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283
제283화
나는 얼떨결에 정인아의 집에 가게 됐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초대에 흔쾌히 응한 것은 방과 후에 별다른 일정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집에 방문할 명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정윤아의 상태를 확인한다는 이유도 있었고, 곧 있을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같이 공부를 한다는 명목도 있었다.
렉바의 도움을 받으면 굳이 공부를 하지 않아도 기말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공부는 하는 편이 나았다.
렉바가 모든 문제의 정답을 알고 있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을 것 같으냐?]렉바는 그런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분명히 렉바도 모르는 것은 있을 것이다.
렉바의 도움만으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때 나는 나의 능력과 의지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근데 좀 이상하네.”
정인아의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그녀는 문득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보았다.
“네가 나보다 성적이 더 좋은데, 왜 네가 나한테 공부를 배워?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공부는 네가 더 잘해. 성적이랑 별개로.”
“뭔 소리야……. 성적이 좋으면 공부도 네가 더 잘하는 거지.”
“저번에 1등한 건 그냥 운이었고.”
“맨날 운이래. 겸손인지 기만인지……. 하여튼 이런 게 짜증 나, 너는.”
정인아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러는 너는 왜 맨날 짜증 난다고 하냐?”
“뭐? 내가 언제 맨날……. 맨날 그랬나……?”
“그래.”
별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며 그녀의 집으로 들어왔다. 거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집에서는 그 어떤 소리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구석의 방문 하나만이 굳게 닫혀 있었고, 그 너머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자그맣게 들려올 뿐이었다. 아마 저기가 정윤아의 방인 것 같았다.
들어오면서 문 여는 소리가 분명히 방 안까지 들렸을 것이고, 그렇다면 한번 나와볼 법도 한데 정윤아는 전혀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정인아는 굳게 닫힌 방문을 노려보다가 혀를 쯧, 차며 입을 열었다.
“동생한테 나오라고 말하고 올게. 얘는 자기가 불러 놓고, 막상 데려오니까 나오지를 않아.”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고는 안에서 동생과 뭐라고 대화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거실에 있는 의자를 아무거나 끌어와 앉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대화를 마치기를 기다렸다.
“어휴, 진짜…….”
마침내 대화가 끝났을 때, 정인아는 질렸다는 듯 한숨을 쉬며 정윤아의 방에서 나왔다. 정윤아는 여전히 얼굴을 비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안 나온대?”
“응, 뭐 하고 있다고 나중에 나온다는데……. 몰라, 쟤랑 더 말하기 싫어. 말투가 싸가지 없어.”
“너랑 닮았네.”
“뭐?”
장난으로 건넨 말이었는데, 정인아는 진심으로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둘러댔다. 그리고 공부나 하자고 화제를 돌렸다.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던 정인아는 재차 한숨을 푹 쉬고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공부나 해. 서로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자.”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가방에서 책 두 권을 꺼냈다. 시험공부를 위한 책이 하나, 그리고 평소 읽던 책이 다른 하나였다.
정인아는 묵묵히 공부를 시작했고, 나도 그 앞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집중이 잘 되지 않는 참에는 평소 읽던 책을 펼쳐서 읽었다.
서로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자고 말은 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거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나는 모르는 부분이 있어도 되도록 그녀에게 묻지 않고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리고 정인아는 달리 모르는 부분이 없는 것 같았다.
“가끔 무서울 때가 있는 것 같아.”
정적이 깊어질 무렵, 문득 정인아가 말했다.
나는 흘깃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곳곳에 밑줄을 긋는 손동작이 정갈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말의 뜻을 짐작해보려 했으나, 정인아의 얼굴에는 표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 탓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뭐가 무서울 때가 있다는 건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
내가 묻자, 정인아는 잠시 대답하지 않고 계속 책을 보았다. 그러다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며 입을 열었다.
“그냥, 이것저것…….”
“이것저것?”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시대라고 해야 하나.”
정인아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정확히는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로마니카 종교학 교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너무 쉽게 죽어. 부두교니, 사탄교니, 사교들이 넘치는 이상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거고.”
“…….”
“그런데 그게 조금씩 당연하게 느껴지려고 해.”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우리 학교에서 몇 명이나 죽었는데, 추모식도 다녀왔는데,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말았어. 친한 애들이 죽은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익숙해져서 그래. 지금까지 너무 일이 많았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익숙해질까?”
정인아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표정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기계적인 눈빛으로 책을 훑으며, 묵묵히, 그리고 꿋꿋하게 계속 공부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언제나 눈물이 고이곤 했던 그녀의 눈동자는 건조하게 말라 있었다.
“그렇겠지. 성직자가 되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할 테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책에 시선을 붙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네가 죽더라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익숙해질 수도 있어?”
“갑자기 그런 걸 왜 묻는 거야? 공부에 집중이 안 되잖아.”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정인아는 시선을 다시 책으로 옮기며 말을 이었다.
“네가 죽어도 내가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어?”
“글쎄…….”
잠시 고민해 보았다. 나는 내가 죽더라도, 혹은 떠나더라도 정인아가 아무렇지 않기를 바라고 있나?
나는 언젠가 죽을 수도 있고, 말없이 그녀의 곁을 떠나게 될 수도 있다. 나는 부두교의 교주였고, 정인아는 로마니카교도였다. 김진서와 마찬가지로.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무엇도 장담할 수 없고, 무엇도 바랄 수 없었다.
“……무너지지 않을 만큼만 슬프면 좋겠지.”
나는 고민 끝에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다. 정인아는 내 말을 듣고 잠깐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피식 미소를 지었다.
“되게 오글거리게 말하네.”
“주제부터 오글거렸어. 그리고, 애초에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야?.”
“공부하기 싫어서 그냥 꺼내 본 말이야. 깊게 생각하지 마.”
벌컥.
그때,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고 정윤아가 나왔다. 정윤아는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공부하는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인아와 나 사이를 정신없이 오가던 그녀의 시선은 이내 나에게 멈췄다. 정윤아는 말없이 나를 한참 쳐다보기만 했다.
“안녕.”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정윤아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반갑, 아니. 죄송합니다. 저…….”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나는 허둥지둥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멀쩡하게 말을 하는 정윤아를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문득 정윤아가 아직 좀비였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말을 하기는커녕, 괴성을 지르면서 내 팔을 물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정인아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새삼 감격스러웠다.
한때는 정윤아를 치료한 것이 나라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다는 것이 답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멀쩡한 정윤아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마음이 후련했다.
“……인사를 너무 늦게 드려서.”
“그래, 너무 늦게 했어. 사람을 불러 놓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서는.”
정인아가 정윤아를 쏘아보며 핀잔을 줬다. 정윤아는 그런 정인아를 흘깃 노려보더니, 내게 다시 한 번 고개를 푹 숙여 보이고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게, 기껏 불러줬더니 고작 저 말 하려고……. 미안해. 동생 때문에 오라고 한 건데, 막상 동생은 얼마 보지도 못하고.”
“됐어, 충분해.”
나는 정인아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감사 인사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평범하게 말하고, 생활하는 정윤아의 모습을 본 것만으로 정말 충분했다.
* * *
나는 정인아와 계속 공부했고, 밖이 어두컴컴할 무렵에 그녀의 집을 나왔다. 겨울이 되어서 해가 짧아진 탓인지, 밖은 금방 어두워졌다.
정인아는 내가 한사코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굳이 집 밖으로 나와서 나를 배웅했다.
“얼른 들어가. 추워.”
나는 정인아에게 얼른 들어가 보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그녀는 추위에 몸을 덜덜 떨면서도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먼 길 오셨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마음 같아서는 바래다주고 싶은데.”
“먼 길은 무슨, 바로 앞이 기숙사인데.”
“그래도……. 아무튼, 조심히 들어가.”
정인아가 내게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나도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 뒤, 몸을 돌려 걸었다. 거리에 늘어선 가로등 불빛마저 음산하게 보이는 어둡고 깊은 밤이었다.
나는 성유다를 언제쯤 만나야 적당할지 고민하며 예배당 쪽으로 향하려고 했다.
“…….”
그러다 문득 나는 등 뒤로 인기척과 시선을 느꼈다. 분위기로 보아 미행이 붙은 것 같았다. 문요셉이 나를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붙인 건가?
그러나 문요셉의 수하라고 하기에는 너무 엉성했다. 기척을 숨기려는 생각조차 없는 듯, 무척 허술한 미행이었다.
그러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나는 예배당으로 향하던 걸음을 기숙사 쪽으로 돌렸다. 미행이 붙은 채로 예배당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행과 천천히 거리를 좁히며 걷다가, 미행이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못한 틈을 타 불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다. 나를 따라오고 있던 것은 문요셉이 붙인 미행도 아니었고, 다른 로마니카교의 성직자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정윤아였다.
그녀는 내가 갑자기 고개를 돌린 탓에 놀랐는지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아까 감사하다는 말씀을 못 드린 것 같아서요.”
정윤아가 말했다. 그녀는 그 말을 하고 나서 한참이나 우물쭈물 입을 열기를 망설이다가, 이내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오랜만이라는 말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