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ander of the Space Gamer RAW novel - Chapter 84
81. 사람 사는 곳 (3) >
81.
홀로그램으로 이뤄진 여럿의 사람들이 머리가 반쯤 벗겨진 사내를 둥글게 마주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체구가 건장해 보이는 남자가 말을 건넸다. 머리가 벗겨진 사내를 제외하고 이 자리에 모인 사람은 모두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상황이었다.
“해리 윙크스. 우리의 협약은 어떻게 된 것이오? 독자적으로 행동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소?”
머리가 벗겨진 사내, 해리 윙크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좌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독자적으로 행동할 것이라면 사령관 한 이드라실을 제거하려는 시도부터 막아섰겠지요. 아시다시피 아메리카 섹터는 묵인했습니다. 묵인은 곧 소극적 동의라는 것에 이견이 없으시겠지요.”
“음.”
“사령관 한 이드라실을 얕잡아봐서는 곤란합니다. 그 어떤 사령관도 설혹 루퍼스 사령관이라 할지라도 한 사령관의 상황에서 그와 같은 전공을 세울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원안대로 깔끔하게 제거되었다면 최선이었겠지만 아시다시피 실패했으니 차선책을 사용하는 수밖에요.”
그러자 체구가 건장한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를 제거할 방법은 여전히 많이 있소만?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한 이드라실을 제거하기로 협의한 상황인데 이건 누가 봐도 협약을 위반했다고 봐야겠지.”
“제가 그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독자적으로 행동하려 했다면 저희 섹터가 한 일을 여러분께 알려드릴 이유가 없었겠지요.”
“우리를 무슨 눈먼 봉사 취급하는 것이오? 결국엔 밝혀질 일이니 선수 친 것에 불과한 것 아니오?”
해리 윙크스는 눈매를 슬쩍 좁히며 러시아 섹터의 알란 카라에프를 유심히 바라봤다.
“좋습니다. 알란 카라에프 대사. 현 상황에서 한 이드라실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단 루퍼스 사령관과 젤린도 사무총장의 눈을 그때도 피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아니 피할 수 있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군요. 그때도 묵인해 준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 이번에는 우리를 압박할 증거로 남겨둘 것 같은데 말입니다.”
“으흠.”
해리 윙크스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한 이드라실을 제거하려 했다면 이번에 성공했어야 했습니다. 그래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모든 부분에서 타협을 볼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지요. 만약 한 이드라실이 죽었다면 8함대 지휘권을 어느 섹터에서 주도적으로 가져갈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하고 있겠지만 보다시피 상황은 이러하군요.”
해리 윙크스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우리가 머뭇거릴수록 루퍼스 사령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기회는 결코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자에게도 오지 않지요. 협의한 내용과 다르게 독자적으로 움직인 부분에 대해선 심심한 사과를 표합니다만 모두를 위해 그럴 수밖에 없었음에 양해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를 위한다? 아메리카 섹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검은 머리칼의 동양계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는 차이나 섹터의 장청위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였다.
해리 윙크스는 장청위의 날선 반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느긋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아메리카 섹터가 이득을 보게 될 거란 사실에 대해 말입니다. 그러나 저희가 급히 움직이지 않았다면 글쎄요. 루퍼스 사령관이 그 상황을 이용했겠지요. 그도 아니면 보르딘 사무총장이 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차피 타카스 토벌은 루퍼스 사령관에게 돌아갔을 겁니다. 그건 저희 모두 원하는 광경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자 잉글랜드 섹터의 대사 윌리엄 린튼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8함대 지휘권을 두고 조율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테니 타카스 토벌을 눈 뜨고 빼앗기는 격이 될 테지요. 하지만 한 사령관을 루퍼스 사령관의 대항마로 사용하겠다라···.”
윌리엄은 말을 끊은 뒤 눈매를 좁히며 해리를 바라봤다.
“해리 윙크스 당신이 협의도 되지 않은 일을 거론할 리는 없고 한 사령관과는 어느 정도 협의가 되었다고 봐야할 테지만 넵튠 8함대라면 애매한 수준이 아니오? 비공식적인 회담을 요청한 이유는 아무래도 그것과 연관이 있겠군.”
“바로 보셨습니다. 하여 한 사령관에게 머큐리 1함대를 지원할 생각입니다.”
그 말에 금빛 머리칼을 지닌 윌리엄의 미간이 슬쩍 꿈틀거렸다.
“머큐리 1함대를?”
유니온의 군대는 다소 복잡하다. 크게는 세 부류다.
먼저는 아메리카의 입김이 강하게 닿아 있는 UNC. 유니온과 연합한 형태이긴 하나 유니온 사무총장이나 안전보장이사회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자적인 작전권을 지녔다.
두 번째는 UNP. 평화유지군으로 유니온 소속의 국가들이 연합한 군대다. 평화유지나 테라 방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과거에는 비상설 조직으로 그 힘이 약했으나 상설 조직화 되면서 세 부류 중 가장 거대하고 강한 군대에 속했다. 사무총장과 안전보장이사회의 통제를 받는다. 당연히 그 힘과 별개로 통제력은 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마지막으로 UNA. 독자적인 작전권을 지닌 UNC를 견제하기 위해 유니온 조직 자체에서 상설한 군대로 가장 작은 군대였으나 루퍼스 사령관의 활약으로 UNC는 물론 UNP까지 위협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굳이 나누자면 UNC, UNP, UNA로 나눠진다는 것인데 이 역시 자로 재듯 딱딱 나눠지는 관계가 아니다. 세세하게 파고들면 각 섹터와 여러 이익집단들로 인해 훨씬 더 복잡한 관계로 얽히고설켜 있다.
참고로 이 외에도 예전만큼은 아니나 각 섹터는 자신들의 군대를 상시 보유하고 있었다. 유니온의 역량이 엠파이어의 역량보다 뛰어나다는 건 바로 이런 부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머큐리 1함대는 UNC에 소속된 함대다. 아메리카 섹터의 입김이 강하게 닿아 있는 함대라는 소리.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프랑스 섹터의 라파엘 나달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계시는 거겠지요?”
“물론입니다. 합류하시지요. 타카스 행성 토벌 시 작전권을 드리기는 어렵지만, 타카스 행성 토벌 이후엔 자유롭게 경쟁하는 것으로 하시죠.”
“흐음. 그런 것이라면?”
“으흠.”
앞서 말을 꺼냈던 섹터의 대사뿐만 아니라 침묵을 지키며 상황을 주시하던 주요 섹터의 대사들도 잠시 술렁거렸다.
그때 체구가 좋은 사내 알란 카라에프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작전권은 사령관 한 이드라실 그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겠지?”
해리 윙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란에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한 이드라실의 근본이 되는 병력인 8함대는 UNA 소속이다. 루퍼스의 입김이 강하게 닿아 있는 군대. 타카스 행성에서 커다란 승전을 거두더라도 그것이 한 이드라실의 힘이 될 수 없다.
둘째 머큐리 함대는 UNC 소속. 아메리카 섹터의 입김이 강하다고 하나 작전권이 한 사령관에 있다면 함부로 좌지우지할 수 없고 독자적으로 보유한 병력을 보충한다면 큰 문제 없이 타카스 행성을 취할 수 있을 터.
8함대 지휘권을 얻으려는 것도 결국엔 타카스 점령 시 보다 많은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서인데 이런 상황이라면 굳이 8함대 지휘권을 서로 차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갈등요소를 처리하면서도 이리저리 맞물려서 서로 간에 견제가 되니 현시점에서 가장 적절한 방안으로 판단되었다.
“러시아 섹터는 동의하오.”
“동의하겠습니다.”
“동의합니다.”
알란 카라에프의 동의가 떨어지기 무섭게 비공식 회담에 참여한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
넵튠 8함대에 이어서 머큐리 1함대의 임시 지휘권까지 확보한다라. 일견하기엔 엄청난 권력과 힘을 지닌 자리다. 더욱이 두 함대는 우주모함, 순양함, 호위함, 구축함, 초계함, 정찰함 등 거의 모든 방면에서 공방체계를 철저하게 갖춘 강력한 함대다.
넵튠 8함대가 다른 일곱 함대에 비해 떨어진다고는 해도 뉴트럴의 함대보다도 강력한 것이 현주소다.
그런 함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란 과거 황제의 권한보다도 막강할 것이다.
하지만 이한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결국 허수아비, 광대 짓에 불과하니까. 밑바닥부터 차근히 쌓아간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큰 힘이 주어진 것 아닌가?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지만,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통제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나를 엿 먹인 새끼들에게 빅엿을 선사해줄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좀 괜찮긴 하다만. 뭐 어쩌면······.”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한다면 어쩌면 다시 전장에 서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타카스 행성 토벌에 성공하고 각 세력이 타카스 행성에 놓인 고농축 초자원을 이용하게 된다면 나라는 존재가 불필요하게 여겨지겠지.
이를테면 전장과는 상관없는 평화롭고 외딴곳에 유폐될지도 모른다. 전공을 세우고 높은 직위를 얻는 것은 별 관심이 없으니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로서는 쌩큐지.
풀썩.
푹신한 자리에 앉아 와인 잔을 손에 든 이한은 방송을 켰다. 라이언과 기묘한 만남 후 3일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그간 이한은 의미 없다고 여기면서도 가상훈련이나 거듭하고 있었다.
8함대 함장들이라도 만나고 관계를 다지면 좋겠지만, 최전선의 함장들이 무슨 사교장에서 춤이나 추고 있지는 않을 테니 일부러 부르지 않는 한 만날 수 없는 자들이었고 현재 이한은 그들을 부를 만한 공식적인 권한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주야장천 훈련이나 거듭하는 수밖에. 타카스 행성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륭샤오핑은 그날 그렇게 사라져서 어떤 연락도 닿지 않았다. 뭐 알아서 복수전을 치르고 있겠지. 시에라, 빌리 등은 벌써 전부터 혹독한 훈련에 돌입한 지 오래였고.
화면에 말끔하게 생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젤린도 보르딘 사무총장은 생각보다 훨씬 젊었는데 어쨌든 루퍼스 사령관보다 젊은 건 확실했다.
짤막한 연설을 끝으로 다시 앵커로 보이는 자에게 화면이 돌아갔다.
띠딕!
이한은 더 듣지 않고 방송을 꺼버렸다. 그런 뒤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 단번에 들이켰다.
쪼르륵
꿀꺽꿀꺽.
어느 방송을 틀더라도 뉴트럴의 행보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이한의 생각은 달랐다.
‘균형이 깨어지고 승산이 보인다면 뉴트럴은 반드시 움직인다. 그러니까 유니온이 루퍼스 사령관을 엠파이어 주변으로 보낸 것은 뉴트럴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경고 및 방어하기 위함이다. 이 상황에서 엠파이어가 뭐한다고 유니온을 공격할까? 정신나간 미치광이들도 아니고. 후우.’
호시탐탐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으려는 아귀 지옥이 따로 있으랴? 이한은 다시 말없이 잔 가득 와인을 따라 마신 뒤 침상에 누웠다.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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