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ander of the Space Gamer RAW novel - Chapter 21
21. 드루와! (2)
21.
아스라이 멀어지는 빛과 소음.
오감과 육감을 넘어 신경 다발 끄트머리까지 저릿한 감각.
구토라도 와악 내뱉고 싶지만, 저 밑바닥 아래에서부터 옥죄는 지독한 답답함은 헤아릴 수 없는 갈증이 되어 영혼까지 말라비틀어지게 만든다.
처절한 비명을 끝없이 내지르나 결국 비명을 지르는 자의 고막만 무참히 찢어버릴 뿐 소리 없는 아우성이 되어 먼지처럼 스러진다.
더러운 늪에 빠진 가여운 사슴처럼 형언할 수 없는 고독 가운데 하염없이 침잠하고 메마르다 못해 갈가리 찢어진 목청 뒤에 남은 허무와 두려움이 게걸스럽게 온몸을 잠식한다.
“크흑!”
이한은 거칠게 헬멧을 벗어던졌다.
정말 엿같은 기분이다. 탄환이 온몸을 헤집는 기분이라니······. 한두 발도 아니고.
아니 그보다도 사신이 들고 온 서슬 퍼런 낫에 비친 겁에 질린 내 얼굴을 바라본 지금은 가히 어떤 말도 뱉기 힘들다. 아주 끔찍한 경험이다.
‘······. 그래도 레벨업은 했구나. 마지막 순간에 보고하고 임무를 초과달성했으니 망정이지······.’
워 이 새끼. 그렇게 겁을 주더니! 라고 면박을 주고 싶어도 죽지만 않았을 뿐, 워의 경고는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다음번에도 죽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직접 겪은 나조차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편안히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조차 지극한 안락함으로 다가온다.
“괜찮으십니까?”
이것 역시 좋다. 눈이 정화되는 기분이야. 아름다운 미녀가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사령관님?”
이한은 시에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에라의 반문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어? 괘. 괜찮아. 좀 어지러워서.”
“임무초과달성이라니······. 역시 사령관님이시네요. 이건 어떻게 해도 유니온이 패배하는 시나리오로 보였는데 말입니다.”
“기억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전투훈련 프로그램을 초과달성했다고?”
“허. 소문대로 대단한데?”
시에라의 말을 들은 병사들이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간의 고생이 조금이나마 씻겨······. 가기는 개뿔. 이거 아무래도 상당한 트라우마가 될 것 같다.
‘그나저나 뭐가 어떻게 달라진 거지?’
분명 레벨업을 했다고 들었다. 이번 레벨업은 내 정신과 육체에 영향을 미칠 확률이 높다고도 했었고.
가상현실의 여파로 인한 어지러움 때문인지 아직까진 달라진 점을 체감하기 어려웠다. 헛구역질이라도 한바탕하면 좋으련만.
“가상현실이라고 해도 죽음을 겪으셨으니 더 이상 훈련을 지속하기는 어렵습니다. 한동안 푹 쉬시는 게 좋습니다.”
시에라의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말에 이한은 머리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어야겠지. 그나저나 생각보다 상당히 효율적인 훈련방법이네. 마치 기초훈련의 모든 것을 통달한 느낌이야.”
지랄 맞은 간접죽음의 경험만 빼면. 죽었다가 살았는지도 모르지. 뭐든 간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한 사령관께서는 본래 뛰어난 군인이셨으니 훈련으로 기억이 조금이나마 돌아오신 모양입니다. 다행입니다. 다만 미처 파악하지 못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바로 의료 센터로 이동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뒈지면 다 무슨 소용인가? 몸에 별다른 문제가 없더라도 맛있는 음식도 먹고 편안한 음악도 좀 듣고. 아니 다 필요 없고 잠이라도 푹 자야겠다.
위이이잉! 위이잉!
‘아······. 또 뭔데?’
사납기 그지없는 사이렌 소리를 듣는 순간 이한은 그 모든 생각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안내가 떨어지기도 전에 병사들은 제각각 어디론가 급히 뛰어가고 있었다.
훈련이 아니라 휴식을 취해야 했었나?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 휴식이 아닌 훈련을 택한 것을 기특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위험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
주변을 살피던 금발의 시에라가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
“지휘통제실이 어딘지는 나도 아니까 전투준비부터 해. 돌발상황이 언제 어떻게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니······.”
“알겠습니다. 그럼 무장을 갖추고 빌리 소위와 함께 지휘통제실 앞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시에라와 빌리 등은 함내에서의 임무가 없을뿐더러 이한 역시 호위병이 하나라도 더 있는 것이 든든했다. 더욱이 이들은 생사를 함께 나눈 진정한 전우들이 아닌가?
“뭐. 그렇게 해.”
*
이한은 병사의 경례를 데면데면하게 받으며 통제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치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드러난 광경은 승무원 모두가 정신없이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습과 멋들어진 구렛나루를 가진 한 사내가 명령과 지시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지휘통제실 가운데는 커다란 상황판이 떠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항성이나 행성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표나 현 상황에 대해 표시하는 여러 기록이 빠르게 점멸하고 있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이한은 멋들어진 구렛나루를 가진 사내, 곧 스티븐 함장과 눈이 마주쳤다. 이미 전에 짧게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기에 얼굴만으로도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스티븐 함장은 승무원들에게 빠르게 몇 가지 지시를 더 내린 후 이한에게 다가왔다.
“한 사령관님. 오셨군요.”
스티븐 함장의 계급은 대령 진급을 앞둔 대령(진)이었다. 대령으로 진급해도 이한보다 한 계급이 더 낮았으니 그가 말을 높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계급이 높다고 해서 나이와 경험 모두 월등한 스티븐 함장에게 말을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여긴 스티븐의 함선이다. 그의 직속 부하들 앞에서 그를 홀대해서 이로울 게 하나도 없었다.
“리퍼입니다.”
리퍼는 대개 우주 해적단을 통칭하는 단어였다. 다만 해적이 상선도 아니고 정규군을 습격해? 정신이 나간 건가? 대체 뭘 뜯어먹을 게 있다고? 이한의 의아한 심정을 눈치채기라도 한 모양인지 스티븐 함장이 바로 말을 이었다.
“현 볼터함에는 리퍼가 노릴만한 재화나 특별한 기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적들은 사령관님을 노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나를? 왜 나를 노린단 말입니까? 설마 초인공지능?”
그렇다면 더 황당한 일이다. 순순히 권한을 양도하더라도 죽어야만 양도가 되는 걸 어떤 사령관이 해적 따위에게 양도할까?
“현재 추측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정도입니다. 사령관님을 회유할 수도 있으나 그건 사령관께서 받아들일 이유가 없으니 납치 후 몸값을 뜯어내려는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이한은 여전히 의아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여전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행동 같은데······.”
초계함은 많게는 10개 편대까지 이뤄진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다. 10개 편대면 무려 30기의 전투기다. 때에 따라 더 많은 요격기를 보유하는 경우도 있다.
아울러 초계함의 화력이 약하다고 해도 민간 함선이 비빌 수준은 결코 아니다.
훈련 수준이나 규율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해적단이 정규군을 건드려? 아무리 생각해도 정신 나간 놈들이다.
“안 그래도 그것을 여쭤보기 위해 사령관님을 만나 뵙고자 했습니다.”
스티븐이 여기까지 말을 꺼내자 이한은 그가 무엇을 묻고 싶은 것인지 바로 눈치챘다.
“저들이 탐낼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함장의 말대로 초인공지능 외에는 말입니다.”
“흠.”
스티븐 함장은 이한의 대답에 미간을 좁히며 침음을 뱉었다. 거짓을 말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해적들이 함선을 습격할 당위성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함장님! 다수의 헤러틱이 출현했습니다. 리퍼가 확실합니다.”
정규군이 쾌속정을 사용하는 경우는 행성에 인접한 함대에 속한 경우에 그렇고 이렇듯 원거리를 항해할 때는 쾌속정은 거의 운용하지 않는다. 헤러틱 쾌속정을 사용한다는 것만 봐도 저들이 리퍼라는 것을 확정할 수 있었다.
저들의 목적이야 나중에 밝혀도 될 일. 격퇴하는 것이 우선이다. 스티븐 함장은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함내에서 전투 대기 중인 모든 요격기 출격시켜! 놈들이 강습을 시도조차 못하도록 초기에 진압한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린 스티븐 함장이 이한에게 다시 말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전투상황만 아니라면 제가 찾아 뵜을 겁니다.”
“임무가 우선이지요. 용건이 끝났다면 이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사령관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일단 호위 병력을 붙여드리겠습니다. 혹 원하신다면 이곳에 계셔도 됩니다.”
“그보다는 스틸아머라도 걸치고 있는 게 좋을 듯하군요.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
유려하게 빠진 동체를 가진 요격기 편대가 적함을 향해 빠르게 가속하고 있었다.
슈슈슈슝!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빠르게 가속하던 요격기보다 더욱 빠른 물체 여러 개가 발사되었다.
별처럼 반짝이며 폭발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스타버스트라는 미사일이었다.
콰아아아앙! 콰아아앙!
빠른 속도로 돌격하던 리퍼의 쾌속정의 배리어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강하게 요동치다가 이어진 공격에 결국 박살 났다.
콰아아앙!
배리어 없이 쾌속정의 외부장갑만으로는 결코 요격기의 공세를 막아낼 수 없다. 초계함의 요격기 편대에 리퍼의 쾌속정은 속수무책으로 우주 곳곳에서 화려하게 산화했다.
여기에 별다른 이변은 없었다. 예측했던 모습 그대로 리퍼의 잔해만 우주에 화려하게 흩날렸을 뿐. 리퍼는 대체 왜 유니온의 초계함을 습격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