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204
제204화
안전을 위해, 대주교급 이상 성직자와 동행한다.
선교여행 신청서에 기입되어 있던 내용이다. 그 성직자가 다름 아닌 한대호가 된 모양이었다.
아예 초면인 사람보다는 나았지만, 나는 박물관에서 필연적으로 범법 행위를 저질러야 하는 처지였기에 마냥 좋아할 수도 없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마유현은 웃고 있지만 조금은 껄끄러운 얼굴이었고, 그 외에 다른 아이들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강대만의 반응이 조금 묘했다. 그는 어쩐지 적개심이 느껴지는 시선으로 한대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인사는 이쯤 하고, 다들 여권은 챙겼지? 가서도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라. 없어지면 낭패니까.”
한대호는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따라 걸었다. 평소 같으면 다들 농담이라도 주고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우리보다 앞서 출국 수속을 밟는 행렬이 전부 성직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피렌체 선배일 수도 있고, 좋든 싫든 나중에 만날 수도 있는 사람들이었다. 괜히 시끄럽게 굴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나 역시 괜한 일로 트집을 잡히기는 싫었던 터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답답하구나, 언제 꺼내 줄 생각이니?]그러는 동안 담 발라가 말을 걸었다. 그녀는 캐리어 안에 들어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서 데려가기는 해야 하는데, 데려갈 방법이 캐리어에 집어넣는 것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주머니에 넣어 가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 크기까지 작아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덥구나. 그리고 너무 건조해. 숨이 잘 안 쉬어지는구나, 꼬마야…….]담 발라가 칭얼거렸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담 발라를 꺼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시끄럽게 굴어도 꺼내 줄 생각은 없다.
[애당초 현현 같은 쓸모없는 짓을 한 게 잘못이지, 담 발라.]순탄하게 수속을 밟아가는 동안 렉바가 일침을 날렸다.
[아아, 렉바. 지팡이가 없으면 현현조차 못 하는 노쇠하고 불쌍한 로아.] […….]그러나 담 발라의 반격으로 순식간에 전세가 뒤집혔다. 렉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렉바가 연거푸 담배 연기를 뿜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 보니 어느덧 수속은 끝나 있었다.
일은 마침내 기내에 들어섰을 무렵 터졌다.
“혹시 신발장이 어디 있습니까?”
“네?”
강대만이 기어코 신발을 벗고 비행기를 타버린 것이다.
강대만은 승무원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되묻는 모습을 보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며 얼굴을 붉혔다. 그는 허겁지겁 신발을 다시 신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강대만이 큰 소리로 사과했다. 승무원은 그런 강대만을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웃었다. 강대만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성큼성큼 자리로 가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한수련이 키득거리며 강대만 옆에 앉았다.
“한수련! 네가 신발 벗고 타야 된다고 하지 않았나!”
“엥, 내가 언제?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이 치욕은 언젠가 갚아주겠다.”
“그러든가~.”
나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원래 내 옆자리는 여민서가 앉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웬 성하연이 와서 앉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자리에 앉더니,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네가 원래 이 자리였던가?”
나는 성하연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사실 굳이 말을 걸 필요는 없었지만, 그녀에게 여러 가지로 궁금한 게 있었다. 대부분은 성유다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물을 수는 없으니, 대화를 통해 원하는 정보를 조심스럽게 캐 볼 생각이었다.
눈을 감고 있던 성하연이 다시 눈을 떴다.
“……아니요, 제가 자리 좀 바꿔 달라고 그랬어요. 저 사람이랑 앉기 싫어서.”
성하연이 마유현 쪽을 턱짓으로 퉁명스럽게 가리키며 말했다. 성하연이 자리를 바꾼 탓에, 마유현과 여민서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둘은 강대만과 한수련처럼 티격태격했는데, 보통 마유현이 여민서의 심기를 긁으면 그녀가 화를 내는 식이었다.
김진서는 혼자 앉았다. 그녀는 등받이를 최대로 기울인 채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승객들도 둘러보았다. 다들 성직자들이었으며, 묵주를 들고 기도를 하거나 잠을 청하고 있었다.
“성하연.”
나는 다시 성하연을 불렀다. 그녀는 대답 대신 나를 흘깃 쳐다보기만 했다. 얼핏 보면 태연한 얼굴이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묘한 경계심이 서려 있다.
나는 그런 성하연의 반응이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댔다. 사실, 진짜로 의아했던 건 아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연기에 불과했다.
“저번에 혹시─”
“죄송한데.”
성하연이 신경질적인 말투로 내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왔다.
“좀 피곤…… 피곤해서. 자고 싶어요. 혹시 중요한 이야기인가요?”
“……아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야. 그냥 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성하연은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만 감고 있을 뿐, 자고 있지는 않았다. 별로 피곤해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나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아서, 피곤하다는 핑계를 댄 것이리라.
성유다가 성하연에게 뭐라고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모양이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되면 일이 조금 복잡해질 것 같았다. 성유다에게 아버지의 연구 자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반드시 성유다를 다시 만나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성하연이 마음을 닫아버렸으니, 그녀를 통해서 성유다를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
아니, 성유다에 대한 것을 굳이 지금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잡념을 털어내며 등받이를 편한 각도까지 기울인 뒤 눈을 감았다. 잘 생각은 없었고, 눈을 감은 채로 계획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나는 이번 선교여행에서 역행의 지팡이를 가져와야만 한다. 이번에 실패하면 다음에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르니, 다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임하는 것이 맞았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상상하고 그에 대한 대처법을 떠올렸다. 실수 없이 지팡이를 가져온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차라리 실수를 최대한 줄이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그때,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렉바가 뭐라고 말을 건넸다. 그러나 소음에 가려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기체(機體)가 떠오르는 소음 속에서, 강대만이 감탄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수련의 웃음소리도. 그리고 마유현이 여민서를 놀리는 목소리도, 전부 어렴풋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소음이 멎을 무렵에 창문을 보았다. 늘 올려다보던 구름이 내려다보였다.
* * *
도착한 뒤, 수속을 마쳤을 때는 현지 시각으로 초저녁 무렵이었다. 점심에 출발하여 장장 10시간을 비행했는데도 아직 밤이 되지 않은 것은 시차 때문이었다.
우리는 캐리어를 받은 뒤 한대호를 따라 공항 밖으로 나왔다.
“아…….”
가장 먼저 탄성을 내뱉은 것은 강대만이었다. 나도 내뱉지만 않았을 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내심 감탄사를 흘렸다.
오만할 정도로 높게 솟은 건물은 저무는 태양을 견제하기라도 하려는 듯 화려한 조명을 뿜어 대고 있었다.
보라, 주황, 초록, 형형색색의 빛깔이 도심을 몽환적인 분위기로 가득 채웠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에서 홀로 빛나는 도심은 그야말로 오아시스였다. 혹은 신기루이거나.
도로에 촘촘하게 자리를 잡고 선 차량들은 쉴 새 없이 경적을 토했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낯선 외모, 낯선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이국적이었고, 이곳에서는 우리 모두가 이방인이었다.
“감탄은 나중에. 지금은 일단 숙소로 이동해야 해. 생각보다 시간이 부족해.”
한대호는 넋을 잃고 서서 풍경을 구경하고 있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다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한대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대호는 우리를 공항 근처에 주차되어 있던 차량으로 안내했다. 10명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법한 작은 버스였다.
“3일간 모든 이동은 이 버스로 할 거야. 혹시 길을 잃거나……. 아, 이 부분은 일단 숙소로 가서 짐 풀고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군.”
한대호는 그렇게 말하며, 짐을 트렁크에 싣고 우리를 차에 태웠다. 차가 출발하는 동안 우리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낯선 도시의 풍경을 본 여운이 아직까지 남아 있던 탓이리라.
적어도 내가 입을 열지 않은 이유는 이것이었다.
[온갖 더러움을 화려한 빛깔로 치장하여 가린 도시지.] [아아, 나도 보고 싶구나, 꼬마야. 언제쯤 나는 나갈 수 있는 거니?]렉바와 담 발라가 한 마디씩 건넸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차창 너머로 흘러가는 풍경을 성실하게 눈에 담았다.
지형은 대체로 평지이고, 겉보기에는 아주 화려하고 세련된 도시처럼 보였다. 그러나 유심히 들여다보면 오랜 시간 방치된 것처럼 더러운 골목도 보였다.
치안이 그리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한국보다는 신경 쓸 것이 적었다. 한국은 어디를 가든 CCTV에 블랙박스를 신경 써야 하니까.
[치안이 안 좋은데 안심을 해? 이건 뭐, 어엿한 범죄자군!]“…….”
그때, 바론 삼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 며칠 동안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목소리조차 들려주지 않던 그가, 대뜸 나타나서 한 첫 번째 말은 다름 아닌 조롱이었다.
나는 욕을 할 뻔했다가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바론 삼디는 그런 내 처지를 알고 더 신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하긴, 부두교도는 살아 있는 것조차 범죄로 취급되긴 하지. 지독한 세상이구나!] [바론 삼디, 쓸데없는 소리를 할 거면 뭐 하러 왔지?]렉바가 핀잔을 주자 바론 삼디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늘 그렇듯, 조언 한 마디 하러 왔지. 그래, 역행의 지팡이가 코앞에 있구나. ‘역행’의 지독하고 추악한 냄새가 벌써부터 나는데.]“…….”
[내 조언을 듣지 마라. 그럼 어느새 역행은 네 손에 들려 있을 거다.]바론 삼디가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그 조언을 듣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조언이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던 탓이다.
그의 조언을 들으려면 조언을 듣지 않아야 했고, 조언을 듣지 않으면 조언을 듣는 셈이 됐다.
바론 삼디가 킬킬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역행’은 운명을 따르는 자를 싫어하지. 그러니, 조언을 해도 모순된 조언이 옳지 않겠나? 가령─] [바론 삼디, 더럽고 냄새나는 로아! 꺼져주렴!]그때 바론 삼디의 말을 끊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담 발라였다. 담 발라는 바론 삼디를 아주 싫어했다.
바론 삼디는 애연가에 애주가인 데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두운 계열의 옷만 입는데, 담 발라는 그런 것들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얀 옷을 좋아했고, 담배와 술 냄새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방금 담 발라인가? 오랜만이기는 한데, 어디에 있는 거지?] [더러운 입 냄새 풍기지 말고 꺼져주렴!] [아, 캐리어 안에 있었구나! 하하, 거기 갇힌 채로 말라비틀어져 죽어라. 가는 길은 내가 안내해 주지!]바론 삼디와 담 발라가 유치한 공방을 주고받는 동안 차량은 숙소에 도착했다.
우리 숙소는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고층 호텔이었다. 사전 조사를 할 때, 밤에 테라스 정원을 나가면 야경을 볼 수 있어서 좋다는 평이 있던 곳이었다.
“숙소로 가서 짐 풀고 좀 쉬다가, 음……. 30분 뒤에 지하 1층에 있는 강당으로 내려와라. 전달할 게 있어. 중요한 내용이니까 늦지 말고.”
우리는 한대호의 지시를 따라 숙소로 갔다. 남자 숙소는 11층이었고, 여자 숙소는 12층이었다.
홀수 층을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와 짝수 층을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어서, 남녀가 갈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마유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하필이면 층이 다르네. 이러면 좀 곤란한데…….”
도대체 뭐가 곤란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배정된 숙소는 생각 이상으로 컸다. 셋이 쓰기에 넉넉한 것을 넘어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다. 침실도 3개여서, 인당 한 개씩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넓기만 할 뿐 가구가 많이 놓여 있지는 않아서, 휑뎅그렁한 느낌이 났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아무 침실 중 한 곳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캐리어를 열었다.
[아, 오랜만에 보는 빛이구나. 꼬마야, 정말로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단다.]그리고 담 발라를 꺼내 주었다. 그녀는 간만에 맡는 바깥 공기에 몹시 기분이 좋아진 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거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침실은 제가 쓰는 걸로 할 테니까, 여기 어디든 숨어 있어요.”
[또 숨어야 하는 거니?]“네. 어디든 캐리어 안보다는 나을 거예요. 침대 밑이나, 저기 서랍 안이나…….”
[언제까지 숨어 있어야 하니?]“우리 나갈 때까지만요.”
[그래, 꼬마야. 계속 숨을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구나.]사삭!
담 발라는 침대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몸을 숨겼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잠갔던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마유현과 한대호는 거실에서 한창 짐을 풀고 있었다.
그때, 마유현이 자신의 캐리어에서 검은 봉투 하나를 꺼내 냉장고에 통째로 집어넣었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얼핏 보니 제법 무거운 게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건 뭐냐?”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마유현은 현장 검거된 범죄자처럼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떨떠름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 뭐, 음료수 같은 건데.”
“음료수를 가져올 이유가 있나?”
“……아이 씨, 그냥 봐라. 어차피 너도 같이 먹을 텐데.”
마유현은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봉투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서프라이즈로 딱, 풀려고 했는데……. 아쉽게 됐구만.”
나는 다가가서 봉투에 든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너…… 정신 나갔냐?”
그가 가져온 것은 술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양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