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64
제64화
“여민서.”
대련 실습을 마친 뒤, 신성 훈련장.
소도진이 서늘한 목소리로 여민서의 이름을 불렀다. 여민서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신성 훈련장의 바닥 타일 구조를 분석하는 것처럼 보였다.
“네 행동에 대한 처분은 징계 위원회에 맡기도록 하겠다. 불만은 없겠지?”
“……이게 징계 위원회까지 갈 일인가요?”
“너는 본 실습의 교사인 내 지시에 응하지 않았고, 또한, 돌발 행동으로 도선우 포함 4명의 학생을 다치게 했고 기타 등등. 너무 많아서 구구절절 말하기도 귀찮아.”
“하. 예, 알겠습니다.”
여민서가 마지못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태도가 무척이나 삐딱했다.
소도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야. 여민서.”
부르는 목소리에 여민서가 고개를 돌렸다.
“네?”
“대답 다시 해라.”
“아, 예. 죄송합니다.”
여민서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사과를 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태도는 삐딱하기 그지없다. 소도진이 싸늘한 눈빛으로 여민서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다시 해라.”
“네. 죄송합니다.”
여전히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
“……죄송합니다, 선생님.”
소도진은 그제야 여민서를 보내주었다. 만족스러운 기색은 아니었지만, 여민서의 입에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나오게 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여민서는 부글부글 끓는 화를 억지로 누르며, 성난 걸음으로 신성 훈련장을 나갔다.
“이야. 속이 뻥~”
울컥.
구준혁이 놀리듯 하는 목소리에, 여민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억울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눈가가 붉었다.
구준혁은 그런 여민서를 바라보며 편안하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구준혁은 학교를 마치고 곧장 체육관으로 향했다.
그의 대련 전적은 2승 1패. 도선우와의 대련을 제외하면 전부 이긴 셈이었다.
몸을 예열하기 위한 줄넘기를 하려고 줄을 고르던 중, 구준혁은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뭐야. 아프다고 조퇴한 김진서 씨 아니세요? 왜 여깄냐?”
김진서가 링 가장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손에 감은 핸드 랩이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주먹이 찢어진 듯했다.
샌드백이나 미트를 치다 보면 주먹이 찢어져 피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출혈이 너무 심했다. 손이 온통 피로 흥건한 수준이었다.
“어우야, 너 무슨 손이. 사람을 얼마나 팬 거야?”
“오늘은 스파링 안 했어.”
“왜. 아까 여민서한테 처맞고 와서?”
김진서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구준혁이 환하게 웃으며 주춤 뒷걸음을 쳤다.
“장난이었습니다~”
“뭐가 장난이야. 맞는 말인데.”
김진서가 체념한 듯 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핸드 랩을 풀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그녀의 손이 드러났다.
구준혁이 그것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운동을 어떻게 했길래 손이 저 지경이 됐을까.
그녀가 캐비닛을 뒤지고 있자, 구준혁이 다가왔다.
“뭐 찾아?”
“핸드 랩.”
“어? 그걸 왜 찾아. 너 설마 오늘 계속 운동하게? 그 손으로?”
“…….”
김진서가 구준혁을 흘깃 쳐다보았다. 눈매가 매서웠다. 구준혁이 추측하기로, 저건 더 이상 말 걸지 말라는 뜻의 눈빛이었다.
“야. 나 하나만 물어보자.”
이 이상 말을 걸면 맞을 수도 있었지만, 구준혁은 결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유는 없다. 굳이 이유를 만들자면, 입을 다물지 못하는 천성으로 태어난 탓이다.
김진서는 한창 캐비닛을 뒤지다 말고 구준혁을 쳐다보았다. 눈동자는 초점 없이 텅 비어 있다. 이루 말 못 할 섬뜩함을 느낀 구준혁이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야.”
김진서가 힘 풀린 눈으로 구준혁을 응시했다.
“귀찮으니까 좀 꺼져줬으면 좋겠는데.”
“아, 하하하. 오~ 방금 그거 좀 무섭다. 진짜 쫄았음.”
“농담 아니야.”
김진서는 여전히 구준혁을 응시하고 있었다.
식은땀이 구준혁의 뒷목을 타고 흘렀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무서웠다. 구준혁은 두려움을 애써 누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진짜 안 들어? 도선우 관련된 건데?”
김진서는 들은 체 만 체하며, 그저 묵묵히 캐비닛을 뒤졌다. 구준혁은 머쓱한 심정이 되어 괜히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한참이 지나도 김진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안 들을 거면 말든가~ 진짜 중요한 얘기도 하나 해주려고 했는데.”
구준혁은 이내 체념하고 돌아섰다.
쾅!
그때, 김진서가 캐비닛을 거칠게 닫았다. 구준혁이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김진서가 핸드 랩을 갈아 끼우며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눈빛은 여전히 매섭다.
“……뭔데?”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말에 구준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안 궁금한 척은 다 하더니, 내심 궁금하긴 했나 보다.
구준혁은 애써 웃음을 참으며 질문을 던졌다.
“너 아침에 도선우랑 왜 싸웠냐?”
“싸운 거 아니야.”
“그래? 그럼 싸운 게 아니라 네가 일방적으로 화낸 건가?”
“화낸 적 없어.”
“에이. 솔직히 말해봐. 왜 화난 건데?”
김진서가 시선을 바닥에 떨궜다.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걔가 나한테 거짓말을, 했는데…….”
막상 말하고 보니 별거 아니었다. 자신이 너무 쪼잔한 사람인가 싶어, 김진서는 괜히 부끄러웠다.
생각해 보면 고작 이런 이유로 화를 낸 것이 말이 안 됐다. 도선우는 어찌 됐건 두 번이나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었으니.
아니,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게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근데 거짓말이 그렇게 큰 잘못인가?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문득 머리가 아파져서 그녀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구준혁은 태연하게 귀를 후비며 입을 열었다.
“어, 사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좀 사이좋게 지내라. 서로 관심은 있으면서 아닌 척 간만 보다가 맨날 어긋나잖아. 보는 내가 답답해서 미치겠다니까?”
“서로?”
김진서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구준혁은 그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자신에 찬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서로. 야, 이번 실습에서 여민서가 몇 승 몇 패였는지 아냐?”
“3승 0패겠지.”
“땡~ 2승 1패입니다~!”
구준혁이 통쾌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김진서의 눈이 약간 커졌다.
“왜 2승 1패야? 누구한테 졌는데?”
“도선우. 참고로 도선우가 3승 0패야.”
“엥……?”
김진서가 멍하니 입을 벌리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선우의 실력으로는 결코 여민서를 이길 수 없으니까.
비단 도선우만이 아니라, 피렌체의 그 어떤 1학년도 여민서를 ‘대련으로’ 이길 사람은 없었다.
헌데, 그런 여민서를 도선우가 이겼다는 것이다. 도선우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믿기 힘들었다.
구준혁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설명을 하자면! 네가 여민서한테 지고 질질 짜면서 조퇴─”
“야.”
“……아무튼, 조퇴하고 나서. 여민서랑 도선우랑 대련을 했는데? 도선우가 왠지 모르게 굉장히 화가 나 있는. 무슨 느낌인지 알겠냐? 아~ 네 눈으로 직접 봤어야 됐는데. 어쨌거나─”
구준혁이 갖은 추임새를 다 넣어가며 설명을 이었다.
도선우가 왠지 모르게 굉장히 화가 나 있었고, 정의의 철퇴로 여민서를 마구 때려 눕혔다.
그렇게 대련에서 승리를 얻어냈고, 여민서는 징계 위원회에 가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였다.
구준혁의 무용담 속에서 도선우는 흡사 영웅처럼 묘사되었다.
“갑자기 징계 위원회는 왜 가?”
“……뭐, 여민서가 평소에 죄 지은 게 많잖아.”
“그게 뭔─”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도선우가 화가 엄청나게 났다니까? 왜 화가 났겠어? 응?”
구준혁이 김진서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구준혁의 무용담에는 의아한 점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도선우는 왜 화가 났을까.
“걔도 여민서 싫어하잖아. 그래서 그랬겠지.”
여민서는 상대가 자기보다 약하면 멸시하고, 강하면 개긴다. 견종에 비유하자면 치와와 같은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피렌체 1학년 중에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여민서 싫어하는 사람 접어. 그러자 대한민국이 반으로 접혔으며, 그것이 삼팔선의 기원이다……’라는 근본도 없는 농담이 피렌체 1학년 사이에서 공공연히 떠돌 정도다.
“뭐, 그것도 있기는 하겠지. 근데 이, 화난 타이밍이 말이야. 네가 딱 여민서한테 지고 조퇴한 다음! 그다음부터 얼굴이 싸악 굳었다니까?”
“그래서?”
“걔가 너한테 관심이 없었으면 뭐 하러 그러겠냐~ 그런 이야기지.”
김진서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시선을 바닥에 떨궜다. 심장이 울렁거리듯 묘하게 뛰고 있었다.
운동의 여파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김진서 본인도 알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망상에 가까운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저어 억지로 상념을 털어냈다.
“어, 억측이야.”
“‘어, 억측’? 그냥 억측도 아니고 ‘어, 억측’은 뭐냐?”
김진서가 매서운 눈빛으로 구준혁을 노려보았다.
“야, 장난 좀 쳤다고 사람을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냐. 말을 못 하겠다, 말을.”
“무섭게 본 적 없어.”
“네, 네~”
구준혁이 놀리려는 듯 턱을 쭉 내민 채로 말을 이었다.
“뭐 아무튼, 좀 잘해봐. 도선우가 거짓말을 했으면 왜 거짓말을 했냐, 이렇게 딱 물어보란 말이야.”
“…….”
“맨날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면 도선우가 네 기분을 어떻게 아냐?”
정곡이었다.
김진서는 기분이 나쁘거나 속상한 일이 있어도, 절대 그것을 입 밖으로 토로하지 않았다.
말해봐야 바뀌는 것도 없으니, 차라리 나 혼자만 힘들고 마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김진서가 대답 없이 고개를 떨구자, 구준혁은 그 잠깐의 침묵조차 고통스럽다는 듯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근데 도선우가 뭔 구라를 친 거임? 걔 거짓말 안 하지 않나?”
솔직히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침묵을 깨기 위한 질문이었다. 김진서는 약간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걔네 집에 불났을 때. 어디 있었냐고 물었는데 독서실이라고 그래서.”
“잉? 그게 왜 구라야?”
김진서는 체육관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길, 도선우가 어느 집에서 나오는 장면을 목격했던 일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구준혁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즉 도선우는 독서실에 있던 게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는데, 독서실에 있었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그것이 김진서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는 이야기였다.
그제야 대충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됐다.
그렇게 한창 이야기를 듣던 구준혁이 대뜸 의아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근데 도선우가 정확히 어디서 나온 거야?”
“학교 근처 골목길. 그 가운데 있는 양옥.”
학교 근처 골목길이라면 하나밖에 없다. 도선우, 구준혁, 정인아 셋이 하굣길로 애용하는 그 골목길이 분명했다. 그 가운데 있는 양옥이라면…….
“거기 정인아 사는 집 아닌가.”
“…….”
“아! 생각해 보니까 아닌, 아니. 맞는, 맞나? 거기에 양옥이 하나밖에 없는데.”
김진서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본 구준혁이 뒤늦게 수습하려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김진서는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말없이 구준혁을 지나쳐 체육관을 나갔다.
걸음이 빨라서 쫓을 엄두도 나질 않았다. 쫓을 이유도 없었지만.
“아, 이거 큰일 났네.”
구준혁이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진짜 큰일 났네, 씨X…….”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얼굴에는, 절망보다도 분노하는 기색이 더욱 뚜렷하게 떠올라 있었다.
* * *
“계약은 성립되었다.”
바론 삼디의 스산한 목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의아한 마음에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이렇게 빨리 끝나요?”
“계약이라는 건 원래 속전속결로 진행하는 거다. 중간에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 수도 있잖아?”
“그건 그렇다 쳐도, 사자(死者)의 계약은 원래 대가를 받잖아요.”
“원래는 그렇지. 허나, 이번만은 대가를 후불로 받을까 하는데. 어때?”
바론 삼디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계약의 대가는 원래 선불이 기본이다. 헌데 이번만은 후불로 해준다고 한다.
“저야 좋죠. 그렇게 합시다, 그럼.”
바론 삼디가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으므로 흔쾌히 응했다. 대가는 늦게 지불할수록 좋으니까.
어쨌거나 계약은 성립됐다.
이 계약은 훗날 내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었다.
바론 삼디의 예언을 해석하여 위기에 대비한다고 한들, 완벽한 대비는 불가능할 터. 보험 하나쯤은 들어두는 편이 안전했다.
“이상 간청은 끝입니다.”
이것으로, 간청을 빙자한 협상은 끝.
나는 어둠 너머로 일렁이는 바론 삼디의 눈을 보았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안광이 흐릿하다.
“……뭐 하세요?”
“흠. 뭐 어떻게든 되겠지. 힘내라, 교주. 앞날에 평안이 가득하길 바라며! 나는 이만!”
바론 삼디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는, 즉시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방은 바론 삼디가 남긴 죽음의 향기, 그리고 양초에서 흘러나온 보랏빛 안개로 가득했다.
지하실에는 바람이 불지 않기에, 안개는 흩어지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천하의 바론 삼디가 의외로 순순히 제안에 응해 주는구나.]렉바가 말했다. 적잖이 놀란 듯한 말투였다.
“제가 로아의 특성을 이용했으니까요.”
[그래. 아주 통쾌했다. 확실히 너는 네 어미와 닮았어. 바론 삼디도 네 어미 앞에서는 꼼짝을 못 했거든.]“그래도 아직 따라잡으려면 멀었어요.”
나는 자조하듯 웃으며 말했다.
비록 바론 삼디와의 협상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협상에 성공했을 뿐.
어머니처럼 바론 삼디를 상대로 완전히 주도권을 얻어 오지는 못했으니.
탁.
나는 불을 켰다. 순간 눈이 너무 부셔서, 잠깐 시력을 잃은 줄 알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쉽사리 빛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눈이 빛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눈부심이 전부 가셨을 무렵, 나는 방 한가운데에 늘어놓은 아버지의 유품을 보았다.
상자와 반지. 상자는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다.
“…….”
아버지는 반드시 성인이 된 다음 상자를 열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 유언을 지킬 생각이다.
근데 한편으로는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상자의 자물쇠를 여는 열쇠는 반지이다. 반지에 박혀 있는 유골 보석을 자물쇠의 홈에 끼워 맞추면 상자가 열리는 구조.
아버지가 설명을 해줬던 기억이 어렴풋하나마 남아 있었다.
즉,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상자를 열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이라도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럼 열어라.]상자를 바라보며 한참 근심에 잠겨 있을 무렵, 렉바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네 인생에는 파도가 너무 많아. 괜한 고집을 부렸다가 상자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도 못하고 죽어버릴 수도 있다. 차라리 지금 열어보는 편이 낫다.]“그래도 아버지가 남기고 간 유언인데. 지키는 편이 낫죠.”
[그럼 정말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릴 셈이냐.]렉바의 물음에,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차마 유언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는 주저 없이 상자를 열어버릴 생각이다.
가령, 성인이 되기 전 상자를 열어 보기도 전에 죽을 위기에 처한다든가.
애초에 그런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라야 맞지만. 혹시나, 정말 만약이라도 그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대비하여, 앞으로는 상자와 반지를 언제나 품에 지니고 다닐 생각이다.
언제 어디서든, 내가 원하는 때에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도록. 설령 죽음이 코앞에 닥친 상황일지라도.
상자는 가방이나 바알의 아가리에 넣고 다니다가 필요하면 꺼내는 것으로 하고. 반지는 작아서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니, 손가락에 끼고 다니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반지를 손가락에 껴봤다. 일단은 검지부터.
“안 맞네.”
사이즈가 너무 작아서 손가락에 반지가 들어가질 않았다.
그다음은 중지. 안 맞는다. 엄지는 당연히 안 맞았고, 그나마 가느다란 손가락인 약지에도 안 맞았다.
맞는 손가락은 소지, 즉 새끼손가락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손이 이렇게 작았었나.”
나는 실없는 혼잣말을 읊으며, 마지못해 왼쪽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꼈다.
딱 맞았다. 애초에 새끼손가락에 끼는 반지로 제작된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사이즈가 이렇게 작을 리가 없었다.
빠직.
그때, 반지에 박혀 있던 유골 보석에 금이 갔다.
“어……?”
균열 사이, 가느다란 안개가 스멀스멀 흘러나온다. 후 불면 사라질 듯 미약하고 희미한 안개. 색은 익숙한 보랏빛이다.
주술의 안개.
보석에 주술을 담은 건가? 물건에 주술을 담았다? 어떻게?
의문을 가질 틈은 없다. 안개가 나를 덮친다. 의식이 멀어진다.
상급 주술에도 끄떡없던 의식이, 고작 이 가느다란 안개 한 가닥에 무너진다.
풀썩.
몸에 힘이 풀린다. 눈이 감기고, 끝을 알 수 없는 진득한 어둠이 나를 반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