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quering Murim with future technology RAW novel - Chapter 31
31화. 수라마후와 파천비 (1)
“잠시 요기도 할 겸, 저기 그늘에서 쉬었다 가지.”
“예, 사형.”
해가 중천에서 조금씩 지기 시작할 무렵. 관도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자, 도현도장이 유신에게 휴식을 권했다.
“드시지요.”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 자리를 잡고 앉은 유신이 행낭을 풀어 커다란 주먹밥 하나를 꺼내 도현도장에게 건넸다.
“고맙네.”
나란히 앉아 해를 피하며 두 사형제가 주먹밥을 입에 물었다.
청빈한 도사들이라 그런지 반찬 하나 없이 퍽퍽한 주먹밥을 약간의 물과 함께 우물거리고 있음에도 그들의 얼굴에 평온과 만족이 서려 있었다.
“사제, 무림 십대기보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도현도장의 물음에 유신이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사형. 어렸을 때 도진사형께 잠깐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지금 기억나는 것은 파천비, 천마보도, 용신주와 의천검뿐입니다. 나머지는…….”
말끝을 흐리는 유신을 보며 도현도장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십대기보는 네 개를 제외하곤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거면 정확히 알고 있는 게 맞네.”
이럴 때 보면, 확실히 유신이 무공뿐만 아니라 학자의 기질도 출중하다 생각하는 도현도장이었다.
어린 시절에 잠시 옛날이야기처럼 들었을 뿐일 텐데, 스쳐 지나가듯 들은 이야기도 이토록 자세하게 기억하는 걸 보면 확실히 무공은 오성과 많은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그런데 왜 십대기보라고 불리는 것입니까? 사대기보여야 맞는 것이 아닙니까?”
“무림 십대기보에 왜 기(奇)자가 들어가는지 아는가?”
“잘 모르겠습니다. 사형.”
“십대기보는 병기로서도 물론 절세의 강도를 자랑하는 기보이지만, 각각 기이한 능력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세. 그중에서 능력이 밝혀진 무기가 사제가 이야기한 네 개의 무기뿐인 것이고.”
“허면, 나머지 여섯 개는……?”
“행방이 묘연하다네. 오백 년 전, 혼원신교의 마지막 교주가 남긴 열 개의 보물 중 네 개의 상자만이 무림에 나타났고, 그 상자 속에 들어있는 무기들이 가진 강력한 힘 때문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나머지 보물들까지 포함해서 무림 십대기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습니까?”
“사실 십대기보의 정확한 능력은 지금까지도 설왕설래하는 경우가 많다네. 하지만 이번에 찾아가고 있는 파천비는 그 능력이 강호에 널리 알려진 계기가 있었지.”
“제가 알기로는 굉장한 경도와 예기를 가진 단검이라고 들었습니다. 대대로 사혼교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이라고…….”
“허허, 단순히 단단하고 날카로운 단검이라면 어찌 십대기보겠는가. 파천(破天)이라는 단어는 쉬이 붙지 않을진대.”
확실히, 파천이라니. 하늘을 부순다는 광오한 표현이지 않은가.
파천비의 능력을 상상하던 유신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무엇이옵니까? 소제의 아둔한 머리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유신의 사부만큼이나 사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도현도장은 지금의 대답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지금 유신이 차고 있는 검만 해도 평범한 검이지 않은가.
유신은 보검이나 기보 등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심신을 갈고 닦아 스스로의 발전을 꾀하는 전형적인 도사였기에 기물에는 해박하지 못했다.
“사제, 수라마후(修羅魔后)라는 별호를 들어 보았나?”
“예, 스승님께서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파천비는 수라마후와 함께 출현했다네.”
수라마후 주약란.
사도팔문 중 하나인 사혼교의 15대 교주로,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남자들만 역임했던 사혼교의 교주 자리를 최초로 꿰찬 여장부였다.
뛰어난 지혜와 그에 뒤지지 않는 무공을 지닌 절세가인이었다고 전해져 오는 그녀는, 처음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죽는 그 날까지 정과 사, 황궁의 고관대작들까지 무수한 남자들의 청혼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뜻을 이룬 자는 없었지만, 그 정도로 그녀의 재기와 미모가 중원에 울려 퍼졌다 전해지는 여걸이었다.
* * *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사천의 아미파와 서안의 사혼교가 소금 사업에 대한 이권을 두고 부딪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하급무사들을 필두로 한 소규모다툼으로 시작했지만, 점점 상황이 심각하게 번지더니 어느덧 문파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물러설 수 없는 점입가경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었다.
정과 사를 대표하는 명문들의 세력전답게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지만, 국지전이 길어지고 소모전의 양상으로 치닫게 되면서 소금 사업의 이권보다 두 문파의 피해가 훨씬 커지는 상황이 되었고 끝내 두 문파의 장은 휴전을 결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로 자존심을 접고 실리를 위해 나선 그 자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으니, 그것이 바로 불행의 시작이었다.
“아미타불. 어찌 이런 비겁한!”
아미파의 절정고수, 유정신니에게 아들을 잃고 분노를 참지 못한 사혼교의 대호법이 휴전을 위한 자리에서 아미파의 장문인을 기습한 것이다.
아미파의 장문인이 심각한 부상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며 두 문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대호법, 어찌 이리 경솔하단 말이오.”
당시의 사혼교주는 아무리 사파라도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던 이였기에,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도의는 물론, 교의 중대한 행사를 저버린 대호법에게 분노했다.
특히나 교주가 신임하던 대호법이었기에 그 실망감과 분노는 더욱 컸으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휴전협정을 위한 자리에서 상대 문파의 장을 기습해 죽이려 한 사실은 선전포고를 넘어 둘 중 하나는 죽자는 것과 다름이 없는 기만행위였던 탓이다.
사혼교주가 백방으로 상황을 개선하려 해봐도, 장문인이 몸져누운 아미파는 완고했다.
“교도들은 들으라.”
“예, 교주님.”
“기호지세의 상황이 되었음을 잘 알 것이다. 이제 아미와 사혼교는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음이니, 어쩔 수 없다. 아미를 지우라.”
“충!”
교주가 직접 친정에 나선 사혼교가 즉시 사천으로 물밀듯이 진격하였고, 사천의 주요 거점을 파죽지세로 장악하며 아미를 옥죄기 시작했다.
결국, 상황을 보다 못한 사천의 당문과 청성파가 비밀리에 소수의 최정예 고수들을 아미파로 급파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청성과 당문의 입장에서는 이번 기회에 모든 전력을 투입해서라도 사혼교를 쓸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겠지만, 그랬다간 사파의 다른 세력도 사혼교의 편에 설 게 분명했다.
그야말로 정사대전이라는 도화선에 불을 지피는 격이 될 수도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런 비겁한! 다른 세력을 끌어들이다니, 크으읔……. 원통하구나.”
이에 자신 있게 아미산의 복호사까지 진군한 사혼교가 당문과 청성의 최정예 고수들을 등에 업은 아미파의 역습에 크게 패퇴했고, 퇴각 중에 그만 사혼교의 교주가 전사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무량수불, 빈도는 이만 청성으로 철수하겠습니다.”
“저희도 당가로 귀환해야 할 거 같습니다.”
사혼교의 교주가 전사하자 이 정도면 충분히 사혼교의 세를 줄였다고 판단한 당문과 청성의 고수들은 회군의 뜻을 밝히고 다시 각자의 문파로 귀환했다.
그러나 정예고수는 물론이오, 우두머리인 교주까지 잃은 사혼교를 끝장내고자 했던 아미파는 여세를 몰아서 사천을 넘어 서안까지 진군했고, 타오르는 불길처럼 사혼교의 총단을 포위했다.
“쯧쯧……. 사혼교의 황혼인가? 대호법이 차라리 협상장에서 문주를 참살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을…….”
당시 세인들은 그대로 사혼교가 멸문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 순간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이변이 일어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본녀는 사혼교의 15대 교주 주약란이라 합니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절세가인이 단신으로 포위된 사혼교의 정문을 열고 나와 아미파에게 제안을 건넸다.
“사혼교의 15대 교주로서 아미의 장에게 1대1 비무를 청합니다.”
“아미타불, 비무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만약 제가 죽거나 패한다면 사혼교는 백 년간 봉문할 것이며, 서안의 모든 거점을 아미에게 드릴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반대로 제가 비무에서 승리한다면 아미는 포위망을 거두고 이만 사천으로 물러나 주실 것을 약조해 주십시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아미에게 밑질 것이 없는 장사였겠으나, 하필 당시 아미파를 이끌던 최고통수권자가 제마멸사를 신조로 하는 제정신니였던 것이 문제였다.
“사혼교주여, 비무는 거절하겠습니다. 그대들의 죗값을 뉘우치고 극락왕생하길 빌겠습니다. 아미타불.”
여기서 조금만 더 공격을 가하면 사혼교 자체를 강호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라 여겼기에 이번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던 것이다.
“스승님, 제가 나서겠습니다.”
“내 너를 믿지 못함은 아니지만, 혼자서는 여의치 않을 수도 있다. 마군을 제압하는 일에 신장이 꼭 한 명일 필요가 있겠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스승님.”
주약란과 연배가 비슷한 아미파 최고의 후기지수인 현영이 제정신니의 말에 같은 항렬의 사매들과 함께 주약란을 제압하러 나섰다.
“아아악!”
하지만 아미파 최고의 후기지수라 불리던 현영과 사매들이 주약란의 섭혼마라장에 다섯 초를 채 넘기지 못하고 명을 달리하며 전쟁은 묘한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아미파로서는 무척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제정신니는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 확실하게 승부를 보고자 장로급인 효정신니를 앞세워 주약란을 상대했다.
채앵!
울리는 검명과 함께, 효정신니와 주약란의 처절한 사투가 시작되었다.
아끼는 사질들을 잃고 분노한 효정신니와 아버지인 전대 교주는 물론, 가족 같은 교인들을 잃은 주약란의 분노가 불길이 되어 서로를 잿더미로 만들려 했다.
효정신니는 과연 아미파의 주축이 되는 절정고수로서 신위를 발휘하여 어느 정도 주약란과 맞수를 이루는 듯했으나.
“아미타…….”
털썩.
결국 주약란의 왼팔에 작은 상처를 입히는 것을 대가로, 심장이 뚫리며 차가운 시신이 되어 무너져 내렸고.
“효정!”
아끼던 사매인 효정신니의 죽음에, 제정신니는 분노로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악녀를 처단하라!”
평소 인망이 두터워 존경받던 효정신니의 죽음에 분개한 아미의 비구니들이 일제히 주약란에게 달려드는 걸 막지 못했던 것이다.
“정파라는 가면도 드디어 벗어던지는 건가요? 이제 나를 원망하지 말아요.”
주약란의 처연한 미소가 점점 섬뜩한 미소로 바뀌어 가더니 고수들을 피해 크게 뒤로 물러서며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냈다. 손잡이에 붉은 보석이 박혀있는 아름다운 단도.
훗날 파천비라 불리게 될 저주받은 마병이 천하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