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어떤 새끼가 그런 소리를 해?”
“으에? 아니, 그냥 물어보는 거야.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것 같아서……. 아무튼 안 피운다는 거지?”
“그래. 누가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다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돌면 그것은 소문의 탓이지, 한수련의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화가 나긴 하지만 한수련에게 화풀이를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 그리고 너…….”
한수련은 내 눈치를 흘깃 살피다 말을 이었다.
“맨날 같이 다니는 걔 있잖아, 갈색 머리. 이름이 정…… 정인아? 맞나?”
“걔 뭐.”
“아이, 자꾸 화내지 말고. 너 혹시 걔랑 그, 사귀나?”
한수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질문을 이었다.
“그래? 그럼 김진서는?”
“걔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지?”
“너랑 자주 붙어 다니는 두 명이잖아. 저번에도…….”
한수련은 도중에 말끝을 흐리더니, 뭔가를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눈썹을 치켜들었다.
“설마 양다……? 둘 다?”
“개소리. 둘 다 아니야.”
나는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되기도 했고, 한수련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기가 빨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교실로 들어가려는 한수련을 향해 외쳤다.
“……너 어디 가서 이상한 소문 퍼트리지 마!”
한수련은 입이 가볍고 가십을 좋아한다. 이대로 보내면 이상한 소문이 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수련은 음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입 모양으로 어떤 말을 전했다.
대충 알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대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켠에 불길함이 자욱하게 남았다.
잡념을 털어내며 순결반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작 이런 걸로 소문이 퍼질 리도 없고, 소문이 퍼진다 한들 해명하면 그만이다. 애초에 소문에 연연할 여력도 없다. 내게는 다른 신경 쓸 일이 많았다.
* * *
“염색은 계속 하는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라희는 보란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에는 말도 못 걸던 애들이 와서는 친한 척 말을 걸고 있다. 성하연과 함께 있을 때는 상상도 못 할 광경이다.
성하연과 잠깐 사이가 서먹한 틈을 타 접근하려는 모양인데…….
조금 불쾌하긴 하지만, 여기서 화를 냈다가는 반에서 완전히 고립될 가능성이 있다. 김라희는 찌푸렸던 인상을 풀고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응, 슬슬 다시 할 때 됐지.”
“또 회색으로 하는 거야, 그럼?”
“아마?”
김라희는 사실 언제나 흰색으로 염색을 해보고 싶었지만, 흰색으로 하면 성하연과 캐릭터가 겹친다. 그리고 너무 노골적으로 따라하는 느낌이 들 수 있다.
회색이 딱 비웃음을 사지 않을 정도로만 개성적이면서, 성하연과 어울릴 수 있는 색깔이었다.
김라희는 그 사실을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지만, 얼마 전에 본의 아니게 알게 되었다.
“회색 말고 다른 색은 해본 적 없어? 라희 너는 다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다른 색깔로 한 적은…….”
있다. 그리고 비웃음을 샀다.
문득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김라희는 표정을 구겼다. 가슴 속에서 끓는 쇳물이 부글거리는 것처럼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근데 너 나랑 친하냐?”
“응? 아, 아니, 나는 그냥─”
“안 친한데 왜 말을 걸지.”
그렇게 말하고는 쯧, 혀를 찼다.
말하고 나니 부글거리는 통증이 조금은 가라앉은 듯했다.
아이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반쯤 벌린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고, 귀가 밝은 몇몇 아이들이 김라희의 날 선 말투를 듣고 숨을 죽였다.
“…….”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들. 속이 울렁거렸다.
김라희는 눈치껏 교실을 나가면서, 책상에 이마를 박고 엎드린 채 꼼짝 않는 성하연을 흘깃 쳐다보았다.
성적표를 받은 뒤부터 내내 저 상태다. 시험을 못 본 모양인데, 저래도 나보단 잘 봤겠지. 안 봐도 뻔하다.
오늘은 이래저래 기분이 안 좋다. 수업은 그냥 째야겠다. 어차피 지금은 선생들도 잘 안 들어오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었을 때였다.
“으악, 시발! 깜짝……!”
문을 열자마자 도선우가 나왔다.
휴교 기간이 끝난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어쩐지 처음 봤을 때보다 분위기가 많이 음침해진 것 같았다.
아니, 음침이 아니라 어두워진 건가. 잘 모르겠다.
김라희는 필요 이상으로 놀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감추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너, 너 뭐야.”
“너 성하연 친구지?”
도선우는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역으로 질문을 해왔다.
멀쩡한 이름 대신 ‘성하연 친구’라는 대명사로 불리는 것이 언짢았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데, 왜?”
“교실에 있지? 좀 불러줘. 줄 게 있어서.”
김라희는 잠깐 주저했다. 방금 막 교실을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면 다른 애들이 보기에 모양새가 조금 이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흘깃 도선우의 표정을 살폈다. 살벌할 정도로 무표정하다. 아무래도 들어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으니.
“……잠깐 기다려.”
김라희는 그렇게 말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절망에 빠져 엎드려 있는 성하연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성하연은 약간 붉게 충혈된 눈으로 스르르 고개를 들었다. 김라희는 도선우가 기다리고 있을 앞문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도선우가 너 찾아.”
성하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키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기색이 선연했다.
“그, 그 사람이 왜요? 왜 왔대요?”
“뭐 줄 게 있다는데?”
“그, 어…… 없다고 해주세요. 아파서 결석했다고…….”
“왜 없다고 해? 너 또 뭐 잘못했냐?”
마지막으로 들려온 목소리는 도선우의 것이었다. 냉소적인 목소리에는 묘한 적대감이 깃들어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 속에서 김라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도선우가 뭘 했길래 성하연이 저렇게 꼼짝 못 하는 거지?
정적이 깨진 것은 도선우가 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꺼내려고 했을 때였다.
입술을 깨문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던 성하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선우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자, 잠깐만요. 여기서 이러지 마요. 나가요, 우리.”
“……왜?”
“교실에서는 좀, 그래요…….”
성하연은 그렇게 말하며 도선우를 복도로 끌고 나갔다.
김라희는 대화를 들을수록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무나 궁금해서, 복도로 따라 나갔다. 둘의 대화를 엿들을 생각이었다.
성하연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헉헉 숨을 고르다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눈치를 보았다.
도선우는 여느 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공포와 불안으로 딱딱하게 굳은 성하연과 달리, 도선우의 얼굴은 한없이 차가우면서 동시에 여유로워 보였다.
“왜 나오자고 한 거야?”
“저번에…… 내기했던 거요. 성적 가지고 내기하자고 했던…….”
성하연은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다가, 비로소 용기를 낸 듯 고개를 들며 말을 이었다.
“무, 무승부로 할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