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ander of the Space Gamer RAW novel - Chapter 44
41. 즐거운 사업계획 (2) >
41.
이한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에 설핏 잠에서 깼다.
“크으. 머리······.”
한쪽 머리를 짚고 몸을 일으키던 이한은 여인의 비단결처럼 고운 피부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말문이 턱 하니 막혔다. 정확하게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백옥처럼 하얀 등을 가진 금발여인의 등이었다.
이한은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뒤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 시에라?”
시에라가 왜? 그것도 나체로 나와 함께 이불을 덮고 있어?
그 순간 이한은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것처럼 지난밤의 격렬한 정사가 스쳐 갔다. 탐스러운 가슴에 환상적인 골반과 완벽한 엉덩이의 출렁임, 그리고 뜨거운 숨결이 귓가와 온몸을 달궜던 짜릿한 감각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차갑고 이지적인 시에라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아찔했던 그녀의 표정이 이한의 머릿속을 꽉 메웠다.
“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내가 시에라하고 뜨거운 밤을? 어제 빌리하고 술을 진탕 마시다가 내가 먼저 나가떨어져 나간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때 등을 돌리고 누워있던 시에라의 차분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등을 돌린 채로 이한에게 말했다.
“······. 후회하나요?”
지난밤 뜨거운 숨결을 내뿜었던 그녀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녀의 어조와 분위기는 차가웠다.
후회하냐고? 처음으로 이 세계에 떨어진 것을 환영해야 할 판국에 후회는 개뿔이! 꿀이다. 개꿀! 그래 씨발! 고난 뒤에는 뭔가 보상을 줘야지! 이런 보상이라면 대환영이다!
어제는 술에 취해 뭐가 뭔지 제대로 느낄 새도 없었다. 이한은 시에라의 어깨를 잡아 확 돌려세운 뒤 그녀의 입술을 한 마리 짐승처럼 탐했다.
“웁. 우웁!”
시에라가 인상을 쓰며 두 손으로 이한을 밀어내자 이한은 잠시 입술을 떼고 그녀를 바라봤다.
“이게 뭐 하는 건가요?”
“마무리해야지.”
“뭐······. 뭘 말인가요?”
펄럭!
이한은 이불을 확 걷어치우며 말했다. 백일하에 드러난 시에라의 나신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상상 그 이상으로 환상적이었다.
게다가 당황한 시에라의 표정이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아니 대놓고 자극적이었다.
“알면서 뭘 또 묻고 그래.”
이한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시에라를 향해 거칠게 달려들었다. 지난밤보다 더 격렬하고 뜨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한의 어깨를 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거구의 흑인, 바로 빌리였다.
“지난밤은 잘 보내셨습니까?”
이한이 빌리를 돌아보자 그는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흰 치아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목숨을 걸고 서로를 구할 정도로 마음이 있는 건 분명한데 한 이드라실 대위님은 상관과 부하라는 것 때문에 선을 넘지 않는다. 라고 에리오한테 들었습니다.”
“그래서?”
“뭐 약골 사령관님이 술에 헤롱거리시길래 시에라 소령님한테 연락해서 소령님을 찾고 난리도 아니다. 난 더 상대하기 싫으니 데리고 가려면 데려가고 말라면 말라고 한 뒤 곧바로 버리고 숙소로 돌아갔지요. 보아하니 일이 잘 풀린 것 같습니다. 흐흐.”
“날 버렸다고?”
빌리는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지금 절 탓하시는 겁니까?”
“아니. 절대 아니지. 덩치는 산더미 같은 놈이 어울리지 않게 세심하네. 거대한 흑인 큐피트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데 말이야.”
“크크큭. 확실히 전 지금의 사령관님이 좋습니다. 이제 와 말인데 예전엔 무슨 기계랑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기세가 너무 칼 같아서 사령관님과 술을 마신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암튼 축하드립니다.”
“그래. 고맙다.”
“그래서 시에라 소령님은 훈련하러 간 겁니까?”
이한은 뜨거운 시간을 보낸 후 샤워하러 들어가던 시에라가 차분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한 것을 떠올렸다.
“다시 나를 버리고 갈 생각이면 그땐 정말 죽을 각오 하라더군. 언제 시에라를 버린 적이 있었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있었나 보군요.”
“흠.”
“그나저나 어제 일을 공치사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테고 뭡니까? 제가 할 일이.”
이한은 반문하는 빌리를 바라보며 탄산수를 들이켰다.
“겉모습만으로 섣불리 판단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너를 보면서 다시 깨닫게 된다.”
“뭘 또 새삼스럽게. 여우, 곰이 따로 있답니까? 전장에서 미친 듯이 구르다 보면 여우도 곰이 되고 곰도 여우가 되는 겁니다.”
“그 무슨 희귀한 궤변이냐?”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앞으로 두 달 남았다. 미확인 행성, 아니 타카스 행성이라 명명된 곳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르기까지 두 달.”
타카스는 개척지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다.
“음.”
“키아텍 스테이션에서 모집된 병사들에게 다시 한번 브리핑 해주고 쓸만한 해병들도 네가 책임지고 모집 좀 해줘야겠어.”
“얼마나 말입니까?”
“모두 합쳐서 2,000명.”
빌리는 미간을 좁히며 이한에게 되물었다.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비하면 적었다. 적어도 3천에서 4천은 모집하는 게 더 현명해보였기 때문이다.
“그것 가지고 되겠습니까?”
“고급화 전략으로 갈 거다. 기갑병기로 크락투를 쓸어버리면서 그 가운데 절반은 스펙터로 만들 생각이니까. 그때쯤이면 급여라든지 자원 상태가 풍부해질 테니 얼추 맞을 거다. 무엇보다 전과 달리 우리만 타카스 행성으로 향하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스펙터 교육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는 근성 있는 자들을 우선 선별하도록.”
“으흠. 하긴 처음부터 스펙터를 고용하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들 테고 고귀한 분들께서 신생 사령관에게 임관한다고 보기도 어렵… 잠깐만! 그거 저도 포함입니까?”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하아. 사령관님. 저는 스틸아머가 좋습니다.”
“그럼 그거 입고 크락투에게 뒈지던가. 강요는 안해. 하지만 너도 봤잖아. 크락투 발톱에 종이짝마냥 쫙쫙 찢어지는거. 나노슈트의 방어력은 스틸아머랑 별 차이 없어도 다른 부분은 비할 수 없지. 특히 반응속도나 속도를 높여주는 부분 말이야. 크락투와 싸우려면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흐음.”
“그리고 너도 진급했다. 타카스 행성 탐사에 일조한 것이 유니온에게 인정받아서 중위로 진급했다. 그러니까 스펙터 되면 내가 책임지고 바로 대위시켜주마.”
“허어.”
한숨을 뱉던 빌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좋습니다. 모집하랴 훈련하랴 정신없는 두 달이 되겠군요. 사령관님께서는 앞으로 두 달 동안 어쩔 계획입니까?”
“훈련도 좀 하고 즐거운 사업계획서 좀 작성해서 후원자들도 좀 만나봐야지.”
“그것 참 쉽지 않은 일이겠습니다.”
“그래도 해야지. 별수 있나?”
*
쿠우우우웅!
동체가 대기권을 뚫으며 극심하게 흔들리는 것이 세포 구석구석까지 전달되어왔다.
콰아앙!
쿠우우웅!
철컥! 철컥!
포트 안에 있던 마린들이 일제히 라이플을 재점검했다.
그때 이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먼저 함대 포격으로 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살아남은 새끼들이 있을 거다. 그러니 방심하지 마라. 이 새끼들은 총알 몇 대 두들겨 처맞았다고 죽는 새끼들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푸쉬이이이
이윽고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강습포트의 문이 날아갔다.
파캉!
“1소대부터 빠르게 나간다! 실시!”
스틸아머를 걸친 마린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사주경계를 실시했다.
그런 가운데 이한은 라이플을 한 손으로 쥐고 걸어 나오며 통신했다.
이한의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육중한 엔진음이 울려 퍼졌다.
푸우우우우!
푸우우!
하늘을 바라보니 컨트롤 센터를 결박한 수송선들이 몇 대가 빠르게 하강하고 있었다.
크락투가 득실거리는 행성이라는 걸 모두가 알았기에 먼저 공통의 적인 크락투를 섬멸한 후에 자웅을 가려도 가리자고 암묵적인 협약을 맺은 것이다. 그게 모두에게 이익이 되니까.
하지만 더 큰 이익이 보장된다면 언제든 깨질 수 있는 협약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 위치를 재차 확인해 본 것이었다.
이윽고 이한은 컨트롤 센터가 지면에 완벽하게 안착하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아직 초인공지능 장치는 장착하지 않았다. 컨트롤 센터보다 중요한 것이 백업장치라고 할 수 있는 이 장치였으니까.
이한은 짧은 대답과 함께 타카스 행성 외부에 위치한 유니온 함대와 연결을 끊었다. 방금 통신한 사람은 이한 자신을 전담하고 보조하는 장교였다.
이한은 컨트롤 센터 주변, 포격으로 인해 초토화된 지대를 바라봤다. 크락투의 잔해로 보이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전에 백신 연구를 워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엘린 박사에게 연구를 맡긴 첫 번째 이유는 바로 보안이다.
유니온 소속이 된 이상 초인공지능을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에 대한 간략한 로그를 유니온에 제출해야 한다. 이는 각 사령관이 어떤 일을 수행하고 있는지 감찰하기 위한 제도로 제출하지 않는다면 준반역 행위로 간주된다.
다행히 레벨업 현상에 대한 것은 기록에도 남지 않아서 상관없지만, 연구는 그렇지 않다. 테라에서 초인공지능을 임의대로 사용할 수도 없지만 만약 초인공지능을 활용해 연구를 진행했다면 누락한 보고가 있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을 것이고 당연히 상당한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초인공지능으로 기존에 없던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려면 상부의 허가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한은 그럴 생각이 없었기에 엘린에게 맡겼다. 엘린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말없이 수락한 것이고.
하지만 이제는 누구라도 크락투의 잔해로 연구를 수행할 테고 상부 또한 결과물을 얻기를 원할 테니 엘린 박사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서둘러 백신을 완성하면 된다.
초인공지능의 도움이 효율적인 건 사실이나 인공지능의 도움 역시 무시못하니 엘린 박사가 이미 상당한 결과를 얻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을 토대로 대 크락투 병기를 완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개발한 기술들은 저들과 마찬가지로 특허권을 획득하고 사용료를 받을 것이다.
이한은 지체하지 않고 컨트롤 센터로 향했다. 지금이야 별문제 없지만, 문제가 발생할 건 자명한 일이니까. 서둘러 기지를 개발하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한은 컨트롤 센터로 걸음을 옮기면서 이곳 타카스 행성에 대해 상기했다.
타카스 행성은 테라의 한 배 반 정도 되는 크기였다. 무조건 크다고 좋은 게 아니다. 너무 크면 중력이 그만큼 강해지니 생명체가 거주하기 어려운 행성이 된다. 아닌 게 아니라 테라와 같이 밀도와 질량이 높은 암석형 행성은 목성 크기만 되어도 항성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높다.
테라보다 크긴 해도 중력은 테라와 비등한 수준이었다. 질량이나 다른 부분에서 차이점을 가졌기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였다.
우주의 관점에서는 태양조차 먼지다. 간단히 우주 시대에 접어든 인류가 그 태양보다도 한없이 작은 행성 하나를 두고 다투기엔 우주는 너무나 광활하다.
초자원, 프로젤과 세라메틱을 고려해도 그 초자원이 타카스 행성에만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광활한 우주에 있을 초자원은 초자원이고 타카스 행성에 다량 함유된 초자원은 또 별개의 문제다. 그게 바로 비극이다. 아무리 광활하고 아무리 풍부해져도 인류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물론 타카스 행성을 두고 전면전까지 벌이진 않겠지만, 그것을 위해 함대전은 암묵적으로 금하기로 결의했지만 사실 그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일단 이한이 즐겨했던 스페이스 워에서도 엠파이어와 뉴트럴은 사라졌다. 그러니까 엠파이어와 뉴트럴이 이룩한 문명과 그 모든 시설이 대다수 파괴되었다는 뜻이다.
“후우. 나중 일은 나중 일이고.”
이한은 백업 장치를 컨트롤 센터에 결합시켰다.
우우우웅!
컨트롤 센터 전체가 빛을 내며 요동치더니 이윽고 워의 음성이 이한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반갑습니다. 사령관님.』
“뭘 또 반가워. 지시내린 내용이나 서둘러 실시해”
이한은 툴툴거리며 워에게 명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대 크락투 전을 대비한 기초 방어시설부터 건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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