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69
제69화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오전 수업, 점심, 그리고 마침내 오후.
나는 자선의 성호 재선출 시험을 보기 위해 대강당으로 향했다. 곁에는 구준혁과 정인아가 함께였다.
다만 정인아는 응시자가 아니었기에, 단순히 우리를 배웅해 주러 대강당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잘 보고 와! 끝나면 연락하고.”
대강당 앞에 다다랐을 무렵, 정인아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나는 대답 없이 그저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구준혁은 다소 못마땅한 기색으로 나와 정인아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야! 나는 응원 안 해주냐.”
“뭐, 꼭 해줘야 돼? 너도 잘 보고 와, 그럼.”
“응원에 영혼이 없다, 영혼이. 좀 영혼을 담아서 응원을 하라고.”
“영혼 담은 응원은 좀 비싼데. 한 3만 원 주면 생각해 볼게.”
“3만 원? 어, 나가~ 꺼져~”
정인아와 구준혁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나는 대강당에 모인 인원을 눈대중으로 셌다.
인솔 교사 빼고, 구경 온 애들 빼면 대충 100명 남짓. 자선반이 아닌 다른 반 아이들도 제법 많았다.
자선의 성호 재선출 시험은 기이하게도 다른 반 학생들도 응시가 가능했다.
심지어는 이미 성호를 가지고 있는, 이를테면 친절의 성호인 여민서나 절제의 성호인 한수련, 순결의 성호인 성하연도 시험 응시가 가능했다.
실제로 성하연은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대강당 앞에서 접수증을 받고 있었고, 멀찍이 여민서와 한수련이 나란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뭐야?”
그러다 한수련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민서에게 뭐라 뭐라 말을 건넸고, 여민서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뭐긴 뭘 뭐야. 너 오늘도 왜 넋을 빼고 있냐?”
그때, 구준혁이 내 어깨를 툭 밀치며 물었다. 아까만 해도 구준혁과 이야기를 나누던 정인아가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정인아 찾냐? 걔 갔어. 네가 관심 안 줘서 토라진 거 같던데.”
“아, 그래?”
“와, 반응 봐. ‘아, 그뤠?’ 지 때문에 토라졌다는데 그냥 죄책감도 없네.”
구준혁이 은근 나를 타박하듯 말했다. 어쩐지 말투에서 화난 기색이 엿보였다.
그간 주술 연습에 푹 빠졌던 것도 있고, 사탄교도니 뭐니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 소홀했던 까닭이다.
……근데 꼭 신경을 써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응시자는 여기서 접수증 받아 가세요─! 접수증 없으면 시험 못 치십니다─!”
교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혼란을 뚫고 귓가에 닿았다. 구준혁과 나는 인파를 헤치고 접수증을 받으러 갔다.
“반, 이름 여기에 적고. 그리고 학생증 보여주세요.”
우리는 교사의 지시대로 반과 이름을 명렬표에 작성한 뒤, 학생증을 보여주었다.
교사는 들고 있던 서류와 우리 학생증을 번갈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에게 접수증을 주었다. 접수증의 디자인은 심플했다.
[응시번호 041666 – 자선반 도선우]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고, 그 외에 다른 문구나 꾸밈은 없었다. 어쩐지 한대호의 명함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오. 666.”
내 접수증을 본 구준혁이 감탄했다. 그러고 보니 응시번호 끝 세자리가 666이었다.
“하필이면 666이네. 불길하게.”
“오히려 좋지. 액땜했다 생각해, 그냥.”
“액땜?”
로마니카교에 액땜 개념이 있던가? 부두교에는 비슷한 개념이 있기는 한데, 로마니카교 교리에는 정통하지 못한 처지라 잘 모르겠다.
“……뭐, 기복기도(祈福祈禱) 같은 거도 다 액땜이랑 비슷한 개념 아니냐. 대충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 하긴.”
구준혁이 황급히 말을 수습했다. 조금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딱히 의심할 만한 말실수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런 사소한 말실수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접수증 받으신 학생들 이동하겠습니다─!”
교사가 쩌렁쩌렁 큰 소리로 외쳤다. 그와 함께, 거대한 버스 서너 대가 대강당 앞으로 줄지어 들어왔다.
늘어선 버스로 교사들이 학생들을 짐짝 나르듯 실었다. 나와 구준혁은 어리둥절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니, 여기서 갑자기 버스가? 스케일 한번 뒤지게 크네.”
구준혁이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나 역시 구준혁의 말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혹시 응시자들이면 빨리 타세요─!”
“아, 우리 부른다.”
도대체 어디서 시험을 보길래 버스까지 동원된 걸까. 의문이 깊어질 틈도 없이, 우리는 교사의 인솔에 따라 버스에 탑승했다.
우리보다 먼저 탑승한 아이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차창은 커튼으로 죄다 가려져 있어서, 바깥 풍경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 이거. 갑자기 좀 떨리네.”
옆자리에 앉은 구준혁이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부아아앙─!
곧, 버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탑승 직후 교사들은 우리 휴대폰을 걷어 가버렸고, 커튼은 차창을 가린 채로 고정되어 있었으며, 버스 내에 시계도 없던 터라 시간을 확인할 수 없었다.
고개를 둘러보자 몇몇 아이들은 시험 삼아 허공에 축복진을 그려보고 있었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도 있었으며, 그 외 나머지는 자고 있었다.
“이거 약간 그거 같은데? 납치? 납치당하는 기분?”
구준혁이 말했다. 납치당하는 기분.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었다.
“창문은 왜 다 가린 거야……. 답답하게.”
“약간 그런 데 가는 거 아닐까? 그 뭐야, 51구역이었나?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 이런 곳.”
“겨우 재선출 시험 보겠다고 거길 데려간다고? 피렌체는 돈이 남아도냐?”
“하는 짓 보면 남아도는 거 같던데. 아님 말고~”
구준혁이 비아냥거리듯 말하며 의자를 뒤로 젖혔다. 구준혁의 자리가 넓어진 만큼,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의 자리는 좁아졌다.
“……아, 뭐야.”
뒷자리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으나, 구준혁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만 의자에 눕듯이 앉아 버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야, 너 성물 뭐 가져왔냐.”
“글쎄.”
대답해 줄 이유가 없는 물음이었기에 적당히 얼버무렸다.
시험 종목이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 내가 가져온 성물이 뭔지 알려주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최대한 숨기고, 설령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적당히 속이는 편이 나았다.
“새끼, 말 안 하는 거 봐. 경쟁자라고 지금 견제하냐?”
“뭔 경쟁자야. 왜 자꾸 나랑 경쟁의식을 갖지?”
“에이~ 장난 그만하고. 솔직히 너도 경쟁자라고 생각하고 있긴 하잖아.”
구준혁이 보이지도 않는 차창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나름 진지했다.
시험이 시작되면 구준혁과 경쟁을 하게 될 것은 맞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구준혁을 경쟁자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
나는 고개를 돌려, 맨 뒷자리에 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머리칼부터 피부까지 온통 새하얀 그녀는, 긴장도 안 된다는 듯 멍한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순결의 성호, 성하연.
같은 버스에 타지는 않았지만, 친절과 절제의 성호인 여민서와 한수련도 이번 시험에 지원했다고 한다.
성하연, 여민서, 한수련. 구준혁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 세 명에 비하면 그는 경쟁자 축에도 못 들었다.
이번 시험에서 만약 예기치 못한 변수가 생긴다면, 구준혁이 아니라 저 셋이 원인일 것이다.
“언제 도착하냐……. 슬슬 지루하네.”
“저, 의자 좀 올려줄래?”
“시간만 알려줘도 좀 나을 거 같은데.”
“저기, 얘들아…….”
“그니까. 뭔 휴대폰을 걷어 가냐. 어이가 없네.”
“…….”
대화 도중 뒷자리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으나, 너무 작은 목소리라 잘 들리지 않았다.
버스는 계속 질주하고 있었다. 우리는 도착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른 채, 창문을 뒤덮은 커튼의 격자무늬만 바라보았다.
* * *
어느덧 버스가 멈추었고, 우리는 교사들의 인솔에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땅을 딛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장 처음으로 숲의 냄새가 맡아졌고, 그다음으로는 안개 냄새가 맡아졌다. 공기가 조금 희박해서 호흡이 쉽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산꼭대기였다. 나와 구준혁을 포함, 학생들은 전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이번 자선의 성호 재선출 시험의 감독이자, ‘방주’의 총 책임자인 노아라고 합니다. 아, 물론 본명은 아닙니다. 세례명이 노아라는 거죠. 실제로 성이 노씨이기는 합니다. 하하하하……. 아, 재미없었나요?”
그때, 한 남자가 호쾌하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이름, 아니 세례명은 노아. 흰 셔츠에 검은 슬랙스를 입었고, 그 위에 발목까지 오는 긴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가운은 바다를 머금은 듯 청량한 푸른색이었다.
“뭐 아무튼! 다들 당황하셨을 텐데요. 재선출 시험인데 왜 난데없이 산꼭대기로 우리를 데려왔느냐! 하는 분도 분명 계실 겁니다. 당연하지만 여러분이 시험을 볼 곳은 여기가 아닙니다!”
[말이 너무 많아. 내가 아주 싫어하는 타입이다.]듣고 있던 렉바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노아라는 사람은 말이 참 많았다. 바론 삼디나 소보보다 더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여러분이 시험을 볼 곳은, 바로 제 뒤에 있는! 이 방주입니다─!”
노아가 자신의 뒤를 과장된 몸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박수가 나올 타이밍이었으나, 아쉽게도 단 한 사람도 박수를 치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노아가 가리킨 방향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노아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리키며, 시험이니 방주니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미친 사람인가.”
누군가 말했다. 적막 속에서 들린 목소리라 그런지, 실제보다 더 과장되게 들렸다. 이를 들은 노아의 얼굴이 약간 구겨졌다.
“미친 사람이라니. 거 말이 참 심하시네! 제 뒤에는 정말 방주가 있습니다! 착한 사람들만 보이는데, 혹시 안 보이시나요?”
노아가 손발을 휘적거리며 요란스럽게 말했다.
역시 미친 사람이 분명하다, 그리 생각한 순간. 노아가 신성력을 사출하여 축복진을 그렸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종류의 축복진이었다.
부우우우우─!
축복진에서 흘러나온 빛이 허공을 감쌌다. 그 순간 뱃고동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무언가 나타났다.
그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배였다. 도저히 한눈으로 담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웅장한 배. 그것을 보자마자, 나는 무의식적으로 ‘방주’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자, 이제 보이십니까?”
노아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이들은 넋을 잃은 듯 입을 벌린 채, 홀연히 나타난 방주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구준혁은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린 채, 눈을 반짝이며 방주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놀라시는 걸 보니 기분이 정말 좋습니다. 하하하! 아무튼, 여러분은 이 ‘방주’ 안에서 시험을 보게 될 겁니다. 아, 혹시 몰라 덧붙이자면! 이건 방주이고, 이 방주를 관리하는 제 세례명은 노아이지만, 그렇다고 이게 ‘노아의 방주’는 아닙니다!”
노아가 설명을 이었다. 이것은 방주이지만, 성서에 기록된 선지자 노아가 만든 ‘진짜 노아의 방주’는 아니다.
전 추기경이자 성물 제작의 명인, 그리고 신성물질학과 신성역학자인 성유다가 ‘진짜 노아의 방주’를 모방하여 설계한 성물의 일종이다……. 그런 이야기였다.
성유다라는 이름이 불리자, 순간 아이들의 시선이 성하연을 향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성유다라는 이름이 내 귀에 너무 자주 맴도는 것이 못마땅했다.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일수록 어쩐지 뇌리에 더욱 선명히 각인되고 귓가에 더 오래 맴돌았다.
“뭐어, 각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들어가서 직접 부딪혀 보는 편이 빠를 겁니다. 자자, 다들 들어가도록 하지요.”
노아가 우리를 안내했다. 백 명 남짓의 학생들은 노아를 따라 줄지어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 방주는 그 압도적인 크기에 걸맞게 입구도 넓었다. 덕분에 별다른 혼란은 없었다.
인파를 따라 노아의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 방주 초입에는 공항에서나 볼 법한 검색대가 있었다.
“네, 통과입니다. 다음!”
방주의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아이들은 자신이 지닌 성물을 남자에게 보여준 뒤, 검색대를 통과하여 비로소 방주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다. 가져온 성물을 직원에게 보여주고, 검색대를 통과한 순간.
삐이이이익!
검색대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 혹시 제출 안 한 성물 있어요?”
“……아뇨? 없는데.”
“엥, 이럴 리가 없는데. 잠깐만요~”
직원이 금속 탐지기를 꺼내 내 몸에 들이밀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조차 없던 탐지기가, 내 손끝을 지난 순간 소음을 토했다.
“아. 혹시 이거 반지 때문인가?”
“…….”
직원이 말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방주 내에 반지를 반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내 계획은 처음부터 꼬이고 만다.
“학생, 혹시 이거 커플링인가요? 반지는 되는데 커플링 반입은 안 돼서~”
“……네? 아니, 아니에요. 커플링 아닙니다.”
“사실 농담이구요, 반지는 끼고 들어가셔도 됩니다! 가끔 이럴 때가 있거든요. 뭐, 보니까 성물은 아니네요. 하하하. 아무튼 통과예요~”
직원이 넉살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다행히 반지는 반입 가능 품목인 듯했다.
뒤편에서 아이들이 나를 보며 귓속말을 하는 듯한 모습이 보였으나, 그냥 무시하고 얼른 검색대를 통과했다.
우여곡절 끝에 검색대를 통과하고, 마침내 노아의 방주 안으로 들어왔다.
내 뒤를 따르던 응시자들도 모두 검색대를 통과하고, 마침내 모든 응시자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왔을 때.
“짜잔─! 여기가 바로 방주입니다!”
방주 한가운데에 있던 노아가 양팔을 크게 벌리며 자랑하듯 말했다.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방주의 풍경을 살폈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휑했다.
도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시험을 보겠다는 거지?
연이은 의문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할 무렵.
“그럼, 다들 열심히 시험에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암전.
걸쭉한 어둠이 눈앞을 가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섣불리 걸음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어둠이었다.
갑작스레 찾아 든 어둠에 놀란 학생들이 소음을 냈다. 비명, 괴성, 침음, 탄식.
소음은 엉키고 뭉쳐 안개처럼 내 주위를 떠돌다, 이내 사라졌다.
이윽고 남은 것은 까마득한 어둠, 침묵.
[성유다, 그 간악한 놈이…….]침묵을 뚫고 렉바의 혼잣말이 머리를 울렸다. 나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혼잣말이다.
딱!
그때, 방금 들렸던 것과 같은 소리가 울렸다.
눈앞을 가리고 있던 걸쭉한 어둠이 이내 걷히고, 차츰 빛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이 부셨다. 나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 방주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휑뎅그렁한 풍경은 온데간데없다. 나는 지금 초원 위에 서 있다.
바닥에는 짧은 풀과 싱그러운 꽃이 가득하며, 멀찍이 드문드문 나무가 보인다. 그보다 더 멀리, 너무 높아서 차마 올려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은 높은 산이 하나 있다.
하늘은 맑고 푸르며, 적당한 크기와 적당한 모양의 구름들이 적당한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햇빛이 포근하다.
마치 문명이 발달하기 전,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지구로 와버린 듯하다.
문명이 없음에 나는 편안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불안함을 느낀다.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나는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툭.
그때, 무엇인가 내 눈앞에 떨어졌다. 그것은 쪽지였다.
나는 쪽지를 펼쳤다. 펼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 내게 ‘쪽지를 펼쳐라’라고 명령을 내린 것처럼.
[응시번호 041666 – 자선반 도선우]1차 관문의 테마는 ‘방주’입니다!
아도나이께서 노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쏟아집니다. 천지만물을 모두 수장하고도 남을 거센 비입니다. 당신은 그 비에 수장되기 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방주에 입주해야 합니다!
심사 기준: 1. 방주에 얼마나 신속히 입주하였는가? / 2. [비공개 조건]
시간제한은 2시간입니다. 제한을 넘기면 그 즉시 탈락 처리되며, 방주에서 추방됩니다!
1차 관문을 통과한 응시자는 2차 관문에 응시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행운을 빕니다.
모든 것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탓에, 쪽지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다. 애석하게도 상황은 내게 이해할 틈을 주지 않았다.
툭, 툭, 투둑.
쏴아아아아─!
시작을 알리듯 빗방울 두어 개가 툭툭 떨어지더니, 곧 장대처럼 굵어진 빗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맑고 화창하던 하늘은 어느덧 먹구름으로 빽빽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멀찍이 나와 같은 응시자들이 비를 헤치고 산을 향해 달리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너무나 갑작스럽게 시험은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