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284
제284화
“아……. 오랜만?”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좀비가 되었던 정윤아를 완전히 치료하고 난 이후, 즉 온전한 상태의 정윤아와 마주하는 것은 이번이 거의 처음이었다. 그러니 나에게는 오랜만이라는 말이 맞았다.
그러나 정윤아가 나에게 ‘오랜만’이라는 말을 건네는 것이 맞나? 좀비일 적의 기억이 소실된 정윤아의 입장에서, 나는 그저 정인아의 친구일 뿐이다.
정윤아와 나는 정인아라는 존재 없이는 연결될 수 없는, 그저 남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녀가 내게 오랜만이라는 말을, 굳이 내 뒤를 쫓으면서까지 전했다는 건…….
“기억이 사라진 게 아니었나?”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고, 몇 안 되는 가로등은 고장이 났는지 빛이 희미하다.
CCTV나 블랙박스 같은 것들이 눈에 밟히긴 하지만, 오군의 권능으로 즉시 무력화하면 될 일이다.
혹 목격자가 있더라도 성유다의 도움을 받으면 충분히 뒷수습이 가능하다.
촤륵.
나는 부두 마력을 사출했다. 사용하려는 주술은 ‘기억 분쇄’, 그리고 ‘혼절’.
먼저 혼절 주술로 정윤아의 의식을 없앤 다음, 그 틈을 타 기억 분쇄를 통해 나에 대한 기억을 정교하게 지우면 된다. 그렇게 하면 아무런 탈도 없을 것이다.
“네, 기억해요.”
그때, 정윤아가 말했다. 나는 주술진을 그리던 손을 멈추었다.
어째서 멈췄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본능적으로 손이 멈췄다.
정윤아의 목소리에서 나를 적대하거나, 이용하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강한 의지가 읽혔기 때문인지.
“다는 아니에요. 그냥, 예배당에서의 기억만 드문드문.”
“…….”
“그리고 교주님의 기억을 조금, 봤어요.”
정윤아가 말을 이었다. 나의 기억을 조금 봤다는 그녀의 말은 금방 이해가 되었다.
역행의 지팡이가 폭주했던 그때, 나는 정윤아의 기억을 조금 엿보았다. 그때 정윤아 또한 나의 기억을 조금 엿보게 된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노아의 방주를 통해 자신의 기억을 나와, 성유다에게 전달했던 것과 같이.
정윤아는 내 손에서 흘러나온 보랏빛 부두 마력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씁쓸하다는 듯 고개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제 기억을 지울 건가요? 저는 잘 모르지만, 주술은 기억을 지우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요?”
“……그래.”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출했던 부두 마력은 아직 거두지 않았다. 그려 두었던 주술진은 완성까지 단 한 획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마지막 한 획을 그려 넣으면, 주술은 발동되고 정윤아는 의식을 잃고 나에 대한 기억을 잊게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주술진을 여전히 완성하지 않는 이유는, 그저 호기심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녀가 이토록 침착한 것인지. 나의 기억 중에서, 그녀가 엿본 기억은 무엇인지.
그리고…… 굳이 나에게 이 사실을 알리러 온 까닭이 무엇인지.
“……왜 따라온 거야? 그냥 조용히 있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 텐데.”
“그게 저도, 교주님도 편할 테니까요. 저는 제 기억을 지워도 상관없어요.”
내가 묻자 정윤아는 너무나 태연하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상관이 없다는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기억을 지운다고 말하면 두려워하거나, 혹은 경계하고 도망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리고 있던 주술진을 부수어 없앴다. 주술진은 재가 되어 사라졌고, 손끝에서 흘러나오던 부두 마력도 곧 광채를 잃고 없어졌다.
주술진을 마저 그리는 대신, 그녀의 표정과 눈빛을 살폈다. 그 눈빛에는 여전히 견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상관이 없다……. 왜?”
“저는 싫지만……. 그러는 게 교주님에게 안전하다면 그렇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왜 나를 교주님이라고 부르지?”
“예배당에서 다들 그렇게 불렀으니까요.”
“…….”
정윤아는 나의 추궁하듯 묻는 말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답해서,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정인아와는 성격이 조금 달랐다. 그녀는 정인아보다 차분하고, 무모할 만큼 용기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유심히 쳐다보았고,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많이 고민했어요.”
“뭐를?”
“이걸 말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묻어둬야 할지. 계속 방에 틀어박혀 있던 것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그런데 왜 말하러 온 거야.”
“교주님의 기억을 봤으니까요.”
정윤아가 말했다. 나의 기억이라고 해도, 그 범위가 너무 모호했다. 그녀가 어디부터 어디까지의 기억을 엿보았는지 알아야 했다.
“내 기억을 어디까지 봤어?”
“정확히는 몰라요. 그냥……. 환청이 들리고, 몇 번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그런 기억들부터, 쭉…….”
“…….”
그건 아마도 7년 전의 기억일 것이다.
성전이 끝난 직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라지고 나 홀로 남았던 때.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은 채 로아를 받아들여, 그 부작용으로 반쯤 미쳐 있었던 때.
정윤아가 본 것이 그때부터의 기억이라면, 그녀는 나의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저는 부두교의……. 정확히는 교주님의 편이 되고 싶어요.”
그녀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다시금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를 믿을 수 없다면 이 자리에서 기억을 지워도 돼요.”
“…….”
[꼬마야. 저 아이가 이미 문요셉의 첩자가 되었을지 누가 아니? 너를 떠보기 위한 물음일 수도 있단다. 위험 인자는 미리 제거하는 게 좋아.] [널 떠보는 게 누구인지, 잘 판단하거라.]담 발라에 이어 렉바가 말했다. 지금 나를 떠보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정윤아, 아니면 담 발라? 혹은 렉바일 수도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노아의 방주에 들러 아버지의 기억을 보았을 때, 혹시라도 정윤아가 내 기억을 엿보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녀가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 줄은.
“오군.”
틱, 틱, 틱…….
나는 오군의 권능을 사용했다. 골목을 비추던 가로등이 하나둘 꺼지면서, 주위는 어둠에 잠겼다. CCTV와 같은 기기도 전부 작동을 멈추었다.
나는 그 깊은 어둠을 가로질러 정윤아에게 다가갔다. 희미하게 보이는 정윤아의 실루엣이 작게 떨렸다.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네?”
“너를 믿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뭐냐고 묻는 거야.”
나는 어둠 속에서 나를 쳐다보는 정윤아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흐릿하게 풀려 어디를 보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던 눈동자에는, 어느덧 강하고 또렷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 눈동자는 명확히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약간의 두려움과 긴장으로 떨리는 듯 보이지만, 안에 담긴 결의는 흔들리지 않았다.
“뭐든…….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고 싶어요.”
정윤아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이토록 나를 도우려고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려고 하지?”
나라면 도망쳤을 것이다. 나 같은 것과는 말조차 섞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기억을 보았다면, 부두교가 지금까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도 보았을 것이다. 부두교의 편에 서면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지도 알 것이다.
반쯤 미친 상태의 내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도, 전부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윤아는 내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건지, 당돌한 건지 모를 확신에 찬 눈동자로 나를 또렷이 응시하면서.
나는 그 확신의 근거를 알고 싶었다. 그녀가 나를 떠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나를 돕고 싶어 한다는 것에 대한 확신의 근거를 찾고 싶었다.
“그럼 왜 저에게는 그렇게까지 했나요?”
정윤아가 고개를 치켜들면서 말했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을 보았다.
정인아와 닮은 갈색 눈. 정인아가 기분이 안 좋거나, 혹은 화가 났을 때 종종 내비치고는 했던 매섭고 싸늘한 눈빛.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정윤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는 걸 봤어요. 그러면서도 매일같이 저를 찾아와서 주술을 쓰고, 또다시 피를 토하면서 쓰러졌죠. 나는 그걸 보고만 있어야 했어요. 몸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
“이제는 몸이 내 뜻대로 움직이게 됐으니까, 뒤늦게라도 보답 좀 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나쁜 건가요?”
당찬 물음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일단 돌아가. 다음, 다음에……. 다시 찾아갈 테니까.”
나는 고개를 젓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정윤아는 나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이 어둠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 사라질 무렵에 나는 예배당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군.] [꼬마야, 너는 정에 너무 휘둘리는구나. 나쁜 건 아니지만…….] [이러다가 세상 사람들이 전부 알게 되겠어.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렉바와 담 발라, 그리고 언제 나타난 건지 모를 바론 삼디가 차례로 입을 열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뒤섞여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결국, 나는 정윤아의 기억을 지우지 않았다. 그녀를 믿기로 한 것이었다.
믿을 만한 근거가 충분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정윤아가 내게 했던 모든 말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우우웅─!
그때, 정적으로 가득 찬 거리에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성유다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전화를 받았다.
“…….”
뚝.
나는 성유다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예배당으로 향하던 걸음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 * *
피렌체의 교무실은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입단 시험 시즌이 다가오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1학년 때 입단 시험에 붙어서 정식 성직자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입단 시험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일단 원서를 넣어보는 학생들이 많았다.
교무실에 들이닥친 수많은 학생들은 전부 입단 시험 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교사의 추천서를 받으러 온 것이었다.
“실적도 나쁘지 않고……. 입단 시험이 문제인데, 하연이면 뭐…….”
성하연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중앙사제단 입단 시험에 원서를 넣으려고 교사들의 추천서를 모으는 중이었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경험 삼아 치른다고 생각하고, 크게 기대는 하지 말아라’라는 말을 건네곤 하던 담임교사는, 성하연의 추천서만은 진지하게 작성해주고 있었다.
“아직은 붙는 게 기적인 수준이기는 해도, 이만하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을 거야. 하연이, 너는 특히 정화의 일족이니까…….”
성하연은 파견 실습을 중앙사제단에서 치른 데다가, 파견 실습 당시 쌓은 실적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정화의 일족이었다. 성적이나 실적이 부족하더라도, 일족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는 게 교사의 의견이었다.
다른 학생들에 비하면 상당히 희망적인 말이었지만, 성하연에게는 그 말이 마냥 달갑지 않았다.
중앙사제단 입단이 마치 성하연의 실력이 아니라, 일족의 영향력에 달려 있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
만일 내가 정화의 일족이 아니었더라도 교사는 같은 말을 했을까. 성하연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털었다. 그런 가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다소 씁쓸한 마음을 갖고 교무실을 나오던 성하연은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아, 도선……!”
도선우였다. 그 역시 입단 시험 원서를 내기 위해 추천서를 모으고 있었는지, 양손에 교사들의 추천서를 바리바리 들고 있었다.
성하연은 그를 부르려고 했다가, 이내 체념하고 입을 다물었다. 도선우는 요즘 성하연과 이야기를 나누기는커녕,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일부러 피하는 듯이 어색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선우는 성하연과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한마디의 인사말조차 없이 등을 돌려 교무실을 떠나버렸다.
“…….”
성하연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쾌감과 비참함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성하연이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았고, 말을 걸어도 무시했다.
한때는 매일같이 연락을 나누며 필요에 따라서는 만나기도 했던 그가, 갑자기 무슨 원수라도 대하는 것처럼 차가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불쾌함을 넘어서서, 비참한 기분마저 느껴지는 태도 변화였다.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말 일인데, 이상하게 도선우가 그러니까 더 기분이 나빴다.
가끔은 숨이 막히기까지 했다. 저러는 이유라도 알고 싶은데, 이유를 묻기도 전에 도망을 가버리니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이후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시간을 보내던 성하연은 집으로 돌아왔다. 입단 시험 원서를 내기 위해 성유다에게 받아야 할 서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택의 모든 곳 중에서,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던 연구실로 향하던 그녀는 불현듯 이질적인 인기척을 느꼈다.
복도에 낯선 사람이 있었다.
“어.”
성유다가 고용한 사람은 아니었다. 고용인은 전부 지정된 유니폼을 입고 있어서, 성하연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유니폼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완전한 외부인.
외부인은 성하연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더니, 당황한 듯 일그러진 얼굴로 성하연을 응시했다.
놀라서 몸이 굳어 있던 성하연이 느리게 뒷걸음을 쳤다. 뒤늦게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본 그녀의 눈동자가 공포와 당황으로 떨렸다.
낯선 사람, 외부인, 불청객 따위보다 더 무서운 남자가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왜, 여기에. 뭐, 뭐 하는……?”
“……잠깐만, 당황하지 말고 들어봐.”
도선우가 진정하라는 듯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성하연은 계속 뒷걸음을 쳤다.
도선우. 집에 와 있을 이유가 없는 그 사람이 집에 와 있다. 그 사실이 성하연을 더욱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