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173
제173화
하예진과 김복동은 함께 고사장을 거닐고 있었다. 하예진은 젖은 머리를 털어 말리고, 물기를 짜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 이렇게 갑자기 비가 온대요.”
“그러게나 말이다.”
김복동도 손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변덕스러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엄청난 기세로 쏟아져 내리던 빗줄기는 어느덧 가늘어졌고, 무서울 정도로 까맣던 먹구름도 차츰 색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진짜 짜증 나네. 더운데 습하기까지 하고.”
“…….”
하예진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 섞여 있었다. 김복동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괜히 대답한답시고 이상한 말을 했다가는 그녀의 짜증이 자신을 향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시험의 안전 요원 신분으로 고사장을 돌아다니는 것이었으나, 이따금 학생들을 만나면 토큰을 보상으로 과제를 내주기도 했다. 안전 요원이자 시험관인 셈이었다.
둘이 처음부터 같이 다녔던 건 아니었고, 우연히 마주쳐서 그냥 같이 다니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정말 우연은 아닐 것이다. 김복동은 다니는 내내 안절부절못하며 하예진을 보기도 하고, 시선을 땅에 떨어트리기도 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할 말 있으면 지금 해요.”
“어……, 어떻게 알았지?”
“그러고 있으면 누가 몰라요? 보는 내가 답답하네.”
하예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김복동이 짧게 깎은 머리를 박박 긁으며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사직서를 냈다고 들었는데.”
“소도진이 그래요?”
보나 마나 소도진에게 들었을 것이다. 하예진은 교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김복동에게 알리지 않았다. 김복동이 폐관수련을 하겠다는 이유로 모든 연락을 피했기 때문이다.
김복동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이사장님이 말씀해 주셨다.”
“뭐…… 이사장님이?”
“그래. 네가 마음이 바뀌길 기다리고 계시는 것 같았어.”
김복동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예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들 나를 너무 좋아하네요.”
“음, 뭐……. 그렇다고 봐야지.”
하예진이 김복동을 흘겼다.
“대답을 왜 그렇게 망설이지?”
“아니…… 그런 적 없다.”
김복동이 쩔쩔매며 대답했다. 하예진이 그 모습을 보고 빙긋 웃었다.
둘은 말없이 걸었다. 비는 가늘어지다가 이내 완전히 멎었다. 젖었던 땅이 따사로운 햇살에 서서히 말라가고 있었다.
하예진은 젖고 뭉쳐서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서 정리했다. 내리깐 눈동자가 우울에 잠겨 있었다.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음?”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김복동이 고개를 갸웃댔다. 하예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배성현이 퇴학당했을 때는, 그 아이를 탓했어요. 저런 애가 왜 하필 우리 반이었을까, 왜 하필이면 또 반장이었을까, 이러면서.”
“…….”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문제인 것 같아요. 그때 일도 그렇고.”
그때 일이란 구준혁에 대한 일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혹시라도 지나다니는 학생이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김복동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위로를 하기도, 쓴소리를 하기도 적절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예진도 김복동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듣자고 꺼낸 얘기가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를 가르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교직에서 물러나는 게 당연하죠.”
“……확실히 네 잘못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김복동이 말했다. 말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함이 느껴졌다. 그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을 바르게 이끌 수는 없는 법이야. 가끔 엇나가는 아이들도 있기 마련이다.”
“가끔이 아니죠. 한 학기에 두 명이나……, 전부 우리 반이었으니까.”
“너 때문에 엇나간 게 아니야. 이미 엇나가 있던 거지.”
“그런 아이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게 내 역할이었어요. 나는 실패했고.”
“세상에는 바꿀 수 없는 사람도 있는 법이야. 그런 사람들을 억지로 바꾸려고 하면 역효과가 나지.”
“그럼 교사는 왜 있나요?”
“바꿀 수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하예진이 고개를 들고 김복동을 보았다.
“뭘 해도 엇나가는 아이가 있고, 작은 관심에도 마음을 바로잡는 아이들도 있어.”
“…….”
“나는 그 작은 관심을 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학생이 한두 명도 아니고, 일일이 지극정성을 쏟을 수는 없으니.”
김복동이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하예진은 놀란 눈으로 김복동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착잡한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 역시 하예진이 교직을 떠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하예진은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사제단은 의외로 위계질서가 강한 집단이었다. 대놓고 군기를 잡는 일은 없었지만, 알게 모르게 신경전이 오갔고 정치질이 난무했다.
하예진은 그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고, 도망치듯 사제단을 떠나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학교도 적응하기 힘든 분위기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르칠 아이들은 많았고, 다들 저마다의 사정을 가지고 있었다. 필연적인 경쟁과 잇달아 벌어진 사건 속에서 학생들은 힘들어하고 있었다.
저번 사건으로 자퇴를 결심하고 상담을 요청한 학생도 여럿 있었다.
교사진은 또 어떤가. 학생들을 물심양면 도와주진 못할망정, 표창장을 주는 일에 자격이 어떻고 공이 어떻고.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예진은 무력감을 느꼈다.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어디가 맞는 길이고 틀린 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자신의 길조차 찾지 못한 인간이, 학생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인도할 수는 없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나는…….”
삐이이이익─!
마침내 결심한 하예진의 말은 끝내 맺어지지 못했다.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 착용한 교사용 전자시계가 굉음을 토하고 있었다. 시험을 치르는 학생 중 하나가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혹시라도 도중에 시험을 포기하고 싶거나, 시험 도중 심각한 부상을 입었거나, 그 밖에 일어날 수 있는 위험 상황에 대비하여 학생들의 전자시계에 탑재된 기능이었다.
학생들은 버튼 하나로 교사들을 불러내어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잘못 누르는 학생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하예진과 김복동의 손목에 채워진 전자시계는 한 번도 아니고 수십 번이나 굉음을 토하고 있었다.
잘못 누른 게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김복동은 즉각 축복진을 그렸다. 그리고 전자시계를 통해 도움을 청한 학생의 위치를 파악하며, 그쪽으로 내달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하예진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왜! 할 말이 있으면 나중에 해라!”
“그게 아니라, 나도 데려가요! 저번처럼 혼자 가지 말고!”
하예진은 김복동과 소도진만큼 빠르지 못했다. 상황이 급박해지면 두 사람은 하예진을 놓고 자기들끼리 현장에 가버리고는 했다.
이번에는 그러면 안 됐다. 김복동 혼자서는 해결하지 못할 문제일지도 모른다.
김복동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예진 쪽으로 등을 보였다.
“빨리 업혀!”
“네!”
하예진이 김복동 위로 목말을 탔다. 어깨에 실린 예상치 못한 무게에 당황한 김복동이 인상을 찌푸렸다.
“윽, 이렇게 업히라는 게 아니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해요? 빨리 뛰기나 해요!”
김복동이 달리기 시작했다. 하예진은 그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았다.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거친 야생마와 그를 길들이는 기수 같았다.
* * *
김진서는 악마종과 대치하고 있었다. 악마종은 이상하게 선뜻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악마종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정확히는 악마종을 조종하고 있는 사탄교도가 마음을 먹었더라면 김진서는 몇 초도 채 버티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악마종은 심지어 도망가는 아이를 추격하지도 않았다. 귀기가 서린 붉은 눈동자는 김진서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은 언제나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는 짓을 보아하니, 악마종의 목적은 아무래도 나를 생포하는 것 같다.
김진서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죽이지 않고 굳이 생포하려는 이유는 모른다. 사탄교도는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지금은 그저, 그들이 나를 생포하려 한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후.”
김진서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번 정신을 다잡으니, 잃어버렸던 감각이나 의식이 일제히 돌아왔다. 그녀의 눈에는 어느덧 싸늘하고도 차분한 이채가 돌고 있었다.
“진서, 야……. 우리 같이, 가자.”
휘익!
악마종이 팔을 크게 휘둘렀다. 김진서를 잡으려는 움직임이었다. 팔이 어찌나 긴지 김진서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몇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야 했다. 손끝에서는 아직 축복진이 되지 못한 신성력이 일렁이고 있었다.
“…….”
김진서는 언제든 축복진을 그릴 준비를 하며 악마종의 움직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생각한 것보다 빠르지 않았다. 시험 도중 상대했던 문요셉의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그에 비하면 악마종의 움직임은 느리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축복진을 그렸다. 약점이 보였다. 붉게 빛나는 두 눈이었다.
다른 부분은 단단한 갑피 같은 것에 둘러싸여 있어서, 검으로 베어도 흠집조차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을 노린다면 승산이 있을지도 몰랐다.
김진서는 축복진을 그렸다. 근력 강화, 고양, 그 밖에 전투에 필요한 모든 축복을, 역량이 닿는 한까지 전부 사용했다.
악마종과의 전투는 장기전으로 갈수록 승산이 떨어진다. 그녀는 이 한 번의 교전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스륵.
악마종이 어깨를 든 순간, 김진서의 머리칼이 작게 흔들렸다.
촤아악!
그녀의 발치에 있던 흙이 무더기로 튀었다. 어느 순간 악마종의 시야에 김진서가 사라졌다.
악마종은 눈동자를 굴려 그녀를 찾았다. 그러나 김진서는 악마종의 눈보다 빨랐다.
그녀는 악마종으로부터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좁혔다.
그녀는 몸을 낮게 숙인 채 악마종을 향해 돌진하고는, 몸을 돌려 채찍을 휘둘렀다. 발치에서부터 생겨난 회전력이 채찍에 고스란히 실렸다.
휘릭!
끈이 악마종의 발목을 휘감았다. 김진서는 이를 악문 채 온 힘을 다해 끈을 잡아당겼다. 악마종이 중심을 잃고 기울어졌다.
쿠웅─!
악마종이 흙바닥에 고꾸라졌다. 휘날린 흙과 자갈이 김진서의 눈에 튀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감지 않았다. 분노한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는 여전히 악마종을 또렷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어어……. 너, 너……!”
악마종이 팔로 땅을 짚으며 일어서려 했다. 김진서는 축복진을 하나 더 그렸다. 소도진의 가르침대로 그것을 일시에 터트렸다.
도약과 함께 그녀가 딛고 있던 땅이 움푹 패었다. 그리고 악마종의 시야에서 또다시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우득!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일어나 중심을 잡으려던 악마종의 명치에 김진서의 발차기가 정확히 꽂히고 있었다.
쿵!
악마종이 중심을 잃고 다시 바닥에 무너졌다. 김진서는 악마종의 배 위를 걸어, 목을 지나 머리 위에 섰다.
그녀는 걸음을 절고 있었다. 발차기를 하며 발목이 부러져버린 것 같았다. 죽을 만큼 아팠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잇새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 안의 고통에 집중하면 발목의 통증을 잊을 수 있었다. 그녀는 발목이 부러진 쪽 다리를 들어 악마종의 눈을 내려찍었다.
콰직.
이미 부러진 다리는 더 이상 쓸 수 없다. 그러니 차라리 소모품으로 써버리자는 생각이었다.
무모하지만 이것 외에는 이길 방법이 없었다. 악마종의 눈을 부수었다고 해서 전투가 끝나는 게 아니었다.
김진서는 채찍의 자루 부분을 들어 악마종의 반대편 눈을 내리찍었다.
푸욱!
“키에에에엑─!”
악마종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눈을 통해 머리를 관통하여 그대로 죽여버릴 생각이었는데, 힘이 부족했다.
김진서는 악마종의 눈에 박힌 채찍을 뽑아내며 물러났다. 그녀는 악마종의 공격이 닿지 않을 만큼 거리를 벌린 뒤,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
발목은 이미 쓸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졌고, 입에서는 피 맛이 돌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심장과 폐를 누군가 송곳으로 마구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한 걸음 움직이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걸음이 무거웠다.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이 서 있었다.
애초에 죽을 것을 상정하고 임한 전투였다. 죽더라도 눈앞에 있는 악마종 한 마리는 기필코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천지를 뒤흔들던 폭풍우가 무색하게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새파란 하늘에 태양빛이 축복처럼 곳곳에 쏟아지고 있었다.
“나의 밤을 인도할 아도나이시여.”
그녀는 그 문장을 시작으로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몸 곳곳에서 신성력이 흘러나왔다. 찬란한 빛의 갑주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적을 재현하려는 것인지, 혹은 기적 그 자체가 일어나려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그녀를 둘러싼 빛은 짙었다.
김진서의 머리칼이 흩날리며 떠올랐다. 얕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녀 주위로 모든 바람이 모이는 것처럼 보였다.
둘러싼 빛은 차츰 형체를 갖추더니 마침내 불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저에게 광야의 빛을─”
그녀의 기도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이었다.
끼이이이이이익─!
섬뜩한 굉음이 일었다. 소리는 귀를 통해 전해져 오는 것이 아니라, 뇌리에서부터 발현된 것처럼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김진서는 기도를 멈추었다.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입에서는 목소리 대신 피가 나왔다. 눈에서 진득한 피눈물이 흘렀다. 흐른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시야가 피로 빨갛게 칠해졌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부릅뜬 눈으로 악마종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시선이 자연히 그 눈동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악마종의 미간에 3번째 눈이 돋아나 있었다. 흰자와 검은자의 구분이 없는 희멀건 눈이 그녀를 또렷이 응시했다.
지상에 축복처럼 드리웠던 햇빛도, 아름답고 신비하게 불어오던 미풍도 없었다. 무섭도록 짙은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깜빡.
악마종이 3번째 눈을 깜빡였다.
“아, 학……!”
그러자 더 이상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쥐어짜이는 느낌이었다. 김진서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
입과 눈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숨을 고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심장이 뛸 때마다 통증이 배가되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편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척, 척.
악마종은 우아한 걸음으로 김진서에게 다가왔다. 희멀건 눈동자는 고통에 떠는 그녀의 모습을 흡족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감싸고 있던 빛의 갑주는 흩어져 사라진 지 오래다.
“가만히 있어.”
악마종이 말했다. 정확히는 악마종의 미간에 난 3번째 눈이 말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악마종이 아닌 사람의 것이었다. 눈동자 너머에 있는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괜찮아.”
“아, 아……!”
“저항하지 마, 아프지 않단다. 내 눈을 보렴, 아프지 않을 거야…….”
김진서는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시선이 그곳에 붙어서 떼어지지 않았다.
눈이 깜빡일 때마다 가슴의 답답함은 심해졌지만, 통증은 차츰 나아졌다. 그 틈을 타 일어나려고 하면 통증이 심해졌고, 그대로 쓰러져 있으면 통증이 사라졌다.
고통과 진통의 반복 속에서 김진서의 의지는 닳고 꺾이고 있었다. 일어나는 것이 두려워지고 쓰러져 있는 것에 안식을 느끼게 되었다.
악마종은 어느덧 김진서의 앞에 쪼그려 앉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착하지…….”
찌직, 찌지직.
악마종은 마치 아이를 달래듯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며 입을 크게 벌렸다. 턱이 찢어지고 갈라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를 통째로 삼켜버릴 생각인 것 같았다.
빠직!
김진서가 손에 들고 있던 채찍 자루를 세게 쥐었다. 최후의 발버둥이었다. 부러진 단면은 뾰족하고 울퉁불퉁했다. 자루에 돋은 나무 가시가 손을 찔렀다. 찌릿한 통증과 함께 잠시 정신이 들었다.
고통으로 아득한 정신을 깨우는 것은 그보다 더 큰 고통이었다.
푹.
그녀는 피로 흥건하게 젖은 손을 들어, 부러진 자루로 악마종의 윗잇몸을 찔렀다. 힘이 부족해서 깊이 찌를 수 없었다.
김진서는 마지막 남은 여력으로 몸을 세워 자루를 밀어 찼다. 자루가 더 깊이 박혔다.
“끼에에엑─!”
악마종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악마종은 손을 집어넣어 입 안을 더듬으며 자루를 뽑으려 들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오히려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자루는 잇몸 깊이 박혔다.
검은 피가 자루에 맺혀 뚝뚝 떨어졌다. 악마종의 미간에 달린 희멀건 눈에 핏대가 섰다.
김진서는 그 틈을 타 바닥을 기어 악마종으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도망칠 생각은 아니었다. 맨주먹으로는 악마종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오히려 단단한 갑피에 주먹이 부서질 게 뻔했다.
유리 조각이나 나뭇가지, 하다못해 돌이라도 주워서 악마종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비에 젖은 흙바닥을 기면서도 김진서의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였다. 눈에 진흙이 들어가든 피가 들어가든 알 바 아니었다.
“……사지 멀쩡하게 데려갈 생각이었건만. 저항이 세네.”
악마종이 손을 뻗어 도망치는 김진서의 다리를 눌렀다.
우득!
악마종이 힘을 주자, 김진서의 발목이 손쉽게 부러졌다. 그녀의 몸이 고통으로 바들바들 떨렸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벌어진 입에서는 소리 없는 절규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악마종이 손가락으로 김진서를 벌레 잡듯 집어 들더니, 희멀건 눈으로 관찰하듯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힘 빠진 눈동자로 악마종을 마주 응시했다.
“그래, 이제야 좀 얌전하네.”
악마종이 김진서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벌어진 입 안에서는 가늘고 긴 두 개의 혀가 교미하는 뱀처럼 엉켜서 춤을 추고 있었다.
촘촘히 박힌 수백 개의 이빨에 맺힌 검고 진득한 침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목구멍 너머 암흑에서는 누군가의 비명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는 듯했다.
뚝.
그 순간, 악마종의 움직임이 멈췄다. 미간에 달린 희멀건 눈동자가 뭔가를 찾듯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좌, 우, 상, 하.
쉴 새 없이 움직이던 눈동자가 땅을 응시한 채로 멈췄다.
눈동자는 땅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땅 너머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땅이 울면서 진동했다. 진동은 땅을 흔들고 나무를 흔들고, 이내 공기를 뒤흔들었다. 진동은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며 차츰 지상으로 올라왔다.
악마종의 희멀건 눈동자에 명백한 동요가 서렸다. 악마종은 서둘러 입을 벌려 김진서를 삼키려고 했다.
콰드드득─!
그 순간, 땅이 갈라졌다. 그리고 악마종의 하반신이 사라졌다.
철퍽!
“윽!”
그와 동시에 김진서의 몸이 흙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몇 번이고 기침을 했다. 기침에서는 이따금 피가 섞여 나오기도 했다.
가까스로 숨을 고른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악마종의 하반신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갈라진 틈에서 길고 거대한 무엇인가가 솟구쳐 나와, 흐늘거리며 악마종의 하반신을 삼키고 있었다.
그것은 뱀이었다.
오색빛깔의 찬란한 비늘이 햇살에 반짝였고, 악마종을 또렷이 응시하는 눈은 날카롭고 표독했다.
악마종의 희멀건 눈동자에는 당황을 넘어 공포가 서리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