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ander of the Space Gamer RAW novel - Chapter 189
186. 도망쳐라! (3) >
186.
콰아아아앙! 콰광!
가라쉬를 소멸하게 만든 거대한 폭발은 단순히 타고르스함을 뒤흔드는 정도가 아니라 함선 자체를 산산이 파괴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그런데도 함선을 뒤흔드는 정도로 그친 것은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블랙홀이 주변을 삼키는 것처럼 모든 폭발이 한 변곡점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사아아악!
따라서 거대한 폭발과 가라쉬 역시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대다수 폭발이 변곡점에 의해 소멸되었더라도 이미 발생한 거대한 충격파는 별수 없었기에 함선 전체에 상당한 타격을 가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견뎌낼 수 있었다.
다만 폭발이 일어난 구역이 예전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형편없이 박살 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한은 그렇게 이리저리 바스러진 함선의 잔해를 밟고 서 있었는데 그의 몸은 흐릿한 잔상으로 일렁이며 빠르게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길 반복하고 있었다.
기이한 현상에 이한이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자 그제야 그 모든 현상이 사라지며 원래의 육체 형태로 돌아왔다. 잠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이한은 자신보다 월등한 지식과 정보를 가진 워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건 대체 무슨 현상이지?”
『물질과 비물질은 서로 대척점이라 할 수 있지만 깊게 파고들면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는 수많은 분자와 원자 등으로 이뤄져 있고 그것을 다시 쪼개면 정의할 수 없는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비물질이 물질을 이루고 있고 물질이 비물질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 방법을 분석할 수는 없으나 사령관님이 상대한 다르포스족은 비물질과 물질을 오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령관께서는 그런 존재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소멸시켰습니다.』
이한의 침묵 가운데 워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그 후 비물질과 물질의 어떤 중간단계라고 봐도 무방한 현상이 사령관님 육체에 나타났습니다. 기존의 어떤 지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기에 확정할 수는 없으나 현재로서는 사령관께서 취득한 엘카힘의 유물로 인한 현상일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굳이 덧붙이자면 사령관께서 가라쉬를 어떤 식으로 소멸시켰는지 분석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음.”
짧게 침음을 뱉던 이한은 폭발의 잔해를 살펴보며 워에게 다시 말했다.
“코스모스에 충격에 가해진 것은 아니겠지?”
『강력한 충격파가 함선을 휩쓸기는 했으나 함선의 주요기능에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았습니다. 코스모스 주포가 곧 완충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한은 다시 말했다.
“완충되는 대로 적함을 파괴하도록 하고 함내의 상황은?”
『피해가 없는 건 아니지만 가라쉬의 죽음 이후 빠른 속도로 진압되고 있습니다.』
“함대전 상황은?”
『예상했던 것과 달리 데모스, 스타로쉬 함대가 출현하지 않았기에 코스모스 주포로 다르포스 함대의 주력함을 파괴하면 대다수 상황이 정리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사령관님. 완충되었습니다. 명령대로 포격합니까?』
이한은 냉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포격해.”
*
타고르스함에서 발사된 코스모스 주포는 다르포스 주력함 수십 척을 단번에 소멸시켰다. 이미 두르둔 함대에게 밀리고 있던 다르포스 함대는 강력한 화력과 방어력을 자랑하던 주력함 수십 척이 사라지자 더 버티지 못하고 몰살당하기 시작했고 이에 급히 후퇴하기 시작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두르둔족이 펼쳐놓은 반 워프 역장으로 인해 제때 워프할 수 없었기에 겨우 몇 척의 함선만이 두르둔 함대의 포위에서 달아날 수 있었을 뿐이다.
그야말로 대승이었다. 오늘의 전투로 다르포스족은 완전히 몰락한 셈이니까. 다르포스족은 오늘의 전투로 모행성에 대다수 주력 함대까지 모두 잃어버렸으니 더 이상 어떤 위협이 되기 어려웠다.
함내로 침투한 다르포스족과 전투를 치렀고 코스모스 주포를 날린 뒤에도 수많은 함선과 전투기를 격추시켰기에 함내의 모든 승무원은 상당히 고양된 상태였다.
“다르포스족 함대를 무찔렀습니다.”
【섬멸 가능한 다르포스 함선을 모조리 격파했습니다.】
【아군의 승리입니다.】
가라쉬를 처단한 뒤 함교로 돌아와 모든 상황을 주시하고 지휘하던 이한은 함내 방송을 통해 승리를 확정지었다.
“상황 종료. 아군의 대승이다.”
【와아아아아!】
“와아아!”
모든 승무원이 열광적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당연히 다르포스족에 지독한 원한을 품고 있던 에스타른족의 반응이 가장 격렬했다.
그 격렬한 환호 속에서 이한은 다른 이들과 다르게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르삭을 바라봤다. 그가 말을 꺼내는 중에도 주변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은 끊이지 않고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맡은 바 임무를 달성하고도 기쁘지 않은 것이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한이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자 헤르삭이 말을 이었다.
【복수라는 표현을 썼지만 에스타른족이 다르포스족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은 다르포스족이 활개를 치는 한 에스타른족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놈들은 반드시 저희 에스타른족을 말살하려고 했을 테니 말입니다.】
이한과 눈을 마주한 헤르삭은 짧게 말을 맺었다.
【다만 그것과 별개로 씁쓸함을 감출 수 없군요.】
“전에 다르포스족과 우호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대답한 것치고는 너무 감상적인 반응 아니오?”
【아시겠지만 그게 사실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상과 현실은 괴리가 있기 마련이지요.】
“이상과 현실은 괴리가 있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오?”
헤르삭은 이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달리 말해 앞으로 다르포스족을 어찌할 것이냐고 묻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 이상만을 쫓을 수는 없습니다. 그 결과는 선조들이 이미 저희에게 충분히 보여줬습니다.】
이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뜻대로 하시오.”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
웜홀 게이트로 복귀한 이한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봉착했다.
이한은 시에라에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거지”
“데모스족과 스타로쉬족은 사령관님 예상대로 모든 함대를 이끌고 이곳 웜홀 게이트로 접근했습니다.”
전에 예측했다시피 다르포스 함대를 돕지 않는다면 저들은 웜홀 게이트를 공략할 거라 판단했었다. 현 상황에서 저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 두 가지밖에 없었으니까.
이한은 침묵을 지키며 말을 경청하자 시에라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한데 저들은 아군을 공격하는 것 대신 사절을 보냈습니다.”
이한은 의아한 눈으로 시에라를 바라본 뒤 저편에 선 두 외계종족의 사절을 힐끗 바라봤다.
“유일한 기회를 그냥 그렇게 날려버렸다?”
시에라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한에게 대답했다.
“글쎄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들은 사절을 보냈고 저는 모든 사령관과 지휘관들의 의견을 참고해 전투를 보류했습니다. 이상입니다.”
『현명한 판단입니다. 그대로 전투를 치렀다면 승전했더라도 막대한 피해를 면치 못했을 겁니다. 전략적인 관점에서도 시간을 끌면 아군에게 유리하니 훌륭한 선택이었습니다.』
그건 이한도 충분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한 가지 의문점은 지금과 선택지에서 놈들이 취할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냐는 점이었다. 다르포스 함대를 격파한 아군이 웜홀 게이트에 합류한 상황이니 현 상황은 데모스, 스타로쉬 두 종족 모두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뭐 웜홀 게이트에 모습을 드러낼 확률은 다르포스족을 도울 확률보다 미약하기는 했으나 예측 가능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웜홀 게이트를 점령하고자 했다면 아군이 다르포스 함대와 상대하고 있을 때가 적기였다. 더욱이 사절을 보냈다고? 이건 정말이지 예측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놈들이 이러한 선택을 했다는 건 아군과 전투를 치르는 것보다 더 큰 이득을 가져다준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텐데 현재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군. 직접 만나보면 알 수 있겠지.’
이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데모스, 스타로쉬 두 종족의 사절을 들어오게끔 했다.
이한은 저들의 모습을 보고 대뜸 입을 열었다.
“유령과 같은 사람과 액체로 이뤄진 사람이라니···. 무슨 의도인지는 알겠다만 오히려 역효과를 낳지 않을까 싶은데?”
유령과 같은 사람은 데모스의 사절이 화한 모습이었고 출렁거리는 액체로 이뤄진 사람은 바로 스타로쉬의 사절이 화한 모습이었다.
“원래 모습을 취하는 것보다는 더 익숙한 모습 아니겠습니까?”
유령처럼 일렁이는 사내의 형상을 한 데모스가 이한에게 가볍게 예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그는 데모스족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말했는데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상당히 유려했다.
반면 스타로쉬의 사절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이한을 주시하다가 짧게 말했다.
“스타로쉬족의 사절입니다.”
이한은 두 종족의 사절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겉모습이야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본질이 무엇인지 본심이 무엇인지가 중요할 뿐.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 말에 데모스의 사절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한 이드라실 테라 총사령관님.”
이한은 그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입을 열었다.
“피차 바쁜 마당에 용건부터 간단히 하자고. 너희와 우리는 이미 전면전에 돌입한 상황이다. 그런데 갑자기 사절이라니 무슨 헛짓거리지?”
“전면전에 돌입한 것은 다르포스족이지 저희가 아닙니다만···.”
데모스 사절의 말에 이한이 눈매를 좁히며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겠다?”
이에 이한을 유심히 주시하고 있던 스타로쉬의 사절이 입을 열었다.
“테라 연맹이 다르포스족에게 무너졌다면 다르포스족을 도와 테라 연맹을 파괴하는 일에 앞장섰을 겁니다.”
이한이 차가운 눈빛으로 묘한 액체로 일렁이는 여인을 바라봤다.
“그런데?”
“테라 연맹이 승리했습니다. 테라 연맹에 대항한 다르포스족은 자신의 모행성과 주력 함대까지 잃고 멸족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요.”
“너의 역시 테라 연맹의 주적이다. 이제 와 상황이 불리해지니 항복이라도 청하겠다는 소리인가?”
스타로쉬 사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한은 스타로쉬 사절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그 항복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항복한 너희를 무슨 수로 믿지? 게다가 너희 역시 내 약조를 무슨 근거로 믿을 것이고? 일단 항복을 받아들인 후 마르지 않는 초자원을 얻고 너희 두 종족을 말살시킬 수도 있다. 설마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이에 데모스 사절이 이한의 말을 받았다.
“저희 종족의 미래가 달려있는데 그 사실을 저희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너희를 신뢰할 수 없고 너희 역시 우리를 신뢰할 수 없다. 이러한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기 마련이지. 그러니 너희가 언급한 항복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여기겠다. 더 이상 대화는 필요 없는 것 같군.”
이에 유령처럼 일렁이는 데모스가 씨익 웃음을 지으며 이한에게 말했다.
“너무 성급하신 결정 아닙니까? 저희 데모스족, 아니 스타로쉬족과도 전투를 치르긴 했으나 그건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국지전? 황당한 소리를 지껄이는군. 뭐 스타로쉬족은 그렇다 쳐도 너희 데모스족은 테라를 데모스 행성으로 변화시키려고 했던 족속들이다. 그런데도 전면전을 치른 적이 없다? 내가 왜 이런 개소리를 계속 듣고 있어야 하지? 물러가지 않는다면 내 손으로 직접 소멸시켜주지.”
이한의 살기 어린 태도에 다소 긴장한 데모스 사절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별 의미가 없을 것이라 여겨지나 먼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한 총사령관 각하. 상황이란 언제나 변화하는 것 아닙니까?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의 아군이 되기도 하지요. 오늘까지 적이라고 해서 내일도 적이 되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는군. 신뢰할 수 없는 아군은 적보다도 못한 법이다.”
“저희 역시 종족의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한 사령관께서 끝까지 저희를 적으로 규정하겠다면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지요. 하지만 테라도 그 끝이 좋지 않을 겁니다.”
이한은 눈매를 좁히며 데모스와 스타로쉬의 사절을 바라봤다. 전쟁은 무슨 이유를 붙이더라도 악이다. 피할 수만 있으면 무조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한이 전쟁을 원하는 모습을 취하는 것은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라면 예측 가능하고 유리한 상황에서 치르는 것이 현명했기 때문이다.
에스타른족은 거론할 것도 없고 이들은 종족의 이득과 깊게 연결되어 있어 배반할 수 없는 두르둔, 라페이드족과 다르다. 따라서 저들이 칼가로아 등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 뒤통수를 후려치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희생을 치르더라도 마무리를 짓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꺼내는지 들어볼 필요성은 있겠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저들은 다르포스족과 다를 바 없는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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