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246
제246화
“기억 나? 너희 언니. 정인아.”
내가 묻자, 정윤아가 고개를 갸웃댔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지팡이를 통제하는 법을 알았고, 역주술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정윤아의 상태는 눈에 띄게 호전됐다.
‘조용히 해’라는 말 대신 다른 말도 할 수 있게 됐다. 기껏해야 ‘응’, ‘몰라’ 따위의 단순한 대답에 불과했지만. ‘기다렸어?’라는 말도 할 줄 알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한 것에 불과해서, 정윤아가 한 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상태가 호전되지 않게 됐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등의 확실한 대답보다, 고개를 갸웃대는 때가 더 많아졌다.
일부 기억은 돌아왔다. 그러나 오직 정인아에 대한 기억만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
가끔, 나는 평정심을 잃었다.
내가 도대체 왜 이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하는 건지. 계속 하다 보면, 뭔가 바뀌는 게 있기는 한 건지.
생각해보면 내가 하는 짓은 로마니카교를 위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로마니카교도인 정인아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었으니까.
로마니카교 성전사 때문에 육은형의 용병단원 여럿이 죽고 다쳤다. 나는 로마니카교 성전사 여럿을 다치게 했고, 미치게 했다.
내게 로마니카교도는 분명히 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적을 위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문득 화가 났다. 그만두고 전부 포기해 버리고 싶기도 했다.
“기다렸어?”
그때, 정윤아가 내게 물었다. 나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이전보다 확연히 맑아져 있었다. 혈색도 많이 나아졌다. 얼핏 보면 그냥 피부가 조금 하얀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어.”
의미 없는 대답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지칠 것 같았다. 조급하면 안 되는데, 자꾸만 조급했다.
동부성기사단에 가서 ‘장기 실종자 수색 업무에 참여하고 싶다’라고 선언한 지도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
한대호는 시험이 끝나고 몇 주 뒤에 인원을 편성해서 수색을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적당한 방법으로 정윤아를 찾아낸 것처럼 꾸밀 것이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완전히 정윤아를 낫게 해야 했다.
주륵.
조급한 마음에 역주술을 한 번 더 사용하려고 했지만, 코피가 흘러서 그만두었다. 역주술의 부작용보다도 수면 부족이 문제였다.
근 일주일간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정윤아를 치료하는 데에만 전념했다. 학교도 가고 치료도 하려고 하니 시간이 없어서, 잠을 자는 시간을 줄여버린 것이다.
[곧 시험이구나.]정윤아의 방에서 나와 내 방 침대에 누웠을 때, 렉바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곧 시험인데,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수업도 거의 빼먹어서, 이번 시험은 정말로 잘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잘 봐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정윤아에게 온 신경이 몰려 있는 탓이리라.
그때, 책상 위에 놓았던 휴대폰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문요셉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만나서 할 얘기가 있는데, 언제 시간 되나?] [계속 무시할 생각인가?] [되도록 서로에게 좋은 쪽으로 일을 해결하고 싶네.]지난 며칠 동안 문요셉에게만 온 연락이 수십 통. 전화만 몇 통이었다. 그는 내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락을 해서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너무 집착하네.”
[일이 생각한 대로 흘러간 모양이구나.]내 말에 렉바가 맞장구를 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요셉이 이 정도로 내게 연락을 한다는 건, 모든 것이 내 계획대로 흘러갔다는 뜻이었다.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문요셉과 정화의 일족 간의 어떤 마찰이 생겼음은 분명했다.
문요셉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신경 써야 할 일이 줄었다는 뜻이었으니. 이제 정윤아를 치료하는 것과 시험 정도만 신경 쓰면 됐다.
문제는 시험이었다. 이제 시험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일주일 남짓. 그 안에 벼락치기를 한다고 해서 성적에 유의미한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차라리 아예 시험공부를 포기하고, 정윤아를 치료하는 데에 전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도움을 줄까.]그때, 렉바가 말했다. 나는 놀라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렉바가 은연중에 내게 도움을 준 적은 많았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겠다고 말한 적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 렉바는 그 말을 남기고 침묵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원래 나는 시험을 칠 때 로아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코피를 흘려가며 공부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내가, 오직 로아의 도움만으로 좋은 성적을 얻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로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시험을 친다면……. 지금껏 본 적 없는 사상 최악의 점수를 받게 될지도 몰랐다.
“또 도움을 받지 않겠다고 하면, 그건 고집일까요.”
[나는 고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그게 네 신념을 지키기 위한 행위라고도 할 수 있지.]“신념……. 글쎄, 그 정도로 거창한 행위는 아닌 것 같은데요.”
[네가 느낀 부당함에서 비롯된 신념. 너 스스로는 부당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신념이지.]너무 확대해석인 것 같기는 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내가 처한 상황을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세상이 부당하다고 느낀 적도 있다.
우리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다. 그런데도 교황청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겨야 했고, 혹여라도 부두교도라는 사실이 들키는 날에는 꼼짝없이 죽거나 수감되어야 했다.
부두교도는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죄를 지은 셈이 됐다.
그러한 현실이 너무 싫었기 때문에, 나라도 부당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했다.
[그 신념이 너를 지탱하고 있는지, 아니면 너를 파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거라.]“…….”
[지탱한다면 그것은 신념이겠지. 그러나 파괴한다면……. 그건 고집일 거다.]옳은 말이었다. 부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때로는 그것에 집착하는 행위가 나를 지탱한다면 신념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나를 파괴한다면 그건 고집이었다.
[고민해 보거라. 그리고 선택해 보거라.]렉바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 * *
정인아는 무거운 걸음을 이끌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고 발끝이 저렸다. 눈꺼풀과 입가의 근육이 바들바들 떨렸다.
공부를 하느라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이라고, 정인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간 공부를 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고 지냈다. 거의 밤을 새워가면서 공부를 하다가,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간다. 그리고 시험을 친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시험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 날 보는 시험 과목은 신성물질학. 다행히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이었다. 가장 많이 공부한 과목이기도 했다.
오늘따라 컨디션이 유독 안 좋지만, 그래도 신성물질학만큼은 잘 볼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서, 신성물질학에 대해 필기한 부분을 기계적으로 읽으며 걸었다.
“인아야!”
그때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정인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고작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머리가 계속 어지러웠다. 그녀를 부른 친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왔다.
“왜 그래? 어지러워?”
“……조금? 잠을 못 자서 그런가?”
“공부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야? 그러다 죽겠다.”
“죽기는, 겨우 이 정도로는 안 죽어. 살짝 컨디션이 안 좋은 거야.”
정인아가 웃으며 말했다. 웃는데도 입가가 자꾸 떨렸다. 친구가 정인아가 들고 있던 노트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이건 뭐야? 필기한 거?”
“응, 그냥 간단하게? 시험 직전에 보려고 중요한 것만 써 둔 거.”
“봐도 돼? 나 진짜 공부 하나도 안 해서! 이거라도 보면 점수 좀 오르지 않을까?”
“봐도 되기는 하는데……. 내가 글씨를 너무 못 써서. 알아보기 좀 힘들걸.”
정인아가 그렇게 말하며 친구에게 노트를 건넸다. 친구가 노트에 적힌 것들을 보았다. 방글방글 웃고 있던 친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분명 정인아는 시험 직전에 보려고 중요한 것만 간단하게 써 둔 노트라고 했다. 그런데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노트에는 교과서에 적힌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글씨가 너무 작고 빽빽해서 읽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친구는 한숨을 푹 쉬며 정인아에게 노트를 돌려주었다.
“야……. 이게 어떻게 간단하냐? 보자마자 속이 울렁거리네.”
“에이, 그 정도는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어휴……. 진짜 전교 2등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친구가 말했다. 칭찬으로 한 말인 것 같았지만 정인아에게는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목표는 1등이었다. 이번 시험에서는 반드시 마유현을 이기고 싶었다. 그러나 확신이 없어서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정인아는 아무 말 없이 다시 노트를 펼쳐서, 그 안에 빼곡하게 적힌 글씨를 읽고 또 읽었다.
“아, 마유현이다.”
노트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다가, 슬슬 글씨가 춤을 추듯 흐느적거리기 시작할 때 친구가 말했다. 정인아가 고개를 들었다.
1학년 건물 앞 화단에서, 마유현이 집게를 들고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은 마유현의 주위를 맴돌면서 그를 놀렸다.
“역시 쓰레기 줍는 솜씨가 남달라. 이것이 피렌체의 이삭 줍는 여인?”
“이러고 계속 허리 굽히고 있으면 안 아프냐? 마유현, 벌점 다 깎을 즈음에는 꼽추 돼 있을 듯.”
“노트르담의……. 아니다, 머리색을 생각하면 노르스름한 꼽추네.”
“야, 닥쳐라. 집게로 아가리 다 찢어 버리기 전에.”
“이거 명언이네요. ‘얘, 댁챼럐’.”
“집게로 주섬주섬 쓰레기를 수거하면서 말하니 더욱 명언인데?”
“…….”
그들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댔다. 처음에는 화를 내던 마유현도 하도 놀려 대니, 어이가 없었는지 웃음을 흘렸다.
정인아와 친구는 그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얼마 전에, 마유현이 도선우를 때렸다는 소문이 났다. 도선우는 맞아서 입술과 볼이 터지고 찢어졌으며, 머리에도 큰 상처가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도선우의 요청에 따라, 마유현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대신 벌점을 받았고, 그걸 깎기 위해서 마유현은 교내 봉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짜증 나. 원래 같았으면 정학 먹고 학교에는 나오지도 못했을 텐데.”
친구가 계단을 오르면서 말했다. 정인아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친구가 혀를 쯧 차면서 입을 열었다.
“학폭위는 왜 안 연 거야? 호구도 아니고. 뭐, 돈이라도 받았나?”
“그냥, 일 커지는 게 싫어서 그랬겠지.”
“야, 아무리 그래도……. 아, 맞다. 도선우랑 연락은 해 봤어?”
친구가 물었다. 정인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요즘은 연락 안 해.”
“그래? 아쉽네. 왜 맞았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학교에 와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있기만 하다가 가니까 물어볼 틈이 없더라.”
“바쁜 것 같아. 연락도 안 하고, 인사도 안 해.”
사실, 그녀는 최근에도 도선우에게 문자를 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답장이 돌아온 적이 없다.
나중에는 정인아가 보낸 문자만 십여 통이 쌓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스스로가 너무 비참하고 한심했다.
그 이후로 누군가 도선우에 대해서 물어보면, 정인아는 항상 모른다고 답했다. 연락을 하냐고 물어도 연락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래, 뭐……. 그래도 학교는 오니까.”
친구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둘은 시험장이 달라서, 중간에서 헤어졌다. 정인아는 시험장에 가는 도중에도 계속 노트를 읽었다.
시험장에 들어가서,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 감독관이 시험에 필요한 필기구 외에는 전부 가방에 집어넣으라고 말한 후에야 정인아는 노트를 덮었다.
종소리와 함께 시험이 시작되었다. 감독관이 시험지를 배부했다.
“…….”
정인아는 시험지를 노려보았다. 얼핏 보기에 어려운 문제는 없다. 실수하지만 않는다면 전부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정인아는 호기롭게 펜을 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가끔, 집중이 끊기면 도선우와 마유현 생각이 났다.
도선우가 마유현에게 맞은 이유에 대해서, 다양한 소문이 돌았다. 도선우가 마유현의 부모를 욕했다는 소문. 마유현의 여자를 도선우가 빼앗았다는 소문.
심지어는 그 자리에 있던 김진서까지 엮어서, 치정극을 벌이다가 싸움이 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 소문을 듣다 보면, 정인아는 도선우가 원망스러웠다. 치정극을 벌이다가 싸움이 났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왠지 모를 질투가 났다.
도선우를 걱정하는 마음이 먼저여야 했는데,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시험 종료 10분 전. 슬슬 정리하고 마킹 시작해라.”
감독관이 말했다. 다른 아이들은 여전히 문제를 푸느라 끙끙대고 있었지만, 정인아는 이미 문제를 다 풀고 답을 재검토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번 시험에서 반드시 마유현을 이기고 싶었다.
전교 1등을 위해서는 반드시 마유현을 이겨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도선우가 맞은 것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었다.
소문을 듣고 도선우를 걱정하기보다, 그를 원망했던 것에 대한 속죄를 하고 싶었다.
그녀가 검토를 마치고 마킹을 위해 컴퓨터용 사인펜을 들었다.
쿵.
그때, 정인아가 정신을 잃고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배부된 시험지 위에 붉은 피가 스며들어서 번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