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ander of the Space Gamer RAW novel - Chapter 92
89. 잘 가라 (2) >
89.
이한이 다소 정신 나간 얼굴로 항로맵을 확인할 때 미약한 신음이 울려 퍼졌다. 이에 이한은 즉시 시에라에게 다가가 안전장치를 풀어줬다.
퓨슈욱!
“괜찮아?”
“예. 조금 많이 어지럽긴 하지만 괜찮아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딱딱하게 굳은 이한의 표정과 흔들리는 눈빛을 본 시에라는 그가 상당히 복잡한 심경에 휩싸여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걱정스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이한은 흩어진 정신을 추스르고 입을 열었다. 지금의 감정을 숨길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이미 눈치챈 상황에서 숨기려는 모습은 오히려 더 큰 위화감을 자아낼 뿐이라 솔직하게 대답했다.
“당면한 문제는 둘째치고 느낌이 매우 좋지 않아.”
전이라면 괜히 예민하고 불안해서 그렇다고 무시하고 넘겼겠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마냥 무시할 수 없는 감각이 종종 있었다. 지금 느껴지는 불안감이 바로 그런 종류였다.
“그럼 대비해야겠네요.”
“그래. 대비해야. 응?”
별생각 없이 대답하던 이한은 시에라를 바라봤다.
별도의 근거도 없는 개인적인 감정일 뿐인데 단지 그것만으로 대비해야겠다고? 이한의 시선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것일까? 시에라가 입을 열었다.
“한 당신이 말한 것이니까요.”
“흠.”
신뢰받는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고 또 고마운 일이다. 더욱이 사랑하는 여인의 전폭적인 신뢰는 사내로 하여금 어떤 역경도 뚫고 가게 만드는 강한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생존과 연관된 사안은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고마움과 별개로 뭐라 말을 덧붙이려고 할 때 이번에도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안다는 듯 시에라가 이어서 말했다.
“단순히 그렇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응?”
“ESP 능력 가운데 예지라는 능력이 있어요. 이는 초감각적인 지각 중 하나인 육감이 발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능력인데 아수라장을 거친 당신을 요동치게 만들 감각이라면 글쎄요. 육감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이치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고 확신할 만한 근거조차 없지만, 직관적으로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 정신작용, 어떤 지적판단을 하지 않았음에도 단숨에 그 결과에 도달하게 만드는 감각 등을 육감이라 통칭한다.
“···. 예지? 육감?”
이한이 다소 황당하다는 듯이 반문하자 시에라는 차분한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예. 더욱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당신은 초인공지능의 마스터이면서 동시에 이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죠.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저 테라네스도 당신이 이능을 가졌다는 걸 파악할 수 없었고요.”
이한이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자 시에라가 다시 말했다.
“사령관은 물론 병사들 역시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만큼 유용한 능력이 또 있을까요? 크락투보다 클론 군단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했고 이번에도 트롤 거함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빠르게 인지했죠. 이미 여러 이능을 지닌 당신에게 위험감지 능력이 있다고 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이한은 시에라의 말에 생각에 잠겼다.
‘예지라고?’
불현듯 타카스 행성이 떠올랐다. 왜 그곳을 꼭 폭파시켜야만 했던 것일까? 아니 왜 반드시 폭파해야만 안전하다고 확신했던 것일까?
자신이 무슨 인류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대영웅이라서? 아니면 타카스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초자원을 돌덩이나 쓰레기처럼 볼 수 있는 아주 대단한 금욕주의자라서?
영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게다가 금욕주의자? 환락 좀 즐겨보려다가 생명줄 끊길 뻔한 것이 불과 얼마 전이다. 사람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설혹 바뀌더라도 단번에 바뀌는 일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희박하다.
그런데 영웅심에 심취한 금욕주의자라고? 내가? 헛소리도 이런 헛소리가 없다. 기이한 것은 이제 와 돌이켜보니 영웅심에 심취한 금욕주의자처럼 행동한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대체 왜?
‘왜 반드시 타카스 행성을 파괴해야만 안전하다고 생각한 거지?’
단순히 클론 군단의 위협 때문에? 트롤 거함도 그렇다. 왜 우주 모함인 디카르마타를 진격해서 처박은 것이지? 그것을 시작으로 이한의 머릿속으로 자신이 겪은 모든 전투가 번개처럼 스쳐 갔다.
뭐 하나 위험하지 않은 전투가 없었다. 다행히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은 택할 수 있었고 그 모든 전투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만 그 선택의 뒤편에는 언제나 맹렬한 위기감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위험감지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육감과 예지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라면?’
이한의 전투 영상을 분석한 이들이 하나같이 혀를 내두르는 이유는 뭔가 단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지금의 공적은커녕 생존할 수도 없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모든 전투가 어찌 될지 미리 알고 전투를 수행해도 이한이 얻은 결과를 얻지 못할 거라고 이구동성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한마디로 무조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장에서 승리를 거뒀다는 소리다.
‘하지만 예지라······.’
예지까지는 너무 갔다. 미래를 예지한 적은 없으니까. 그렇게 보인 부분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스페이스 워’에 대한 얕은 지식 때문이었을 테니 패스다.
그러나 위험감지 능력은 상당히 타당한 추측으로 여겨졌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극도로 위험하다고 느꼈고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것 같은 절박함에 목숨까지 도외시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이 아닐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에라에게 말했다.
“흠. 그럴지도···. 어쩌다 보니 말이 조금 옆으로 샌 것 같은데 일단 이 문제는 나중에 알아보고 현재 우리는 항로맵에도 나와 있지 않은 미확인 지역으로 워프한 것 같다. 비상절차에 따라 조치하긴 했지만 내 감정과 별개로 위험한 상황인 건 분명해.”
“······. 지금으로선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네요.”
이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뭐 현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고 봐야지.”
잠시 눈을 감고 주변을 파악해보던 시에라는 이한에게 다시 말했다.
“그럼 일단 저는 명상하면서 기운을 다스려야겠어요.”
이한은 여전히 파리한 안색의 시에라를 바라보며 걱정 섞인 말을 뱉었다.
“그냥 휴식을 취하는 게 낫지 않겠어?”
“지금 상황에선 명상이 곧 휴식이에요.”
명상이 곧 휴식이라니. 이한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그녀가 그렇다니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음.”
“무슨 뜻인지 알아요. 하지만 현재 날뛰는 기운을 명상으로 안정시키지 않으면 어차피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앞으로 다가올 위협에도 대비해야 하니까요.”
시에라는 이미 위협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긴 그건 이한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시에라에게 말했다.
“···. 알겠어. 그럼 그렇게 해.”
그 말에 시에라는 수송선 한쪽 구역에 들어가 문을 닫고 명상을 시작했다. 수송선이 제법 커서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가 돼서야 륭샤오핑을 비롯한 슈퍼솔져가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워프의 충격에서 빨리 회복하는 순서는 대개 ESP 능력자, 그리고 신체가 더 튼튼한 자 순이었다. 그러니 이는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륭샤오핑 등도 상당히 빨리 정신을 차린 축에 속했다.
“여기가 어딥니까?”
륭샤오핑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거두절미하고 위치부터 물었다.
이한은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미확인 지역.”
“미확인 지역?”
륭샤오핑은 이한의 말을 반문하다가 즉시 안전장치를 풀고 항로맵과 워프 거리 등을 확인했다. 역시 어지러운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생각을 정리하던 륭샤오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코어 폭발로 인한 공간 왜곡으로 수송선이 다다를 수 없는 곳까지 워프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장 여기가 어딘지 보다는 어떻게 해야 생존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겠지.”
“그렇습니다. 수송선의 연료가 모두 떨어진 상황에서 구조를 받을 수 없다는 건 이곳이 무덤이라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으니 말입니다.”
이한은 그런 륭샤오핑을 바라봤다. 이 사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륭샤오핑 당신은 이 상황이 두렵지 않은 건가? 나처럼 냉정하려고 일부러 애쓰는 건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륭샤오핑은 메마른 눈빛으로 이한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죽음을 거론하는 것이라면. 예.”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륭샤오핑은 편안한 자세로 몸의 모든 근육을 이완시키며 이한에게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도 아실 겁니다. 두려움이 없는 상태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는 걸.”
륭샤오핑의 말에 이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 자체가 해로운 것이 아니다. 두려움에만 머물러 있는 상태가 해로운 것이지. 두려움이 없다면 위험한 일을 보고도 피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 결과는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젊은이들이 터무니없이 무모한 행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도 이 일과 연관이 있다.
경험의 부재이든 젋은이의 혈기 때문이든 두려움이 거세된 상황에서는 위기를 위기로 여기지도 않기 때문이며 어리석은 자는 두려워야만 위험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한이 알기로도 슈퍼솔져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무슨 광전사가 아니다. 광전사라 할 수 있는 이들은 매드솔져지 슈퍼솔져가 아니다.
“슈퍼솔져라도 해도 모두 동일하진 않으니 모두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엔 죽음보다 사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 반작용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사는 것이 두렵다라······.”
말을 잠시 끊은 이한은 고개를 미미하게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전에 언급한 복수도 그렇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아수라장을 거쳐온 모양이로군. 미처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말이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옛말이 떠올랐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정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 외엔 없을 테니까.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묻힐 정도로 삶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는 뜻이리라. 차라리 죽음의 두려움을 맛보는 것이 낫다라고 여길 만큼.
그러니 얼마나 처절한 삶이었겠나? 그런 과거는 함부로 물어볼 수도 없다.
륭샤오핑은 쓴웃음을 살짝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하나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왜 도망치지 않으셨습니까?”
도망쳐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하는 사람 없을 상황이고 지금까지 세운 공적만 해도 충분한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오른 사람 아닌가?
“살려고.”
“예?”
“큭큭큭. 황당한 발언이라는 건 나도 아는데 그 말이 정답이야. 살려고. 그뿐이야.”
륭샤오핑이 침묵을 지키자 이한이 그에게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살아있잖아. 그러니 살아야지. 수송선에 뭐 쓸만한 게 있는지 찾아봐봐. 비상절차로 인한 조치가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봐야지.”
그러자 정신을 차린 후 이한과 륭샤오핑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슈퍼솔져들이 수송선 곳곳으로 움직였다.
“저 방은 내버려 두고.”
이한이 가리킨 방은 시에라가 들어선 방이었다.
그런 뒤 이한은 메마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륭샤오핑에게 말했다.
“기스모토 히데키. 아직 못 죽였잖아? 살아야지. 주변에 착륙할 만한 행성이 있는지도 알아봐봐.”
이에 륭샤오핑이 건조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항로맵에 행성 등이 존재하는 것으로 표기되긴 했지만, 저곳 가운데 착륙할만한 행성을 찾는 건 둘째치고 수송선의 연료가 바닥이라 어떻게 행성에 착륙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시에라와 내가 어떻게 힘을 합치면 수송선을 제어하는 건 가능할 것 같으니까.”
연료도 없이 무슨 수로? 라는 표정으로 이한을 바라보던 륭샤오핑은 시에라라는 여인이 발휘한 강력한 초능력과 이한의 초진동검으로 크락투를 썰어버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빌어먹게도 이곳이 어딘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딘지도 모르는 건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 자체가 이한에게는 낯선 곳이니까. 방법이 없으면 찾으면 되고 그래도 없으면 직접 만들면 된다.
이한은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인사 두 번 했다가는 저승세계로 떨어질 판이네. 큭큭큭.’
그렇게 웃었다. 우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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