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ander of the Space Gamer RAW novel - Chapter 82
79. 사람 사는 곳 (1) >
79. 사람 사는 곳.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동양계 남자였는데 이한은 한눈에 그가 중국계 동양인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서양 사람이 보기엔 다 비슷비슷해 보여도 한국인이었던 이한이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신기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이 있던 세상의 수백 수천 년 뒤의 미래로 이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 아닌가?
적당한 미래기술 하나만 파악해서 돌아간다면 떼부자가 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미래기술? 미래기술이 다 뭔가? 과거에 일어난 일 중 돈이 될 법한 정보만 알아내서 돌아갈 수 있다면!
온갖 잡생각이 떠올랐지만, 이한은 옆에 놓인 천으로 땀을 대충 닦아낸 뒤 눈매를 좁히며 그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이한의 날선 반응에 이 시대의 정장처럼 보이는 옷을 걸친 중국계 사내 역시 날카로운 눈으로 이한을 주시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사령관, 당신과 식사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식사?”
이한은 짧게 반문한 뒤 입을 열었다.
“식사를 원한다고 하면 내가 냉큼 달려가서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하나? 뭐 얼마나 대단한 분이시길래?”
중국계 사내는 미간을 좁히며 이한을 바라보다가 이한의 단말기에 뭔가를 전송하는 행동을 취했다.
“기스모토 히데키. 그에 대해 알고 싶다면 저녁 7시까지 이곳으로 오십시오.”
그런 뒤 사내는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한은 떠나가려던 사내에게 입을 열었다. 사내는 극도로 단련된 신체를 지니고 있었다. 최소 스펙터, 자신이 느끼기에 사내는 슈퍼솔져로 보였다.
“그래서 그쪽의 이름은?”
걸음을 옮기려던 중국계 사내는 슬쩍 걸음을 잠시 멈춰 세운 다음 입을 열었다.
“륭샤오핑.”
자신의 이름만 짧게 대답한 사내는 이한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이한은 그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기스모토 히데키를 언급했다는 건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그를 고용한 고용인.
그러나 일반 암살단도 아니고 뉴트럴에 자치 방위권을 허가받은 상위 리퍼집단인 ‘쿤’이라는 조직에 의뢰해놓고 바로 발을 뺀다? 아무래도 가능성이 희박했다.
둘째 그들과 반대편에 선 자들. 이건 제법 가능성이 높다. 아마 자신을 만나고자 한 이는 이들의 수장이 아닐까 싶다. 말단 직원이 만나기엔 이한 자신도 급이 상당히 높아진 상황이니까.
‘이거 상황이 재밌게 흘러가는데······.’
적군도 아군도 없다. 서로의 이익만 남아 있을 뿐. 어떤 이득도 없이 호의만으로 누군가를 위하는 사람이 간혹 있을 수는 있으나 어떤 이득도 없는데 호의를 베푸는 세력은 단언컨대 전무하다.
유니온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세력들이 무슨 봉사단체는 아니지 않은가?
“영문은 알 수 없지만 만나봐서 해가 될 일은 없겠어.”
이한은 자리에 일어서서 숙소로 향했다.
*
쏴아아!
샤워실에서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며 긴장을 풀은 이한은 가상현실에서의 전투를 떠올렸다. 나름 검기라든지 검강이라든지 무시무시한 것들을 뿌리며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이한은 그 모든 것이 어린아이 장난처럼 느껴졌다.
끝없이 몰아치는 크락투와의 전투를 경험한 이한에게 그건 그저 가볍게 몸을 푸는 수준에 불과했다.
워의 조언이 맞았다. 전투기술이라든지 전투상황에 대한 대비는 이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보다 근원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고위 등급의 ESP 능력자들이 그러하듯이 초자원의 기운을 보다 자유자재로 운용하려면 정신적인 수양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한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내가 무슨 엘더도 아니고.’
엘더는 하나같이 강력한 ESP 능력자들이다. 강력한 번개를 흩뿌리거나 거대한 불기둥을 생성하는 등 인간 초능력자들은 감히 감당하기도 어려운 일들을 해내는 외계종족이다.
12 종족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초자원을 활용한 엘더는 기술력도 12 종족 가운데 가장 막강한 편이다. 저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로 종족수와 번식력. 다른 종족에 비하면 그 숫자가 터무니없이 적기에 그나마 힘의 균형이 이뤄지는 것이지 그게 아니라면 11 종족은 엘더 휘하에 놓인 지 오래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 엘더라는 종족이 밤낮으로 하는 게 명상 비슷한 거다. 명상을 통해 서로의 의식과 의식을 교류한다는데 자세한 건 알 수도 없고 스페이스 워의 정보이니 어차피 정확하지도 않다.
시에라가 고급 심화 교육을 이수했다지만 그건 인간 기준에서 고급 심화 과정이었을 뿐이고 엘더의 수준에 비하면 초급, 잘 봐줘야 중급 수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워의 예상을 넘어설 정도로 강력하다. 시에라가 엘더의 훈련 수준에 다다른다면 저 엘더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해질 것이 분명하다. 아니 이미 어지간한 엘더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얻은 능력을 완성할 수 있다면 그런 시에라보다도 강력해지겠지만······.’
명상? 명사아앙? 그게 뭐하는 건데? 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진천마신공이나 초월의 마도서 등을 얻었으니 그걸 수련하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건 게임에서 얻은 스킬에 불과하다. 무슨 심법을 수련하고 마도서를 공부해서 얻은 능력은 아니니까.
얼마 전까지는 초자원이 연결된 가상현실에서 전투하고 그걸 경험치 삼아 자연스럽게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따로 수련하지 않았음에도 가상현실의 전투만으로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체득된다는 점이었고.
그런데 이제 이 스킬 레벨을 올리려면 고위 등급 ESP 능력자들이 그러하듯 무슨 명상과 같은 정신수양 훈련을 통해 초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소리였다.
참고로 고위 등급 ESP 능력자라 함은 기본적으로 고급 심화 교육 과정을 마친 ESP 능력자를 뜻한다. 고로 현재 시에라가 테라네스에서 훈련하는 것도 명상과 같은 훈련이 대다수일 것이다.
이미 고위 등급 ESP 능력자를 쌈싸먹을 정도로 강력한 시에라지만 힘을 갈고닦기 위해 훈련하는 시에라에게 두손을 번쩍 들어 박수를 쳐주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에라는 지난 모든 훈련과정 중에도 자신의 모든 능력을 드러내지도, 드러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게 밝히 드러났다면 워가 예측하지 못했을 까닭도 없었겠지. 영리한데다가 성실하기까지 한 여인이다.
이한이라고 시도해보지 않은 게 아니다.
하지만 이건 도무지 할짓이 못 된다.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땅에 앉아서 뜬구름 잡으라는 것도 아니고.
효과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어차피 다른 ESP 능력자와는 시작부터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니 다른 방식으로 업그레이드할 방법이 있을 거다.
‘그러고 보니 능력이 전체적으로 상향된 것같긴 한데······.’
크락투와의 수많은 전투때문일까?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다. 전투도 초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가상현실에서만.
‘음. 설마 초자원 결정을 들고 전투하면 현실에서도 강력해지나?’
두 가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생겼다. 초자원 결정을 들고 있으면 워와 현실에서도 대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초자원 결정을 지니고 전투하면 가상현실에 그랬듯 현실에서 능력이 상향되는지 등 말이다.
만약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가상현실이 튜토리얼이었고 현실이 본게임인 셈이겠지.
‘하지만 그토록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지만 초자원 결정은 몸에 지니고 있지 않았는데?’
띠딕! 띠딕!
그때 알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약속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지금쯤 움직여야 했다.
따라서 이한은 상념에서 벗어나 샤워기를 끄고 뽀송뽀송한 천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낸 뒤 옷을 걸쳤다. 그냥 평범한 유니온의 제복이었다. 테라네스 내에서 허가받지 않은 자들은 전투장비를 착용할 수 없도록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불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크락투나 클론 군단, 시에라나 엘더 등에 비교하니 부족한 거지 자신도 어디가서 꿀리는 능력자는 아니었다.
아닌 말로 맨몸으로 매드솔져 수십과 스펙터는 물론 크락투 수십 마리를 회쳐버릴 수 있는 능력자가 어디 흔한 줄 아는가? 고위 등급 ESP 능력자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디까지나 시에라가 예외였다.
문제는 그 예외가 계속해서 속출하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
약속 장소에 들어서자 웨이터로 보이는 남자가 이한을 자리로 안내했다. 예상했던 대로 매우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었는데 그런 것 치곤 사람들이 코빼기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한이 머리가 희끗한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말없이 자리로 향하자 그곳엔 아까 만났던 륭샤오핑이라는 사내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한은 이채 서린 눈빛으로 륭샤오핑을 바라봤지만 일단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풀썩.
편안한 의자가 이한의 등과 엉덩이를 감싸 안았다.
륭샤오핑은 이한을 데려온 매우 정중한 노신사처럼 생긴 웨이터에게 짧게 말했다.
“준비한 음식 내오도록.”
“알겠습니다.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자리에 앉은 이한은 말없이 그런 륭샤오핑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륭샤오핑 당신이 나를 만나고자 한 당사자였나?”
“전권을 일임받았을 뿐.”
“전권이라···.”
그 말을 음미하듯 내뱉은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륭샤오핑에게 말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그때 스프와 빵을 비롯한 음식을 웨이터가 가져왔다.
“이곳의 음식 나쁘지 않습니다.”
륭샤오핑은 그 말과 함께 숟가락을 들어 스프를 떠먹었다. 이한은 그런 그를 잠시 일별한 뒤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모든 음식이 다 나올 때까지도 별말 없이 음식을 먹었다.
모든 식기를 다 치운 웨이터가 이한 등에게 말을 꺼냈다.
“디저트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한은 냅킨으로 입을 닦아낸 뒤 웨이터에게 대답했다.
“이건 예상외로군. 유니온의 사무총장이나 사무부총장일거라 예상했는데 둘다 아니었어. 디저트는 당신들의 정체를 듣는 것으로 하지.”
이한의 말에 공손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웨이터가 눈을 들어 이한을 바라보더니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웨이터가 륭샤오핑을 바라보자 륭샤오핑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웨이터에게 정중하게 인사한 뒤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로 안내했다.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은 웨이터는 목을 옥죄고 있던 나비넥터이를 풀고 희끗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이한에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식사는 만족하셨습니까?”
“배고프면 뭐든 먹게 되어 있는 법이지요.”
“허허허. 배고프면 뭐든이라. 적절한 표현이군요. 실례했습니다. 라이언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라이언이라 밝힌 노신사가 고개를 숙이자 이한 역시 가볍게 예의를 차리며 그에게 인사했다.
“이미 아시겠지만 한 이드라실이라 합니다.”
“일단 왜 사무총장이나 사무부총장이 아니라 생각하셨는지 궁금하군요.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이곳은 테라네스입니다. 사무총장이나 사무부총장이 잠깐이라 할지라도 정체를 숨기고자 웨이터라···. 글쎄요. 그래서 내 예상이 틀린 겁니까?”
“허허허. 아닙니다. 그건 아니지요.”
“나를 여러모로 살펴봤을 테니 더 시간 끌 것 없이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이한은 불현듯 쿤의 위치를 노리는 리퍼 조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스모토 히데키의 이름을 거론한 것도 그렇고 말이다.
“흠. 잠깐 당신들 리퍼. 리퍼인 것이오?”
라이언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이한에게 말했다.
“이번에 라스베이거스에서 큰일을 당하셨다고 들으셨습니다.”
이한이 말없이 라이언을 바라보자 그가 바로 말을 이었다.
“아메리카 섹터의 첩보부 소속입니다.”
“아메리카?”
이한은 미간을 좁히며 유니온의 복잡한 상황에 대해 떠올렸다. 유니온은 통합된 단일 통치체계로 보이지만 실상은 수많은 이익집단의 통합 의결기구에 가까웠다.
유니온만의 군대가 없지는 않으나 1함대에서 5함대까지는 유니온을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강력한 섹터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한은 아메리카 섹터에서 찾아왔다는 말에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지는 것을 느꼈다. 복잡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일에 휘말린 모양이다.
아메리카 섹터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유니온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물론 과거의 위상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다. 그저 유니온 내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자랑할 뿐이니까.
이한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라이언에게 다시 말했다.
“거두절미하고 용건부터 들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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