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ander of the Space Gamer RAW novel - Chapter 18
18. 그거 거짓말이다 (2)
18.
동의하냐고? 아무렴 동의해야지. 이런 일을 겪고도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더 살 생각은 말아야지.
초인공지능은 마스터인 사령관이 죽어야만 소유권이 넘어간다. 물론 그전에 전임사령관의 동의가 이뤄져야만 가능한 일이고.
이 백발노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노인장이 의도하는 바는 너무나 명확하다.
네가 유니온의 사령관이 아니라면 죽이겠다.
그전에 사령관 위를 넘기기를 종용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살해할 자들에게 이익을 안겨준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단연코 그 일에 동의할 사람은 없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테니 저들 역시 의례 절차상 물어보는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일반 함선만 소유했어도 재산권을 보장받기 위해 주요 세력에 가담하는데 모든 세력이 탐을 내는 전략자원인 초인공지능을 소유한 상황이니 세 세력 중 하나에 가담하지 않고는 어차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유니온이 아니라면 엠파이어나 뉴트럴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혹 유니온이 자비로운 세력이라 할지라도 위협이 될만한 요소를 멍청하게 방치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자비로운 이익집단이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백발노인 루퍼스는 이한을 매섭게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이한은 그런 루퍼스의 눈을 마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이드라실. 유니온의 사령관임을 인정합니다.”
“알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회의실을 뒤덮고 있던 홀로그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적막한 회의실을 잠시 둘러보던 이한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페이스 워에서 주인공은 유니온의 첨병으로서 테라의 두 세력을 무너뜨린 일등공신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스페이스 워의 내용은 참고만 해야지 신뢰할 수도 없고 신뢰해서도 안 된다. 더욱이 두 세력을 무너뜨린다?
‘멍청한 짓거리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고 외계종족과의 전투를 생각하면 제살깎아먹기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글쎄 그 결과도 퍽 좋지는 않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적으로 만난 엠파이어 등이 오! 네가 테라의 전체 이익을 위하고 있구나? 그럼 우리 사이좋게 손잡고 놀자! 이럴 리가 없지 않은가?
‘뭘 하든 간에 일단 힘부터 기르자.’
아이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봤자 쥐방울만한 새끼가 확! 이러는 게 현실이다. 혹 그 아이가 위압적인 덩치를 가진 사내라면? 비겁하다고? 그게 현실이라니까? 무엇보다 아이가 옳은 말을 한다고 귀 기울일 사람이라면 아이에게 지적당하지도 않는다.
드넓은 세상 가운데, 세 세력 가운데 어디 옳은 말하는 사람 한 명 없을까? 그러니 텄다. 일단 두들겨 패야 돼. 하다못해 그럴만한 힘이라도 갖추던가.
이한은 골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매만졌다.
“이럴 게 아니라 훈련이라도 해야겠군. 훈련이라도.”
지난 전투에서도 느꼈지만, 사령관이라고 안전한 게 아니다. 크락투는 말할 것도 없고 암살을 위해 스펙터라도 들이닥치는 날에는. 그냥 뒈지는 거다. 그냥.
이것만 봐도 스페이스 워는 믿을만한 게 못 된다. 그냥 참고자료 수준이 딱 적당하다.
밖으로 나선 이한은 문 옆에 시립한 군인들에게 말했다.
“훈련실로 안내해.”
“알겠습니다.”
*
연합군의 초계함. ‘볼터’는 작은 함선에 속하나 그래도 전장이 250m에 정원은 400명 되는 함선이다.
초계함의 화력 자체는 구축함 등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다른 함선에 비해 가장 빠른 기동력을 지녔고 요격기나 전투 드론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기에 초전이나 기습전에 자주 활용되는 함선이었다.
함선에 400명이나 되는 인원이 상주하고 있기에 함선 안에는 전투나 생존에 필요한 시설들이 적당하게 갖춰져 있었고 훈련실도 그중에 하나였다.
이한이 훈련실에 도착하자 익숙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령관님!”
시에라였다.
“어? 시에라.”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테라로 워프할 때까지는 충전시간이 필요하니까. 그사이 훈련이라도 하려고.”
“아 기억을 잃으셨으니······.”
시에라가 말을 꺼낼 때 이한은 등 뒤에서 묵직한 느낌이 들어 고개를 슬쩍 돌렸다.
2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흑인 사내는 바로 빌리였다. 이한 그러니까 한 이드라실도 작은 키가 아니었건만 빌리에 비하면 왜소해 보일 정도였다.
눈이 마주친 빌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시에라의 말을 받았다.
“확실히 훈련이 필요하긴 합니다. 스펙터 교육까지 이수한 사령관께서 그리 굼뜬 움직임을 보였으니······. 그 치열한 전장에서 살아남은 게 기적이죠. 사실.”
“스펙터?”
한 이드라실이 스펙터였다고? 그런 설정은 없었… 이한은 생각을 털어버렸다. 스페이스 워의 설정에 자꾸 얽매이는 경향이 있었다. 누차 인지했다시피 그건 이제 별 쓸모가 없다.
‘하긴 그러고 보면······. ’
이한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팔과 다리를 바라봤다.
상당히 잘 단련된 육체였다. 스틸아머와 더불어 단련된 육체가 지난 전투에서 살아남게 만든 것이리라. 아울러 한 이드라실을 생성할 때 설정한 잘생긴 얼굴까지 고스란히 적용되었다는 걸 뒤늦게 인지했다.
그건 마음에 여유가 조금이나마 생겼다는 방증이리라.
‘그러고 보니 잘생긴 얼굴에 단련된 육체. 사령관이라는 직위. 얼래? 이거 생각보다 괜찮을 지도······. 는 개뿔.’
뭐 다 좋다. 언제 뒈질지 모른다는 점만 빼면······.
빌리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같이 생사를 오간 전우라고 진한 친밀감을 느낀 이한은 편안한 표정으로 빌리에게 대답했다.
“이제 와 말인데 기억나는 건 이름밖에 없다.”
자신은 이한이고 이딴 이야기는 꺼낼 필요가 없다.
그런 이한을 빤히 바라보던 시에라가 대뜸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훈련을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시에라 중위가?”
이한은 그렇게 반문하며 시에라를 바라봤다.
착 달라붙은 훈련복을 입어서 그런지 그녀의 몸매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거의 완벽한 비율의 몸매를 가진 금발 여인이 바로 시에라였다. 시에라는 긴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그 모습까지도 너무 잘 어울렸다.
대답 없는 이한의 모습에 시에라는 차분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부족하다고 여기십니까?”
부족? 대체 뭐가 부족한데? 이 몸매, 이 얼굴, 게다가 중위인 걸 보면 능력도 뛰어난데 대체 뭐가 부족한데?
“시에라 중위님 역시 스펙터 교육을 이수한 분입니다. 저보다도 나을 겁니다.”
빌리의 말에 이한은 쌍방 간에 오해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정신 차려! 미친놈아.’
하지만 이건 본능이다. 이성과는 상관없는 남자의 본능!
‘지랄! 왜? 내 뇌는 아예 아랫도리에 달려있다고 하지 그래?’
말도 안 되는 변명은 써글! 괜한 자괴감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낀 이한은 더듬거리며 말을 뱉었다.
“아… 아니.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갑작스러워서.”
이미 훈련 중이었던 시에라는 뺨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이한에게 되물었다.
“그럼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 아 씨발. 좀 나대지마.’
훠이 물렀거라! 음란마귀! 제발 좀 꺼져줘.
“어 부탁할게.”
꺼지라고!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이한은 괜히 인상을 찌푸리며 급히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스펙터 교육을 이수했다면서 전에는 왜 스틸아머를?”
그 말에 빌리가 대답했다.
“그건 부작용 때문입니다. 스틸아머만 해도 적절한 치료가 병행되어야만 합니다. 더 강력한 나노슈트나 바이오나노슈트는 말할 것도 없죠. 자세한 건 시에라 중위님께서 설명해 주실 테니 그럼 저는 다시 훈련하러 가겠습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에라와 눈이 마주쳤다.
“음······.”
괜히 침음을 흘릴 때 시에라가 다시 말했다.
“이름만 기억하시는 게 확실합니까?”
“어 그게… 이름만 기억하는 건 아닌데······. 뭐 그런 셈이지.”
“······.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기초 훈련부터 시작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를테면 스틸아머 사용법이나 무기 사용법 등 말입니다. 일단 전혀 기억하지 못 하는 것 같으니 개략적인 것들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미처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나 자세한 내용은 후에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으시면 됩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시에라가 빙글 몸을 돌리자 포니테일로 묶은 금빛 머리칼이 찰랑이며 이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니 그보다도······.
‘그만! 그만해! 미친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