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ander of the Space Gamer RAW novel - Chapter 94
91. 고진감래 (1) >
91. 고진감래.
슈퍼솔져들과 마찬가지로 밖으로 나온 이한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첨예하게 솟아오른 산들이 눈에 들어왔다. 왜 갑자기 시조가 떠오르는지 모르겠지만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로 이어지는 문구가 이한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갔다.
제아무리 높은 산도 하늘에서 보면 점과 같고 우주에서 보면 거대한 항성조차 먼지와 같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나를 덮쳐오는 파도가 집채만큼 거대할지라도 그건 그저 파도일 뿐이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러니 덮쳐오는 파도가 얼마나 거대하든지 앞길을 가로막은 산이 얼마나 높든지 간에 꿋꿋이 걸음을 옮기겠다.
행성 주변의 외부온도가 바이저에 떠올랐다. 영하 53도. 어마무시한 추위다. 맨몸을 밖에 드러냈다가는 동태가 되어버리다 못해 금세 얼음덩어리가 되고도 남을 정도의 추위.
심지어 이 온도는 수송선이 추락하며 가져온 열기 때문에 아마 다른 곳보다 온도가 높게 측정되었을 것이다.
가히 살인적인 추위였다.
일곱 조로 나눠서 밖으로 나서긴 했지만, 일단은 수송선 주변에서 사주경계를 취하고 있었다. 이 주변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면 수송선이 추락하는 모습을 목격했을 테고 호기심이든 적개심이든 어떻게든 확인하려 몰려들 테니 말이다.
그 가운데 륭샤오핑이 이한에게 말을 꺼냈다.
“사령관님.”
이한이 그를 바라보자 륭샤오핑이 말을 이었다.
“대기 중에 산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륭샤오핑의 말에 바이저를 확인하니 확실히 산소가 대기 중에 분포해 있었다. 살인적인 추위만 아니라면 헬멧을 벗고 숨을 쉬어도 무방할 정도의 대기였다.
“컨트롤 센터가 건설되기 전까지 수송선을 베이스로 삼는다. 유사시를 대비해 부족한 산소 등을 비롯한 생존에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도록.”
“알겠습니다.”
잠시 더 주변을 경계했지만 별다른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사실은 크게 두 가지를 시사했다. 이 행성에 생명체가 없거나 있더라도 신속하게 이동할만한 기술이나 능력이 부족하다는 소리.
물론 이한 등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고등기술을 보유한 생명체가 존재할 확률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일단 그런 고등기술을 가진 생명체가 하고 많은 행성들 중에 이런 불모지 같은 행성에 자리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
더욱이 이걸 확인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한 일에 속했다.
“초자원의 유무나 강력한 에너지를 포착했나?”
슈퍼솔져들이 사주경계를 취한다고 해서 한 자리에 머물러서 대기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슈퍼솔져들은 천천히 그 경계망을 수송선 외부로 넓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퍼솔져는 특수임무에 가장 특화된 병력이다. 당연히 슈퍼솔져의 장비 역시 최고급 장비에 속한다. 그런 저들이 지닌 장비로도 감지하지 못했다는 건 특이점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륭샤오핑 및 2명의 슈퍼솔져와 함께 베이스를 지키고 있던 이한은 레이더 뜬 아군의 표식을 확인했다.
너무나 추운 지역이다 보니 발자국 하나를 남겨도 여타 다른 지역보다 오래 남을 수밖에 없다. 물론 블리자드와 같은 얼음 폭풍이 주변을 쓸어버린다면 모든 흔적이 사라졌을 수도 있지만 흔적이 없다는 슈퍼솔져의 보고엔 당연히 그런 외부요소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외곽지역까지 확인해보고 특이점이 없다면 복귀하도록.”
슈퍼솔져가 향한 외부지역에는 영하 100도까지 떨어지는 지역도 있었다.
탐사를 실시한 이유는 행성 탐사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컨트롤 센터 건설 중에 발생할 위협을 파악 및 제거하기 위해서였기에 지금으로서는 설정된 경계지역까지만 확인하면 충분했다.
탐사를 지속하느라 정작 컨트롤 센터에 발생할 위협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더 넓은 지역을 탐사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욱이 슈퍼솔져도 사람인 이상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다.
*
슈퍼솔져들이 설정된 경계지역은 물론 그 이상까지도 확인했지만, 그 어떤 특이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탐사한 정보로만 판단하자면 이 행성은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차디찬 얼음 행성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한은 컨트롤 센터 건설을 시작했다.
초인공지능 장치가 장착된 건설로봇은 워의 지시대로 쉴 새 없이 움직였지만, 자원도 부족하고 로봇도 한 기뿐이라 진척속도가 매우 느렸다. 가장 큰 원인은 아무래도 초자원의 부재였다.
어느 정도냐면 수송선을 분해해서 컨트롤 센터를 건설하는 데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수송선을 분해하면 이 행성을 어떻게 탈출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어차피 함선급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행성을 떠나도 아무 의미가 없다.
게다가 수송선은 거의 완파되다시피 박살 났기에 분해해서 사용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시에라가 휴식을 취하는 곳 정도는 아직 분해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나중에는 이 구역과 유지장치 모두 분해해서 자원으로 활용할 테지만 컨트롤 센터가 어느 정도 완공되면 그때 분해할 예정이었다.
위이이잉! 치이익!
위이잉!
느리긴 해도 컨트롤 센터가 얼추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다만 이 정도 모습이라도 갖출 수 있는 이유는 원래 규모보다 훨씬 축소시키고 기능 역시 간소화했기 때문이다.
자원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다. 수송선에 남아있던 극소량의 초자원이 아니었다면 컨트롤 센터 건설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테니 이 정도만 해도 다행이었다.
“당장 목숨을 잃어버릴 확률은 줄어들었지만 앞으로가 문제군. 초자원은?”
슈퍼솔져들은 주변을 확인한 후에도 수시로 외부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전처럼 경계하려는 의도보다는 자원 탐사 임무 성격이 강했다.
초자원을 확보해야만 이름 모를 불모지 행성을 떠나 돌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설혹 초자원을 발견해도 구축함급 이상은 건조해야 미지의 세계를 항해해도 할 수 있을 테니 다량의 초자원 확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초자원과 별개로 지하에 광물이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륭샤오핑이 말을 흐리자 이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꺼운 얼음층을 깨고 암석층의 자원을 채취하려면 채굴 장비가 없이는 불가능하겠지. 문제는 컨트롤 센터를 건설한다고 해도 필요한 장비를 생산할 자원조차 없는 상황이고.”
“그렇습니다. 다만 현재 가용한 모든 자원을 탐색 중이긴 합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륭샤오핑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무리하지 말도록. 초자원이 없다면 어차피 행성을 떠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지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이곳에 일단 뿌리를 내리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초자원이 없더라도 풍부한 자원만 확보할 수 있다면 광속이동까지는 가능하다. 인류가 초자원을 조우하기 전에도 광속이동은 가능했으니까.
그러나 워프 등 초자원과 연관된 기술은 초자원이 없다면 어떻게 활용할 방법이 없다.
광속은 초속 30만km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속도지만 우주는 그런 광속이 1년 동안 움직인 거리를 기본 단위로 둘 정도로 광활한 곳이다. 그러니 워프를 활용할 수 없다면 확보된 안전지역을 무작정 떠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초자원을 발견할 수 없다면 먼저는 광속이동이 가능한 함선을 만들어 초자원 탐사를 시행해야 하는데 이게 또 만만찮은 일이다. 어디에 초자원이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FTL 항법만으로 이동하며 초자원을 탐사하는 일 역시 자살행위에 가까우니까.
“여전히 구조대가 오지 않는 걸 봐선 륭사오핑 네 말대로 공간 왜곡으로 인해 헤아릴 수 없는 거리에 떨어진 모양이니 자력으로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겠지. 그러기 위해선 안전이 최선이다.”
넵튠 8함대급이라면 얼마 전에 일어난 워프의 흔적을 추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구조대를 보내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니 워프 흔적을 발견했다면 벌써 그 흔적을 따라 이 주변으로 워프해 수송선의 신호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오지 않았다. 이는 공간 왜곡으로 워프 흔적조차 사라졌거나 아예 저들이 추적할 수도 없는 먼 곳으로 워프했다는 소리다.
전자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여러 정황이 후자에 가깝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10,000광년 어쩌면 그 이상 되는 거리에 떨어졌을 수도 있다.
일단 자신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유니온의 윗 대가리들이 철저히 수색할지도 의문이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테라의 모든 세력이 수색한다고 해도 자신들은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비유하자면 모래사장에서 특정 모래 알갱이 하나를 찾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이한은 생각을 정리하며 륭샤오핑에게 다시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아. 이곳을 떠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중요하지 않아. 지금 상황이 안정되면 그때가서 걱정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살아남는 일에만 집중하자고.”
륭샤오핑은 여러모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한을 바라보며 짧게 대답했다.
“···. 알겠습니다.”
*
그렇게 이 미확인 행성에서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흘려 보냈다.
그간 슈퍼솔져들은 쉴 새 없이 탐사에 탐사를 거듭하며 자원을 탐사했지만 초자원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다른 자원들은 제법 발견했지만 어떻게 확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무용지물이긴 마찬가지였다.
암울한 가운데 희소식이 하나 있다면 한없이 지체되었던 컨트롤 센터가 간소화된 형태이긴 해도 완공되었다는 점이었다.
『한 사령관님. 다시 만나뵐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다시 만나뵐 수 있어서? 어째 듣기 별로다?”
『사령관님!』
“왜?”
『지하에서 에너지의 흐름을 포착했습니다.』
“에너지 흐름? 지하에서?”
아무리 워라고 해도 슈퍼솔져들이 발견할 수 없던 걸 발견할 수는 없다. 하드웨어적인 부분은 워나 슈퍼솔져나 동일하니까.
그러나 무수히 많은 정보를 집약해서 결과를 도출해내는 일은 초인공지능을 따라올 존재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이한은 급히 되물었다.
“정확하게 설명해봐!”
『포착되지 않을 정도로 미약한 에너지 흐름이긴 합니다만 묘하게도 그 모든 에너지 흐름이 일관성 있게 흐르고 있습니다. 자연 상태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흐름입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예. 행성 지하에 확인되지 않은 뭔가가 자리하고 있을 확률이 높. 사령관님! 조심하십시오! 알 수 없는 에너지 흐름이 이 주변에 끝없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컨트롤 센터 주변으로 푸른빛이 일렁이며 어떤 존재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후우웅!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이었다고? 더욱이 고등기술을 지닌 생명체가?
이한은 내심 당황하면서도 급히 명령을 내렸다.
“철저히 경계태세를 취하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교전을 금지한다!”
푸른빛은 점점 더 많아지더니 계속해서 어떤 존재들을 형성해냈다. 당연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한 등은 마른 침을 삼키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충 드러난 숫자만 천이 넘는다. 고등기술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적이라면······. 그 뒤는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푸른 빛무리가 사라지자 역시 푸른 피부를 지닌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두 다리로 서있는 것을 봐선 이족보행으로 보이긴 했지만 팔 다리가 매우 길어 보였다.
저들은 저마다 창처럼 보이는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게 원시무기인 창에 불과할 리는 만무했다.
근접전에서는 물론 원거리전에도 적합한 무기가 분명하리라. 그게 아니면 먼 거리에서 자신들을 경계하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이한은 눈매를 좁히며 저들을 바라봤다. 12종족 가운데 저런 종족은 없었다. 하긴 이 우주에서 12종족이 전부가 아니니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무덤과 같은 침묵이 양 진영 사이에서 흐를 때 이한의 기지를 둘러싼 저들의 무리가 가운데 한 존재가 앞으로 나아왔다.
잠시 그 존재를 바라보던 이한 역시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륭샤오핑이 이한을 만류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전력 차이가 너무 극심하기에 이러나저러나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한은 이윽고 푸른 피부를 지닌 정체불명의 종족과 일정거리를 유지한 채 마주하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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