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pany Employee Who Sees Destiny RAW - chapter (87)
“으허헛! 그거 맹랑한 놈이구나. 맞아. 불안하기 짝이 없다. 더 가져갈 게 남았냐?”
“별로 생각 없습니다.”
“왜 생각이 없는 건데? 먹을 게 없어서냐? 아니면 내 눈치가 보여서?”
“둘 다 아닙니다. 현진중공업만 하더라도 사실 굉장히 탐이 나니까요. 그런데 회장님 때문에 인수할 욕심이 안 생기는 건 아닙니다.”
“그럼?”
“인수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현진중공업은 우리가 인수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잘 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럼 현진관광은 현진물산이 인수하지 않았다면 망할 회사라고 생각했나?”
“그건 아닙니다. 단지 회장님께 보내는 사인이었습니다.”
임 회장은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사인? 무슨 사인?”
“현진물산을 현진그룹에서 제외해서 생각해 달라는 사인이었습니다.”
꽤나 건방진 대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 회장은 노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계열사 분리를 해달라는 건가?”
“음… 회장님의 뜻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싸움으로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이 피해를 볼 것 같았습니다. 현진물산의 직원들은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타인의 욕심 때문에 회사가 불안해지는 걸 볼 수 없었습니다.”
임 회장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사고방식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설사 거짓말을 한다고 해도 이런 식의 핑계를 대지는 않는다.
“그래서 현진관광을 인수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상처를 입은 맹수는 트라우마를 가지는 법이니까요. 물론 도와주신 분이 많습니다. 저 혼자 한 게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원래 인생이라는 게 그렇거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 생각을 하는게 어렵지. 그리고 그걸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건 더 어려운 것이고. 도대체 대출회사에 다니던 신입사원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자네 능력이라고 믿지.”
“감사합니다.”
임 회장은 송 사장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월급은 많이 챙겨주고 있나?”
“입사 3개월 만에 과장 진급에 오피스텔까지 하나 주었습니다. 더 주고 싶은데 본인이 마다해서 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돈 싫다는 사람은 별로 못 봤는데…”
연희는 할아버지가 괜히 영훈을 의심하며 불필요한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미 오기 전부터 꺼내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저희 사귀고 있어요.”
“뭐라고?”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임창호 회장은 물론이고 송 사장이나 영훈도 깜짝 놀랐다.
아마 먹고 있는 게 있었다면 입에서 튀어나왔을 것이 분명했을 만큼 놀란 영훈이 연희를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제 혼처를 구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제가 골랐어요. 집안은 별거 없어요. 그래도 지금껏 보아왔던 어떤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고 또 그 누구보다 능력 있는 사람이에요.”
“능력은 있어 뵈는구나. 그래서 혹시나 놓칠까봐 이 할애비 앞에서 선언하는 게냐?”
“솔직히 제가 여자라서 못 미더우시잖아요. 어디서 못난 남자 만나서 아무 문제 없는 회사 망칠까 두려우시구요. 그런 남자 만나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송 사장은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연희의 태도에 내심 놀랐다.
별 생각 없이 터뜨린 게 아닌가 했는데 들어보니 연희가 왜 저러는지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연희는 연희 나름대로 할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적어도 당장 스스로의 능력을 앞세울 수 없으니 영훈을 내세워 현진물산의 경영권을 가지고 흔들지 말라는 말이었다.
“많이 컸구나. 알겠다. 이거 생각지도 못했는데 오늘 손녀사위 될 사람까지 만나게 되는구나.”
임 회장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때 영훈이 입을 열었다.
“사실 식사 자리라고 해서 왔지만 회장님 따님 회사를 뺏어놓고 같이 식사를 할 만큼 얼굴이 두껍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늘 자리는 가족분들이 오랜만에 모인 만큼 저는 그만 일어나려고 합니다.”
“영 자리가 불편한가?”
“왠지 불청객이 끼어서 할 이야기를 제대로 못 하실 것 같아 그렇습니다. 아니라고 하셔도 그냥 제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실례지만 언제 내려가십니까?”
임창호 회장은 호기심이 진하게 동했다.
감히 본인이 불러낸 자리에서 가족과의 시간이라고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며 가겠다고 하더니 오히려 자신이 약속을 잡겠단다.
그룹 회장과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긴장 하나 없는 태도나 태연히 약속을 잡으려는 목소리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늙은이가 바쁠 게 뭐가 있겠어? 내 마음이 가고 싶을 때 가는 거지.”
“그럼 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제가 괜찮은 장어요리 한번 대접하고 싶습니다.”
“장어라… 그거 좋군.”
“그럼 전 일어나보겠습니다.”
영훈이 일어나더니 임창호 회장 앞에서 다소 뜬금없는 소리를 해댔다.
“이렇게 뵌 것도 영광인데 악수 한 번만 청해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거 없지.”
영훈은 정중하게 악수를 나누곤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송 사장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룸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임 회장이 송 사장에게 말했다.
“걸물이구나.”
“그런 것 같아요. 사실 처음부터 신뢰를 한 건 아니었어요. 연희랑 같이 영업팀에 두었는데 신영투자증권이 가진 현진물산 지분을 저 친구가 물어오면서 신뢰를 가지게 됐거든요.”
“회사 지분을 되찾아 온 게 저 친구라고?”
“그것뿐이 아니에요. 신영은행에서 받은 5천억 플러스 알파도 저 친구가 가져왔어요. 그걸로 과장에 올렸죠.”
임 회장은 진정 놀란 눈빛으로 감탄성을 내뱉었다.
“허… 진짜 걸물이구나. 그래, 그 정도 걸물이니까 현진관광을 먹자는 말에 네가 거부하지 않았겠지.”
“그 외에도 저 친구가 입사해서 처리한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또 능력이 대단한 것도 대단한 거지만 사람을 대하는 방법이 보통 아니에요. 현재 실질적으로 회사에서 부사장 버금가는 권력을 쥐고 있어요. 저 친구의 말 한 마디에 기조실, 이번 인수를 주도한 특수사업부가 총력을 다해서 움직이거든요.”
“고작 입사한지 얼마 안 되는 과장의 말에 강… 누구야? 강노식이 맞지?”
“네.”
“강노식이가 손발 노릇을 한다고?”
“맞아요.”
“믿을 수가 없구나.”
능력이 좋은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여느 재벌 가문의 후계자도 저 나이에 저 직급으로 사람을 부리지 못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일을 배우면 바로 임원으로 승진을 시켜 힘을 실어주는 것인데, 고작 과장의 직급으로 회사 임원들을 말 한 마디로 움직이니 어디서도 이런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얼마 전에 연희한테 우명그룹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네 삼남(三男)하고 만나게 해주고 싶다고 하면서요. 그런데 연희가 거부했어요.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그런데 그 사람이 최 과장이라고 하니까 저도 더는 말리지 못했어요.”
“우명그룹? 김태현이가 관심을 가진다…”
임창호 회장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며느리 될 아이의 얼굴도 잘 모르는 인간이 연희의 성품을 보고 선을 보라고 했을 리는 만무했다.
현진물산이 탐이 났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현진물산이 현진관광을 인수하면서 덩치가 두 배 이상으로 커졌다.
전에는 몰랐지만 고작 삼남으로는 이제 임 회장의 눈에 차지 않았다.
“할아버지 전…”
연희가 뭐라 말하려하자 임 회장이 손을 들어 막았다.
“됐다. 우명그룹 첫째가 온다고 해도 네가 싫다고 하면 권할 생각이 없다.”
연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입사한지 1년도 되지 않아서 현진관광을 먹은 남자를 할애비에게 소개시켜줬는데 누군들 눈에 들어올까.”
임 회장이 생각했던 건 ‘우명그룹이 왜 현진물산을 탐을 낼까?’였었다.
두 주먹을 꼬옥 쥐며 눈빛만으로 환호하는 연희를 보면서 임 회장은 나직이 말했다.
“연준이가 아마 다 컸으면 저리 똑똑했을 게야.”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금기와도 같은 단어를 꺼냈음에도 임 회장은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고놈이 한번 말하면 척척 알아들었어. 하나를 배우면 열이 뭐야? 스물, 서른을 알아내는 놈이었지. 성품은 얼마나 좋았는지 길거리에 주인 없이 지나가는 개, 고양이는 죄다 데려와 먹이도 주고 놀아주고는 했다. 허허허… 고사리 만한 손으로 제 덩치보다 큰 개한테 사료를 주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고놈이 컸
다면 아마 최 과장처럼 똑똑했을 게다.”
연희는 아픈 과거를 들추는 회장의 말에 화가 나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송 사장은 회장의 말이 무얼 뜻하는지 깨달았다.
“아버님…”
“됐다. 옛 생각이 나서 그랬다. 늙으면 원래 주책없이 감상적이 되곤 한다. 밥은 언제 나오냐? 오늘 내내 정신을 쏟았더니 허기가 지는구나.”
송 사장은 얼른 종업원을 시켜 준비된 식사가 나오도록 했다.
이후 식사를 하면서 임 회장은 연희에게 외국에서 뭘 공부했는지, 친구는 누굴 사겼는지, 힘든 건 없었는지 따위를 물었다.
왜 이렇게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연희는 그저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만 하며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임 회장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안내해라.”
송 사장과 연희는 가지고 온 차를 수행기사 혼자 운전하도록 하고 임창호 회장이 탄 차에 같이 타고 이동했다.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도착한 임창호 회장은 병원 1층의 편의점에서 산 따뜻한 꿀물을 몇 모금 마시며 숨을 가다듬은 다음 VIP 병동으로 올라갔다.
“죄송하지만 환자분 지금 잠드셨습니다.”
간호사의 말에 임 회장은 괜찮다며 조용히 병실로 들어갔다.
홀로 병실로 들어선 임 회장은 잠이 든 임지훈 전 사장 옆에 앉았다.
가만히 임 사장의 머리와 손을 쓰다듬은 임 회장이 중얼거렸다.
“왜 이리 말랐누… 살이 쪽 빠졌네. 미안하다. 애비가 늦었다. 가슴에 화가 많아서 그랬다. 그러게 몸 생각을 했어야지. 아프면 쉬었어야지.”
아들을 나무라는 게 아니었다.
아들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신경을 써주지 못한 자신을 나무라는 거였다.
임 회장은 그렇게 한 시간여를 병실에서 아들과 같이 했다.
*
겨울임에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삼청동에 대형 세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리 없이 미끄러져 들어가던 대형 세단이 작은 장어 가게 앞에서 멈추었고 수행기사가 우산을 펴 뒷자석 문을 열었다.
“됐다, 요 앞인데 우산은 무슨…”
수행기사가 멋쩍게 웃자 임창호 회장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가게 전세 냈나?”
가게에 손님이라고는 영훈 밖에 없어 묻는 말이었다.
“조용하게 식사하길 원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여긴 따로 방도 없구요. 주인한테 하루치 이상 선불로 지불했습니다.”
“잘했다.”
임 회장이 가운데 자리에 턱 앉자 영훈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기다렸다는 듯 음식이 들어왔다.
“장어는 안에서 구워 나올 겁니다.”
“연기 안 나고 좋구나. 술은 할 줄 알고?”
“좋아하지는 않습니다만 자리에 맞게 하는 편입니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니 그거 마음에 드는구나. 자고로 술 좋아하는 남자 치고 아내 힘들게 하지 않는 남편 없는 법이니까. 내가 그랬다.”
임 회장은 클클 웃더니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한잔 올리라는 표현이다.
영훈이 얼른 소주를 따르자 그가 한잔 들이키고 나서 안주로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더니 물었다.
“할 이야기가 무엇인고?”
“혹시 군산조선소 관심 없으십니까?”
임창호 회장이 오물거리던 입을 딱 멈췄다.
“그건 왜?”
“잘 포장해서 드리면 가질 생각 없으신가 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임 회장은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인자하게 보이던 미소를 지우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난 옛날 사람이라 포장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네. 내용물이 중요한 거지.”
“보기에도 좋은 게 먹을 때도 좋은 법이니까요.”
“포장이 과하면 가격이 비싸지니 하는 말이야.”
“흥정도 하기 전에 우는 소리부터 하시면 물건을 가진 사람은 다른 구매자를 찾는 법입니다.”
“그 물건이 자네 손에 있다는 듯이 말하는 구만.”
“요즘 세상은 생산자보다 유통업자가 더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왜 노래를 만든 사람보다 노래를 파는 플랫폼이 돈을 더 많이 가져가지 않습니까?”
“자네 손에는 없지만 팔 수는 있다?”
“네.”
임창호 회장은 괜시리 목이 말라 왔다.
생각이 많아진 임 회장을 보면서 영훈은 처음으로 손에 땀을 쥐었다.
시간이 없었다.
임 회장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