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360
제360화
―안녕.
부모님은 잘 지내지? 집에 한번 찾아가려고 마음은 먹었는데, 쉽지가 않았어. 돌아가는 게 무서워서.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언니가 부모님한테 넌지시 전해줘. 나는 잘 지낸다고. 편지가 언니한테 잘 갔으면 좋겠다.
이만 줄일게. 나머지는 만나서 얘기하고 싶어. 그게 나을 것 같네. 아직 내가 싫지 않다면, 오는 15일에 내가 적은 주소로 와줘. 싫다면, 안 와도 괜찮아.
정윤아.
편지는 거기서 끝나 있었다. 정인아는 그 편지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혹시 누가 장난을 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필체는 분명 동생의 것이 맞았다. 오랜만에 보내는 편지치고는 너무 짧은 분량이나, 글자로도 느껴지는 무뚝뚝한 말투까지 전부, 정윤아가 맞았다.
편지지와 함께 동봉된 자그마한 쪽지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지명으로 보았을 때, 국내는 아닌 것 같았다.
이 주소가 어떤 의미인지는 정인아도 알았다.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여기로 오면 자신을 만날 수 있다는, 그런 뜻일 것이다.
“…….”
정인아는 편지를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주소가 적힌 쪽지와 함께. 그리고 그것들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었다.
그 주소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정인아는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정윤아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그 쉽고 뻔한 결심을 하기가 어려웠다.
가족을 버리고 부두교도가 되어서는, 말없이 떠난 정윤아가 원망스러워서일까. 아니면 그저 두려운 것일지도 몰랐다.
꼬박 1년 반을 떨어져 지낸 동생을 만나는 일이, 생각한 것보다 더 어색하고 힘든 일이 되어 있을 것만 같아서.
* * *
정윤아가 편지에 적었던 ‘오는 15일’로부터 열흘 전이었다. 방학식 이후 계속 집에만 있던 정인아는, 정말 오랜만에 밖으로 나왔다. 만나자고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인아가 피렌체 아카데미의 교사가 되기까지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자, 그녀의 담임 교사이기도 했던 하예진이었다.
식당에서 보기로 했는데, 하예진의 모습이 영 보이지 않아서 정인아는 몇 번이나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인아, 여기!”
그때, 어디선가 정인아를 부르는 하예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인아는 겨우 하예진을 찾았다. 근데 자리에 하예진 말고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소도진과 김복동이었다.
하예진만 만나는 줄 알았던 정인아는 두 사람을 보고 살짝 놀랐다. 하지만 떨떠름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가웠다.
“안녕하세요!”
정인아가 고개를 숙이며 그들에게 명랑하게 인사했다. 하예진이 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김복동도 뒤늦게 정인아를 알아보고는, 격하게 손을 흔들며 반겼다. 소도진도 정인아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기는 했지만, 표정은 어쩐지 떨떠름했다. 정인아는 하예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두 분도 있으신 줄 몰랐어요. 저는 하예진 선생님만 뵙는 줄…….”
정인아가 말했다. 하예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내가 말 안 했나? 요즘 내가 정신이 없어서……. 깜빡하고 말을 안 했나 보네요.”
“그러게. 나도 인아가 오는 줄은 몰랐네. 우리끼리 만나는 줄 알았는데.”
소도진이 말했다. 하예진이 고개를 한 번 더 갸웃댔다.
“엥? 인아도 온다고 그쪽에는 내가 말했던 것 같은데……. 안 했나?”
“나한테는 말했다. 사실 나는 소도진이 오는 줄은 몰랐어. 인아랑 하예진만 보는 줄 알았지.”
김복동이 말했다.
“뭐야, 이러면 내가 불청객인 것 같잖아.”
소도진은 조금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해요, 요즘 진짜 정신이 없어서. 근데 뭐 어때요? 만나서 반가웠으면 된 거지.”
하예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능청스럽게 상황을 넘겼다. 정인아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정인아는 소도진과 김복동이 오는 줄 몰랐다. 소도진은 정인아가 오는 줄 몰랐고, 김복동은 소도진이 오는 줄 몰랐다. 대충 이런 식으로 상황이 꼬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쨌거나 잘 모이기는 했으니 다행이었다. 하예진이 말한 것처럼, 만나서 반가웠으면 그만이다.
네 사람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네 사람은 각자의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예진은 지금까지 모아둔 돈으로 생활하면서, 사제단에 아르바이트 식으로 연구를 도우면서 지낸다고 했다.
일주일에 두어 번 정도만 사제단에 출근하면 돼서, 전보다 훨씬 여유롭다고 했다. 소도진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부럽다는 듯이 감탄을 토했다.
“얘 옛날에 꿈이 그거였잖아. 돈 많은 백수. 꿈 이뤘네.”
“다는 못 이뤘어요. 백수는 맞는데, 돈이 없어서.”
하예진이 웃으며 말했다.
소도진도 이제 피렌체 교사가 아니었다. 성전사 일은 계속 하고 있었지만, 트리니타스 성전사단이 와해된 탓에 그냥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프리랜서처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벌이는 이전보다 훨씬 적지만, 그래도 바쁘지 않아서 좋다는 모양이었다.
“카페인도 끊었어. 안 바쁘니까 자연스럽게 끊게 되더라고.”
“근데 담배를 다시 태운다고 그러지 않았나?”
김복동이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뭐? 진짜?”
하예진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소도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모함, 모함이야. 담배는 무슨, 끊은 지가 언젠데…….”
소도진이 황급히 해명했다.
“김복동 선생님은 요즘 뭐 하세요?”
정인아가 물었다. 정인아는 소도진과 하예진의 근황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복동의 근황은 몰랐다.
김복동은 성전이 있기 전에 피렌체 교사직에서 물러났는데, 그 이후로 뭘 하고 지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다. 마음이 편해서 좋아.”
김복동이 말했다.
“오……. 잘 어울린다.”
정인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도진이 피식 웃었다.
“김복동은 솔직히 교사를 할 얼굴이 아니었지. 험악하게 생겨서는.”
“내 얼굴이 그 정도는 아니야! 조금 무섭게 생겼을 뿐이다.”
그런, 시시하지만 재밌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각자의 근황 다음에는,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근황 이야기를 나눴다. 몇몇 기억에 남는 학생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도진은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열었다.
“참, 걔는 뭐 하고 지내냐? 그 싸가지 없던 애.”
“여민서요?”
정인아는 소도진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사업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꽤 잘되고 있을걸요?”
“사업? 미쳤네. 돈 많이 벌겠네…….”
소도진이 중얼거렸다. 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복동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소도진, 너도 돈은 많지 않나? 설마 모아둔 돈을 벌써 다 썼나?”
“뭔 소리야, 아까부터. 애초에 모아둔 돈도 얼마 없었어. 오늘도 하예진이 밥 사준대서 나온 건데?”
“내가 언제 사준다고 했어요? 인아만 사준다고 했지.”
하예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음식이 나오고, 식사를 하면서도 그들은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옛날이야기들. 하예진, 소도진, 김복동이 학생이었을 때, 피렌체에서 일어난 기억에 남는 일화들. 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친구였고, 지금까지도 친했다.
옛날이야기를 할 때, 당연히 정인아는 할 말이 없었다. 김복동과 하예진, 소도진은 모두 친구였지만, 정인아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는데, 그래도 재밌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잠깐이지만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나도, 아니,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아주 가끔, 하게 된다.
“미안해, 불러 놓고 너무 우리끼리만 얘기한 것 같아서.”
헤어질 무렵에, 하예진이 말했다.
“아뇨, 저도 재밌었어요!”
정인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말로 재밌었다. 그와 별개로, 조금은 씁쓸하긴 했지만.
하예진은 환하게 웃어 보이는 정인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인아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착잡한 얼굴이었다.
“방학에는 어디 안 가요? 여행을 간다든지, 그런 계획 없나?”
하예진이 물었다. 정인아의 착잡한 얼굴을 보니, 괜히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정인아는 그 말을 듣고 고민했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고민했다. 침울한 눈동자로, 먼 어딘가를 멍하니 노려보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행 정도는 가보려고 생각 중이에요.”
“오, 진짜? 어디로? 정해둔 데 있어?”
“정해둔 데는 있는데…… 어딘지는 저도 가봐야 알 것 같네요.”
정인아가 말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정윤아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꾸깃꾸깃했다. 잘 펼쳐서, 편지를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 주소지를 확인했다.
지명만 보아서는 어느 나라인지, 어디인지 감도 안 잡혔다. 그래도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 *
정윤아가 쪽지에 적어둔 주소는, 검색해본 결과 미국 뉴올리언스에 있는 어느 지역이었다. 정인아는 그 즉시 비행기와 숙소를 예매해서 그곳으로 떠났다.
성수기라 푯값이 무척 비쌌지만, 아깝지는 않았다. 그간 모아둔 돈이 적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정인아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정인아는 즉시 택시를 잡아서, 기사에게 쪽지를 보여주었다.
택시 기사는 쪽지에 적힌 주소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댔다. 그러고는 어쩐지 자신이 없다는 듯한 태도로 출발했다.
기사는 웬 도로 한복판에 차를 세웠다. 그러고는 정인아에게 내리라는 듯이 손짓하며, 뭐라고 말했다. 불어인지 스페인어인지, 아무튼 정인아는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아니. 뭐라는 거야……. 아이 씨, Thank you! 알아서 갈게요!”
어떻게든 소통을 시도하려고 했던 정인아도, 끝내는 지쳐서 그렇게 말했다. 돈을 냈는데 한국에서보다 몇 배는 비쌌다. 왠지 바가지를 쓴 것 같았다. 어이가 없었다.
기사가 친절하지도 않고, 목적지에 제대로 가주지도 않은 데다가, 비싸기까지……. 아무래도, 호구가 되어버린 모양이다.
“……좋은 일 했다고 생각하자.”
정인아가 중얼거렸다. 그냥 적선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냥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그녀는 일단 주소지를 검색해서, 휴대폰이 안내하는 곳으로 걸어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어쩐지, 걸어갈수록 외진 곳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도로가 끊겼다. 그 앞으로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좁은 길만 있었다. 어둡고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으스스했다. 하지만 휴대폰에서는 계속 앞으로 직진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대체…….”
정인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 으스스한 길목으로 들어갔다. 사실 이쯤에서 돌아갈까 고민도 했다. 도저히 이런 곳에 정윤아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인아는, 계속 앞으로 가보기로 했다. 나름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
얼마쯤 걸었을까.
끝이 없을 것 같던 으스스한 길이 끝났다. 그 너머에는 해변이 있었다. 파도는 잔잔했다. 수평선 위로 붉은 달이 떠 있었다. 달빛을 받아 파도는 빨갛게 부서졌다.
무섭게 보일 법도 한 풍경이었지만, 정인아는 그다지 무섭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신비롭고 아름다워 보였다.
파앙―!
그 해변에서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사람이 많았다. 해변에 있는 사람들은 붉은 달을 보며, 혹은 빨갛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그도 아니면 하늘에서 화려하게 터지는 불꽃을 보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교황, 직접 보니 어땠냐? 사진으로 보면 엄청 예쁘던데.”
“야, 실제로 보면 그냥 하얗기만 해. 얼굴은 내가 낫지, 솔직히.”
“네가 낫다고?”
“그래. 나도 얼굴은 반반한 편이잖아?”
“……넌 내가 지하 감옥에서 본 이단 심문관을 닮았어.”
“무슨 의미지?”
“객관적으로 반반하지는 못하다는 의미지.”
“야, 무슨 그런……. 죽여 버린다!”
“하하!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달리기는 내가 더 빠를걸.”
남매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다가 해변을 달렸다.
“인마, 육은형이. 그때 느그는 나 읎었으먼, 저그 하판석이 따라 꼼짝없이 뒈졌을 거여. 알어?”
“언제 적 일을 아직도 우려먹는 거야? 난 기억 안 난다.”
“워메, 이런 은혜도 모르는, 이, 이 배은망덕한 눔이……!”
친구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술잔을 주고받았다.
“선지자가 좋긴 좋아. 이런 불꽃놀이도 무상으로 할 수 있고. 아, 지아야. 고기 더 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배가 불러서……. 스승님도 좀 드세요.”
“나는 구우면서 계속 주워 먹어서 괜찮어.”
부녀인지, 아니면 사제지간인지, 아무튼 두 사람이 고기를 구워 먹으며 말했다.
“몸 아끼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권능을 도대체 몇 번이나 쓰는 거야?”
“내 심장에 칼 꽂았던 애한테 이런 말도 듣네.”
“야, 그건……. 그건, 그때는 어쩔 수 없었잖아!”
“알지, 농담이야.”
“아무튼, 이제 그만해. 더 하면 몸 상하겠다.”
“조금만 더 하자. 예쁘잖아. 분위기도 살고.”
“맨날 말을 안 들어.”
“늘 그랬잖아.”
“……그건 그렇지.”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하늘에서 화려하게 터지는 불꽃을 보며 티격태격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인아는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모두가 죽었다고 말했던, 그래서 분명 죽은 줄로만 알았던 두 사람의 뒷모습 같았다.
정인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의 얼굴을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달빛이 붉은 까닭인지, 그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 언니!”
그때, 누군가 정인아를 불렀다. 정인아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뭐 해? 거기서.”
“…….”
정인아를 부른 것은 정윤아였다. 정윤아의 말을 듣고, 바다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서 정인아를 보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정인아를 적대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정인아가 쳐다보고 있던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얼굴이 이제야 보였다.
“…….”
도선우와 김진서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정인아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도선우가 정인아를 보고, 작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일상적인 인사였다.
파도가 쳤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해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뛰어노는 사람들은 다들 즐거워 보였다. 평화로웠다.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