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ric Academy's Shaman RAW novel - Chapter 99
제99화
두려움은 무지에서 나온다고 한다. 까마득한 심해와 광활한 우주에 문득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도, 그곳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도선우를 보며 하수영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수영.”
“어, 네? 네?”
도선우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하수영은 주저앉은 채 고개만 연신 끄덕이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때 하수영은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었다. 도선우는 자신보다 주술을 잘 다룬다.
그는 내가 모르는 주술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좀비약을 쓰지 않고도 사람을 좀비로 만드는 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른다. 그가 자신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가 무슨 짓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
두려움은 무지에서 나온다.
하수영은 다시금 그 대목을 떠올렸다.
“고개 들어봐.”
“……미안, 아니. 죄, 죄송. 죄송해요.”
“고개 들어봐, 빨리.”
하수영은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고개를 들면 어쩐지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때, 머리 위로 갑자기 빛이 느껴졌다. 부두 마력에서 나오는 어두침침한 빛은 아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무척 밝고 환한 빛이다.
교주는 부두 마력뿐만 아니라 신성력도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다.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로마니카교 성직자들은 신성력을 이용하여 극악무도한 고문을 발명했다고 한다.
도선우는 지금 나를 고문하려고 하는 걸까? 신성력을 이용해서?
속이 울렁거렸다. 고문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아니, 죽기는 싫다.
차라리 좀비가 된다면. 아니, 좀비가 되는 것도 싫다.
다 싫다…….
그러는 와중에도 도선우는 자신을 향해 빛을 겨누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용서를 해줄 때까지 잘못을 비는 수밖에 없었다. 하수영은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잘못했어요. 이제 안 그럴게요. 진짜예요.”
“됐고, 고개 들라니까.”
“잘못했어요. 잘못, 잘못했는데. 이제 용서해줘도 되는 거 아니에요? 이, 이렇게까지 했는데. 무릎도 꿇었는데─!”
용서를 빌던 하수영이 소리를 꽥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직후 후회했다.
도선우의 손에서부터 나온 빛이 여전히 자신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16년 인생이 여기서 끝나는구나.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괜찮은 인생이었다…….
하수영이 죽음을 확신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찰칵─!
그러나 들려온 것은 난데없는 카메라 셔터 음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겨누던 밝고 환한 빛은 어느덧 사라진 뒤였다. 도선우의 입가에 내걸린 미소가 숲의 어둠에 살포시 덮여 있었다.
“……플래시?”
하수영이 뒤늦게 빛의 정체를 파악했다. 그것은 부두 마력도, 신성력도 뭣도 아닌, 그저 카메라 플래시였다.
깨달음 이후 뒤늦은 허탈감이 밀려왔다. 도선우는 사진을 찍은 뒤 휴대폰을 몇 번 만지작거리다, 이윽고 하수영을 향해 손을 건넸다.
“일어나. 이제 가자.”
“사, 사진은 왜 찍은 거…….”
하수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긴장이 덜 풀려서 그런지 말끝이 자연히 흐려졌다.
도선우는 일말의 미동도 없이, 다만 차갑게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혹시 몰라서.”
“혹시 몰라서?”
“설명하기 귀찮아. 얼른.”
도선우가 얼른 잡으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왠지 잡고 싶지 않은 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세차게 뿌리치거나, 혹은 잡아서 땅에다 그대로 메다꽂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여력조차 없었다. 당장 몸을 일으키기도 벅찰 만큼 다리에 힘이 풀려 있었다.
“그냥 두고 간다?”
“…….”
하수영은 어쩔 수 없이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어쩔 수 없이.
* * *
오후 10시 50분. 창백한 달이 창문을 타고 스며드는 회의실.
원탁에 각 교단의 간부들이 둥그렇게 앉아 있었다. 사무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간부들 사이, 하판석의 얼굴만이 푸르죽죽하게 질려 있었다.
“하판석 간부. 무슨 일 있으십니까?”
보다 못한 이진성이 물었다. 고개를 숙인 채 피가 나도록 손톱을 깨물고 있던 하판석이 벌떡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 힘이 풀려 있었고 머리칼이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몹시 불안해하는 기색이었다.
“하판석 간부?”
“……딸이.”
이진성이 재차 묻자 하판석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딸이’?
딸이 뭐 어쨌다는 거야.
이진성은 가늘게 뜬 눈으로 하판석의 얼굴을 살폈다. 안색이 아까보다 더 질려 있었다. 푸르죽죽한 것을 넘어, 얼굴이 보라색으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따님께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그, 그래, 그렇습니다. 수영이가, 아까 나 몰래 산에 나간 것 같은데, 여태까지 돌아오지를 않아서…….”
드르륵!
그 순간, 이진성이 의자를 거칠게 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곧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하판석은 멍한 눈으로 이진성을 응시했다.
“들어가서 찾아보고 오지요.”
그렇게 말하는 이진성의 눈빛에서 열기가 들끓고 있었다.
“가지 마시오.”
그러나, 나가려던 이진성을 강원교단의 윤창수가 붙잡았다.
이진성은 핏발이 선 눈으로 윤창수를 노려보았다.
“이대로 실종되게 두라는 겁니까?”
“선대 교주님이 건 주술 탓에, 이 근방 산길은 죄다 이리저리 꼬여 있소. 나가면 이진성 간부도 길을 잃을 거요.”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른들이.”
“산은 애, 어른을 가리지 않소.”
윤창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돌아오길 비는 수밖에…….”
애, 어른을 막론하고, 잠깐 정신을 놓으면 어느새 길을 잃어 있는 것이 야산이었다.
윤창수는 산에서 수십 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온 사람이었다. 야밤에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는 그가 제일 잘 알았다.
“그래도 가겠습니다.”
그러한 만류를 뿌리치며, 이진성은 다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그의 앞을 가로막고 누군가 나타났다.
“……어? 뭐냐?”
“회의 시작인데 어디 가게?”
“나 저기, 하판석 간부 딸이 산에서 실종된 거 같다고…….”
이진성은 시선을 돌려, 도선우의 손을 꼭 잡고 선 여자아이를 보았다.
이름이, 하, 하…… 뭐더라.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하판석 간부의 딸이었다.
“얘를 왜 네가 데리고 있냐?”
“길 잃은 것 같아서 데려왔어. 산에서 우연히 만나가지고.”
“오…… 잘했네. 안 그래도 찾으러 나갈 생각이었는데.”
이진성이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하판석은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하판석 간부! 교주님이 따님 찾아 왔네요.”
“……따님? 무슨, 수영이? 수영이 말입니까? 수영이가 왔습니까?”
“네. 왔습니다.”
하판석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이진성 곁으로 왔다. 그러고는 교주의 옆에서 고개를 떨군 채 서 있는 자신의 딸을 보았다.
말보다 눈물이 앞섰다. 안도감에서 비롯된 눈물이었다.
안도감에 이어, 이윽고 새로운 감정이 그의 가슴 속에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한마디 말도 않고 야산에 들어가 길을 잃고 큰일이 날 뻔한 자신의 딸을 향해, 분노인지 원망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이 들고 있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지요. 회의가 우선이니까요.”
“……예.”
도선우는 일그러진 하판석의 표정을 읽고, 얼른 하수영을 숙소로 올려 보냈다.
하판석은 비틀비틀 걸음을 옮겨 자리에 앉았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도선우는 원탁의 최상석에 앉아 하판석을 바라보았다.
“하판석 간부. 상태는 아직 괜찮으십니까?”
“예? 아, 예. 괜찮습니다…….”
아직?
어감이 조금 묘했으나, 하판석에게는 지금 그따위 단어의 뜻을 읽어낼 여유가 없었다. 제 마음을 추스르기도 벅찼던 것이다.
도선우는 넋을 잃은 하판석을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1시네요. 회의 시작합시다.”
시간은 마침 11시였다.
* * *
회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안건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교인은 줄어들고, 교황청의 압박은 거세어지면서 교단을 운영할 자금이 부족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전라교단은 그나마 형편이 낫지만, 충청교단이나 강원교단은 문제가 극심한 상황이었다.
“서울교단은 어떻소?”
윤창수가 물었다. 내가 아니라 삼촌에게 건넨 물음이었다.
삼촌은 팔짱을 낀 채 잠시 뜸을 들이더니, 하판석 쪽을 지그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한수엽을 만났습니다.”
난데없는 삼촌의 발언에 원탁이 술렁였다.
“배신자 한수엽 말이오? 그놈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소?”
“네. 교주님의 제단을 훔쳐서, 부두재림교라는 사이비 종교를 하나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한수엽이 모아둔 헌금을 전부 몰수한 덕분에 서울교단은 넉넉합니다.”
삼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으나, 원탁은 혼란에 젖어 있었다.
삼촌의 입에서 배신자 한수엽의 이름이 언급된 탓이었다.
나를 향한 간부들의 인식은 제각각이다. 윤창수와 경상교단의 육은형은 내게 우호적인 반면, 염만근과 하판석은 내게 적대적이다.
그러나 성전 당시 부두교를 버리고 도망간 ‘배신자’들을 증오한다는 점에서는 모든 간부들의 뜻이 일치했다.
“워찌 되얐소?”
혼란 속에서 염만근이 물었다.
워찌 되얐소…….
한수엽이 어떻게 됐냐는 뜻인 것 같았다. 삼촌은 염만근의 말을 해석하려는 듯 눈살을 찌푸린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교주님께서 직접 ‘좀비화’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조, 좀비화!”
염만근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부두교도들은 사형보다 좀비화를 더 두려워했다. 부두교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죽음을 선택할 자유’를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했다.
부두교가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도 죽음도 아닌, 자유의 박탈이다.
“부두교를 배신한 죄는 좀비화로 벌하는 것이 마땅하지. 한수엽도 그 정도는 각오했을 것이오.”
윤창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옆자리에 앉은 하판석의 표정이 굳어가고 있었다.
“배신자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지금은 재정난에 대해 모책하는 일이 제일 급하니까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교주님.”
이야기가 딴 길로 새는 듯하여 바로잡았다. 경상교단의 육은형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부들이 한수엽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지금은 재정난에 대한 이야기를 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이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가까스로 종식되었을 즈음, 나는 염만근을 쳐다보며 눈짓을 했다.
“재정난과 관련하여 염만근 간부에게 말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야아…… 듣기야 들었는디…….”
염만근이 자신이 없다는 듯 어물어물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한 말이 잘 기억이 나질 않는 모양이었다. 한 번 들어서 외울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설명은 제가 하겠습니다.”
“아, 아니구만요. 나가 허는 것이…….”
“괜찮습니다. 간부분들께 직접 보여드릴 것도 있고 하니까요.”
불편하다는 듯 몸을 꼬아 대던 염만근이 그제야 편안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자신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안심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근처에서 아무 책이나 가져다가 원탁 위에 놓았다. 삼촌이 가져온 경제학 서적이었다. 너무 많이 읽어서 당장이라도 찢어질 듯 헤져 있었다.
부두 마력을 사출한 뒤, 책에 혼절 주술을 새겨 넣었다.
‘각인’이었다.
주술이 새겨진 책에서 은은하면서도 음침한 보랏빛이 감돌았다. 이를 본 윤창수가 고개를 갸웃댔다.
“……책에 무엇을 하신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다른 간부들도 주술을 각인한 책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혹여나 책이 바람에 날려 펼쳐지지 않도록, 표지 부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른 채 입을 열었다.
“이건 물건에 주술을 새기는 것입니다. 저는 ‘각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물건에……? 혹시, 2대 교주님이 쓰셨던─!”
“아니요, ‘각인’은 아버지가 쓰셨던 기술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렇게 말하며 책을 펼쳤다.
펼쳐진 책으로부터 주술의 안개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혹시라도 간부들이 들이마실 일이 없도록, 안개를 제어하여 회의실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이를 본 간부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나는 말을 이었다.
“이처럼, ‘각인’은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물건에 새긴 주술이 발동되는 기술입니다. 가령 책에 주술을 새기면, 책을 펼칠 때 주술이 발동됩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나가듯이.”
“그럼, 주술을 총에 새기면 방아쇠를 당길 때 발동되기도 합니까?”
“네. 총이 있다면 가능할 겁니다.”
주술을 총에 새긴다는 발상은 하판석의 것이었다. 상상도 못 해본 발상이라 조금 놀랐다.
그러고 보니 총에 주술을 각인하면, 방아쇠를 당겨 주술을 발동시키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총을 구할 방법이 없으니, 허황된 상상에 불과했다.
“염만근 간부께서는 소주 공장을 운영하고 계시지요?”
내가 묻자 염만근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받았던 소주 한 병을 삼촌에게 받은 뒤, 중독성과 쾌락을 최하로 낮춘 도취 주술을 각인했다.
그것을 들어 가볍게 흔들며 간부들에게 보여주었다.
“이걸 염만근 간부의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뒤 판매할 겁니다. 다시 말해, 주술을 판매하는 것이지요.”
“……도취 주술은 금기가 아닙니까?”
육은형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도취 주술을 금기로 지정하셨을 때와 달리, 지금은 부두교가 로마니카교에게 핍박받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제한을 완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도취로 하여금 주입되는 쾌락은 뇌를 녹여버릴 만큼 강렬하다. 그 쾌락만큼 중독성과 의존성도 강하다.
사람이 주술을 부리는 게 아니라, 주술이 사람을 부리는 것을 염려하여 아버지는 도취 주술을 금기로 지정하셨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재정난과 로마니카교의 탄압으로, 언제 부두교가 망할지 모르는 와중이다.
부두교의 재건을 위해, 그리고 로마니카교의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조금은 변화를 줄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는 건 아닙니다. 쾌락의 정도를 최하로 낮추어, 중독성과 의존성을 배제한 도취 주술만은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하겠다는 뜻이지요.”
“쾌락의 정도를 최하로 낮춘다는 말씀은……?”
“통상의 도취 주술은 여전히 금기이나, 그 정도를 최하로 낮춘 경우에만 사용이 가능하도록 허가한다는 뜻입니다. 즉, 주술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는 분은 도취 주술을 사용해도 된다는 것이지요.”
승계 의식을 받은 이후, 나는 주술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도취 주술을 사용할 때 쾌락의 정도를 조절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내가 아닌 다른 간부들은 도취 주술의 강도를 조절하지 못할 것이다.
쉽게 말해서 도취 주술은 나만 쓰겠다는 뜻이다.
조금 이기적이긴 하지만, 억울하면 주술의 강도를 조절하는 법을 배우면 된다. 배운다고 배워지는 재주가 아니지만.
“설명을 잇겠습니다. 먼저, 저는 ‘각인’을 활용하여 염만근 간부의 공장에서 제조되는 제품에 도취 주술을 각인할 것이며─”
말을 이었다.
염만근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술에 도취 주술을 각인한다. 5개에 하나 꼴로 주술을 각인할 생각이며, 이를 통해 염만근의 사업을 팽창시킨다.
발생한 수익의 40%를 전라교단이 가져가고, 20%는 서울교단이, 그리고 나머지 40%는 분할하여 다른 교단에 나누어 준다.
요점만 정리하자면 이랬다.
“저희는 좋지만, 아무래도 염만근 간부의 의견이 중요할 듯한데…….”
내 말을 들은 하판석이 슬슬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아무래도 염만근의 사업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일이다 보니, 염만근 본인의 의사가 제일 중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염만근 간부는 흔쾌히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염만근을 설득한 뒤였다. 그는 오히려 내 제안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안 그래도 경쟁사가 나타나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자사 제품에 도취 주술을 각인할 수만 있다면 경쟁사도 제거하고 판매량도 늘고,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염만근은 종교인이지만 동시에 사업가이기도 하다. 그가 흔쾌히 동참의사를 밝혔다는 것은, 내 계획이 성공할 여지가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사전에 염만근을 만나러 간 것은 동의를 구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사업가적 안목으로 계획을 판단하기 위함도 있었다.
“참,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허나, 이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
염만근의 사업을 팽창시키고 수익을 분할하는 것은 장기적 관점에서의 해결 방안.
“한수엽의 재산을 몰수한 덕분에 서울교단의 재정 상황은 제법 넉넉한 편입니다. 교단 운영비와 저축을 제하고, 그 외 나머지 금액을 간부 여러분들께 분배하겠습니다.”
“어? 야, 아니, 교주님. 잠시만요.”
“단, 성전 이후 일시적으로 폐지되었던 헌물 제도를 다시 시행하겠습니다.”
헌물(獻物) 제도.
제물로서 효과를 가지는 각 지역의 특산품을 일정 주기마다 서울교단에 바치는 제도를 말한다. 공납(貢納)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헌물 제도는 성전 이후 부두교가 몰락함에 따라 자연히 폐지되었으나, 이제는 부활시킬 때가 됐다.
헌물 제도를 부활시키면 자연히 교주의 힘이 강해지고, 그에 따라 지방 교단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편해진다. 이를 통해 반란세력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염만근의 공장에서 나오는 수익을 분배하여 재정난을 해결. 서울교단의 남는 돈을 지방교단에 분배하고, 이를 빌미로 헌물 제도를 부활시킨다. 이를 통해 제물의 수급을 원활히 하여, 로아의 힘을 키우고 동시에 교주권을 강화한다…….
제법 나쁘지 않은 계책이라고 생각한다.
* * *
회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종료되었다. 교주가 나름의 묘책을 내놓은 덕이었다.
염만근의 공장에서 나오는 수익을 분배하면 장기적 재정난이 해결될 것이며, 서울교단의 남는 돈을 분배하는 것으로 단기적 재정난을 해결할 수 있었다.
간부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서 공돈을 만지는 셈이었으니, 너 나 할 것 없이 좋아하며 교주를 칭송하기에 바빴다.
“염만근, 이 개자식이……!”
그러나 하판석의 속은 그야말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함께 반란을 모의했던 전라교단의 염만근이 대뜸 교주의 편에 붙어버렸기 때문도 있었으나, 다른 무엇보다도 교주가 헌물 제도를 부활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은 까닭이었다.
헌물 제도를 부활시키면 지방교단으로부터 받은 제물을 통해 로아의 권능을 강화할 수 있기에, 가장 먼저 교주 일신의 무력이 강해지게 된다.
허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염만근의 공장에서 나오는 수익의 분배 비율을 정한 것도 교주. 본부의 잉여 재산의 분배 비율을 정한 것도 교주.
재정에 대한 권력이 전부 교주에게 몰려 있다. 이런 와중에 헌물 제도를 부활시킨 것은, 바친 제물의 품질에 따라 재정의 분배에 차등을 두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즉, 헌물 제도를 통해 지방교단끼리 서로를 견제하도록 시스템을 구축해버린 것이다. 이는 반란 세력, 즉 하판석 자신을 향한 명백한 경고였다.
“썩을 놈…….”
교주는 재정난을 위기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교주권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을 것이다.
정말 만약의 일이지만, 반란 세력의 주축이 충청교단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지금 당장 보복을 하러 올지도…….
똑똑.
불길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가는 것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판석은 숨을 죽이고 문 너머 인기척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염만근? 아니면 이진성인가?
교주가 보복을 위해 직접 행차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떨면 안 된다. 긴장해서도 안 된다. 설령 문 너머에 있는 것이 교주일지라도, 일절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도둑이 제 발을 저리는 꼴이었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 교주는 내가 반란 세력의 주축이라고 확신하고 보복을 가할 것이 분명했다…….
“누구십니까?”
하판석은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힌 뒤, 차분하게 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 너머는 그저 어둠으로 가득했다.
흘러 들어오는 어둠의 급류를 타고 한 남자가 성큼성큼 하판석의 숙소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걸음걸이에서는 일말의 주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제집 안방을 드나들듯 하는 태도였다.
그토록 무례한 태도에도, 하판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교주님.”
그의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교주였기 때문이다.
“알고 열어주신 거 아니었나요?”
교주가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눈빛만은 선명하게 하판석의 상판을 훑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