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any Employee Who Sees Destiny RAW - chapter (308)
308화 창훈, 희찬 이야기
새벽 3시경 청주 시내에 위치한 한 술집.
그곳에 솔라 고위급 임원들이 저마다 한 명씩 어린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가 무척 숨막혔다.
상석에 앉은 가장 어린 김도훈 상무가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임원들에게 한바탕 훈계를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참 쪽팔려서 진짜… 이번 것도 그래. HS물산이 다 만들어서 던져준 거나 홀랑 받아 처먹고 있고 말이야. 우리는 솔라 임직원들은 영업력이라는 게 없는 건가? 뭘 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겁니까? 아니면 능력이 없는 겁니까? 예?”
“죄송합니다.”
“아니… 나도 우리 어르신들한테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요. 내 마음 아시죠?”
“그럼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 좀 해봅시다. 아니… 생각해 봐. 나 잘 되면 당신들도 좋을 거 아냐. 아닌가?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아닙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용택 상무. 일 잘하고 항상 성실해. 나도 그건 인정하지. 그런데… 감이 떨어져. 내가 말하는 감이 뭔지 알겠어요?”
“그… 정치적인…”
“그래, 그래… 알잖아. 우리 조 이사 우명건설에서 잘 나가다가 청주 내려왔다고 처음에 엄청 속상해했잖아요. 그쵸?”
“아유, 무슨 말씀이십니까.”
“에이… 그랬으면서. 내가 모를 줄 알았죠? 나 다 알아. 존나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데, 다~ 알아.”
도훈의 얼굴은 술이 얼큰하게 올라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그렇게 30여 분을 더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도훈은 말을 하기도 지쳤다고 생각했는지 다리를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어쨌든 오늘 고생했고 다들 들어가 쉬세요. 이제 오늘은 이만합시다.”
도훈의 오른팔이자 비서실장은 서진철이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예, 바로 대리 부르겠습니다.”
“빨리빨리.”
도훈이 기다리기 귀찮다는 듯 연신 손을 휘저었다.
밖으로 나가 한참 통화를 하던 서진철 비서실장이 다시 룸으로 들어와 무척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장님… 지금 대리가 없다고 하는데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아이, 뭘 기다려! 짜증나게.”
“죄송합니다. 얼른 잡힐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비서실장은 얼른 다시 나갔다.
대략 3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떻게 됐어?”
잔뜩 일그러진 도훈이 소리 지르자 밖에 있던 비서실장이 또 난감한 얼굴로 들어왔다.
“오늘따라 왜 이러는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면…”
“아, 됐어요.”
“그럼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당신도 술 마셨잖아! 됐어. 내가 운전할 거야.”
도훈은 억지를 부리곤 어정쩡하게 말리는 서진철 실장의 만류를 뿌리쳤다.
지켜보는 임원들도 역시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못했다.
어디 이런 일이 한두 번이야 말이지.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고!”
“단속도 있고… 밖에 비도 옵니다.”
“이 시간에 단속 없어! 그리고 뭐 폭우 쏟아져?”
“그건 아닙니다만…”
“됐어 그럼.”
도훈은 서진철 실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코 자신의 차 운전석에 올랐다.
막 차 문을 닫으려는 도훈이 서진철 실장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서 실장. 쟤들 서울에서 온 애들 아니야? 상태가 다 왜 이래?”
“죄송합니다. 하필 오늘 오기로 되어 있던 애들이 다 펑크를 내는 바람에…”
평소였다면 옆에 한 명 끼고 가야 했을 도훈은 오늘은 영 눈에 차지 않아 혼자 가는 게 불만인 거였다.
“잘 좀 합시다.”
“네. 다음엔 진짜 괜찮은 애들로 섭외하겠습니다.”
“나 가요. 그런데 집에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오늘 계속 안색이 어둡네?”
“아닙니다. 조금 피곤해서 그런 거 같습니다. 그럼 살펴 가십쇼.”
서진철 비서실장은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서 실장, 갔어.”
도훈이 모는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허리를 굽히고 있다가 누군가 그의 허리를 툭 치자 자세를 바로 했다.
서 실장은 도훈이 차를 몰고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았다.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고생은 뭐, 서 실장이 했지.”
“다 잘 되자고 하는 일이잖아.”
“어휴…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
“고생들 했고 나 먼저 가네.”
임원들은 지친 얼굴로 하나둘 집으로 떠났다.
서진철 비서실장은 그들이 모두 떠나는 걸 보고 나서야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예, 2분 전에 떠났습니다. 혼자입니다.”
전화기를 든 서 실장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경기도에 위치한 대학병원.
아침 8시가 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 누구 하나 웃음기 없이 바삐 돌아다니는데 그 분위기가 무척이나 무거워서 숨쉬기도 어렵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회장님…”
윤희찬 부장에서 이제 상무가 된 그는 응급실 앞에서 넋을 놓고 있는 김태현 회장에게 허리를 숙였다.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기에 윤 상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대답은 김태현 회장의 심복인 비서실장이 했다.
“교통사고였습니다. 화물트럭 기사가 만취 상태로…”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
턱을 치켜 올리고 분노로 이글거리는 회장의 눈빛은 비서실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 사고를 냈던 도만식이라는 운전자는 석 달 전에 이혼한 상태입니다. 음주운전 경력도 세 번이나 있는데 근래에도 술이 잦았는지 일단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고 있습니다. 오전은 지나야 제대로 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주운전 경력만 세 번… 쓰레기 같은 새끼…”
“사고 당시 혈중 알콜 농도가 면허 취소 수준이었고 집 앞 편의점에서 새벽 2시까지 혼자 술을 마셨다는 건 확인했습니다.”
“통장거래내역은?”
멈칫했던 비서실장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직까지는 드러나는 게 없습니다만 더 확인해보겠습니다.”
김태현 회장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믿을 수가 없어. 믿을 수가…”
“…”
“도훈 엄마는?”
“충격 때문인지 의식은 되찾았는데 아직 말을 하지 못하십니다.”
“담당 의사가 뭐라고 해?”
“충격을 받으셔서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흐음…”
한동안 말이 없던 김태현 회장이 한쪽 옆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윤 상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창훈이는?”
“현재 체코에 있는데 바로 가장 빠른 비행기로 오겠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분 정도면 출발할 겁니다.”
“그렇군…”
김태현 회장은 손을 흔들었다.
이만 나가보라는 제스처라 윤 상무는 고개를 숙이고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회장의 심중은 명확했다.
자신을 믿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
방금 전에는 워낙 정신없는 상황이었기에 비서실장과의 대화를 노출했지만 무언가 의심스러운 점을 느꼈기에 내보냈던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윤 상무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병원 입구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검은 세단 하나가 눈앞에 멈춰 섰다.
윤 상무는 뒷좌석에서 내리는 사람을 확인하곤 얼른 담뱃불을 껐다.
“사장님, 오셨습니까.”
“어떻게 된 거예요?”
HS물산 최영훈 사장의 얼굴은 평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간밤에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이곳으로 긴급 이송돼 응급조치를 취했지만 결국 사망했습니다.”
침통한 표정.
회장의 장남이 죽었으니 당연한 것이리라.
“김창훈 사장은요?”
“어제 출국했다가 2시간 전에 연락받고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 체코에 있습니다.”
“신혼여행도 제대로 못가서 이번에 간 거였었죠?”
“맞습니다.”
“공항에서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겠네요?”
“아마 그럴 겁니다.”
“회장님은 위에 계십니까?”
“네. 그런데 충격 때문에 사장님을 뵙기 어려우실 겁니다.”
결혼식 후 6개월 만에 떠난 신혼여행에서 형제의 사고로 다시 돌아와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영훈은 가만히 윤희찬 상무를 바라보았다.
윤 상무는 그 서늘한 눈빛에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습니다.”
“네?”
황당한 말이었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그를 더욱 당황하게 했다.
“김창훈 사장은 일부러 내보낸 겁니까?”
윤 상무는 주변을 한번 살피곤 굳은 얼굴로 다가갔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아직 장례가 결정된 것도 아니고 내부 사람도 아닌데 나에게 새벽부터 소식을 전했다… 나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던 건가요?”
“…”
“흘러가는 대로 두세요. 괜히 오버하다가 눈에 띄지 말고.”
영훈은 다른 사람이 들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간략하게만 설명하고 다시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아, 장례 끝나고 한번 만나도록 합시다. 생각해보니 내가 도울 만한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괴물…’
그가 바라보는 최영훈 사장은 진정 그러했다.
떠나는 영훈을 한참 바라보던 윤희찬 상무는 멀리 보이는 자신의 수행 기사에게 손을 흔들었다.
“광주로 가자.”
“아직 비가 상당합니다.”
“괜찮아. 천천히 가자고.”
“알겠습니다.”
차에 오른 윤희찬 상무의 말에 수행기사가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아직 거세게 쏟아지는 비는 한참을 가도 줄어들 줄을 몰랐다.
그렇게 2시간 정도를 폭우를 뚫고 운전한 다음에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윤 상무가 이 습한 온도 속에서도 입술이 바짝 말라오는 걸 느끼며 저 멀리 보이는 간판을 바라보았다.
[영원묘원]얼마만에 이곳에 오는 건지…
“지금 비가 많이 와서 올라가는 건 위험합니다!”
묘원의 관리인이 우산을 쓴 채 차를 막아서고는 운전석을 향해 소리쳤다.
“괜찮습니다.”
“아니… 위험해요.”
윤 상무는 안주머니에서 현금 5만 원짜리 십여 장을 꺼내 수행 기사에게 주었다.
수행 기사가 바로 그 돈을 관리인에게 건네자 그는 머뭇거리더니 이내 한 걸음 물러섰다.
“진짜 조심하셔야 합니다. 위험하니까 빨리 내려오시구요.”
“예, 예…”
관리인을 지나쳐 한참 미끄러져 들어간 차가 주차장에 멈춰 서자 수행기사가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가 뒷좌석 문을 열고는 우산을 받쳐 주었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
윤 상무는 수행기사의 우산을 자신이 들었다.
“밖에 비가 많이 옵니다.”
“나도 눈 있다. 혼자 걷고 싶어.”
“…알겠습니다.”
쏴아아…
윤 상무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검은 우산 하나를 쓴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비가 내리는 묘원의 땅은 관리인 말대로 무척 미끄러웠다.
그나마 목적한 곳의 위치가 아래쪽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검은 정장 바지와 재킷이 다 젖었을 때 그의 걸음이 멈췄다.
“후우… 후우…”
지쳤는지 잠시 숨을 몰아쉰 희찬은 담배에 불을 붙이곤 그 담배 그대로 비석 앞에 내려놓았다.
무릎을 바닥에 대지 않은 채 앉은 희찬은 비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지? 나도 잘 지냈다. 이게 얼마 만이냐. 난 별일 없이 살고 있어. 친구 덕에 제법 출세도 했고 결혼해서 애도 있다. 창훈이도 얼마 전에 결혼했어. 설마 샘내는 건 아니지?”
잠시 말이 끊긴 희찬은 한참 동안 비석을 바라본 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선 니가 당했던 거 이상으로 괴롭혀주고 싶었는데 그게 마음처럼 안 되는 거잖아. 법으로 죗값을 받을 놈도 아니고… 그래서 고민 끝에 하늘로 보냈으니까 너무 오래 걸렸다고 욕하지 마. 그래도 성공했잖아. 지금쯤 그 개새끼 만나고 있으면 불알이라도 걷어차 버려. 그 새끼는 그래도 싸니까.”
희찬은 품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곤 이제는 불이 다 꺼진 담배 앞에 내려놓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만나서 즐거웠다. 진심으로.”
사진엔 교복을 입은 세 남녀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309화 민희, 형준 이야기(1)
늦은 저녁, 종로의 오래된 닭한마리집.
시간이 너무 늦어서 그런지 손님도 거의 없는 이곳에 나이가 지긋한 두 명의 남자가 팔팔 끓고 있는 닭 한 마리를 앞에 두고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크… 요즘 내가 이거 없으면 못 삽니다.”
작고 단단한 체구에 눈빛이 강렬한 장년의 남자는 전 신영금융그룹 부회장이었던 이세준이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이는 이세준 부회장보다 못해도 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남자로 오래된 정장을 단정하게 입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속이 말이 아니셨죠?”
“말이 아니다… 단순히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네요. 하아…”
이세준은 허리를 의자에 기대고 회한이 가득한 눈빛으로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날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여자와 기어코 결혼을 진행했던 일부터 나를 닮지 않은 자식을 품 안에 거두고 키우던 그 오랜 세월…
속이 썩어 문드러지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닐까?
“곧 좋은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이세준 부회장은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번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우리 위원장님한테 참 빚을 많이 진 것 같습니다.”
“빚이라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위원장이라는 사람은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빚 맞습니다. 아무리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이지만 위원장님이 감수하는 위험을 내가 모르지는 않아요.”
“이 나이에 자리에 연연할 이유도 없고 있어봤자 허울뿐인 명예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폄하할 자리가 아닙니다.”
“…”
이세준 부회장은 위원장이라는 남자가 따라주는 술을 받고 다시 그의 잔에 따라주었다.
술잔을 부딪치지 않고 단번에 술을 넘긴 둘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형준이가 아직 어립니다. 신영이라는 거대한 배를 몰기엔 아직 많이 부족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놈은 배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잠시 말을 끊은 이세준 전 부회장은 결심했다는 듯 힘주어 말했다.
“아드님이 지금 JP모건에서 일하고 있지요?”
맞은편에서 술잔을 움켜쥐고 있던 남자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맞습니다.”
“먼 타국에 보내놓으니까 손주 얼굴도 못 보고 이게 참 무슨 일입니까? 한국으로 들입시다.”
“그게 무슨…”
“그만한 경력과 실력이면 은행장 해도 되지 않습니까? 형준이 그 녀석이 세운 행장 내보내고 아드님이 그 자리 앉으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안 그래요? 하하하하!”
이세준 전 부회장은 가게가 떠나가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삼성동 고급 저택.
아침 7시가 채 되기 전인 6시 50분인데도 벌써 집안이 부산스럽다.
“엄마! 나 안 일어나면 좀 깨워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엄마 때문에 늦었어!”
“내가 이 나이에 아침잠까지 깨워야겠어? 엄마 탓하지 말고 얼른 준비해!”
“아주머니, 혹시 북엇국 있어요? 나 속 쓰려.”
명숙은 눈을 비비면서 겨우 일어난 막내딸 은지에게 눈을 흘겼다.
“넌 도대체 술을 얼마나 먹고 다니는 거니? 주말이면 또 몰라.”
“술 안 먹고 남자를 어떻게 만나? 결혼하라며!”
“아유, 내가 미쳐.”
명숙이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리고 있을 때 계단을 통해 부산스러운 모녀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 천천히 내려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단정하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
“어, 일어났니?”
명숙은 불편한 얼굴로 눈만 마주치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집안의 사실상 권력서열 넘버1인 여자가 바로 며느리인 김민희였으니까.
민희는 슬그머니 눈을 깔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은지에게 말했다.
“어제 많이 취하신 것 같던데 오늘 출근하실 수 있겠어요?”
“어? 그럼요. 할 수 있죠.”
민희가 나이도 많았기에 은지는 감히 말을 놓지 못했다.
“일은 요즘 어때요? 할 만해요?”
명숙은 며느리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히 말도 걸어볼 수 없던 아랫것이 이제 아들과 결혼해서 일이 할 만하냐고 묻다니…
더 화가 나는 건 며느리에게 말버릇이 그게 뭐냐고 호통칠 수 없다는 거였다.
“뭐… 특별히 욕먹거나 그런 건 없어서요.”
은지도 그걸 알기에 불만스러운 마음을 누르고 억지로 대답한다.
“다행이에요. 권도준 부장한테 내가 특별히 잘 도와달라고 부탁했으니까 일하면서 힘든데 있거나 모르는 게 있으면 권 부장한테 물어보세요. 그렇다고 대놓고 직원들 다 있는 데서 그러면 좀 그러니까 은밀하게… 아시죠?”
“저 애 아니에요.”
“걱정돼서 그런 거예요.”
“고마워요.”
은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살짝 눈인사를 하곤 곧장 들어가려는데 민희가 주방 이모에게 물었다.
“아주머니, 혹시 해장할만한 거 있을까요?”
“북엇국은 없고, 미역국은 가능한데 그거라도 할까요? 홍합 넣어서 시원하긴 할 텐데.”
“그래 주세요.”
민희는 들어가려는 은지를 붙잡고 말했다.
“먹고 출근해요. 빨리 준비하면 늦지 않겠어요.”
누구의 명령인데 거부할까?
은지는 원래도 아침을 먹던 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말했다.
“네, 아주머니, 저 준비하고 나올게요.”
은지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도망쳤다.
명숙은 벌써 화장과 머리를 마치고 식사하러 내려온 며느리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형준이는?”
“지금 준비하고 있어요. 금방 내려올 거예요.”
“어제 형준이 얼굴이 말이 아니더라. 좀 챙겨 먹이고 있니?”
“온갖 몸에 좋다는 거 어머님이 가지고 오시잖아요?”
“밖에서 잘 먹이라는 말이야.”
“밖에서 뭐 그리 좋을 게 있겠어요?”
명숙은 한 마디도 안 지는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점심에는 직원들 먹는 식당 말고 좋은 곳에서 먹으라는 말이야. 저녁도 마찬가지고.”
“형준 씨는 나이가 어려요. 그렇기 때문에 더 직원들하고 같이 어울려야 인망을 얻을 수 있어요. 어린 나이에 권위 있는 모습 보이면 좋은 말이 안 나와요.”
“그런 게 어딨니? 회사 대표한테 누가 뭐라고 해?”
“없는 자리에서는 나랏님 욕도 하는데 형준 씨 욕 안 하겠어요?”
“그래, 좀 했다고 하면 뭐? 형준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니?”
“형준 씨한테는 더 많은 아군이 필요해요. 모르는 사람 욕은 쉽게 해도 친한 사람 욕은 쉽게 못하는 게 사람이고 그렇게 친한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면 형준 씨한테 알게 모르게 힘이 돼요.”
“…”
이번에도 한 마디를 안 진다.
더 열 받는 건 말을 하면서도 감정의 동요가 많지 않다는 거였다.
마치 한참 어린아이를 교육하는 것처럼 차분하게 대답하니 말하는 사람 더 진 빠지게 만든다고 해야 할까?
화가 치밀었지만 그녀의 카드 한도가 누구의 손에 결정되는지 알고 있기에 억지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그때 형준과 대충 씻고 머리를 말린 은재가 식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형준은 아직 머리도 다 못 말린 둘째 은재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도 늦게 일어났어?”
은재는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는 올케를 슬쩍 보고는 퉁명스레 말했다.
“별로 안 늦었어. 지각 안 해.”
본래 회사 일에는 관심이 없던 은재와 은진이는 새로운 식구가 들어오면서 억지로 회사생활을 하게 됐다.
그나마 신영그룹 계열사인 신영카드 관리직으로 채용되어 힘든 일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회사생활이 마냥 노는 백수 짓보다 좋을 리 없었다.
형준은 동생의 항변에 별다른 대꾸 없이 식탁에 앉았다.
아주머니가 미리 준비한 밥과 국, 어젯밤에 해놨다가 아침에 데운 갈비찜 등을 내왔다.
“아침에 이렇게 제가 좋아하는 것만 내오니까 자꾸 살이 찌는 것 같아요. 하하하!”
형준이 웃으며 날카로운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사실 형준은 결혼 이후 거칠고 신경질적인 성격이 많이 바뀌어 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내인 민희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본래 안 좋은 성격이 자신도 모르게 누그러져 가는 그런 건 아니었다.
이건 마치 동물원에 갇힌 사자가 사육사에게 길들어가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넌 속도 좋다.”
엄마의 핀잔에도 형준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결혼 전에 놀 만큼 놀았겠다 지금은 사실 민희 말고는 다른 여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밥맛이 좋으니까 속도 좋은 거지.”
형준은 속상한 엄마를 보며 히죽 웃고는 맛있는 갈비찜은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달달하고 진한 육즙이 입안을 가득 채우는 행복감을 다 누리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한때 아버지에 의해 좌천됐다가 지금은 신영은행 부행장으로 올라선 강주현 전무였다.
어차피 출근하면 마주 볼 사람이기에 어지간하면 이 시간에 전화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걸 알기에 형준은 굳은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이 아침에 무슨 일입니까?”
[회장님, 조동철 위원장이 어젯밤 전 부회장님과 긴밀히 회동했다고 합니다.]고려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이자 금융감독원 금융감독자문위원회 조동철 위원장은 신영은행 사외이사 중 한 명이었다.
“조동철 위원장이?”
형준은 방금 전까지 좋던 입맛이 싹 달아났다.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동철 위원장이다.
그 사람은 신영은행 사외이사 중에서도 인망이 높아 따르는 사람이 많은데 그중에 같은 사외이사인 김훈정 변호사와 홍상민 교수과 친분이 아주 두텁기로 소문나 있었다.
[조동철 위원장이 저번 달에 홍상민 교수를 추천한 게 어쩌면 회장님께 독이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홍상민 교수의 사외이사 임기는 고작 1년이지만 만약 조동철 위원장이 미리 의도하고 그의 사람을 꽂았다면.
지금껏 조용하던 아버지가 조동철과 미리부터 짜고 일부러 방심시킨 후 홍상민을 이사회에 올렸음이 분명했다.
형준은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동철이 만약 딴생각을 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조 위원장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움직일지가 관건입니다.]“갑자기 그 늙은이가 이러는 이유가 뭘까요?”
[아무래도… 전 부회장님과 모종의 합의가 있지 않았겠습니까?]“이 노망난 늙은이 같으니라고…”
본인은 정정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형준이 보기엔 나이가 60이 넘어 이제는 모든 실무에서 손을 떼고 후학이나 양성하며 노년을 보내야 할 사람이었다.
그 나이에 무슨 욕심을 부리겠다고 이러는지…
[아무래도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알겠어요. 이따 봅시다.”
전화를 끊은 형준이 민희에게 뭐라 말하려고 할 때 이미 그녀가 다가와 있었다.
“같이 출근해요.”
“어? 어. 그래.”
“어머니 저희 같이 출근할게요.”
명숙은 밥도 한 숟갈만 뜨고 일어선 아들이 못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조금 더 먹구 가.”
“급해요.”
그렇게 아들 내외는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310화 민희, 형준 이야기(2)
그룹 회장의 와이프가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 것.
그게 회사 임직원들에게 얼마나 큰 부담감을 주는지 민희는 결코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형준과 결혼한 후 몇 달 일을 쉬기도 했었다.
본래 현진물산에서 계속 일을 할까도 했었지만 쓸데없는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은 피하는 게 좋다는 영훈의 말에 그것도 포기한 그녀였다.
지금은 워낙 가까워져 평일에도 종종 연희와 만날 정도여서 두 그룹과의 공적인 일도 교류를 하고 있는 민희였다.
그렇기에 신영금융에서 완전히 손 뗀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결국 석달 정도를 집에서 쉰 그녀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출근을 결행하고야 말았다.
직급은 상무.
그것도 그냥 일반 부서도 아닌 전략기획팀 상무로 발령받으니 당시에 얼마나 큰 뒷말이 있었는지 말로 설명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감히 민희 앞에서 그런 불만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민희가 전략실로 들어서며 인사하자 근무하고 있던 직원들 모두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어떻게 식사는 하셨습니까?”
말을 걸지 않으면 밉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다들 한 마디씩 건넨다.
“그럼요. 부장님 저랑 잠깐만…”
“네!”
전략기획실에서만 10년을 근무한 장대석 부장이 얼른 민희 뒤를 따라붙어 상무실로 들어갔다.
민희가 재킷을 옷걸이에 걸고 상석에 앉자 장대석 부장이 공손히 옆자리에 앉았다.
장대석 부장이 처음 민희를 보았을 때 감상은 지금과는 무척 달랐다.
어리고 어리고 어리기만 한…
전략기획실을 벗어나면 빈번하게 마주치는 흔한 여직원의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가 달랐다.
그저 남편의 힘에 기대서 뭐라도 해보려는 주제넘은 여자와는 결이 좀 달랐다고 할까?
“어젯밤에 조동철 위원장이 전 부회장님과 회동했다는 거 확실한 거죠?”
“네, 방금 전 유 대리가 가게 앞 CCTV까지 확인했다고 합니다. 지금 복사본 떠서 출근하는 중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하던 민희가 차분하게 물었다.
“조동철 위원장은 어떤 사람이에요?”
이게 바로 다른 여직원들과 조금 다른 부분이다.
분명 위기를 느낄만한 상황인데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경제학파 원로이자 초대 총리였던 원승제 전 총리의 제자였고 이후 10년 넘게 좌·우 정권 가리지 않고 경제 고문을 역임할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점잖고 대쪽 같다고 평가받고 있기도 합니다.”
“평가받는다는 건 부장님 생각과는 다르다는 말이네요?”
“맞습니다. 점잖은 건 맞지만 짠돌이에 돈을 꽤 많이 밝히는 양반이죠.”
“어느 정도나요?”
“10년 전인가? 인성저축은행이 매물로 나왔을 때 그거 먹어보겠다고 온 정치권을 들쑤셨더랬죠. 그때 전 회장님께서 그 양반을 좀 도와줬는데 운이 닿지를 않았는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래도 전 회장님께서 도와주려고 했던 건 잊지 않아서 계속 인연을 맺어오고 있었구요.”
“오래전 이야긴데 히스토리를 꽤 잘 아시네요?”
“당시에 인성저축은행 건 풀겠다고 뛰어다닌 사람이 제 사수였거든요. 지금 리스크관리 부분을 맡고 계신 오종민 이사님이 그분이십니다.”
“아…”
“여하튼 그런 사람인데 전 부회장님과 회동했다는 건 이미 그 전에 부회장님과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거나 그게 아니라도 속에 무언가를 품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요.”
“그렇군요.”
민희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입을 다물었다.
침묵하는 사모님을 기다리던 장대석 부장이 슬그머니 물었다.
“혹시…”
“네?”
“정치권에 가까운 분이 있으십니까?”
“그건 왜 물으세요?”
“조동철 위원장이 지금 저리 날뛴다지만 무척이나 대외적인 평가에 민감한 사람입니다. 항상 정치권과 가까이하려고 애썼거든요.”
“정치인으로 그를 압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재벌이 아닌 사람이 재벌과 같은 위치로 올라서기 위해선 정치인 만한 게 없으니까요.”
민희는 장대석 부장의 의견을 듣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왜… 웃으십니까?”
“부장님의 의견이 왠지 예전에 내 보스가 종종 해줬던 말과 비슷해서요.”
“현진물산 최영훈 사장 말입니까?”
“맞아요.”
이 어린 사모님은 종종 최영훈 사장을 소환하며 얘기하곤 했다.
그때마다 드는 느낌은 그녀가 최영훈 사장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것 같다는 것?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을 그렇게 존경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는데 지금도 그랬다.
“사람을 잘 보셨다지요? 궁금하네요. 최영훈 사장님이 만약 조동철 위원장을 만난다면 무슨 평가를 할지.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한다면 좋겠는데 말이죠.”
“아마 비슷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분도 항상 어떤 문제에 직면하면 그 문제의 핵심 인사의 성향을 먼저 거론하고는 하셨거든요.”
“그런가요?”
“네, 부장님이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오늘처럼 종종 사장님과 비슷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으니까요. 조금 다른 건 더 직관적이고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는 것?”
“대단하신 분이셨군요.”
“맞아요, 대단하셨죠. 그런 의미에서 만약 최 사장님이 내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턱을 괴며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해야 할 말을 정리했는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걸 물었을 것 같아요.”
장 부장을 만나기 전까지 많이 답답했던 민희는 최영훈 사장님이 이 자리에 있을 걸 예상한 후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뭘 말입니까?”
“그렇게 똑똑하신 분이 왜 지금 움직이셨을까요?”
“…”
“나이도 있을 만큼 있고 지금 상황이 얼마나 예민한지 잘 아실만한 분이 왜 지금에서야 움직였을까. 궁금하지 않아요?”
장대석 부장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가 얼른 손을 폈다.
“최대한 빨리 확인해보겠습니다.”
이렇게 쪽팔릴 수가…
장 부장은 쥐구멍에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사실 민희의 질문이 세상 누구도 쉽게 생각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건 절대 아니었다.
회사 경영권이라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어 이걸 빨리 보고한다는 생각에 차마 이것까지 고려하지 못했을 뿐.
다만 하필 서른도 채 되지 않는 회장의 아내에게 이걸 지적당한다는 건 자존심을 떠나 자신의 가치를 다시 평가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쓸모없는 직장인은 결국 버려지기 마련.
가진 것만 많은 어린 여자를 지속적으로 가르쳐주어야 자신이 쓸모가 있음을 어필할 수 있는데 반대로 가르침을 받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건 언제라도 전략기획팀 부장 자리를 다른 사람이 꿰찰 수 있다는 뜻이다.
“부탁드려요. 나가보세요.”
“알겠습니다.”
장대석 부장은 미소 짓는 민희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곤 방을 나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잔뜩 굳은 얼굴로 김민희 상무의 방을 나온 그에게 시커먼 얼굴에 헬스장에서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두꺼운 근육을 자랑하는 남자가 다가왔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몸보다 머리 쓰는 걸 좋아하는 권순우 차장이었다.
“하… 시팔. 개쪽팔리고 나왔다.”
“네? 왜요?”
“됐고, 조동철이 주변 좀 알아봐.”
“안 그래도 조동철이 자산취득 현황을 뒤져보고…”
“그거 말고…”
“…”
“그 양반 돈 좋아하는 거 누가 모르냐. 근데 단순히 돈 때문에 이러는 걸까?”
권순우 차장이 눈을 껌뻑이며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그를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장 부장의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말했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말씀이시죠?”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에 와서 이러는 게 이상하다는 거지. 그리고 하필 그 이야기를 내가 상무님한테 지적받았다는 거고.”
“아… 혹시 정말 돈 때문이 아니라면 조동철 위원장의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까요?”
“건강?”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양반 아닙니까?”
장 부장은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나도 그걸 가장 먼저 떠올리긴 했는데 병원 쪽 애들은 어지간해서는 환자 개인정보 넘기지 않아. 이걸 가지고 활용하기도 어렵고.”
“그렇긴 하네요. 내가 아픈 거 어떻게 알았냐고 따지고 들어가면 우리한테 역풍이 불 수도 있으니까요.”
“어쨌든 그게 가장 가능성이 클 거 같으니까. 조동철이 가족을 좀 파봐. 그 양반이 지금 뭐에 꽂혀 있는지 말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빨리 움직여.”
“네.”
권순우 차장이 사라지자 장 부장은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뭔가 다르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너무 성급했다.
다급한 상황에 처한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가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걸 예상하고 어떻게 잘 달래서 흥분을 가라앉히게 할까 생각했는데 그걸 너무 크게 벗어나고 말았다.
그렇게 장 부장은 한동안 자책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챙겼다.
아무래도 직접 발로 뛰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였다.
*
신영금융그룹 본사 회장실.
강주현 신영은행 부행장은 짝 얼어붙은 채로 이형준 회장 앞에 앉아 있다.
“아버지는 근래에 어떻게 지내셨대요?”
“방금 전에도 보고받았는데 모습을 드러내신 이후로 항상 똑같았다고 합니다. 낮에는 주기적으로 산을 오르시고 저녁에는 옛 지인들과 만나 막걸리를 드셨습니다.”
“그 지인 중에 위험이 될만한 사람은 없는 건가요?”
“네. 정치인이나 신영에 위협이 될 만큼 많은 주식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조동철 위원장과 만났다?”
“통화기록까지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동철 위원장과는 전화로 대화하면서 교감을 주고받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셨을 때는 일부로 외부 이목을 끌 수 있도록 유도하셨을 거구요.”
“흠… 일리 있네.”
“어떡할까요? 바로 전 부회장님을 만나시겠습니까? 아니면 홍 교수를 만나시겠습니까?”
탁자를 내려다보며 한참 고민하던 형준이 입을 열었다.
“내가 열 살 때였을 거예요. 그 나이 때 애들 다 그렇듯이 나도 노느라 정신없었지. 근데 학교 밖을 나와 보니까 나랑 좀 다른 애들이 존재하더라구요.”
이형준 회장은 강주현 부행장 앞에서 옛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어찌나 공부를 열심히 시키던지 당시에 난 부모가 애들을 고문이라도 시키는 건가 싶었다니까요? 속된 말로 요즘 대치동이니 분당이니 마포니 하는 교육열 높은 지역 애들도 받기 어려운 교육들을 해댔는데 처음에는 그걸 보고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한테 물어봤었어요. 난 왜 아버지 친구들 애들처럼 공부시키지 않냐고. 그랬더니 아버지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긴 그냥 내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 대요. 크크크큭… 와… 내가 그때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생각해봐요. 애들이 다들 공부한다고 죽어. 영어는 기본에 중학교도 안 들어갔는데 중학교 수학을 벌써 한다니까? 시팔, 밀레니엄 시대에 사서삼경까지 떼는 애도 있었어요. 지랄 난 거지. 그런데 우리 아버진 아들의 행복을 위해 공부를 시키지 않겠대! 이 얼마나 대단한… 응? 대단한 사랑 아닙니까? 예?”
형준이 ‘대단한’ 부분을 강조할 때 강주현 부행장은 언뜻 그의 눈이 충혈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
“그러다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 아버지랑 어머니가 크게 싸우는 걸 들어서 알게 됐어요. 아버지가 기를 쓰고 내가 사립학교에 가는 걸 반대하고 있구나… 사립학교가 도대체 뭔데? 궁금해지더라고. 내가 또 궁금한 건 못 참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시죠.”
“그래서 아버지한테 ‘아버지, 저 사립학교 가고 싶습니다.’라고 해봤는데… 그때 아버지의 그 얼굴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 잊혀지지가…”
“…”
한숨을 푹 쉬며 괴로워한 형준은 탁자 앞에 놓인 홍성민 교수의 인사 프로필 자료를 한동안 노려보다가 말했다.
“여기 홍 교수 좀 만나야겠습니다.”
“바로 시간 잡겠습니다.”
311화 민희, 형준 이야기(3)
마포 공덕시장은 근처 직장인들이 자주 찾는 맛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특히 전과 족발이 유명한데 영훈과 한번 온 이후 형준도 이곳을 자주 들리곤 했다.
“회장님이 이런 곳을 아실 줄은 몰랐습니다.”
작은 간의 탁자 맞은편에 앉은 깔끔한 정장 차림의 마흔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한경대학교 경제학 교수인 홍상민 교수였다.
형준이 슬며시 웃으며 그의 잔에 막걸리를 따르며 말했다.
“저라고 항상 스테이크나 썰며 얘기하겠습니까?”
“그래도 조용한 일식집이나 한정식집을 생각했었죠.”
“이제는 그런 곳도 지겨워서요. 자꾸 오다 보니까 정겹기도 하고…”
형준은 작은 가게에 빼곡히 가득 찬 사람들을 잠시 둘러보곤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은근히 사람들이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더라구요. 재벌 그룹 2개 총수가 나란히 앉아서 족발을 먹는데 어떻게 관심 가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나? 웃기죠?”
“아마 몰라서 그랬을 겁니다.”
“그러니까요. 한잔합시다.”
오래된 스테인리스로 된 잔에 따라 먹는 막걸리 맛은 룸에서 먹는 위스키와 사뭇 다른 흥취를 불러일으켰다.
형준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내가 왜 보자고 했는지 알아요?”
홍상민 교수는 족발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대답했다.
“회장님께서 사외이사를 만나는 거야 그리 이상할 것도 아닌데… 제가 바쁘다고 학교까지 직접 오시는 건 상당히 의외였습니다. 그러니 분명 가벼운 일은 아닐 테고, 무엇 때문일까요?”
“이봐요, 홍 교수. 난 성격이 급해서 돌려 말하는 것도 잘 못 하고 뻔히 보이는 속내를 이리저리 돌려 말하는 사람도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형준의 날카로운 눈빛에 홍 교수가 흠칫 놀랐다.
“…”
“돌려 말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본론부터 들어갑시다. 조동철 위원장과 많이 가까우시다구요?”
“제 스승님 같은 분이시죠.”
“그럼 스승님 같은 분과 항상 같은 의사결정을 합니까?”
“존경하는 분이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전 주관이 없이 사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가요?”
빤히 바라보는 형준의 눈빛에 홍 교수가 젓가락을 놓고 남은 막걸리를 들이마셨다.
입에 쫙 달라붙는 막걸리로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곤 말했다.
“시국이 무척 예민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도 조심하고 있구요. 그런 의미에서 누가 신영그룹을 이끌어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많은 고민이 필요한 건 맞습니다.”
“당신은 주관이 있는 사람이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그 주관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아직… 생각이 어디를 향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요? 시국이 예민해서?”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것도 하나지요.”
형준이는 결연한 얼굴의 그를 한참 바라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흥! 내가 말이에요. 나이는 많지 않은데 경험이 많아. 응? 경험이 많다고.”
말이 짧아졌다.
홍 교수의 얼굴이 굳어지는 건 당연지사.
형준은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어갔다.
“뭐, 그 경험이라는 게 여러 일을 해봤다는 그런 종류는 아니고 주로 뭘 좀 이뤄봤다 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경험해봤다는 거지. 솔직히 내가 아는 그 친구에 비하면 새발의 피긴 한데 그래도 딱 한 가지 부류의 사람들은 제법 아는 편이거든.”
“제가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까?”
형준은 그와 시선을 마주하면서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경험한 교수라는 인간들은 말이지. 대략 두 부류로 나누더라고. 학문을 위해 돈이 필요한 사람과 그냥 돈이 필요한 사람. 당신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해?”
홍상민 교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가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겁니까?”
“보통 내가 어떤 제안을 하면 말이야. 학문을 위해 돈이 필요한 교수들은 먼저 자기 의견을 말해. 이러저러해서 꼭 이걸 해야 한다고. 그러고 나서 내 의견을 구하지. 그런데 그냥 돈이 필요한 교수들은 대답을 먼저 하지 않아. 무슨 대답을 해야 자기한테 유리한지 입을 꾹 다물고 기다리거든. 어때? 내가 틀렸나?”
“아주 큰 선입견을 가지고 계시군요.”
“뭐, 그럴 수도…”
형준이 족발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자 홍상민 교수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우… 아무래도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 전 학생을 가르치는데 제 천직인 것 같네요. 이런 복잡한 정치와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형준은 비릿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그럼…”
홍 교수는 고개를 살짝 숙이곤 혼잡한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고 홀로 남은 형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빈 잔에 막걸리를 따르곤 한껏 들이켰다.
“크으… 좋다.”
쫙 달라붙는 막걸리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족발 한점을 입에 넣고 오물거린 형준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생각했다.
저 욕심 많은 돼지 새끼는 분명 조동철 위원장의 따까리라고…
문제는 그룹 회장이 직접 대면했는데도 돼지 새끼가 먹을 걸 달라 하지 않는다는 것.
“조동철이가 뭘 먹이로 줬을까…”
형준은 그게 궁금했다.
*
“죄송합니다.”
장대석 부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부하직원을 움직이고 본인이 직접 알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조동철 위원장이 갑자기 스탠스를 바꾼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다못해 조동철 위원장이 다니는 병원까지 쑤셔봤을 정도였다.
조동철 위원장의 주변 사람들은 아는 게 없었고 그의 행보 역시 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전 부회장님과 식사 한번 했다는 게 전부여서 ‘어쩌면 그냥 식사 한 번 한 게 아닐까’하는 행복회로까지 돌려보았을 정도였다.
“어쩔 수 없죠.”
민희는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장 부장은 그게 더 아프게 와 닿았다.
처음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어떻게…?’라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장 부장이었지만 가까스로 삼켰다.
“알겠습니다. 시키실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그렇게 할게요.”
“일단 계속해서 알아보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구요.”
어떻게든 말을 붙여 뭐가 더 있는지 알아보려고 한 장 부장은 표정 변화 하나 없는 민희의 모습에 힘없이 물러갔다.
“하아…”
민희는 장 부장이 나간 후 이마를 잡았다.
장 부장의 생각처럼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어도 혹시나 무언가를 알아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나였다.
잠시 고민하던 민희가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안 바쁘면 잠깐 볼 수 있어? 그래. 우리 자주 만났던 호텔 있지? 거기서 봐.”
전화를 끊은 민희는 곧장 핸드백을 챙겨 나왔다.
나가는 그녀의 모습 뒤로 직원들의 불안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
HS그룹이 가진 종로 리츠칼튼 호텔 일식당에 한 여자가 들어와 직원의 안내를 받고 걸음을 옮기고 있다.
안쪽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방문이 열리고 안에 미리 도착해있는 사람을 본 여자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언니!”
오랜만에 만난 다은이 잰걸음으로 올라와 자리에 앉는다.
“넌 청와대 들어가더니 갈수록 피부가 더 좋아진다?”
강다은은 두 손을 뺨에 가져가며 수줍게 웃었다.
“이것도 다 카메라 마사지를 받아서 그런 거 같아. 이래서 걸그룹들이 다 갈수록 예뻐지는 건가?”
“현충원 행사 때 보니까 카메라가 계속 너 쫓아다니던데 부담스럽지는 않았어?”
“가기 전에는 행사 무게감 때문에 부담스러울 것 같았는데 막상 가니까 뭐… 오히려 재밌던데?”
현직 대통령의 며느리인 다은이는 중요한 선택을 앞두곤 항상 민희를 만나 조언을 들었다.
그래서 이젠 거의 둘이 단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친해졌다.
“성격에 맞으니 다행이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런데 언니가 날 만나자고 하고,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혹시 내가 도와줄 일 있어?”
“응.”
“오오오! 좋아. 내가 언제 언니가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나 했다니까.”
다은이 기꺼워하는 이유는 그동안 민희에게 도움을 받기만 했지 줘본 적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이건 인간적인 미안함을 떠나 언제고 갚아야 할 빚이라고 여겼기에 그걸 조금이라도 털 수 있는 것에 기뻐하는 거였다.
물론 민희도 그걸 알고 있었다.
“우리 그룹 사외이사 중에 조동철이라는 사람이 있어.”
“조동철?”
“응,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고 금감원 금융감독자문위원회 위원장이야.”
“그런데?”
“이 사람이 며칠 전에 시아버지를 만났어. 은밀하게…”
“아…”
다은이 아무것도 모르고 놀기만 했던 때는 형준을 알기 전이었고 이제 영부인 없는 대통령의 유일한 며느리가 된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당연히 민희의 시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고 그 두 사람이 만났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고 있었다.
“돈으로 해결될 사안일까 생각하면 쉽지 않은 게 조동철 위원장의 마음을 흔든 사람이 우리 시아버지야. 그룹을 차치한 후의 시아버지라면 어떤 제안을 했을지 잘 모르겠어. 그래서 섣부르게 돈으로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야.”
“이해가.”
“그런데 난 그냥 돈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왜? 언니 생각은 어떤데?”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가 꽤 많은 사람이야. 예전에 보스가 해준 말이 있어. 사람은 나이가 들면 돈보다 권력과 명예에 더 집착한다고. 그럼 뭔가 원하는 게 명확하게 있을 거야.”
“내가 그걸 알아봐 주면 되는 거야?”
“응.”
다은이는 따뜻한 녹차를 두 손으로 잡고 호호 불며 몇 모금 마셨다.
그동안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내가 그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유가 있겠네?”
“그 사람이 예전부터 정치권과 아주 가까웠다고 들었어. 그럼 지금 청와대 니 손이 닿는 사람 중에 한명 정도는 조동철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거나 아니면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야.”
“음… 그렇구나. 알았어. 내가 한번 알아볼게.”
“고마워.”
“뭘 이 정도 가지고. 하… 근데 내가 알아봐 줄 수 있어야 언니한테 도움받은 거 조금이라도 갚을 텐데.”
“마음이라도 고마워. 배고프니까 일단 먹을까?”
“응.”
두 여자는 음식을 먹으며 각자 생각에 빠져들었다.
*
종로 북촌의 한 오래된 한옥.
나이가 칠순은 넘어 보이는 노인이 한적한 경치를 구경하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그의 손에 든 호두 두 알이 내는 소리가 묘하게 사람을 안정시켰는데 그걸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가 있었다.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홍상민 교수가 걱정스레 물어보았고 호두 두 알을 돌리며 경치를 감상하던 남자가 답했다.
“비가 올 모양이야.”
“네?”
“비가 올 때는 우산을 준비해야지.”
“…”
홍 교수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무니 조동철 위원장이 주름진 얼굴로 피식 웃었다.
“왜? 겁나냐?”
“제가 겁날 게 뭐가 있습니까? 어차피 제 일도 아닌데요. 기한이 정해진 임시직 할 일 하고 그만두면 끝 아닙니까.”
“내 욕심 때문에 괜히 너만 골치 아프게 됐어.”
“그런 말씀 마세요. 저라고 욕심 하나 없겠습니까? 잘 되면 좋고 안 되면 하던 일 계속하면 되니까 전 마음이 가볍습니다.”
조동철 위원장의 가는 눈이 웃음 때문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어졌다.
“허허허… 이놈 이거 학생 때랑 어찌 그리 변하는데 없누.”
“사람 변하면 죽을 때라고 하잖아요. 전 아직 오래 살 겁니다.”
“그래, 오~래 살아라. 나보다 오~래 살아서 다 해 처먹어라. 하하하!”
“하하하하!”
그렇게 한바탕 웃음을 쏟아낸 뒤 홍 교수가 말했다.
“이형준 회장은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굳건하게 그를 지지하는 세력도 있구요. 위원장님과 제가 전 부회장님을 지지하면 미세하게 우리 쪽으로 균형이 옮겨오긴 할 테지만 그래도 만약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이미 생각해 둔 게 있다.”
“아, 정말이세요?”
“토끼도 굴을 팔 때 세 군데를 뚫어 놓는다고 하는데 내가 하나만 뚫어 놨을까.”
“그것참 다행입니다.”
“걱정하지 말고 가서 일 봐.”
“예, 알겠습니다.”
홍 교수는 조동철 위원장에게 고개를 숙이곤 기쁜 마음으로 고택을 빠져나왔다.
운치 있는 북촌 한옥 사이를 걸어가는 홍 교수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하여튼 여우야, 여우. 흐흐흐…”
312화 민희, 형준 이야기(4)
[신영손해보험의 지분을 10% 가지고 있는 MFV 펀드에서 조동철 위원장과 접촉했다는 말이 있어. 일단 내가 알아본 바로는 이게 다야.]다은이와 만나고 이틀이 지난 아침, 민희는 그녀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았다.
“뭐 있어?”
씻고 나와 화장대에 앉아 한참 동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으니 막 침대에서 일어난 형준이 물어본다.
민희는 핸드폰을 옆에다 놓으며 화장 거울로 고개를 돌렸다.
“조동철 위원장이 MFV 펀드와 접촉했대요.”
“MFV 펀드? 지성준을 만났다고?”
형준은 깜짝 놀라 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잘 아는 사람이에요?”
“엄청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몇 번 만나기는 했었지. 어떻게 안 거야?”
“다은이한테 부탁했어요.”
형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다은이?”
“네.”
그녀는 대통령의 며느리이기도 하지만 오성그룹의 막내딸이기도 했다.
오성그룹에서 자신에 대한 약점을 알게 되면 좋을 게 없다는 건 말하기도 입 아프다.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민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화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강다은을 믿어? 오성에서 지금 조동철과 우리 아버지가 손을 잡았다는 걸 알게 되면 중간에 끼어들어서 한입 해먹으려고 달려들걸? 돈이 부족하면 돈을 더 보탤 테고 권력을 원하면 한자리 더 얹어 줄 거야. 알잖아?”
민희는 화장을 멈추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형준을 향해 돌아섰다.
“염려되는 건 알겠는데 지금 상황이 그렇게 돌다리 다 두들겨보고 건널만큼 여유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물이 넘칠 거 같으면 일단 건너고 봐야죠.”
“그래도 강다은에게 정보를 넘긴 건 위험했어. 분명 이거 강대성이 귀에 들어갔을 거야. 어쩌면 방금 정보 강대성이가 가져왔을 수도 있어.”
“그랬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오성에서 쉽게 우리를 흔들지 못할 거예요.”
“어째서?”
민희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HS의 눈치를 볼 거예요. 최영훈 사장님은 오성이 우리를 흔드는 걸 두고 보시지 않을 거예요.”
사적인 친분 때문이 아니라 HS가 신영을 중요한 파트너로 여기기 때문이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그건 그런데… 만약 또 우리가 영훈이 놈 도움받으면 받은 만큼 해줘야 해.”
“알아요. 일단 최대한 그렇게 되지 않게 노력해보자구요.”
“후… 아버지는 왜 또 조동철을 꼬드겨가지곤…”
형준은 머리를 헝클이며 괴로워했고 민희는 그런 남편을 가만히 바라보다 어깨를 쓰다듬었다.
“언제고 일어날 일이었잖아요. 적어도 한번은 거쳐야 할 일이었어요.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을 뿐이지.”
“알아. 안다고. 나 씻을게.”
형준은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한 뒤 벌떡 일어나 샤워하러 들어가 버렸다.
들어가는 형준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보던 민희는 화장을 마무리하곤 거실로 내려갔다.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와 고풍스러운 클래식 음악이 묘하게 어우러진 거실엔 시어머니인 명숙이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늦게 들어왔더라.”
“일이 좀 많아서요.”
“형준이야 당연히 일이 많겠지만 너가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니? 며느리면 집에 일찍 좀 들어와야 하는 거 아니니?”
“회사를 다녀본 적 없으셔서 잘 모르시나 봐요. 회사 일이라는 게 6시 딱 됐다고 업무가 마무리되는 건 아니거든요. 아주머니~ 저도 커피 한 잔만 주시겠어요?”
“네~”
시어머니의 면박에 조금도 져주지 않는 민희는 일하는 사람에게 커피를 받아 명숙의 건너편에 앉았다.
명숙은 질 걸 아는데도 며느리의 모습만 보이면 참지 못하고 뭐라도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너 시어머니 무시하니?”
“무슨 말씀이세요. 무시한다니…”
“무시하는 게 아니면? 내가 퇴근시간 지나고 나서도 계속 일이 있는 거 몰라서 물어봐? 다 알면서도 물어보는 거야. 너 며느리잖니. 다른 며느리들은 회사 다녀도 끝나는 시간 되면 칼 같이 들어와서 집안일 돕는다.”
“그렇겠죠. 능력이 없으니까.”
“뭐?”
“다른 사람들은 회사 있고 싶어서 남겠어요? 하던 일을 마무리해야 하니까 남아 있는 거죠. 그거 무시하고 내일 와서 해야지 하면 내일 일은 그만큼 밀리지 않겠어요? 당연히 인사평가가 잘 나올 수 없는거구.”
“너가 인사평가를 걱정해야 할 위치에 있니?”
“안타깝게도 인사평가를 해야 할 위치에 있으니 어머니 말대로 칼퇴하면서 결과도 그리 좋지 않은 직원은 평가를 박하게 해요. 어머니, 저도 피곤해요. 빨리 집에 와서 쉬고 싶다구요. 다른 집 며느리들처럼 고상하게 미술관에서 수다나 떨면 좋겠는데 일이 있는 걸 어쩌겠어요?”
“너 애는 안 가질 거야?”
민희는 잠시 멈칫하고는 커피잔을 무릎까지 오는 탁자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아직 젊어서 그래요. 저도 애 싫어하지 않아서 때가 되면 가질 생각이니까 그렇게 재촉하지 마세요.”
“그때가 언젠데?”
“회사가 안정되면요.”
명숙이 욱하며 뭐라 하려는 찰나 막내딸인 은지가 부스스한 머리로 거실에 나왔다.
“엄마, 아침부터 그만 싸워. 시끄러워 죽겠네.”
“이게 그냥…! 너도 어제 늦게 들어왔지? 너 또 친구들이랑 클러…”
명숙은 순간적으로 며느리의 눈치를 살폈고 민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클럽이 지겨운 나이 아니에요?”
“나 클럽 안 갔어요.”
“메이크업도 안 지우고 그냥 잤네요?”
은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배시시 웃었다.
“클럽이 아니라 그냥 바. 가볍게 한잔 한거예요. 아주머니! 나 밥.”
그녀가 웃음으로 상황을 마무리하고 식사하러 들어갈 때 민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오늘 점심에 식사나 같이 합시다]놀랍게도 발신자는 조동철 위원장이었다.
그리고 마침 2층에서 내려오는 형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
강남 팔레스 호텔 일식당.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서니 생각지도 못하게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명은 민희를 이곳으로 부른 조동철 위원장이었고 다른 한 명은 신영의 또 다른 사외이사이자 재일한국인변호사협회 서두승 이사였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서두승 변호사입니다.”
“사모님이 아니라 직책으로 불러주시면 감사할게요. 반가워요. 위원장님도요.”
민희는 누가 앉으라고 말하기 전에 서두승 이사 옆자리에 앉았다.
“두 분이 같이 계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조 위원장님의 생각이신가요?”
“우연찮게 서 변호사와 식사할 일이 생겼는데 마침 사모님… 아니, 상무님께 드릴 말씀도 있어서 같이 뵈면 어떻게 생각했었습니다. 식사는 알아서 시켰는데 괜찮으십니까?”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런데 술까지 드시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대 아닌가요?”
그녀의 말처럼 이미 식사 자리에는 술이 들어있는 하얀 주전자와 노란빛을 띠는 액체가 술잔에 담겨 있었다.
“사는 낙이라고 할까요? 반주 없으면 뭐하러 오래 살까 싶습니다.”
“그렇군요.”
민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주전자를 들어 본인의 잔에 스스로 술을 따르곤 그대로 들이켰다.
뜨끈하게 목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정신을 깨웠다.
갑자기 자작을 하는 민희를 보고 놀란 두 남자가 말없이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잔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 민희와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조동철 위원장.
짧은 시간의 침묵이었지만 숨막힐 듯 긴장감이 팽만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구요?”
“맞아요.”
“해보세요. 그럼…”
팔짱을 낀 채 빤히 바라보는 민희를 보고 조동철 위원장은 무언가 잘 못 생각했었음을 깨달았다.
서른도 채 되지 않는 어린 나이에 쉽게 볼 수 없는 정신상태였으니까.
“이 나이쯤 되면 물도 가려 마셔야 한다지요? 괜히 자식새끼들 인생 오물이라도 묻지 않을까 싶어 말 한마디 가려 왔는데 사는 게 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더란 말이오. 가끔은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할 때가 있고 싫은 사람과도 대화를 해야 할 때가 있는데 상무님은 내 사정을 이해하겠습니까?”
“계속 해보세요.”
도무지 흔들리지 않은 그녀의 표정에 조동철 위원장의 안색도 굳어졌다.
“저간의 이유야 어찌됐든 상무님과 회장님이 나를 오해한 게 아닌가 싶은데 안 그렇습니까?”
민희는 그가 자꾸 자신의 안색을 살피며 떠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아버님을 만난 게 맞다는 말씀이시죠?”
목이 말라 물컵을 잡아가는 조동철의 손이 순간 움찔했다.
“아, 네. 그랬습니다.”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별다를 건 없었습니다. 어떻게 사시는지, 시간은 어떻게 보내시는지 따위였고 식사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만난 적이 없구요. 그런데 상무님.”
“말씀하세요.”
“상무님의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절 무슨 죄인처럼 취급하시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 상무님을 찾아뵙고 말씀드리려고 했다는 말, 잊어버리셨나요?”
점잖게 나무라는 그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미안해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예의까지 신경쓸 틈이 없었거든요. 그럼 이왕 예의가 없었던 김에 조금 더 없어 볼게요. 서 변호사님?”
옆에 앉아 있던 서두승 이사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예, 상무님.”
“전에 결혼식 때 뵙고 이번이 두 번째였던가요?”
“맞습니다.”
“계속 일본에 계셨다고 알고 있는데 한국어가 참 능숙하시네요?”
“일본에서 살지만 제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좋아요. 지금 우리 조 위원장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실 것 같은데 서 변호사님은 언제 시간 봐서 같이 식사하는 게 어떨까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는다면 바보가 분명하리라.
오늘 그가 이 자리에 와 있어야 했던 이유는 나중에 알려주고 이만 나가보라는 말에 서두승 이사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 맛있었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서 이사는 민희와 조동철에게 각각 고개를 숙이곤 방을 나갔다.
이제 둘만 남게 되자 민희가 조 위원장에게 말했다.
“제 남편도 아니고 저에게 먼저 연락한 이유가 뭐죠?”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아주 다방면으로 발이 넓으시다고… 젊은 나이에 참 쉽지 않은데 말이죠.”
“무슨 소문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좀 낯부끄럽네요.”
“제가 이제 곧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라 부끄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상님 뵐 면목도 없고…”
“…”
“사모님. 아니, 상무님. 우리 얼굴 붉히면서 싸우지 맙시다. 상무님 입장에서도 시아버지와 싸워서 득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회장님 앞길은 구만리 아닙니까?”
“그래서? 적당히 서로 나눠 갖자?”
“막말로 임시 이사회 소집해서 서로 편갈라 싸우면 개판 납니다. 그리고 개판인 싸움은 어떻게 끝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서로 막 물어뜯거든. 이놈이 저놈 물어뜯고 저놈이 요놈 물어뜯는 거지.”
한마디로 이사회 가면 상황이 어찌 변할지 모르니 그 전에 적당히 나눠 갖는 걸로 정리하자는 말이었다.
민희는 이마를 만지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 그 이야기하자고 부르셨구나. 그래서 뭐가 가지고 싶으신데요?”
“그거야 서로가 마음을 터놓고 진심으로 다가갔을 때 천천히 논의하면 될…”
“신영손보가 가지고 싶어서 그래요?”
허를 찔렸는지 조동철 위원장의 눈이 껌뻑였다가 이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씀드렸던 대로…”
“MFV 펀드. 이미 당신과 협의한 거 아니었어요? 시아버님과 남편이 싸우는 동안 적당히 말리는 척하면서 미리 양념 발라놓은 거 잡수시겠다는 거 같은데… 그러다 체하세요. 나이가 많으시면 소화도 안 되실 텐데 욕심이 많으시네.”
조동철 위원장은 처음엔 화가 날 듯 얼굴이 붉어졌다가 술 한잔 마시고는 이내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 기묘한 변화를 민희가 묘하게 바라볼 때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오랜만이구나.”
민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조 위원장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는 남자.
“어디 며느리가 주는 술 한번 받아보자.”
오래전에 사라졌다가 나타났다던 이세준 부회장이었기 때문이다.
313화 민희, 형준 이야기(5)
처음 보는 시아버님의 미소.
그의 여유는 민희를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어서 앉아라. 시애비 앞두고 제사라도 할 셈이야? 나 아직 안 죽었다.”
“그럴리가요.”
민희는 얼른 자리에 앉고는 다시 유심히 시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보았던 단단한 체구에 형형한 눈빛이 그대로 살아있어 지금껏 숨어 지냈다는 이야기들이 전부 거짓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사건의 당사자였기에 그가 얼마나 그룹의 눈길을 피해다녔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그렇기에 지금 그의 자신만만한 등장이 더욱 그녀를 당황스럽게 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그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졸졸 채워지는 술잔을 지그시 응시하던 이세준 전 부회장은 며느리인 민희에게 술주전자를 받아들었다.
며느리에게 한 잔 주겠다는 뜻이었기에 민희 역시 거부하지 않고 잔을 내밀었다.
말없이 흘러가는 이 짧은 시간에 민희는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며 이 자리에 시아버지가 나타난 이유를 떠올렸다.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른다는 말이 지금 딱 맞았다.
술맛이 어떤지도 느끼지 못한 민희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이세준이 넌지시 물었다.
“평민에서 귀족이 된 기분이 어떠냐?”
민희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말만 들으면 무시하고 비아냥거리는 건데 표정과 눈빛에서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닐까 싶었던 거다.
“재벌이 되면 다들 귀족이라고 생각하나 보네요?”
“인류가 성장해오고 국가라는 개념을 만든 이후부터 모든 인간은 평등하지 않았다. 다들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것부터가 실은 모든 국민이 평등하지 않음을 알고 있어서지.”
“…”
“게다가 화목하지 못한 집안에서 자라왔던 넌 아무래도 지금 기분이 더 특별할 것 같은데… 아니야?”
민희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후… 오늘 기분이 좋아요.”
그녀의 딴소리.
세준의 관자놀이가 꿈틀한다.
“응?”
“며느리라고 말씀해주셨잖아요. 그렇다는 건 아직 형준 씨를 아들로 생각하고 있다고 여겨도 되겠죠?”
“그래서 기분이 좋다?”
“저라고 시댁 부모님들이 진심으로 축하하는 결혼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여건이 안 되니까 포기하고 살았던 건데… 아버님께서 이렇게 인정해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부모 욕을 한 거나 다름없는데 생긋생긋 웃으며 받아친다.
세준은 희한한 것을 본 것처럼 민희를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어느 순간부터 형준이 이놈이 딴사람이 된 거야. 여자를 한 달에 한 명씩 바꿔대면서 놀아대는 놈이…”
세준은 그렇게 말하곤 슬쩍 민희의 안색을 살폈다.
남편이 그렇게 문란하게 놀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 다시 한번 직접 듣게 됐을 때 어떤 반응을 하는지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역시나 이번에도 민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
“가장 이상한 건 말이야. 실수를 안 해. 실수를… 내가 그놈을 어렸을 때부터 보면서 느꼈던 한가지가 뭐였냐면 머리만 믿고 덤벙댔다는 거거든? 이건 천성이라 쉽게 고쳐지지가 않는 건데…”
“형준 씨가 운이 좋은가 봐요.”
“아니아니… 운은 한두 번 찾아오는 게 운이지. 바둑 둘 줄 아니?”
“어렸을 때 잠깐 배워서 규칙은 알고 있습니다.”
“기력이 높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실수를 안 한다는 거거든?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다. 실수를 안 하는 기사가 고수고 실수를 안 하는 사람이 또 고수다. 그런데 형준이는 원래 고수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입을 쩝쩝 다시며 아쉬워하는 그였다.
“아버님 말씀을 들으니 어렸을 때 삼국지라는 책을 읽었던 게 기억나요. 거기서 여몽이라는 사람이 사흘이 지나면 사람이 달라져 와서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해서 괄목상대라는 격언까지 나왔다고 하죠? 시아버님은 좋으시겠어요. 아들이 오랜 격언의 주인공에 해당할 만큼 크게 변하고 있으니까요.”
이세준 전 부회장은 황당한 표정을 짓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이거… 말로는 못 당하겠구나. 못 당하겠어.”
“무슨 말씀이세요. 전 아버님을 말로 이길 생각이 없는걸요.”
“그 아버님 소리도 집어치워라. 여 봐라. 닭살 돋는 거 보이지?”
그가 소매를 걷어 팔뚝을 보여준다.
민희는 잠깐 시아버지의 팔뚝을 보고 난 다음 안색을 바로하고 입을 열었다.
“아버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겠지만 전 아버님과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그건 그이도 마찬가지구요. 하지만 아까 조 위원장이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저희 역시 그래야 하는 걸까 싶어요.”
“무슨 말이냐?”
“원하는 계열사가 있다면 한 개 정도 챙겨 드릴게요.”
세준의 미간이 꿈틀거린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에서 안광이 쏟아져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내가 거지로 보이냐?”
“말도 안 되는 말씀이세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아시잖아요. 아버님이 형준씨를 계속 밀어내려고 하면 우리도 싸울 수밖에 없어요. 저도 형준씨도 그러고 싶지 않아요.”
“좋아. 말 잘했다. 어차피 오늘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려고 나온 자리니 툭 터놓고 얘기해보자. 하나 먹고 떨어져라? 그럴 수 없지. 신영생명, 신영손보, 신영투자증권, 요렇게 셋. 일주일 주마. 그 안에 대답이 없으면 이사회 소집할 거다.”
고작 일주일.
이미 포섭할 사람은 다 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머리가 어질하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민희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다시 한번 본인의 잔에 술을 따라 단번에 들이켰다.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을 데우자 불안하던 마음이 어느새 진정되었다.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던 그녀의 눈이 어느 순간 시아버지의 눈과 마주쳤다.
“사흘 드릴게요. 신영캐피탈이면 아버님이 적당히 체면 차리면서 사실 수 있을 거예요.”
상 위에 올라가 있던 세준의 손이 술잔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보면서도 민희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사흘이에요. 사흘이 지나면 아무것도 없어요. 이만 먼저 일어날게요. 다음에는 아버님을 웃으면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건 진심이에요.”
민희는 그대로 일어나 시아버지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곤 그대로 나가버렸다.
쾅!
그녀가 나간 뒤 세준이 강하게 상을 내려쳤다.
술잔과 술주전자가 엎어지며 상 위가 난장판이 되었지만 조동철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이년이…”
“…”
“위원장님.”
“예, 부회장님.”
“이사회 소집 준비하세요.”
“알겠습니다.”
조동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나가려고 할 때 이세준이 나직하게 한마디 했다.
“사람들 확실히 챙겼지요?”
“물론입니다.”
“믿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 위원장은 고개를 숙이곤 방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종업원 몇 명이 들어와 상을 치우고 다시 세팅했다.
이후 이세준 전 부회장은 홀로 1시간을 넘게 자작했다.
*
“어디로 모실까요?”
가게를 나온 민희는 수행기사의 물음에 입을 열지 못했다.
기세 좋게 큰소리치고 나오긴 했지만 막상 얻어낸 건 없었다.
시아버지가 생각보다 정정(?)하다는 것과 이미 확실한 아군을 확보한 것 같아 보인다는 점?
그리고 시아버지가 확보한 인물을 특정하기 어렵다는 게 그녀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상무님?”
“성수동으로 가주세요.”
“성수동이요?”
“네. 일단 그쪽으로 방향 잡고 출발하세요.”
“알겠습니다.”
민희는 입술을 깨물고 어렵사리 핸드폰을 들었다.
어지간하면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았는데…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결국 전화를 걸었다.
*
늦은 밤, 성수동의 한적한 공원 옆 카페에 앉아 있는 민희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누군가를 기다렸다.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로 커피를 마시는 그녀의 모습은 얼핏 보면 굉장한 미인으로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굉장히 차가워 보인다는 걸 느낄 수 있을 터였다.
“뭘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세상에 그걸 잘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다.
“사장님.”
벌떡 일어나는 그녀에게 영훈은 손을 흔들며 앉으라고 권했다.
“뭘 일어나고 그래요. 이 저녁에 커피 마셔도 되나?”
“전 카페인 중독이라 세, 네잔을 마셔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럼 다행이고. 가게 주인한테 민폐이니까 뭐 하나라도 시키고 올게요.”
“제가…”
“됐어요. 손님이 뭘 사려고 그래.”
영훈은 방금 집에서 나온 것처럼 츄리닝 바지에 후드티를 걸쳐 입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그냥 동네 청년 같아 보인다고 할까?
주스와 조각 케익이 담긴 쟁반을 받아든 민희가 말했다.
“쉬시는데 방해가 됐죠?”
“어차피 일찍 안 자요. 일이 많아서… 뭔데 이 밤에 달려온 겁니까?”
“하… 그게…”
“어려워하지 말고 꺼내 봐요. 연희가 궁금하다고 따라 내려온다는 걸 억지로 두고 왔는데 말 길어지면 못 참고 내려올걸요?”
민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제가 참 염치가 없어서…”
“염치 없을 게 있나.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야 빌려줄 수 있는데 그런 건 아닐 테고.”
“실은 시아버님이 돌아오셨어요.”
“아…”
영훈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고민인지 이미 다 알 것 같다는 얼굴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참으로 귀신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민희는 조금은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털어놓았다.
“금감원 금융감독자문위원회 조동철 위원장이라고 있어요. 현재 우리 신영금융그룹 사외이사인데 그 영향력이 상당해요. 얼마 전에 그 사람이 시아버님이랑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파악해보니 형준 씨에게 안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 알게 됐어요.”
“전에 이사회 때는 어땠어요?”
“그때도 시아버님 손을 들어줬어요.”
“그럼 평소에도 주의하고 있었겠네요?”
“그렇긴 했죠. 임기가 얼마 남지 않긴 했지만 워낙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라… 그런데 형준 씨가 그룹 회장으로 결정되고 나서 가장 먼저 굽히고 들어왔던 사람이 바로 조 위원장이었어요. 임기가 끝난 이후에도 한 번 더 이사직을 연장하고 싶다는 뜻이었죠.”
“으흠…”
“그러면서 임기가 끝난 이사 한 분이 회사를 떠나고 그 뒤를 조 위원장이 추천한 홍 교수라는 사람이 이었어요.”
“그게 발목을 잡았군요?”
“네. 자신의 편이 늘어날거라고 기대했는데 그가 시아버지와 손을 잡으면서 오히려 적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 됐어요. 문제는 이들만으로는 이사회에서 무조건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저에게 일주일이라는 기간을 통보하면서 그 안에 계열사 세 군데를 넘기라고 했어요.”
“이세준 전 부회장이?”
“네.”
“방금 만나고 온 거였어요?”
“맞아요.”
“한대 얻어맞고 온 거였네. 그래서 그 얼굴이었고…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신영캐피탈을 준다고 했어요. 대신 사흘의 기간을 줬고.”
“하하…”
영훈은 나직하게 웃었다.
앞뒤도 모르면서 본능적으로 일단 레이스부터 하고 보는 게 전형적인 승부사다웠다.
“잘못한 걸까요?”
“아니요. 잘했어요. 그런데 조준을 잘못했네.”
“네? 조준을 잘못하다뇨?”
영훈은 앞에 놓인 조각 케익을 한입 먹고는 주스를 쪼로록 빨았다.
그리고 여동생 보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대학교 때 친구들 소개팅 좀 시켜줘 봤어요?”
“네? 아니 뭐… 몇몇 정도는…”
“남자친구 있는 애한테 소개시켜 달라는 이야기는 들어 봤어요? 아니면 본인이 남자친구가 있을 때 누군가 소개시켜 달라고 요청했다거나.”
“소개받겠냐는 말은 들었어요. 한번?”
“어떻게 했어요?”
“안 한다고 했죠.”
“왜요?”
“남자친구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요. 아직도 못 잊는 여자친구가 있는데 다른 여자를 소개시켜 준다고 하면 이세준 부회장님이 듣겠어요?”
“네?”
“그렇게 한 사람만 수십 년 바라보는 사람보다 어떻게 여자 한번 사귀어보려고 귀가 팔랑거리는 남자가 있는데 왜 지고지순한 사람 흔들려고 그래요? 힘 빠지게.”
민희의 눈빛이 번뜩였다.
“조동철 위원장의 귀가 팔랑거린다는 말이죠?”
“원래 나이가 들면 사람은 보통 두 부류로 나뉘거든요. 이룬걸 만족하면서 마음속에 평안을 이루던가, 아니면 죽기 전에 이름 석자 남기려고 발버둥 치던가. 내가 조동철이라는 사람은 잘 모르지만 행동하는 것만 봐도 대충 짐작이 되는데요? 겉은 모르겠는데 가슴이 이팔청춘이야.”
314화 민희, 형준 이야기(6)
집으로 돌아온 민희는 침대에서 형준을 앉혀놓고 말했다.
“처음부터 시아버님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조동철 위원장만 처리하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올 거예요.”
“최영훈 사장이 그렇게 말했단 말이지? 그런데 뭘로 꼬실 건데? 말 그대로 마음이 이팔청춘이면 눈도 그만큼 높을 거 아니야? 이미 신영손보 주식까지 가지고 있는 양반인데 적어도 신영손보는 줘야 하는 건가?”
“아니요. 그럴 수 없어요.”
형준이 피식 웃었다.
“와, 그렇게 안 봤는데 너두 욕심이 있구나? 그렇게 아까워?”
비난하는 말투가 아니라 놀리는 말투였다.
그렇기에 민희는 가볍게 형준의 무릎을 때렸다.
“그게 아니라! 아버님이 원하시고 그걸로 영원히 당신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계열사 한 개가 아니라 세 개도 아깝지 않아요. 하지만 조동철 위원장은 남이에요.”
“남이라서?”
“네. 사외이사에게 계열사 하나를 넘기게 되면 다들 우리를 어떻게 보겠어요?”
형준은 민희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알아. 그냥 농담 한번 해본 거야. 어쨌든 조동철이만 잘 흔들라는 건데 솔직히 좀 답답하긴 하네? 분명 아버지는 조 위원장에게 못해도 계열사 하나 정도는 제안했을거야. 어쩌면 그룹 부회장까지 제안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눈이 한껏 높아진 양반을 어떻게 꼬시려고? 어지간한 미모로는 눈도 깜짝 안 할걸?”
“지금부터 그걸 생각해봐야죠.”
“그건 최 사장이 말 안 해줘?”
민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 도움이면 됐어요.”
“하긴… 그것도 맞지. 워낙에 계산이 철저한 놈이라… 어쨌든 수고했어. 아, 그리고 홍 교수 말이야.”
“홍상민 교수가 왜요?”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형준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따로 좀 알아봤는데 홍상민 교수가 교수직을 달 수 있었던 게 실력 때문이 아닌 것 같더라고.”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실력 때문이 아니라니?”
“내가 딱 싫어하는 사람이 겉과 속이 다른 인간들이거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딱 하고, 원하는 게 있으면 내 앞에서 명확하게 딱 요구하는 거. 내가 그래서 최영훈이를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던 거야. 그 자식은 처음부터 그랬어. 원하는 걸 말하고 내가 필요로 하는 걸 제안했지. 뭐, 서로 조금씩 더 가져가려고 입을 털긴 했어도 기준은 명확했단 말이야.”
“사장님이 그런 스타일이죠.”
“그런데 홍 교수 이 자식은 보자마자 딱 알았다니까? 겉은 사람 좋게 허허 웃는데 속은 딴생각을 하고있는 게 딱 보여.”
형준은 마치 홍 교수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허공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노려보았다.
“그래서요?”
민희가 집중하며 장단을 쳐주니 형준은 더욱 의기양양하며 말을 이었다.
“사람을 시켜 뒤를 캐보게 했지. 그냥 이력서에 올라온 내용 말고 무언가 다른 내용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글쎄 홍 교수 이놈보다 그놈 와이프가 더 걸작이더라고.”
“와이프요?”
“그래. 홍 교수 와이프가 수완이 대단한 모양이야. 한경대 총장 와이프한테 로비해서 교수직을 달았다는 소문이 있다는 거야.”
“홍 교수가 한경대 출신은 맞는 거죠?”
“그건 맞아. 확실해. 그런데 웃긴 건 와이프를 만난 게 대학교 때였고 그때부터 와이프가 홍 교수 학점 관리까지 다 해줬다는 거야.”
“그게 말이 돼요?”
“나도 그게 말이 되나 싶긴 해.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렇게 힘들게 교수 자리 따낸 홍 교수가 언제부터인가 조동철 옆에 딱 붙어서 입속에 혀처럼 굴기 시작했다는데 그게 표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게 3년 전쯤이라네.”
“어? 고작 3년이요?”
이번에는 민희도 놀랐다.
아주 깊은 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고작 3년이라니…
“놀랐지? 나도 그거 듣고 어이가 없더라니까? 홍 교수가 조 위원장 제자도 맞긴한데 그 이전에는 아예 다른 라인이었다고 하더라고.”
“그게 어디였는데요?”
“전 경제부총리 양국현 교수.”
“아…”
“양국현 교수가 여당한테 팽당한 이후 조 위원장으로 갈아탄 거였지.”
“그럼 조 위원장도 그걸 알았을 텐데?”
“아니, 몰랐을 가능성이 커. 엄밀히 따지면 홍 교수가 아니라 홍 교수 와이프가 갈아탄 셈이니까.”
민희는 입을 살짝 벌리며 감탄했다.
“대단한 여자였네요?”
“그렇지. 나도 다 듣고 보니까 궁금해지더라고. 어떻게 생긴 여자인지 말이야.”
“그럼 지금 홍 교수의 스텐스는 그의 와이프의 의중이 백프로 담겨 있다고 봐도 되겠네요?”
“그렇지 않을까?”
이렇게 들으니 조동철 위원장 만큼이나 홍상민 교수 역시 귀가 습자지처럼 얇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흠…”
“조동철이는 좀 더 큰 걸 줘야겠지만 아무래도 조무래기인 홍상민이는 조동철보다 흔들기 쉽지 않겠어? 어떻게 생각해?”
“그렇게 쉽게 생각할 게 아닌 것 같아요. 그의 아내가 야심이 대단할 테니 뭐 하나를 던져주면 더 큰 걸 원할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조동철 위원장을 따로 만나볼게요.”
“당신이?”
“당신이 만나면 욱한 마음에 상황을 그르칠까 봐 그래요.”
형준은 인상을 쓰더니 침대에 홱 누워버렸다.
“에이, 알았어. 당신 좋을 대로 해. 그러면 최 사장 한번 만나서 술이라도 사줘야 하나? 계산이 철저한 놈이라 분명 속으로 어떻게 하나 받아내나 하고 있을걸?”
“그러든가요.”
민희는 입을 삐쭉이는 형준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
서울의 한 특급호텔 컨벤션 홀.
[신영, 미래로 도약하라] [신영그룹 협력업체 CEO 초청 오찬 행사]수십여 명이 모인 오늘의 행사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이형준 회장이었다.
젊고 잘생겼으면서도 당당한 그의 모습은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오늘과 같은 행사는 당연히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자리를 빌어 이 자리를 빛내주신 협력업체 사장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 속에서 우리 신영금융그룹이 한국 최고 금융그룹이 될 수 있었던 건…”
긴 축사에도 형준은 단 한번의 버벅임 없이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이 더욱 빛나보이는 건 사람들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윤 사장님, 식사는 어떠십니까? 오길 잘하셨죠?”
“당연히 와야죠.”
“이 회장 아주 신수가 훤해. 결혼을 잘한 건가?”
“하하하하!”
축사를 마치고 간단한 식사를 드는 시간이었지만 형준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형준은 음식을 채 반도 손을 못 대고 아예 자리까지 이동하며 함께한 사장들과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몇 명과 인사를 나누었을까?
“오랜만입니다.”
HLK투자법인 서승권 사장이 형준에게 악수를 청했다.
신영은행 사외이자 한명인 서수일 변호사의 형이기도 한 그는 당연하게도 아버지와 무척 가까운 사이었다.
이사회에서도 서 변호사가 아버지 편을 들었으니 끝나고 껄끄러운 사이가 된 건 당연한 일.
조동철 위원장 같은 경우는 이사회가 끝나고 납작 엎드리며 꼬리를 말았다면서 사장은 전혀 그런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사회의 일원이 아니어서라고 하기에는 그동안 대외적으로 보여준 행보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버지와 가까운 사이어서라고 판단하는 게 맞으리라.
“오랜만이네요.”
“유럽 쪽 투자규모를 많이 축소하셨더군요? 이세준 전 부회장님의 색깔을 지워내기 위함인가요?”
신영그룹, 특히 신영생명과 신영투자신탁에서 운용하는 자금 상당수가 HLK투자법인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런데 이형준이 회장에 취임하고 나서 그 비중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서승권 사장으로서는 이미 각오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데미지가 상당한 일임은 분명했다.
“아, 그런 건 아니고 그동안 투자방식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는지 다시 돌아보는 중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리 재미를 보진 못했으니까요. 의사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면 시스템과 인력을 교체해야 하지 않나 판단하고 있습니다. 모든 게 마무리되면 다시금 자금을 운용할 계획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네요.”
이미 공문상으로 전달했었던 내용을 그대로 읊은 형준은 뭐가 문제냐는 표정이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형준이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사람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니까.”
서 사장 입장에서 형준의 얼굴은 그 어떤 것보다 재수없어 보였으리라.
그는 한참 얼굴을 바라보다가 손목시계를 바라보곤 말했다.
“1시…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왜요? 바쁘십니까?”
“아니요. 오다 보니까 밖에 날씨가 좋아서 산책이나 하려구요. 행사는 이쯤 즐겼으니 전 이만 가겠습니다.”
“그러도록 하세요. 참석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저두요. 무척 감사했습니다.”
의미심장한 인사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나간 그를 형준이 의심쩍게 바라보는데 비서실 직원이 황급히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회장님, 긴급 이사회 소집 요청됐습니다.”
“뭐?”
“이사회 3분의 1이 찬성했고 일단 의장님이 회장님께 의견을 물어보신다고…”
소집 요건이 충족되면 의장은 정당한 이유 없이 거절할 수 없다.
일단 시간이라도 끌어보려는 의도였다.
형준은 다시 한번 서 사장이 떠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
“모레 오후 5시입니다.”
“시발, 급하기도 해라.”
“어떻게 할까요?”
“일단 시간을 끌어보라고 해.”
형준은 언제 인상을 썼냐는 듯 다시 몸을 돌리고 환하게 웃으며 참석한 CEO들에게 다가갔다.
*
형준이 오찬 행사를 하는 동안 민희는 회사에 있었다.
같이 참석해도 무방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사무실에 홀로 앉아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지 고심중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장대석 부장이 들어왔다.
“알아냈습니다. 6시에 이화정이라는 한식집에 동문들과 저녁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어떻게 알아냈어요? 그리고 어디 동문인데요?”
조 위원장을 시아버님 모르게 만나기 위해선 그도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게 가장 좋기는 했다.
그런데 문제는 조 위원장이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
집으로 가도 상관없었지만, 만약 갔다가 문을 열어주지 않고 만남이 불발되면 이건 이형준 회장 체면까지 구겨지는 상황이었다.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에 밖에서 만나는 게 가장 좋았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도 정보를 알아 온 것이다.
“중학교 동문 모임입니다. 원래 연세가 조금 드신 분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동문 모임을 가지는 경우가 많아서 조 위원장 동문 모임 행사 날짜도 다 체크하라고 했는데 직원 하나가 하필 딱 오늘인 걸 알아냈습니다.”
“장소는 어떻게 알아냈는데요?”
“동문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한테 접근해서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조 위원장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으니까 미리 말이 새어나갈 확률은 적을 겁니다.”
민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수고했어요.”
“어디 가십니까?”
“눈이 하늘 끝까지 닿은 양반인데 빈손으로 만날 수 있나요? 선물이라도 준비해야지.”
“아… 네.”
“그럼 수고해요.”
코트를 챙겨 회사를 빠져나간 민희가 차를 몰고 이동해 도착한 곳은 10층 정도 되는 강남의 한 건물 앞이었다.
주요 상권에 위치한데다가 대로변이라 딱 봐도 상당한 가치가 있어 보이는 건물.
[조만식 세무사]건물 2층에 붙어 있는 간판을 확인한 민희는 곧장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큰 건물치고 조금은 좁아보이는 사무실 앞에 선 민희가 노크한 뒤 문을 밀고 들어갔다.
똑똑똑…
“어서오세요. 예약하셨나요?”
“아니요. 조만식 세무사님을 뵈려고 왔어요. 세무일로 찾아온 건 아니에요. 개인적인 일로 왔어요.”
“아… 잠시만요. 제가 여쭤보고…”
여직원이 머뭇거리는 사이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장년의 남자가 민희와 눈을 마주쳤다.
“어디서 오셨는지…?”
“안녕하세요. 신영금융 김민희라고 해요. 조동철 위원장님 아드님 되시죠?”
민희는 당황하는 조만식에게 은근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315화 민희, 형준 이야기(7)
“허허… 거 참…”
응접용 소파에 앉은 조만식 세무사는 연신 의미없는 추임새를 넣으며 민희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민희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무척 잘 알고 있는데다가 그녀가 직접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위원장님을 많이 닮으셨네요. 아, 딸뻘인 제가 이런 말하면 버릇없는 건가요?”
“아닙니다. 아들이니까 아버지 얼굴을 닮는 거야 당연하지요.”
“약속도 하지 않고 이렇게 급작스럽게 찾아와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민희는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하곤 사무실을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조금은 허름하고 오래된 사무실 내부 인테리어를 생각하면 여기 조만식 세무사가 어렵게 사는게 아닐까 생각되지만 그녀는 그가 얼마나 알짜배기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우선 이 건물 자체가 그의 것이니까.
물론 따지고 보면 은행이 절반은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원래 다 그런거 아니겠는가?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위원장님한테 굳이 연락하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이따 오후에 찾아뵐 생각이니까.”
안 그래도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내야 하나 생각하고 있던 조만식은 핸드폰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어떻게 찾아오셨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민희의 모습에 압박감을 느낀 조만식이 묻자 민희가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만식이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 보았지만, 민희는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그의 책상으로 다가가 주변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평소 아버님과 가까운 사이신가요?”
“당연하지요.”
“그러시구나. 저희는… 아니다. 저는 좀 달랐거든요. 집안 분위기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죠. 뭐, 이미 알고 계시죠?”
민희가 뒤를 돌아보며 싱긋 웃자 그는 당황했다.
“예? 아니… 무슨 말씀이신지…”
“알고 계시면서…”
재벌가 결혼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근본도 없는 일반인 가정인 것도 범상치 않은데 심지어 부모 중 한 명이 없었다.
당연히 뒷말이 무성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그녀의 집안 내력에 대한 찌라시까지 돌았었다.
본래도 워낙 방탕하게 놀았던 형준이었기에 민희가 룸싸롱에서 만난 아가씨 아니냐는 말은 너무 많아 법무팀에서 움직였을 정도라고 할까?
어차피 각오했던 일이라 민희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어쨌거나 그리 좋은 이야기가 아닌 건 맞았다.
“그런데 시집오니까 시댁도 그리 분위기가 좋지 못하네요. 이것도 뭐 알고 계시죠?”
“…”
갈수록 태산이라고 느끼는 조만식이었다.
누가 들어도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를 만큼 예민한 이야기를 툭툭 던져대니 곤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아요. 재벌가 가문에 시집와서가 아니라 남편이 절 많이 사랑해주거든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 그래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데 시아버님이 참… 이렇게 매정하실 수가 있을까요?”
조만식 자리에 올려져 있는 가족사진에 민희의 눈길이 한참 도록 머물렀다.
“이해하죠. 이게 사람마다 각자 사정이라는게 있다 보니까 그런거 아닐까 합니다.”
“맞아요. 사정. 시아버님만의 사정이 있겠죠. 그런데 그 사정에 위원장님이 끼어들어 한 손 보태면 행복한 결혼생활 유지하고 있던 죄 없는 며느리입장에서 짜증이 나지 않겠어요?”
확 달라진 분위기에 조만식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재벌 가문의 힘을 잘 모르기에 고작 딸뻘인 여자 앞에서 이리 절절메는 조만식을 보며 혀를 찰 테지만 돈이 좀 있는 사람은 그를 욕하지 못할 것이다.
돈이라는 게 얼마만큼의 큰 힘인지 돈이 있는 사람들은 더욱 잘 알고 있으니까.
특히 아버지가 그 재벌 그룹의 사외이사 중 한 명이라면 더욱.
“그래서 저에게 뭘 원하시는 겁니까?”
민희는 그제야 본래 앉았던 소파로 돌아오더니 다리를 꼬며 말했다.
“이런 말씀 드리면 예의가 없다 생각하시겠지만 사실 선은 위원장님이 넘은 거라 솔직하게 말할게요. 위원장님이나 우리 시아버님이나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시겠어요? 그런분들 때문에 젊은 사람들 미래에 악영향이 생기면 그거 죄 짓는 거 아닐까요? 세무사님은 이 건물 그대로 잘 간직해서 아드님 드리고 싶을텐데 말이에요.”
“지금 무슨 말씀을…?”
“위원장님과 우리 시아버님이 임시 이사회를 소집 요청했어요. 뭐, 이유야 내 남편 몰아내고 시아버님이 그 자리 앉겠다는 거겠죠. 위원장님은 아마 그룹 부회장직에 앉으시려나? 세무사님은 어때요? 관심이 생겨요?”
민희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신영금융그룹 부회장직에 아버지가 오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가 모를리 없을 텐데도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민희를 마주할 뿐이었다.
“아마 운이 좋으면 시아버님이 원하는대로 되겠죠. 운이 아주 좋으면…”
무조건 이긴다고 말하면 그가 믿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민희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돈의 힘을 두려워하지만 결코 어리숙한 사람은 아니니까.
“운이 나쁠 수도 있을까 봐 걱정해서 온 거라면 빨리 원하는걸 말하세요.”
민희는 싱긋 웃었다.
패는 다 깔렸으니 이제 베팅할 시간이 다 된 것이다.
“사진 속 아드님 나이가 어떻게 돼요?”
그녀의 말뜻을 이해 못 한 조만식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예? 우리 아들은 왜…?”
“그러니까 나이가 어떻게 되냐구요.”
“스물 아홉입니다.”
“아… 그럼 아직 결혼 안 했겠네요?”
“그렇죠.”
“직업은요?”
난데없이 이어지는 아들 질문이 무얼 뜻하는지 어렴풋이 짐작 못 할 그가 아니었다.
당연히 당혹스럽기도 하고 좋기도 한 감정이 몰려들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아직 박사 공부중입니다. 한국대학교 물리학 전공입니다.”
민희는 참으로 공교롭다 생각했다.
이렇게 마음먹고 온 게 아닌데 그냥 딱 답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건실하니 좋네요. 아드님 공부시키느라 고생 좀 하셨겠어요?”
“학교 다닐 때야 돈 좀 들었지만, 공부야 결국 지가 하는 거죠. 성실한건 물론이고 조용해서 어디 가서 사고친 적도 없는 앱니다.”
분위기가 어떤지 알아챈 그가 아들 자랑까지 한다.
눈치도 빠르고 척하면 척이라 더 마음에 든 민희였다.
“시댁에 스물여섯에 이제 갓 회사에 취업한 아가씨가 있어요. 어때요?”
조만식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첫째, 시아버님이랑 싸우고 싶지 않아요. 싸워야 하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난 그냥 그런 며느리가 되고 싶지 않아요. 어릴때부터 평화롭고 화목한 가정에서 지냈으면 하는게 내 바램이었거든요. 그리고 둘째, 내 편은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그편이 같은 재벌급이면 더 좋지 않습니까?”
“그것도 내가 컨트롤 할 수 있을때야 좋죠. 여우 잡겠다고 호랑이를 집에 들일 수 있나요?”
같은 재벌 급이면 오히려 잡아먹힐까 걱정되지만 기껏 돈 좀 있다는 사람이면 그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무시하는 발언이라 속상할 수도 있지만 조만식은 전혀 기분나쁘지 않았다.
솔직한 그녀의 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고 할까?
아버지의 바람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가 아니지만 만약 이번 이사회에서 성과를 못냈을 경우 빈손으로 떠나야 하는 걸 생각하면 그녀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민희는 다시 한번 사무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이 사무실이 마음에 들었거든요.”
“예?”
“허세가 없잖아요. 공간에…”
“아…”
“그렇다고 우리가 당신을 엄청나게 밀어줄거라는 착각은 하지 말아요. 그저 사돈댁으로 도의적인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어도 계열사를 준다거나 할 일은 없으니까.”
“그런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언강생심 그런걸 꿈꿀 생각도 없었던 조만식이었다.
아버지부터 이어온 자산이 자신에 이르러 여기까지 만들어낸 그였다.
이제는 무엇을 더 얻겠다고 몸부림치기보단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그였기에 이런 든든한 버팀목이 생긴다는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리고 사람 일이라는게 어디 마음먹은 것처럼 가던가?
둘 사이에 아이가 나오면 당연히 상당한 재산이 흘러가게 될 터.
그 정도까지 막지는 못할 거였다.
“부디 마음이 잘 맞았으면 좋겠네요.”
아마 다은이가 어떻게 남편과 만나 결혼에 골인했는지 옆에서 바라봤던 당사자가 아니었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였다.
이래서 인생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는 걸까?
그리고 말을 하진 않았지만 다른 이유가 두 가지나 더 있었다.
하나는 바로 남편인 형준.
그녀는 형준이 대놓고 말하지는 않고 있지만, 시아버지와 싸우길 원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감정의 근원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남편이 원한다면 따라주고 싶은 그녀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시어머니가 아가씨들을 데리고 재벌 가문에 들이밀며 골치 썩게 만들까 봐 미리 싹을 쳐두는 의미가 있었다.
민희는 시어머니가 힘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았으니까.
“그럼 아버지에게는 뭐라 말씀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요? 위원장님이 그래도 제 시아버지와 함께 하겠다고 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
“뭘 주저하고 그래요. 자식 이기는 부모 있나?”
그녀의 대답에 그제야 후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조만식이다.
민희는 그렇게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한번 허름한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다시 봐도 좋네요. 아, 맞다. 아드님이 혹시 여자친구가 있나요?”
“없습니다. 아니, 있어도 없을 겁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 사돈 어르신 보기보다 화끈하시네.”
“굳이 이기려고 하지 않아도 될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 어수룩해서 항상 괜찮은 여자 만나야 한다고 걱정했었는데요. 그런데 그 아가씨는 혹시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는건 아닙니까?”
“똑같아요. 없고, 있어도 없을 거예요. 그리고 이 집은 자식이 이길수 없는 집이라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럼 다음에 봐요.”
조만식은 곧 사돈 가문의 며느리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녀의 나이가 딸뻘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아들이 신영금융그룹 집안의 딸과 결혼한다는 게 훨씬 중요한 그였다.
한참동안 사무실을 서성거리던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 후다닥 외투를 집어들고 사무실을 나갔다.
*
“아버지!”
북촌의 오래된 한옥집 문을 쾅 열고 들어선 조만식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난초를 만지고 있던 조동철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아버지.”
“말을 해. 무슨 일인지. 무슨 큰일이라도 났어?”
“그…”
막상 말을 하려니까 입이 떨어지지 않는 조만식이었다.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이세준 전 부회장과 일을 꾸미는지 알기 때문이다.
한번쯤은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
일을 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돈을 생산해내는 사업체를 가져보길 꿈꿨던 그였다.
거기서 파생되는 돈과 권력.
그건 단지 돈이 좀 있고 배웠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게 아니라는 걸 아버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애비 속 뒤집어지게 만들려고 작정했어?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야!”
“이세준 부회장이랑 이사회 소집했다면서요?”
멈칫한 조동철은 엄한 표정으로 만지고 있던 난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걸 네가 왜 신경써?”
“신경쓰고 싶지 않았죠. 제가 언제 아버지 하시는 일에 뭐라 한 적 있나요?”
“그럼 지금은 왜?”
“안 돼요. 그러지 마세요.”
굳은 얼굴로 고개를 흔드는 조만식을 보며 조 위원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 이형준 회장 와이프 되는 사람 만나고 왔습니다.”
“그 여자를 네가 왜 만나?”
“찾아왔었어요.”
“흥! 너더러 날 설득시켜달라고 하드냐? 지가 불리한 건 아는 모양이구만.”
“진짜 이길 수 있는 거예요?”
“이길 수 있을거다.”
“백프로 확신하세요? 이긴다고? 그게 아니면 하지 마세요.”
“너 자꾸…”
“세웅이 그 집안과 결혼시킬 겁니다.”
아들의 폭탄선언에 조동철은 입을 떡 벌렸다.
“뭘 한다고?”
“우리 세웅이 그 집안과 결혼시킨다구요. 아버지 정치하고 싶다고 여의도 다 누비고 다닐때도 저 아무말 안 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 말 따라주세요.”
재벌을 미워하면서도 동경했던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일을 벌였는지 알기에 조만식은 말을 하면서도 미안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반응이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진짜 우리 세웅이와 결혼하겠대? 진짜로?”
벌떡 일어나며 눈빛을 빛내는 조동철.
“예… 그 며느리 되는 여자가 그렇게 하자고…”
“흐흐… 그렇구나. 이게 이렇게 되는구나.”
“아버지… 그럼 제 말대로 하시는 거예요?”
조동철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해야지. 해야하고 말고…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어?”
조만식은 아버지의 반응에서 그가 무언가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돈이 된다고 무언가를 얻게 될거라는 믿음.
하지만 그 여자는 감히 그런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못박았었지만 조만식은 일부러 아버지에게 그 말을 전하지 않았다.
“그럼요.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에요.”
316화 민희, 형준 이야기(8)
[죄송합니다. 끝까지 보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청천벽력이 이런 순간일까?
이세준 전 부회장은 떨리는 음성을 감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화를 억눌렀다.
“이게 무슨 일인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들 녀석이 부회장님 따님과 결혼시킨다며 날뛰고 있는 바람에… 못난 애비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내 딸이 어딨어!”
급기야 세준은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 딸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인가.
[예? 하지만 그래도 따님은 따님인데…]세준은 차마 진짜 딸이 아니라는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돌아가신 아버지 앞에서는 몰라도 남에게 이런 치욕적인 사실까지 털어놓는다는 건 스스로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행태일 뿐임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보게 조 위원장. 잘 생각해봐. 결혼식장에 손잡고 들어가기 전까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게 인생인데 하물며 자네 마음 돌리겠다고 저렇게 급하게 일을 진행하다가 만약 형준이가 엎으면 어떡할건가? 그때 가서 다시 나한테 이사회 소집하자고 말하려고?”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그런데 이런 말씀드리면 변명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으신데 그래도 한말씀 드리면… 어쩌면 이건 기회일수도 있습니다.]“기회?”
[생각해보십시오. 이번 임시이사회 소집에서 만약 저희가 지기라도 한다면 부회장님도, 저도 후일을 도모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 손녀와 부회장님의 따님이 혼약이라도 추진하고 있다 하면…]“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부회장님…]“됐네!”
이세준 전 부회장은 결국 화를 못참고 거칠게 전화기를 끊어버렸다.
화를 참지 못하고 한동안 씩씩거리면서 방안을 서성거리던 그는 결국 옷가지를 챙겨 집을 나섰다.
*
전화를 끊은 조동철 위원장은 눈앞의 젊은 청년을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이 정도면 됐습니까?”
“나쁘진 않네요.”
형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에 있는 김치 한점을 입으로 가져갔다.
알싸하고 시원한 맛이 아주 기가 막혔다.
“이 집은 김치가 죽여요. 콩국수도 잘하고 김치도 잘하는 집은 많지 않은데 이집이 그래요.”
“덕분에 맛집 하나 알아갑니다.”
“내가 부회장님을 알았던게 서른 다섯일 때였습니다. 아직도 그때가 기억이 선명해요.”
“우리 위원장님 기억력이 좋으시네.”
같이 편이 됐으니 형준의 입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붙어 나온다.
“이유가 있지. 내가 그때 둘째가 막 태어났을 때거든요? 그런데 애가 많이 아팠어요. 당시에 아버지가 사업한다고 돈을 엄청 날리셔서 교수직에 있으면서도 엄청시리 어려웠거든. 게다가 당시에는 지금처럼 보험도 잘 되어 있지 않을 때라서 어디가 아프면 돈부터 걱정하곤 했는데… 내가 지금도 기억나는 게 그때 부회장님께서 어떻게 내 사정을 전해 들으시곤 애 병원 데리고 가라고 1억을 대출해주셨어요.”
“…”
“그때 얼마나 고맙던지… 지금도 1억이 큰데 당시에는 얼마나 큰 돈이었겠어요? 다행히 둘째 잘 치료하고 지금껏 잘 자라오는 걸 보면서 항상 부회장님께 감사해하곤 했습니다.”
형준는 속으로 ‘그래서 이렇게 뒤통수 치셨어요?’라고 묻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사실 형준은 모든게 잘 처리되어 가는 상황임에도 속이 복잡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한번은 더 싸워야 할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 때가 닥치니 생각보다 더 힘든 형준이었다.
평생을 아버지한테서 인정받기 위해 살아왔는데 그런 아버지와 싸우는 것 자체가 속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눈앞의 인간이 아버지를 자신과 싸우게 구슬렸다가 이제는 배신을 때린다?
곱게 보이지 않을 수밖에.
“뭐, 옛날 이야긴 그만하고 앞으로의 일이나 생각합시다.”
“아유, 그럼요. 그럼요. 그런데 우리 애도 그렇지만 막상 젊은 남녀가 만나면 서로 좋아야 일이 될 건데…”
“그러게 말이에요.”
형준의 말에 조동철이 살짝 당황한다.
그가 원했던 답변은 ‘힘들겠지만 일이 되도록 노력해야죠’ 정도였는데 저렇게 나와버리니 말이다.
잘 안되면 그만인 일이 따로있지…
“크흠…”
조동철의 불편한 기색을 알아챈 형준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아, 됐고 싫으면 하지 말든지’라고 내뱉고 일어나고 싶은데 일을 만들어온 아내를 떠올리니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형준의 그런 안색이 무얼 뜻하는지 모를 조 위원장이 아니었다.
그가 막 불만 어린 말을 쏟아내려고 할 때 굳어 있던 형준의 입이 열렸다.
“지도 생각이 있으면 얼굴이 어떠니, 성격이 어떠니 하면서 퇴짜놓지는 않겠죠. 아마 생각 없이 행동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조동철은 마음을 풀었다.
“하하하! 우리 애도 단점이 없지는 않아요. 그러니 괜히 귀한 동생 잡지 말아요.”
형준은 그저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를 마주 보고 있으면 표정 관리가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
형준이 조동철 위원장을 만나는 사이 민희는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본래는 민희가 조 위원장을 만나야 함에도 집으로 돌아온 건 형준이 시어머니를 설득하기엔 어려울 것 같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일찍 들어온 민희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시어머니인 명숙을 불러 앉혔다.
“어머니, 잠시 저와 얘기 좀 하실래요?”
보통 이런 경우는 마누라가 남편에게 따질 게 있을 때 벌어지는 상황이라 명숙은 한가득 경계를 하며 민희가 앉아있는 소파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뭔데 그러니?”
얼마나 경계하는지 시선도 민희의 한참 옆인 화분을 바라보면서 말한다.
며느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붙어봤자 항상 지기만 하니 상대하기 꺼려서 그런 것이다.
“실은 얼마 전에 시아버님이 모습을 드러내셨어요.”
명숙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 인간이? 갑자기 왜?”
“무슨 이유겠어요? 조동철 위원장을 설득해서 임시 이사회까지 소집했구요.”
너무 놀랄만한 이야기였는지 눈을 부릅뜬 그녀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하는 거야! 그 인간이 나타났으면 나한테 가장 먼저 알렸어야지!”
“알리면 어머니께서 어떻게 하실려구요?”
“어? 당연히… 내가 가서 단도리를…”
“어머님이 단도리를 치면 아버님이 들으실까요?”
“…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시엄마인 내가 우스워 보여?”
민희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답답한 마음을 억눌렀다.
“그게 아니라 어차피 안 될 일이라는 거예요. 누가 설득하든 들으실 분이 아니라는 거 모르세요?”
“그래서 그냥 두고만 보자는 거니?”
“그럴수는 없죠. 단지 아버님을 설득해서 일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말씀드린 거예요.”
“그리고 너! 아버님은 누가 아버님이니? 그 인간이 왜 니 아버님이야? 그 인간 더 이상 내 남편 아니야. 처자식 내팽겨치고 나간 인간한테 무슨 아버님 소리니?”
“… 어머님 마음 이해하지만 전 며느리니까 할 수 있는 도리는 다 해야 해요. 그리고 두 분이 이혼하시긴 하셨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형준 씨 아버님은 이세준 전 부회장님이세요. 임직원들의 시선까지도 생각하면 더더욱 조심해야 하구요.”
“흥! 그 인간 생각하는 것만큼 나를 생각해봐라.”
“당연히 어머님을 아버님보다 더 생각하죠. 지금 같이 사는 사람도 어머님이니까요.”
“말은… 지금 같이 사는 사람이 그 인간이었으면 나보다 그 인간을 더 생각했겠다?”
“그런 말이 아닌 거 아시잖아요.”
“흥!”
“… 어쨌든 그렇게 된 마당이라 형준 씨 입장에선 무척 곤란한 상황이에요. 이사회에서 형준 씨가 이길수도 있지만 막상 투표에 들어가면 어떤 변수가 나올지 모르니 불안할 수밖에 없구요. 가장 최선은 투표하기 전에 이기는 건데 아버님은 마음을 돌릴분이 아니고…”
“그럼 그 조동철은? 나 그 사람 잘 알아. 그 인간이랑 짝짜꿍이 맞아서 골프네 술이네 얼마나 같이 했는데… 그 인간은 말을 들을까?”
“그나마 조동철 위원장이 확률이 높은데 어머님 말씀처럼 쉽지는 않겠다 생각했어요. 그래도 해보는데까지 해보자고 알아보니까 마침 그 조동철 위원장의 손자 되는 친구가 꽤 괜찮은 사람이더라구요.”
명숙의 눈이 다시 한번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니?”
“첫째 아가씨… 이제 결혼할 때가 됐잖아요?”
명숙은 벼락같이 탁자를 때렸다.
“절대 안 된다! 어디 근본도 모르는 집구석에 우리 애를 보내니?”
“한국대학교 물리학 박사 공부중이래요. 머리도 좋고 성실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자리인 거 아시죠?”
“너 무슨 수작이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명숙의 눈은 금방이라도 며느리의 머리채를 붙잡을 것 같았다.
민희는 시어머니의 서슬 퍼런 기세에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무슨 수작이라뇨? 위기인 상황이라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형준 씨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는데 마침 아버님과 손을 잡은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여쭤본 거죠.”
“어이가 없어서 진짜… 조동철은 그걸 받아들였어?”
“다행스럽게도 조 위원장의 아들을 만났는데 좋은 사람이었어요. 욕심도 적고 아들을 잘 키웠더라구요.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도 했고. 어머님과 아가씨만 승낙하면…”
“그걸 왜 우리 은지가 해야 해!”
어떻게 키운 딸인데…
명숙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혼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아직 어리고 예쁜 딸인데 재벌도 아닌 일반인과의 결혼이라니…
“그냥 일반인 아니에요. 조동철 아들이 가진 건물의 시세만 얼만데요. 아들이 하나라 그거 다 물려받는다고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니 수작에 넘어갈 것 같아!”
“싫으세요?”
“그럼 당연하지!”
놀랍게도 민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알겠다니?”
“어머님이 그렇다니 어쩌겠어요? 포기할 수밖에…”
“…”
“아, 그리고 만약 형준 씨가 물러나게 되면 따로 살까 해요.”
“뭐? 따로 살다니? 여길 나가겠다고?”
민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무슨 소리세요? 여긴 형준 씨 명의로 된 저희 집이죠. 그러니 저흰 여기 살고 어머님과 아가씨들을 위해 따로 집을 마련해드릴까 해요.”
집을 마련해준다는 말은 더없이 달콤한 소리였지만 명숙은 덜컥 겁부터 났다.
눈앞의 저 며느리가 어떤 인간인데 쉽게 무언가를 내줄까?
“어떤 집?”
“알아보니까 형준 씨가 강남에 오피스텔을 하나 가지고 있더라구요. 25평이니까 아가씨랑 어머님 사시는 데는 문제 없을 거예요.”
말문이 막히는 명숙이었다.
“너, 너… 25평 그 코딱지만한 데서 우리가 낑겨 살라는 말이니? 그 정도 평수면 혼자 사는 거지. 형준이가 여자 데리고 놀았던 데서 우리가 가서 살라는 말이야?”
일부러 화를 돋우려고 ‘여자 데리고 살았던’이라는 불필요한 설명까지 덧붙였지만 그런 게 걸리적거렸으면 결혼도 하지 않았을 민희였다.
“형준 씨가 자리에서 물러나면 당장 아껴 살아야 해요. 어머님과 아가씨들을 위해서 몇십억 내놓으라는 소리는 아니시죠? 월세로 들어가도 월 육칠백은 넘을 텐데 그건 과하죠.”
“그렇게 돈이 아까우면 같이 살면 될 거 아니니?”
민희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불.편.하잖아요.”
“뭐?”
“어머님과 아가씨의 결정으로 형준 씨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는데 제가 어머님과 아가씨를 볼 때마다 속이 편하겠어요? 그럼 서로가 불편해질 텐데 그렇다고 가족이니까 매일 싸울 수도 없고… 그럴 땐 서로 떨어져 사는 게 최고죠. 안 그래요?”
“너… 지금 시엄마를 협박하는 거니?”
“협박이라니 섭섭해요, 어머님. 그냥… 제 마음이 그렇다구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럴 수 있는 거잖아요.”
민희의 깊게 가라앉은 눈빛이 명숙의 마음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
317화 민희, 형준 이야기(9) -完-
고작 3시간.
명숙의 저항은 고작 3시간만에 끝나고 말았다.
“인물도 영 별론데…”
사윗감이 될 남자의 사진을 보며 명숙은 불만을 토로했지만 들어먹을 민희가 아니었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죠. 번듯하니 공부만 했는데 날라리처럼 놀고 다녔으면 오히려 큰아가씨랑 맞겠어요?”
“니가 형준이랑 결혼하니까 복에 겨워서 그런가 본데 여자도 남자 얼굴에 따라 행복도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 아니? 우리 은지가 남편 얼굴 보는 맛이라도 있어야 살지.”
“글쎄요. 얼굴 보는 맛 때문에 카드 한도 300으로 주는 걸 과연 큰아가씨가 견딜 수 있을까요?”
“걔도 머리는 있는 애니 아주 싫다고는 안 할 거긴 한데…”
납작 엎드리기로 마음먹은 명숙은 큰딸이 싫다고 나자빠지면 당장 집에서 쫒겨날 처지인 걸 알기에 점차 민희의 의견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제가 설득해도 되지만 어머님이 해주시면 아가씨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려우시면 제가 할까요?”
“아니아니… 내가 말 잘 해볼게.”
“고마워요. 그럼 전 이만 일어날게요.”
“피곤할텐데 그래라.”
민희는 이마를 부여잡은 시어머니를 뒤로 하고 방으로 올라왔다.
“하아…”
옷도 못 갈아입은 상태였지만 민희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피곤했다.
화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지만 꼼짝도 못할 만큼 지친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
하루 뒤.
이세준 전 부회장 거처.
“크윽…”
이세준 전 부회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황 끝.
조동철 위원장이 깃발을 바꿔 단 이상 이사회고 뭐고 다 끝나버렸다.
결국 그는 전화를 걸었다.
“나다. 신영캐피탈. 신영투자증권. 이렇게 두 개 넘겨라.”
[…]“싫으냐? 끝까지 가보자 이거냐?”
[좋아요. 대신 한번 뵀으면 해요.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형준이고 마누라였던 명숙이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그였지만 민희의 마지막 제안은 거부하기 어려웠다.
“좋아. 삼성동으로 가지.”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한 그는 삼성동까지 가는 차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지난 일을 후회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해 궁지로 몰린 게 안타까울 뿐,
형준이 사는 저택에 도착하니 놀랍게도 며느리라 주장하는 여자가 미리 나와 있었다.
“오셨어요?”
차에서 내리는 세준에게 무척 공손히 인사하는 그녀의 얼굴에선 승리한 자의 기쁨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의외여서 세준은 입구의 그녀를 지나치지 못하고 물었다.
“왜 나와 있어?”
“처음 모시는 자리잖아요. 집에 있을 수 없었어요.”
“…”
잠시 바라보고 지나치려는 세준에게 민희가 말을 덧붙였다.
“그이도 나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들어오시지도 않고 돌아가실까 봐 일단 안에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보면 귀싸대기를 후려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사실상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자 이번 싸움에서 완벽히 자신의 계획을 무력화 시킨 게 그녀임을 모르지 않으니까.
그런데 막상 그녀를 대면하니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들어가세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세준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그녀를 지나쳐 올라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니 형준이 소파에서 막 일어난다.
명숙은 철천지원수를 보는 것처럼 소파에 앉아 쏘아보았지만, 세준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언제고 이런 자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
“하! 아직도 당신이 그룹 부회장인줄 알아? 꼴이 우스운 상황에 같잖은 소리 하고 있어.”
명숙이 악의에 가득찬 독설을 날렸지만 세준은 듣지 못한 듯 형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엄마는 그만해.”
형준이 앉으며 명숙에게 말하자 그녀가 발끈한다.
“내가 왜 그만해? 이 인간한테 아직도 정이 남았니?”
“어머님.”
민희의 나직한 음성.
그녀는 다소곳하게 형준과 세준 가운데에 앉으며 명숙을 바라보았다.
그 기세가 제법 매서워서일까?
명숙은 화를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세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웃기는구나. 집안 꼴이 참 웃겨.”
“당신 처지만 할까?”
명숙의 비아냥을 귓등으로 흘린 그가 민희를 보며 말했다.
“형준이를 조종할 때부터 생각했지만, 저 여편네 다루는 솜씨가 제법이구나.”
명숙이 화를 버럭 내려다가 형준의 손에 입을 다문다.
“어머님을 다룬다니요. 제가 아버님을 다루는 게 아닌 것처럼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에요.”
처음으로 세준이 명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허… 나보다 더한 며느리를 들였구만? 꽉 잡혀 살겠어?”
전남편의 비아냥에 확 쏘아붙이려는 명숙은 아들이 손을 꽉 잡자 고개를 돌렸다.
“그만 하세요. 오늘 오랜만에 모였잖아요.”
세준은 형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흥! 우리가 모인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어머니나 아버지는 아니라고 해도 저는 의미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에 세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형준은 아버지의 불편한 내색에도 불구하고 말을 이어갔다.
“오래전 아버지와 제가 혈육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그냥 가슴이 묻고 모른척하면서 살았어요. 솔직히 엄마가 많이 미웠는데…”
“내가 왜 미워! 미워하려면 저 인간을 미워해야지!”
명숙이 버럭 소리 지른다.
“나중에 알았어요. 아버지도 많이 잘못하셨다는 거. 그런데 저도 되돌아보니까 잘한 게 없더라구요. 여기 아내 옆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여러 여자 만나면서 방탕하게 살기도 했고… 그렇다고 억지로 어머니와 결혼한 아버지를 이해한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아버지, 어머니, 저 이렇게 모두 잘못한 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냐?”
“딱히 어쩌자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그냥 이렇게 가끔 모여서 밥이나 먹으면 어떨까 해서요.”
“미친놈…”
“너 미쳤니? 내가 왜 저 인간이랑 밥을 먹어?”
당장 세준과 명숙의 입에서 반발이 튀어나왔다.
형준은 당연히 그럴거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같이 안 먹으면 따로따로 먹으면 되죠. 요즘 그런 가정 많다면서요? 부모가 이혼하면 각자 아이들 따로 만나면서 밥도 먹고 놀기도 하고…”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지?”
“신영캐피탈하고 신영투자증권 받으러 오신 거 아니에요?”
이세준 전 부회장은 능청스러운 물음에 그만 입을 벌렸다.
“…”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이번에도 제가 이겼어요.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던 것도 아시죠? 아버지의 최측근이었던 조동철이가 등을 돌린 마당에 앞으로 그 누구도 아버지 옆에 서지 않을 거예요. 그룹의 인사들도 더더욱 저를 따를 거구요.”
“그래서?”
“못 이길 싸움 하신다고 힘 빼지 마세요. 할아버지 그렇게 가시고, 저 무척 힘들었어요.”
“니가 감히 아버지를 입에 올려!”
세준이 버럭 소리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형준은 놀라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저를 친손자로 여기셨어요. 아마 돌아가실 땐 아니셨겠죠? 그래서 가슴 아파요. 전… 저에게는 진짜 할아버지셨어요. 할아버지께 효도하고 싶은 마음도 진짜였구요. 제가 어디서 나왔는지도 모를 놈이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지금도 이 집안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지금도 전 아버지 아들이라고 믿어요.”
“미친놈…”
“신영캐피탈하고 신영투자증권 드릴게요. 가지고 가셔서 아버지 사람 심고 세력 키우세요. 마음껏 하셔도 괜찮아요. 그냥… 가끔 이렇게 만나서 밥먹고 그러자구요. 어때요?”
세준이 미쳐 대답하기 전에 명숙의 벼락같은 고함 소리가 집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너 제정신이니! 미친 거야? 이 인간한테 회사도 주고 인사권까지 마음대로 주게!”
“회사 주면 인사권은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거예요.”
“정신 차려! 이 인간 이제 끈 떨어진 연이야. 가진거라곤 회사 지분이 다라고. 회사 주면 또 널 잡아먹으려고 할거라니까!”
“알아요.”
담담한 형준의 대답이 명숙을 더 미치게 했다.
“아는데 왜!”
“말했잖아요. 이제 아버지는 절 못 이겨요. 그리고 조동철 같은 인물한테 뭘 주느니 차라리 아버지한테 주는게 맞죠. 그리고 아직 법원에서 판결 안 나서 호적에 부자 관계로 그대로 남아 있잖아요.”
어디 멀쩡한 자식을 호적에서 파내기 쉬울까?
그제야 세준은 형준이 쉽게 두 알짜 기업을 내놓을 수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조동철의 손자와 본인 동생을 결혼시킨 이상 조 위원장을 필연적으로 챙겨 줄 수밖에 없는 형준이었다.
그런데 이 분란의 장본인이자 아직 공식적으로 공표된 아버지인 자신에게 알짜배기 계열사 두 개를 주면 조동철도 눈치 보느라 함부로 움직이기 곤란해진다.
게다가 나중에 자식도 없는 자신이 죽게 되면 그 지분은 다시 고스란히 형준에게 돌아갈 터.
“이 모든 게 네 생각이냐?”
세준이 민희에게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다.
이 모든 걸 형준이 다 생각하고 결정했을 리 없으니까.
처음부터 이상했다.
이길 수 있으니까 일단 넘겨준다?
아무리 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다 빠졌다고는 해도 사자라는 껍데기는 어디 가지 않는다.
한번 사자의 무서움을 느낀 초식동물은 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다 빠진다고 해도 감히 덤비지 못한다.
신영캐피탈과 신영투자증권을 깔고 앉으면서 호시탐탐 그룹을 노릴 게 뻔한데도 그걸 두고 용인할 수 있는 배짱은 아무나 가질 수 없다.
특히 그 사람이 그룹의 전 부회장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성격 급하고 쉽게 흥분하는 형준이를 생각하면 세준은 당연히 민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중에 사자를 보고서도 도망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은 며느리라 주장하는 그녀뿐이었으니까.
“아버님을 생각하는 이이의 마음은 진짜예요. 그래서 같이 고민해서 나온 결과일 뿐이에요. 그리고… 저 역시 이이와 같은 마음이에요.”
“너도 형준이와 같은 마음이라고?”
“네. 저 결혼할 때 상견례 한번 제대로 못했어요. 어머님, 결혼식 때 말고 저희 아버지 얼굴 본 적 없으시죠?”
명숙은 당황하더니 고개를 돌렸고 민희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 아버지 아직도 제 걱정하세요. 당신은 딸한테 폐 안 끼친다고 열심히 장사하고 계시는데 걱정하지 말고 쉬시라고 아무리 말해도 용돈도 잘 안 받으려고 하세요. 그러니 아버님이 우리 아버지 만나서 며느리 아주 잘하고 있고, 잘 지내고 있으니까 아무런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셨으면 해요. 종종 만나서 소주 한잔 해주시면 더 좋구요.”
“허… 허허…”
세준은 허탈하게 웃었다.
차라리 아예 고개도 못 들 만큼 밟아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면 너죽고 나죽자는 생각으로 가진 지분 다 걸고 싸워볼텐데 이렇게 나오니 싸울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내가 싫다고 하면?”
민희는 대답은 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딴소리를 했다.
“식사 안 하셨죠? 이이한테 듣기론 게장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솜씨가 부족하니 직접 준비할 순 없고 해서 가장 좋아하신다는 식당에서 급히 공수했어요. 어머니도 같이하세요. 뭐 정 싫으시면 나중에…”
“아니다! 내가 뭐가 무서워서 피하니?”
명숙은 행여 자기 없는 곳에서 이상한 소리를 할까 봐 주방으로 저벅저벅 걸어간다.
그 모습에 형준도 따라 일어났다.
“같이 식사하세요.”
같이 하잔다고 따라 할 세준이 아니었다.
당연히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데 민희가 툭 던졌다.
“같이 식사하시면 지금 신영손해보험 사외이사로 있는 임재현을 신영캐피탈 사장으로 임명할게요. 어때요?”
신영리츠운용의 전 대표였던 그는 세준의 사람으로 그룹에 헌신했던 과거 때문에 대표에서 잘린 후 사외이사로 계약된 상태였다.
이제 단기 계약을 끝으로 회사에서 물러날 거라는 예상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를 사장으로 앉힌다는 건 신영캐피탈을 그의 품에 안기는 수순을 하나씩 진행해 나가겠다는 뜻이었다.
“허…”
“어서요. 네?”
민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고 있는 세준의 팔을 잡고 일으켜 주방으로 이끌었다.
“인사 공문은 오늘 저녁까지 내려갈 거예요. 임 이사님 많이 놀라시겠다. 그쵸?”
“…”
“아, 그리고 저희 아버지는 소주를 좋아하세요. 맥주는 배부르다고 잘 안 드시구요. 안주는 회를 좋아하시는데 다른 것도 잘 드세요. 아버님은 소주 좋아하세요?”
환한 미소로 이끄는 민희 때문에 세준은 자신도 모르게 식탁에 앉고 말았다.
간장게장을 비롯해 언제 준비했는지 한 상 잘 차려져 있는 식탁을 본 그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형준과 민희를 보곤 물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
형준은 따뜻한 밥을 한 숟갈 크게 먹으며 말했다.
“그럼요.”
민희는 대답 대신 양손을 포개 내밀곤 환하게 웃었다.
“아버님, 임 이사도 신영캐피탈 사장에 올려놓고 아버님 좋아하시는 간장게장도 준비했으니까 용돈 좀 주세요. 가게 사장님이 시간에 안 연다는 걸 꼭 좀 해달라고 엄청 부탁했단 말이에요. 네?”
“하하하…”
세준은 웃고 말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들은 몰라도 며느리는 결코 이길 수 없겠다는 걸.
“주실 거죠?”
“그래. 얼마나 줄까?”
“지금 청와대에 들어가 있는 다은이 있죠? 시아버지 사랑을 얼마나 받는지 맨날 시아버지 카드로 뭘 샀는지 엄~청 자랑을 하더라구요. 비싼것도 아닌데 어찌나 질투가 나던지…”
세준은 품솜에서 지갑을 꺼내곤 가장 한도가 많은 카드를 뽑아 며느리의 포갠 두 손 위에 올려놓았다.
“됐냐?”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카드를 받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며느리를 본 세준은 바보처럼 따라 웃는 형준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한줄기 미소를 머금은 채 숟가락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