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66
제66화
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주말의 끝자락. 일요일 저녁, 나는 앉은 자리에서 반지를 들고 부단히 주술진을 그리고 있었다.
[열정을 불태우는 건 좋지만, 네 몸까지 불사르려 하지는 마라.]보다 못한 렉바가 걱정하듯이 말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주술진만 그렸다.
지난 이틀간, 나는 단 한 번도 외출을 하지 않았다. 잠도 거의 안 잤고,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럴 시간에 주술진을 하나라도 더 그려서, 반지에 주술을 담는 방법을 연구하겠다는 일념이었다.
물론 반지에 주술을 담는 방법만 연구한 것은 아니다. 일전에 렉바가 말했던 ‘체득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노력도 틈틈이 하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성과는 없었다. 반지에 주술을 부여하는 것도, 체득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전부 실패.
처음에는 상심했지만, 이제는 슬슬 실패에도 익숙해졌는지 별 감흥이 없다. 어째 체득의 경지가 아니라 해탈의 경지에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
똑똑.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교주님. 식사하시죠.”
“그냥 안 먹─”
“교주님.”
입맛이 없기도 했고, 밥 먹을 시간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거절하려는 찰나.
강지아가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내 말을 끊었다. 그녀가 내 말을 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나는 괜히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잠시 말없이 쳐다보던 강지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식사는 하셔야 합니다.”
“……그럴까요?”
저렇게까지 말하니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매일 아침 삼촌이 커피 잔과 책을 올려 두는 그 식탁 위에, 그럴듯한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걸 혼자 다 했어요?”
“네.”
강지아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뿌듯하거나 생색을 내는 듯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일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국이나 반찬이나 밥이나, 뭐 하나 거를 것 없이 전부 엄청나게 맛있었다. 집 나간 입맛의 머리채를 강제로 잡아 돌아오게 만드는 맛이라고 할까.
“누나는 요리사를 해도 됐겠는데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맞은편에 앉은 강지아가 깨작깨작 밥을 먹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몸집이 작은 만큼 입도 짧은 것 같았다.
강지아의 음식은 남기는 게 미안할 정도로 정말 맛있었고, 나는 순식간에 음식을 전부 먹어 치웠다.
식사를 마친 즉시 강지아가 식탁을 치우기 시작하길래 얼른 따라 일어나 뒷정리를 거들었다. 그러자 강지아가 다소 불편하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 제가 치우겠습니다. 교주님은 그냥 쉬고 계시면 됩니다.”
“그냥 같이 합시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네?”
강지아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대는 동안, 식탁 위 접시를 전부 치워 싱크대에 옮겼다. 그리고 곧바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나는 집안일을 잘했다. 요리나, 설거지나, 빨래 등등. 정확히는 잘하는 게 아니라, 잘할 수밖에 없었다. 7년 전부터 줄곧 혼자 살다시피 해왔기 때문이다.
“어, 아. 저기, 그냥 들어가서 쉬시면 안 될까요?”
설거지를 하고 있으니 강지아가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투로 물었다. 도움을 받는 게 불편하고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허나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강지아가 나를 대신하여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것이, 내게는 너무 불편하고 익숙하지 않은 일처럼 느껴졌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내 할 일을 강지아가 뺏어간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
강지아의 만류에 응답하지 않고 묵묵히 하던 일을 마저 했다. 그녀는 그제야 체념한 듯 내 옆에서 조용히 설거지를 돕기 시작했다.
접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 뽀득뽀득 접시 닦는 소리가 침묵 속에 잔잔히 울렸다.
“누나는 왜 우리를 도와주는 건가요?”
난데없는 물음이었으나, 결코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이건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이었다. 강지아의 능력이라면, 신분을 위장하여 학교를 다니거나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터. 그럼에도 그녀가 우리를 돕는 이유는 무엇일까.
강지아는 질문을 듣고는, 한 치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입을 열었다.
“어릴 적에 은혜를 입었습니다. 교주님께요.”
“아, 우리 아버지한테?”
“아니요. 교주님께.”
“네? 제가요?”
금시초문이었다. 나는 강지아에게 은혜라고 할 만한 선행을 베푼 기억이 없다. 아니, 애초에 어릴 적에 강지아를 만난 적이 없다. 적어도 내 기억에서는 그렇다.
나는 찬찬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주 먼 옛날까지 되짚어 보아도, 강지아에 대한 기억은 일절 없었다.
“죄송한데 제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사과했다. 날 바라보는 강지아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고, 나는 그녀의 기분을 감히 추측할 수 없었다.
강지아가 싱크대에 마지막 남은 접시의 거품을 씻어내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안 나시는 게 정상입니다.”
“안 나는 게 정상? ……제가 도대체 뭘 한 거죠?”
터엉!
의미심장한 강지아의 말을 곱씹는 동안,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당연히 이진성 삼촌이었다.
양손에 뭔가를 바리바리 싸들고 있었다. 평소에 생필품 아니면 뭘 사지도 않는 사람이, 뭘 저리 많이 샀나 의문이 들었다.
“나 왔다. 잘들 지냈냐?”
삼촌이 인사를 건네며, 양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쿵, 하고 묵직한 소리가 났다.
“오셨습니까, 스승님.”
“어어, 그래. 밥 먹고 설거지하고 있던 거야?”
삼촌이 고무장갑을 낀 채 싱크대 앞에 도열한 우리를 보며 말했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고, 목소리 톤도 평소보다 조금 높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강지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교주님께서 식사를 차려 주셨습니다.”
“뭐야. 너 요리도 할 줄 알아? 하긴 자취하면 요리 실력이 는다고는 하더라.”
삼촌이 의외라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나는 괜히 당황하여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밥은 누나가 차려준 건데. 아니 누나는 왜 갑자기 거짓말을 해요.”
“어? 그럼 뭐야. 밥은 지아가 차리고 설거지는 네가 한 거야?”
“아닙니다. 밥도 교주님께서, 설거지도 교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삼촌이 혼란스럽다는 듯 나와 강지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계속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 거짓말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나로서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진짜 누나가 차렸어.”
“아니 뭐, 누가 차렸든 난 관심 없는데? 내가 먹은 것도 아니고. 아무튼, 자.”
삼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화제를 넘기며, 내게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쇼핑백 안에는 이런저런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쓸모없는 잡동사니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 물건들이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제물이네?”
“그래. 한수엽이, 그놈한테 몰수한 재산으로다가 사치 좀 부렸다.”
나는 쇼핑백을 뒤적거리며 제물들을 살폈다.
비록 최상급품은 없었지만, 대부분이 중급에서 상급품을 넘나드는 고급 제물들이었다.
지난 이틀간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녔나 했더니, 제물을 구하느라 집에 들어올 틈도 없었던 모양이다.
“일단 구할 수 있는 대로 여기저기 구해봤다. 근데 단기간에 구한 거라 질이 막 그렇게 좋지는 않을 거야.”
“아니야, 이 정도면 충분해.”
“뭐 그럼 다행이고. 저기, 지아야. 한수엽 좀 데려와 봐. 커피 좀 먹게.”
이진성 삼촌이 식탁에 앉아 책을 펼치며, 강지아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예배당 어딘가로 종종걸음을 옮겼다.
나는 삼촌이 준 제물을 들고 창고로 향했다. 제단은 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보수.”
제단 위에 제물을 올리기 직전, 나는 보수를 불렀다. 보수는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보수. 나와봐요.”
나는 재차 보수를 불렀다.
[보, 보수. 선지자의 부름에 응한다.]보수는 그제야 대답했다.
나는 ‘바산 들소의 발굽’을 들어 보였다. 최상급품은 ‘바산 황소의 뿔’이지만, 들소의 발굽만 해도 제물로서의 가치가 어마어마했다.
보수가 침을 삼키며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흠! 그 제물을 바쳐준다면, 보수는 무척 행복할 것 같다.]“보수.”
나는 목소리를 깔았다. 보수의 권능은 범용성이 넓은 만큼, 내가 자주 사용하는 권능 중 하나이다.
그런 만큼 기강을 확실하게 잡을 필요가 있었다. 보수의 권능이 필요한 시점에, 갑자기 파업을 하겠다고 설치면 그만큼 곤란한 일도 없을 테니.
“앞으로 파업 금지입니다.”
[파업 금지……! 하지만, 선지자가 제물을 주지 않으면 보수는 파업을 할 수밖에 없다!]“바산 들소의 발굽이면 앞으로 한 달은 쌩쌩하죠?”
[한 달! 한 달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보름은 쌩쌩할 것이다!]“그럼 한 달이랑 보름으로 평균 내서 합의 봅시다. 3주. 앞으로 3주간, ‘절대로’ 파업 금지입니다.”
보수가 고민하듯 침음을 흘렸다.
[3주는 너무 길다!]“그럼 이건 그냥 버릴까요?”
들소의 발굽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밟으려는 시늉을 하자, 보수가 질색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 돼! 좋아, 3주. 앞으로 3주간, 보수는 파업하지 않겠다!]“네, 좋습니다.”
보수에게 확답을 들은 직후, 나는 바닥에 떨어진 발굽을 주워 제단 위에 올렸다. 곧, 제단 위에 올린 들소 발굽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제물이 바쳐졌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보수는 달리 기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풀이 죽은 듯 골골대는 소리를 냈다.
“왜 그래요. 제물도 드렸는데.”
[전혀 기쁘지 않다. 이런 악덕 선지자! 이세화보다 더한 악덕이다!]“극찬이네요. 감사합니다.”
이세화, 우리 어머니의 성함. 전대 선지자로서, 로아들에게 ‘악덕 선지자’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로아를 완벽에 가깝게 제어하셨던 어머니를 동경하는 내게, 보수의 말은 극찬이나 다름이 없었다.
보수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이나 투덜거렸으나, 나는 전부 무시했다. 삼촌이 준 나머지 제물들을 전부 로아에게 바친 뒤, 창고를 나왔다.
“아, 교주님.”
문을 열자 곧바로 강지아가 보였다. 그녀는 품에 이불과 베개를 안고 있었다. 잘 준비를 하려던 모양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지아는 언제나 창고에서 잠을 잤다. 그러고 보니,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왜 맨날 먼지 가득한 창고에서 자는 건지 궁금했다.
“누나는 왜 항상 창고에서 자요?”
“저는 어릴 적부터 이게 익숙합니다.”
강지아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도대체 어릴 적을 어떻게 보냈길래 창고에서 자는 게 익숙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본인이 편하다면 나도 참견할 생각은 없다.
침대보다 바닥에서 자는 게 편한 사람도 있으니, 침실보다 창고에서 자는 게 편한 사람도 있겠지. 세상엔 여러 가지 사람이 있는 거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방 안은 연기로 가득했다. 반지에 주술을 담으려 애를 썼던 흔적이었다.
[이 짓을 도대체 언제까지 할 생각이지. 아무리 봐도 성공 가능성은 없는 것 같은데.]침대에 앉아 주술진을 그리려던 나를 향해, 렉바가 꾸짖듯이 말했다.
나는 휴대폰으로 시계를 봤다. 9시 3분이었다. 잠을 자기에는 턱없이 이른 시간이었다.
“1시까지는 해보려구요.”
[1시……. 그래. 1시. 딱 그때까지만 하도록 해.]“네~ 1시에는 바로 잘게요.”
나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주술진을 그리고, 흘러나온 주술의 안개를 반지에 박힌 보석에 담는 과정을 반복했다.
종종 나 자신에게 주술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체득의 경지’를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속했던 1시가 지났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성과는커녕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는 이 헛된 노력은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내가 분명 1시에 자라고 했을 텐데. 내 조언은 귓등으로도 안 듣겠다는 거냐?]“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볼게요. 진짜 마지막. 찐막.”
[마지막이라는 말만 벌써 17번째다.]“……그걸 하나하나 다 세봤어요?”
[네가 하도 마지막, 마지막 하고 시간을 끌어 대니. 할 것도 없어서 좀 셌다.]“오케이. 그럼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 진짜 마지막으로 갈게요.”
그날, 나는 거의 밤을 새웠다.
* * *
밤을 새웠다고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거의’ 밤을 새운 것이었다. 다행히 두 시간 정도는 잘 여유가 났고, 나는 30분 정도 잠을 설치다가 1시간 반 정도를 자고 나왔다.
수면 부족 때문인지 머리가 조금 어지럽고 귀가 먹먹하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늪을 걷듯 발이 푹푹 꺼지는 듯한 느낌은 없었다.
파란만장했던 3월도 끝나고, 4월이 코앞에 있었다. 바람은 어느덧 봄이라 불러도 될 만큼 따스했고, 습기를 머금은 풀들은 더욱이 싱그러웠다.
어젯밤, 잠을 줄여가며 부단히 기울였던 노력이 자그마한 성과를 낳았던 덕분일까. 스치는 풍경이 유난히 예뻤다. 기분도 괜히 좋았다.
[나 참, 잠을 그리 적게 자놓고 기분이 그리 좋으냐. 너 같은 별종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첫 번째는 누군데요?”
[당연히 네 아비지.]아무도 없는 골목을 걸으며, 렉바와 실없는 대화를 나눴다. 곧 피렌체가 보였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무거운 걸음을 옮기는 학생들의 모습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나는 유난히 힘없이 걷는 김진서를 본다. 김진서도 마찬가지로 나를 본다. 시선이 교차했다.
허나, 김진서는 내게 인사도, 아는 척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녀의 표정은 평소보다 차갑고 매몰찼다. 저번주 금요일부터 느낀 거지만, 왠지 내게 화난 게 있는 것 같다.
내가 먼저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번주에 조퇴했─”
타닷!
내 말이 끝나기도 전, 김진서는 도망치듯 달려 내게서 멀어졌다.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스치듯 엿본 표정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번에 조퇴했던데, 지금은 괜찮냐 따위의 안부 인사를 건네려던 내 계획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김진서는 지금 나를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
이유는 역시나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하지만 기억을 더듬어도, 내가 잘못한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을 하는 사이, 김진서는 어느덧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져 있었다.
[네 얼굴이 너무 초췌해서 놀라 도망친 듯하군. 그러게 내가 자라고 할 때 잤어야지.]“…….”
렉바의 헛소리는 무시했다. 나는 한참 김진서가 나를 피하는 이유에 대해 고민하다, 더 이상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으리라 결론 짓고 이내 의문을 접었다. 그리고 교실로 올라갔다.
“도선우 너, 코……! 어? 멀쩡하네……? 왜 멀쩡해?”
교실로 들어가자마자 정인아가 나를 반겼다. 나는 괜히 코를 만지작거리며 웃어 보였다.
“병원이 치료를 잘해줬어. 애초에 많이 다치지도 않았대.”
“아 진짜? 다행이네. 피 난 거만 보면 완전 다 바스러진 것처럼 보였는데…….”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실제로는 정인아의 말대로 코가 다 바스러진 게 맞았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신기에 가까운 복원 주술로 완벽한 치료를 해버렸을 뿐이었다.
“아, 야! 맞다 맞다. 너 본관 앞에 대자보 봤어? 여민서가─”
정인아가 호들갑을 떨며 설명을 했다.
여민서의 돌발 행동에 대한 징계 위원회가 열려, 여민서에게 15일간의 교내 봉사 처분이 내려졌다는 이야기였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애초에 여민서가 무슨 처분을 받든 내 알 바는 아니었던 터라 별 감흥은 없었다.
나와 정인아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구준혁은 자리에 앉아 멀뚱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늘 늦던 구준혁이 웬일로 빨리 왔나 싶었다.
“너 오늘 좀 일찍 왔네?”
“……어? 아. 그치. 오늘은 좀 일찍 왔지.”
구준혁이 떨떠름하다는 듯 대답했다. 평소와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랐다.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선연했다.
……다소 억측인지도 모르겠지만, 김진서가 보였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당황처럼 보였다.
김진서와 구준혁이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건지, 나는 그 이유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 * *
도선우로부터 도망치듯 멀어진 김진서는, 평소 흡연 장소로 애용하던 외진 골목에 들어섰다. 그녀는 등을 벽에 기댄 채 미끄러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으.”
김진서가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으며, 후회 섞인 침음을 뱉었다.
도선우가 말을 건 순간, 김진서는 본능적으로 도망을 택했다. 도선우 입장에서는 자신이 얼마나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을까.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채 숨기지도 못하고 추하게 도망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럽고 쪽팔렸다.
‘반지는 뭔데…….’
한창 후회에 잠겨 있던 김진서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스치듯 본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 도선우의 왼쪽 새끼손가락에는 못 보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왼쪽 약지에 끼는 반지는 커플 링.
김진서는 오직 그것만 알고 있었다. 약지가 아닌 다른 손가락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모르니까 더 불안하고 초조했다.
툭, 툭.
그렇게 홀로 고뇌하던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곧장 자선반으로 걸음을 옮겼다.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
구준혁의 말이 맞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오해만 가중될 뿐,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도선우의 집에 불이 났던 그때. 마침 그가 정인아의 집에 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정인아가 결석을 오래 했으니, 수업 내용을 정리한 노트 같은 걸 전해주러 갔다거나.
……한밤중에 그걸 전해주러 간 시점부터 이미 끝난 거 아닌가?
“…….”
김진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잡념을 털어내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효과는 딱히 없었다. 이미 물꼬를 튼 잡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만 했다.
이윽고, 자선반 교실 앞.
“하아.”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번주 금요일에, 코를 다쳐서 조퇴했다고 들었는데 치료는 잘된 건지. 반지가 예쁘던데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정인아의 집에는 왜 갔는지.
적당히 걱정하듯 안부를 묻는 척하며, 자연스럽게 물어보면 된다. 떨지 말고, 당황하지도 말고, 그저 자연스럽게.
애초에 자연스럽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도선우가 정인아 집에서 놀았든 말든, 자신이랑은 별 상관도 없었다.
자선반까지 걸음을 옮긴 것도 그저 호기심 때문. 도선우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거나, 혹은 같은 반인 정인아가 신경이 쓰인다거나 하는 건 전혀 아니었다.
드륵.
김진서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내부를 슬쩍 엿보았다. 가장 먼저 구준혁이 보였고, 그 곁으로 정인아가 보였으며, 그 앞.
정인아와 이야기를 나누며 환한 미소를 짓는 도선우가 보였다.
쾅!
김진서는 자기도 모르게 자선반 뒷문을 걷어차고는 자신의 반으로 돌아갔다. 문이 부서진 것 같았지만 알 바는 아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